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대릉원(사적) 노동동 고분군, 노서동 고분군

경북 경주시에 있는 대릉원(大陵園) 중 노동동과 노서동에 있는 고분군이다. 신라의 궁성이었던 월성 북서쪽으로 조성되어 있는 삼국시대 신라 왕과 귀족들을 무덤들로 대릉원 북서쪽 끝단에 위치하고 있다. 이전에는 노동리고분군(사적), 노서리고분군(사적)으로 별도 관리되었지만 주변 고분들은 시기적, 지리적으로 동질성을 갖고 있어 대릉원으로 통합하여 재지정되었다. 노동동과 노서동에 있는 무덤들은 도심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어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출토 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을 대표하는 무덤인 봉황대>

경주-대릉원-호우총-09-20220129<노동동, 노서동 일대 신라시대 무덤들>

노동동에는 왕릉으로 추정되는 신라고분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봉황대와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현재 봉분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는 금령총과 식리총이 있다.  금령총은 봉황대 남쪽에 있는 작은 봉분으로 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신라를 대표하는 걸작인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국보)를 비롯하여 금제 방울, 금관(보물) 등이 출토되었다. 식리총에서는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금동 신발을 비롯하여 청동 그릇 등이 출토 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황대와 금령총(왼쪽), 식리총(오른쪽)>

봉황대(鳳凰臺)라 불리는 125호분은 지름 82 m, 높이 22 m로 신라 고분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옛 경주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자주 등장하는 봉황대는 도심에 있는 작은 동산으로 여겨졌다. 무덤 규모로 볼 때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직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외형 등으로 볼 때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봉분 위에 심어진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봉황대 특유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125호 무덤 봉황대>

봉황대 앞에 있는 작은 무덤인 금령총(金鈴塚)은 1924년 일본인 우메하라가 발굴 조사 하였다. 무덤은 바닥에 돌을 깔고 그 위에 널을 만들고 돌과 흙을 쌓아서 봉분을 만든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발굴,조사 이전에 봉분은 크게 훼손되었으며 바닥지름 18 m, 높이 4.5 m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껴묻거리 중에 금제 방울이 있어 ‘금령총’이라 불린다. 금관(금관)과 신라를 대표하는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국보)가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127호 무덤 금령총>

OLYMPUS DIGITAL CAMERA<금령총(金鈴塚) 방울, 금>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明器, 국보)는 금령총에서 출토된 1쌍의 도기이다. 말을 타고 먼 여행을 떠나는 주인과 하인을 모습을 하고 있는데 죽은이의 영혼이 저세상으로 떠나는 모습을 잘 표현하고 이다. 신라사람들의 사후세계관, 복식, 말갖춤 등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사람의 표정 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국보91호01-20200212<말탄사람토기(주인), 국보,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금령총>

국보91호03-20200212<말탄사람 토기(하인), 국보,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금령총>

금령총 금관(보물)은 신라 금관 중 가장 작고 간단한 형식을 하고 있다. 가운데에 ‘山’자모영이 4단으로 연결된 세움장식이 있고 양쪽에 사슴뿔 모양 장식이 달려 있다. 관테와 가지에는 나뭇잎모양의 원판을 달아 장식했다. 관테 좌우에는 귀고리 형태의 드리개로 장식을 하고 있다.  다른 금관과는 달리 옥장식이 없고 금으로만 만들어졌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령총 금관(보물)>

OLYMPUS DIGITAL CAMERA<금제 허리띠>

126호 무덤인 식리총(飾履塚)은 봉황대 앞쪽에 위치한 무덤으로 봉분 아래쪽 일부만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금령총과 함께 발굴조사된 것으로 직경 30 m, 높이 6 m 정도의 무덤이다. 서역 스타일의 상상속 동물들을 새겨놓은 금동신이 출토되어 식리총(飾履塚)이라 부른다. 금관은 출토되지 않았으며 금동신을 비롯하여, 유리그릇, 청동제기 등 신라와 서역 또는 중국 등과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은 무덤 주인 생전 활동이나 역할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126호 무덤 식리총>

금동신발 바닥면에 서역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동물 등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장식의 구성이나 형태에서도 섬세하면서도 이국적인 면모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이 금동신발이 출토되어 식리총(飾履塚)이라 부른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신발, 경주 식리총, 신라 5세기,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국자, 청동,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식리총,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말안장꾸미개, 금동, 삼국시대(신라) 5세기, 경주 식리총>

