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영묘사, 신라 칠처가람 사천미

영묘사(靈廟寺)는 신라 칠처가람 중 사천미(沙川尾)에 세워진 사찰로 신라 27대 선덕여왕때 창건되었다. 이절에서 개구리가 3,4일 운다는 소리를 듣고 백제 복병이 여근곡에 숨어있었음 감지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영묘사는 사천왕사와 함께 유명한 예술가인 양지스님이 작품이 많았던 사찰로 금당에 모셔졌던 장륙삼존불, 천왕상과 목탑, 기와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출토유물 중 도깨비얼굴기와에서 화려한 조각수법을 찾아 볼 수 있다. 신라를 대표하는 ‘신라의 미소’로 잘 알려진 얼굴무늬수막새가 이곳에서 출토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봉덕사에 있던 성덕대왕신종(국보)을 이곳에 옮겨 왔었다고 전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흥륜사지(사적)>

경북 경주시 사정동에 있는 흥륜사지(사적)에서는  ‘흥’자가 적힌 기와와 ‘영묘사’라고 적힌 기와가 출토되어 이곳에 있던 사찰이 ‘영묘사’인지 ‘흥륜사’인지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영묘사’가 새겨진 암키와, 8~9세기, 경주박물관>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
제27대 덕만(德曼) 만(万)이라고도 한다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으로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眞平王)이다. 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에 즉위하여 나라 다스리기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 있었다. ~ 생략 ~ 둘째는 영묘사(靈廟寺)옥문지(玉門池)에 겨울임에도 많은 개구리가 모여 3~4일 동안이나 울었다.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은 즉, 왕은 급히 각간 알천(角干 閼川)·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 2천을 뽑아 “속히 서쪽 교외로 나가 여근곡(女根谷)을 수색하면 필히 적병이 있을 것이니 엄습하여 그들을 죽이라.” 하였다. 두 각간이 명을 받들어 각각 군사 1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에 가서 물으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다. 백제의 군사 5백 명이 그곳에 와서 숨어 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삼국유사 권 제1 > 제1기이,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1년)

얼굴무늬 수막새는 경주 영묘사 터 출토된 기와에 사용된 수막새로 사람얼굴을 하고 있는 유일한 유물이다. ‘신라의 미소’라고도 불리는 이 수막새는 경주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여겨지고 있다. 삼국시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얼굴무늬수막새, 경주 영묘사터, 신라 7세기 전반>

용무늬 얼굴을 하고 있는 기와. 신라 최고 조각가였던 양지스님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사실적이고 힘찬 표현이 돋보이는 유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용얼굴무늬 기와, 경주 영묘사터, 통일신라 8~9세기>

양지사석 (良志使錫 )
석(釋) 양지(良志)의 조상과 고향은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선덕왕(善德王) 때 자취를 나타냈을 뿐이다. 석장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놓으면 석장(錫杖)은 저절로 날아가 단월(檀越)의 집에 이르러 흔들면서 소리를 냈다.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여기에] 넣었고, 포대가 차면 날아서 되돌아온다. 이 때문에 그가 머무는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다. 그의 신이함을 헤아리기 어려움이 모두 이와 같은 것들이다.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기예에도 통달하여 신묘함이 비할 데가 없었다. 또한 [그는] 필찰(筆札)에도 능하여 영묘사(靈廟)의 장륙삼존상(丈六三尊)과 천왕상(天王像)과 전탑의 기와, 천왕사(天王寺) 탑 밑의 8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金剛神) 등은 모두 [그가] 만든 것들이다. 영묘, 법림 두 절의 현판도 썼으며, 또 일찍이 벽돌을 다듬어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3천 불상을 만들어 그 탑에 모시어 절 안에 두고 공경하였다. 그가 영묘사의 장륙상을 만들 때는 스스로 입정(入定)하여 정수(正受)의 태도로 대하는 것을 법식(揉式)으로 삼으니 이 때문에 성 안의 남녀가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 (삼국유사 권 제4 > 제5의해,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1년)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수막새, 경주 영묘사터, 중앙박물관>

성덕대왕신종(국보)은 조선 세조 때(1460년) 봉덕사에서 영묘사로 옮겨와 안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성덕대왕신종(국보), 통일신라, 경주박물관>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