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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배동 삼릉(사적) 신덕왕릉, 신라 53대 신덕왕

경북 경주시 배동에 있는 신라 제53대 신덕왕(神德王, 912~917 재위)의 무덤이다. 52대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 자격으로 왕에 추대되었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신덕왕릉이라 전하는 무덤은 1953년과 1963년데 도굴되어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임이 확인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화장하여 뼈를 잠현 남쪽에 묻었다고 되어 있는데 그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경명왕릉과 함께 조선후기 이후 이곳을 왕릉으로 지정되었다.

 <경주 배동 삼릉(사적) 신덕왕릉>

신덕왕이 즉위하다 ( 912년 04월(음) ), 신덕왕(神德王)이 즉위하였다.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경휘(景暉)로 아달라왕(阿達羅王)註 002의 먼 자손이다. 아버지는 예겸(乂兼)으로 정강대왕(定康大王)을 섬겨 대아찬이 되었고, 어머니는 정화부인(貞和夫人)이며, 왕비 김씨는 헌강대왕(憲康大王)의 딸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죽고 아들이 없어서, 국인(國人)이 추대하여 즉위하였다.
왕이 죽다 ( 917년 07월(음) ), 〔6년(917)〕 가을 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신덕(神德)이라 하고 죽성(竹城)에 장사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신덕왕, 한국사 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배동 남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배동 삼릉(사적)은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쪽에는 신라 8대 아달라왕, 가운데에 53대 신덕왕, 뒤쪽에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경주 배동 삼릉(사적)>

<옆에서 본 모습>

배리 삼릉(拜里 三陵, 사적), 경북 경주시 배동 산 73-1
이 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 (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어 삼릉 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橫穴式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4,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邱城)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삼국사기, 한국사데이타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