경주 노동리 고분군 (慶州 路東里 古墳群),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노동동 261
이 고분군은 월성(月城)을 중심으로 서(西)에서 북동(北東)방향으로 분포하는 많은 신라고분 중 서북편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고분들은 중앙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노동리(路東里)·노서리(路西里) 고분군으로 나뉘어진다. 이 곳 노동리 고분군에는 고분 1기와 고분터 2기가 있다. 남아 있는 무덤은 밑둘레 250 m, 직경 82 m, 높이 22 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봉황대(鳳凰臺)라고도 부른다. 남쪽에는 1924년에 발굴 조사한 금령총(金鈴塚)터와 식리총(飾履塚)터가 있는데 내부 구조는 모두 돌무지 덧널무덤이다. 여기에서 금관(金冠)과 도제 기마인물상을 비롯하여 많은 껴묻거리(副葬品)가 출토되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노동동 11호 무덤에서 출토된 목항아리에는 남자가 성기를 드러내고 있는 장면과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장면을 표현하여 있으며 겉면에 선과 동심원 등을 새겼다. 높이는 40.5 cm, 윗부분 너비는 25.5 cm 정도의 크기이다.

국보195호-01-20200212
<토우를 붙인 항아리, 경주 노동동, 국보, 삼국시대(신라) 5세기>

노서동에는 신라 최초로 금관이 발견된 금관총을 비롯하여, 스웨덴국왕이 황태자 시절 발굴에 참관했던 서봉총, 해방 이후 처음 발굴하여 광개토대왕 이름이 적혀진 청동그릇을 발견된 호우총, 봉황대와 비슷한 규모의 봉분이 있는 서봉황대 등 다양한 고분들이 모여 있다. 해방이후에도 오랫동안 주택가를 이루고 있던 곳으로 1984년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노서동 고분군>

128호 무덤인 금관총(金冠塚)은 1921년 경주 도심에서 주택공사를 하던 중 금관이 우연히 발견되어 신라고분의 존재를 알렸던 곳이다. 금관총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길이 48 m, 높이 13 m 규모로 대릉원 고분 중 중간 정도이다.  금관 및 금제관식(국보)과 금제 허리띠(국보)를 귀걸이.팔찌 등 장신구와 토기류 등 다양한 종류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2015년에는 금관총에 대한 발굴조사가 다시 실시되어 ‘이사지왕도(尒斯智王刀)’라는 명문이 새겨진 칼집 끝 장식을 비롯한 새로운 부장품이 발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128호 무덤 금관총>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금관총>

금관총 금관은 신라 금관 중 가장 먼저 발견된 유물이다. 가운데에 ‘出’자(또는 나뭇가지 모양)과 양쪽에 사슴뿔모양의 장식이 있는 전형적인 신라금관이다. 장식의 앞면에는 133개의 달개와 57개의 곱은옥이 달려 있다. 세움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한 주의 연속 점무늬, 관테에는 파도무늬가 새겨져 있다. 사슴뿔과 나무가지를 형상화한 시베리아 샤먼의 관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 금관(국보)>

금관총 금제 허리띠(국보)는 금관과 하나의 세트를 구성하고 있는 유물이다. 허리띠는 길이 109 cm로 39개의 순금제 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드리개는 17개로 옥(玉)같은 장식품과 칼, 향낭, 물고기 등을 표현하고 있다. 드리개는 유목민들이 이동할 때 허리띠에 매고 다녔던 생활도구들을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 금제 허리띠(국보)>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들었으며 모자 위로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위에 두 갈래로 된 긴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 관모(국보)>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 금제관식(국보)>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금관총 출토 유물을 정리하던 중 고리자루 큰칼의 칼집 끝에서 날카로운 도구로 새겨 쓴 글자를 확인하였다. 판독결과 ‘尒斯智王(이사지왕)’이라는 글자였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리자루 큰칼>

OLYMPUS DIGITAL CAMERA<굵은고리 귀걸이, 금>

OLYMPUS DIGITAL CAMERA<청동제 방울>

OLYMPUS DIGITAL CAMERA<일제강점기에서 작성된 보고서 자료>

금관총 뒷편에 있는 129호 무덤인 서봉총(瑞鳳塚)은  일제강점기에 발굴, 조사되었다. 1926년 당시 방한했던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를 참관했다고 하여 서봉총이라 불렀다. 서봉총에는 금관을 비롯하여 각종 청동제 그릇과 금.은 장신구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봉분의 조성형식 또한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서봉총은 2개의 무덤이 있는 쌍분으로 남쪽 무덤은 1929년 영국인 데이비가(Devid)가 경비를 부담하여 발굴했다고 하여 데이비드총이라 부른다.

OLYMPUS DIGITAL CAMERA<데이비드총과 서봉총, 서봉황대>

서봉총에는 발굴을 참관했던 구스타프 황태자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올려져 있다. 구스타프황태자는 스웨덴국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서 스웨덴과의 친선관계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이 기념비를 만들어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129호 무덤인 서봉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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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총 금관(보물), 서봉총>

OLYMPUS DIGITAL CAMERA<금귀걸이, 5세기, 서봉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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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잔, 5세기, 서봉총>

130호 무덤인 서봉황대는 봉황대와 비견할 정도로 큰 규모를 하고 있는 무덤이다. 신라 왕릉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130호 무덤인 서봉황대>

OLYMPUS DIGITAL CAMERA<132호 무덤>

마총(馬塚)은 쌍상총과 같은 굴식돌발무덤으로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무덤은 이미 도굴되었지만, 말뼈와 마구편이 발견되어 마총이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이후 국립박물관에서 재조사했는데 석실로 이어지는 널문에는 나무를 사용한 흔적이 확인됐다.

