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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군부 총무당과 청헌당, 조선시대 최고 군사기구였던 삼군부 청사

삼군부 건물은 조선시대 중앙부처 관아 건물 중 하나로 정청인 총무당(總武堂), 그 좌우에 보조건물격인 청헌당(淸憲堂)과 덕의당(德義堂)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한말인 고종때 지어진 삼군부 청사는 약 100년이 조금 넘은 건물로 건축문화재로서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볼 수 있지만,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구인 의정부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관아로서 의정부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어 당시 관아건물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재이다. 건물은 앞면 7칸의 규모가 상당히 큰 편에 속하는 건물로 많은 사람들이 근무했던 장소로 보인다. 삼군부 청사가 있던 광화문 앞 육조거리 서쪽에는 예조가 있었으나, 고종대에 군부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 이곳에 삼군부 청사를 세웠다고 한다.

정청인 총무당은 서울 돈암동 서울성곽 낙산 동쪽편 언덕 아래로 옮겨졌고 보조 건물인 청헌당은 공릉동 육군사관학교로 옮겨졌고, 덕의당은 남아 있지 않다. 청헌당은 1967년까지 광화문 광장 서쪽 정부종합청사자리에 있었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청헌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그리 크지 않은 건물로 초익공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삼군부 총무당>

성북구 돈암동 한성대학교 교정 서쪽편 언덕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삼군부 총무당 건물은 앞면 7칸의 큰 건물로 중앙3칸은 대청마루, 양쪽으로 1칸씩 온돌방과 창고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후기 구한말에 지어진 많은 한옥건물들과 건축 수법이 비슷하고, 당시의 관청 건물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희귀한 건축물이다.

<오른쪽에서 본 모습>

건물은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을 하고 있지만, 사찰건물들처럼 공포를 화려하게나 많이 주지는 않고, 굵고 간결하게 하여 단정하면서도 절도가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로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회의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삼군부 총무당 현판 글씨는 강화도 조약 업무를 주관했던 신헌이라는 사람이 쓴 글씨라 한다. 건물 양쪽에는 2칸씩 방을 두고 있는데, 삼군부 고위직이 근무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가운데 대청마루>

<건물 왼쪽 방>

<뒤에서 본 모습>

건물 앞.뒤에는 넓지 않는 통로 목적의 마루를 두고 있으며, 건물 앞에는 별도로 월대를 두고 있지는 않다.

<앞에서 본 모습>

총무당은 삼군부 청사의 정청 건물로 양쪽에 익랑격인 청헌당과 덕의당을 두고 있는 구조이다. 의정부나 육조같은 조선시대 중앙 관청은 대부분 이와 비슷한 구조의 주건물과 실무관헌들이 근무하는 행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성대 교정에서 내려다 본 모습>

<낙산공원에서 내려다 본 건물 뒷편>

 삼군부 총무당(總武堂),
이곳은 1868년(고종5)에 지은 것으로 조선말기에 설치된 삼군부의 청사(청헌당, 총무당, 덕의당) 가운데 중심건물이었다. 그런데 <고종실록>에는 1870년 4월에 발생한 화재로 청사의 건물 79칸이 소실되고 같은 해 윤 10월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총무당까지 화재를 입어 다시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삼군부로 사용하던 당시에는 정청인 총무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규모가 작은 청헌당과 덕의당이 나란하게 있었다. 총무당은 좌우 두 청사와 복도각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1880년에 삼군부가 혁파된 뒤에는 통리기무아문, 시위대청사로 사용했고,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보병사령부 건물로 쓰였다. 총무당은 1930년대에 현재 자리로 옮겨졌으나, 덕의당은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건물의 기둥머리는 익공으로 짜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만들었다. 이는 조선 말기의 건축특성을 잘 보여준다. 조선은 1865년(고종2) 정부와 군부를 분립시켰던 국초의 전통을 되살려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였다. 삼군부는 군무를 통솔하고 변방에 관한 일까지 관장했다. 총무당의 현판 글씨는 강화도조약 때 조선의 대표였던 신헌이 썼다. <출처:서울시청>

<청헌당>

육사경내로 옮겨져 있는 조선시대 최고군사조직인 삼군부 관아 건물 중 청헌당이다. 구한말인 1868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많지 않은 조선시대 중앙 관아 건물 중 하나이다. 정청인 총무당에 비해 규모가 작고 소박해 보인다. 삼군부 실무 관헌들이 근무하던 건물이다.

