경북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통일신라 절터인 보문동사지(사적)이다. 일제강점기에 ‘보문사(普門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절 이름이 확인되었다. 절터에는 물을 담는 그릇인 석조(보물), 당간지주(보물), 연화문 당간지주(보물) 등이 남아 있으며, 금당터와 목탑터가 확인되었다. . 보문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볼 때 경주에 있던 많은 사찰 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보문동사지(사적)는 명활산성과 경주 낭산 사이의 들판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신라 6촌 중 명활산 아래에 위치했던 명활산고야촌이 있던 마을로 신라가 6촌을 6부로 개편할 때 습지부가 되면서 설(薛)씨 성을 받은 지역이다. 이 사찰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낭산 북쪽의 황복사, 낭산 남쪽의 사천왕사와 삼각형을 이루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절터 규모는 크지 않은 편으로 서쪽에 당간지주(보물), 북쪽을 2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연화문 당간지주(보물)가 있다. 북쪽 연화문 당간지주와 금당 사이에 손을 씻고 물을 마시는 석조(보물)이 놓여 있어 북쪽으로 출입 통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 설명에 따르면 금당터을 중심으로 동.서 목탑터가 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서쪽 낭산을 향해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세운 사천왕사 가람배치를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금당을 중심으로 2개의 목탑이 있는 쌍탑식 가램배치를 보여주는 절터>
금당터는 흙으로 축대를 쌓고 있으며, 그 위에 기단석과 초석 등 건축부재들이 배치되어 있다.
출입 통로에 주로 위치하고 있는 석조(보물)는 금당터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보문사지 당간지주(보물)는 금당터 서쪽 1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낭산 주변과 연결되는 출입문이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금당터 북쪽 200 m 정도 떨어진 곳에 연화문 당간지주(보물)가 위치하고 있다. 금당터와 연화문 당간지주 사이에 석조가 놓여 있어 북쪽에도 출입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보문리 사지(慶州 普門里 寺址,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848-6
이 절의 처음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보문(普門)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절 이름이 보문사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석제 유물이나 건물의 배치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절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금당지 · 동서 목탑지 등의 건물터와 석조 · 당간지주 · 초석·석등부재 등이 남아 있지만, 절터의 대부분은 넓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금당지의 높이는 경작지의 표토에서 1m 정도이며, 흙으로 쌓은 축대 위에 건물의 기단석과 초석이 배치되어 있다. 목탑지는 금당지 앞의 높은 단 위에 남아 있는데, 서탑지의 중앙에 남아 있는 대형 초석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보문리 사지 서쪽에는 보물 제123호 보문리 당간지주가 있고, 북쪽으로 62m 지점에는 보문리 연화문 당간지주, 보물 제910호로 지정된 석조를 비롯하여 석등의 지붕돌 및 장대석 등 석조물이 남아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