OLYMPUS DIGITAL CAMERA<133호 무덤인 마총>

서봉황대 앞에는 큰 무덤인 134호 무덤이다. 서봉총이나 황남대총처럼 표주박형태를 하고 있는 쌍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134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135호 무덤>

137호분은 통일신라 고분의 양식인 굴식돌방무덤이다. 1953년 발굴조사시 나란히 설치된 2개의 주검받침이 있어 쌍상총(雙床塚)이라 부른다. 내부는 대부분 도굴되었으며 출토유물로는 토기파편들과 청동제 문고리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137호 무덤 쌍상총>

140호 무덤은 ‘호우(壺杅)’라는 글씨가 돋을 새김되어 있는 청동그릇(보물)이 출토되어  호우총(壺杅塚)으로 부른다. 1946년 국립박물관이 해방 후 처음으로 은령총과 함께 발굴하였다. 전형적인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옆에 있던 은령총과 함께 쌍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당시에는 봉분은 없고 주택이 있었으며 현재는 주위보다 약 2 m 높은 대지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 140호분, 호우총, 은령총>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보물)>

OLYMPUS DIGITAL CAMERA<귀걸이, 호우총>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그릇, 호우총>

호우총 주변 노서동 215번지 일대에는 원래 호우총과 마찬가지로 민가들이 있었는데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노서동 금팔찌(보물), 금목걸이(보물), 금귀걸이(보물) 등이 있다. 노서동 일대를 유적지로 정비하면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노서동 215번지에 남아 있는 무덤>

노서동 금팔찌(보물 454호)이다. 경주 노서동 고분군에 있던 노서리 215번지 민가에서 발견된 금팔찌 1쌍이다. 금반지는 지름 8 cm 크기로 바깥쪽에 각각 59개씩 돌기를 내어 옥을 상감하였다. 돌기 좌우에 용을 생동감있게 새겨 놓고 있다. 섬세한 조각수법과 조형미가 뛰아난 신라를 대표하는 금팔찌이다.

보물454호-02-20200212<신라 노서동 금팔찌(보물), 경주 노서동 출토, 삼국시대(신라) 5~6세기>

노서리 215번지 민가에서 발견된 금목걸이다. 금판으로 속 빈 구형(球形)을 만들어 금줄로 연결한 장식을 44개 연결하여 만든 목걸이로 끝에 비취 곡옥을 달았다. 제작수법이 상당히 정교하며 조형미도 뛰어나다.

보물456호-02-20200212
<신라 노서동 금목걸이(보물), 경주 노서동 출토, 삼국시대(신라) 5~6세기>

노서리 215번지 민가에서 발견된 금귀걸이 1쌍이다. 하나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65년 한국으로 반환되었다. 주고리, 중간식, 마감장식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5~6세기 신라 귀걸이 형태를 하고 있다. 아랫단에는 나뭇잎형 장식으로 마감하였다. 나뭇잎 모양의 장식은 매우 섬세하며 화려한 느낌을 준다. 제작기법과 조형미가 뛰어나며 신라 금귀걸이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보물455호-01-20200212<경주 노서동 금귀걸이(보물), 경주 노서동 출토, 삼국시대(신라) 5~6세기>

경주 노서리 고분군 (慶州 路西里 古墳群), 사적, 경북 경주시 노서동 112
이 곳 노서동 넓은 평지에는 크고 작은 고분이 10여 기(基) 있다. 노동리의 봉황대고분과 더불어 그 규모에 있어서 쌍벽을 이루는 제130호 고분을 비롯하여 1921년 우연히 금관이 출토되어 세상사람들을 놀라게 한 금관총(金冠塚), 1926년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 6세가 발굴조사에 참여하여 금관이 출토된 서봉총(瑞鳳塚), 194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 그릇이 발견 되어 신라 고분에 대한 연대 추정에 도움을 준 호우총(壺塚), 그밖에 은령총 (銀鈴), 쌍상총(雙床家), 마총(馬塚) 등이 있다. 이들 무덤 중 대체로 봉분이 큰 것은 돌무지 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고, 작은 것은 돌방무덤(石室墳)과 구덩식(竪穴式)무덤이다. 1984년 신라고분 정비 보존 사업의 일환으로 민가를 철거하고 지금의 모습으로 정비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5. 안내문, 경주박물관 특별전, 2015년
  6. Cultural Heritage Wiki,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