<창호>

문살은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형태인 띠창살을 사용하고 있다.

<청헌당 현판>

삼군부 청헌당, 서울 노원구 공릉동
이 건물은 1868년(고종5)에 지은 것으로, 조선말기에 설치된 삼군부의 청사다. 이 청사를 지은 2년 뒤인 1870년 4월에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 79칸이 모두 없어졌으며, 같은 해 윤 10월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이때 청헌당까지 다시 지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1967년까지 본래 위치에 있었으나 정부중앙청사를 지으면서 같은해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 1977년에 수리하면서 다소 모습이 달라졌다. 청헌당의 규모는 정면5칸, 측면 3칸이며, 기둥 위를 초익공을 짜고 팔작지붕을 얹어 꾸몄는데, 이는 조선말기 건축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삼군부 시절에는 정청인 총무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크기가 다소 작은 청헌당과 덕의당이 나란히 있었고, 총무당과는 복도각으로 이어져 있었다. 조선 초에 문무를 양립하는 정치를 펴고자 의홍삼군부를 창설하고, 건물도 의정부 맞은편에 두었었다. 고종은 이런 국초의 전통을 되살려 1865년(고종2)에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고 대궐의 수비와 도성 순찰같은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출처:서울시청>

삼군부(三軍府)는 조선초 군사관련 업무와 군령을 통합관리하던 관청으로 종래의 십위군을 중.좌.우군의 3군으로 나누고 자체 감독권과 지원권을 갖는 중앙 군사체제였다. 삼군부 체제는 후에 오위체제로 개편되기까지 중앙부대인 동시에 왕권과 수도를 방위하는 병력을 지휘.감독하는 최고 군부로 자리잡았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군사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비변사(備邊司)가 국가 최고합의 기관으로 자리잡으면서 군사 뿐만 아니라 정치.외교 등 국정전반에 걸친 최고 의결기구로 그 기능이 확대되면서 의정부가 유명무실화되고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비대화되었다.

고종대에 흥선대원군은 비대화된 비변사를 견제하기 위하여 의정부의 기능을 회복하고 조선개국초의 정신을 되찾는다는 의미로 다시 삼군부를 설치하고 기존의 비변사는 의정부와 통합하였다. 삼군부는 최고 군사기구로 오늘날 합동참모본부와 비슷한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삼군부는 1880년 근대적인 군사체제를 도입한다는 취지로 폐지되고 그 직무는 통리기무아문으로 올겨졌다. 그후 임오군란으로 다시 부활하기는 했다가 다시 폐지되었다. 삼군부는 1880년 혁파될 때까지 최고의 군사기구로서 병인.신미양요를 치루는 국방상 중요 역할을 수행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된 조선시대 광화문 앞 육조거리 모형>

삼군부 청사가 있던 대로 서쪽편에는 원래 예조가 있었으나, 구한말 삼군부를 설치하면서 예조를 옮기고 삼군부 청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 규모나 형태는 대로 동쪽편 의정부와 비슷하게 지었으며, 정청인 총무당과 양쪽에 익랑형태의 청헌당, 덕의당과 실무자들이 근무했던 행각으로 구성되었다.

<삼군부 청사가 있던 곳>

원래 삼군부 청사가 있었던 곳에는 현재 정부종합청사가 세워져 있다. 삼군부 건물은 1967년 이 건물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 곳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문무가 조화를 이루를 정치를 추구했으며, 최고 군사조직인 삼군부는 경북앞 광화문 서쪽에, 의정부는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