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신라 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 ~ 632, 김백정)의 무덤이다. 진평왕은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진흥왕의 손자이자 선덕여왕의 아버지이다. 젊은 나이에 왕위에 올라 선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까지 약 52년 동안 재위하였다. 이 시기 수(隋)와 고구려간 전쟁으로 수나라가 멸먕하고 당(唐)이 세워지는 등 국제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진평왕은 여러 관청을 설치하는 등 내정을 안정시키고, 명활산성과 남산산성을 쌓는 등 경주 방어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수, 당과 외교에 힘써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다 ( 579년 07월(음) ), 진평왕(眞平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백정(白淨)이고 진흥왕(眞興王)의 태자(太子) 동륜(銅輪)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金氏) 만호부인(萬呼夫人) 또는 만내(萬內)라고도 하였다으로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딸이고, 왕비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갈문왕 복승(福勝)의 딸이다. 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기이하였고, 키가 크고 몸집이 거대하였다. 품은 뜻이 깊고 굳세며 식견이 밝고 통달하였다.
진평왕이 죽다 ( 632년 01월(음) ), 54년(632) 봄 정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진평(眞平)이라고 하고, 한지(漢只)에 장사지냈다. 당나라 태종(太宗)이 조서(詔書)를 내려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를 추증(追贈)하고, 부물(賻物) 200단(段)을 주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평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진평왕릉은 궁성인 월성(月城)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전 왕릉과 달리 경주 도심 동쪽과 남쪽 방으로 조성된 첫번째 왕릉으로 보인다. 현재는 농경지 가운데 위치하고 있지만 박물관 본 모형에는 주택가와 상가가 밀집한 도심으로 표현되어 있다. 낭산에 있는 선덕여왕릉과 함께 경주 도심을 지킨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 설총묘, 보문사지, 황복사지 등이 있다.
봉분은 높이 7.6m, 지름 38m 규모이며 로 둥글게 흙으로 쌓은 원현형 봉통분이다. 동시대의 다른 왕릉과 마찬가지 자연석으로 둘레석을 쌓았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몇개만 드러나 있다. 왕릉 주변에는 석물이나 특별한 장식이 없다. 주변에 심어진 고목들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진평왕릉은 낭산 북쪽 끝자락에 위치한 황복사지 절터에서 정동 방향으로 700 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진평왕 다음으로 즉위하여 삼국통일 기반을 마련한 선덕여왕릉이 서남쪽 1.2 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 진평왕릉(新羅 眞平王陵,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608
이 능은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 ~ 632, 김백정)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7.6m, 지름 38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무덤 밑 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 돌을 둘렀으나, 현재는 몇 개만 드러나 있다. 이 능은 아무런 시설 없이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진평왕은 남산성(南山城)을 쌓았고, 명활산성(明活山城)을 개축하는 등 경주 방위를 중요시하였다. 왕으로 있는 동안 고구려 , 백제와 싸움이 빈번했으며, 중국의 수(隋) 나라 · 진(陳)나라 · 당(唐)나라와의 외교에 힘써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