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시 인왕동 일대에 있는 신라 왕궁 별궁터이다. 신라 태자가 머물던 거처를 중심으로 국가적인 행사나 귀한 손님을 맞을 떄를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동궁 이상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 때(674) 큰 연못을 파고 꽃과 나무를 심어 정원을 조성다는 기록과 경순왕이 왕건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는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굴조사 결과 연못 서쪽에는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으며 그 중 연못 서쪽 건물터 중 3곳과 연못을 복원하였다. 당나라 장안의 대명궁 후원 태액지가 거의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경주와 신라를 대표하는 장면 중 하나로 손꼽힌다.
궁궐 안에 연못을 파다 ( 674년 02월(음) )
2월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동궁을 짓고 문의 이름을 정하다 ( 679년 08월(음) )
동궁(東宮)을 짓고 처음으로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정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태조가 왕을 찾아가다 ( 931년 02월(음) )
5년(931) 봄 2월에 태조가 5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경기(京畿)에 이르러 만나 뵙기를 청하였다. 왕이 백관(百官)과 교외에서 맞아 궁으로 들어와 상대하는데 간곡하게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다.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벌였는데 ~ (삼국사기 권 제12 신라본기 제1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안압지 서쪽에는 발굴, 조사 결과 회랑지를 비롯하여 26곳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건물 배치는 출입문, 별궁 정전처럼 보이는 주건물과 편전처럼 보이는 뒷편 건물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마당 동쪽 안압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누각 용도의 건물들이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들을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동쪽 누각을 제외한 건물 배치는 불국사 대웅전 영역이나 조선시대 궁궐 정전 영역과 비슷하다. 확인된 건물 중 하나가 <삼국사기> 등에 기록된 임해전(臨海殿)인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 건물터
발굴 조사 결과 안압지 주변에는 26개소 (주 건물터 및 회랑터)의 크기가 각각 다른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그중 연목 서쪽가의 5개 건물터 중 3개소에만 건물 추정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재현하였다. 그 나머지 23개소의 건물터는 발굴된 유구를 발굴 전의 형태로 덮고 그 위에 성토하여 건물의 기단부를 새로 만들어 재현하였다. 초석은 신라 시대의 초석 모습 그대로 화강석을 사용하여 재현하였다. 이들 건물터 중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임해전(臨海殿)이었던 것으로 여겨지나 확실하지는 않다. 새로 만들어 놓은 초석은 모두 267개로서 회랑터를 제외한 주 건물에만 설치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안압지 연못 남쪽에도 비교적 큰 규모 건물터가 있다. 건물 배치나 형태 등으로 볼 때 실무적인 용도의 부속건물인 듯 하다.
앞쪽 가운데 있는 건물터는 임해전지 영역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것으로 보인다. 궁궐 정전처렴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출입문을 들어서면 정전처럼 보이는 주건물터를 중심으로 회랑으로 둘러싸인 마당이 있으며 안압지가 있는 동쪽에 누각형태의 제1 건물터가 있다. 정전 건물 뒷편으로는 편전이나 사찰 강당처럼 생활공간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주건물이 있는 영역 동쪽 제 1 건물터에는 복원된 건물이 있다. 발굴, 조사 결과와 안압지 출토 유물 등을 고려 하여 건물을 복원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 누각 건물이다. 복원된 건물 규모로 볼 때 소규모 연회를 가졌던 공간으로 보인다.
복원 건물: 제 1 건물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된 연못 서쪽가의 5개 건물터 중 현재 복원된 3동의 건물(제1, 2, 5 건물)은 원래 기단부가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하고 건축부재는 목부재와 기와 등 출토유물을 본따 신라 시대의 원형대로 추정 재현한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목조 팔작지붕으로 건평 103 ㎡, 건물 높이 9 m의 누각 형태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주건물 뒷편으로는 약간 긴 형태의 건물터가 남아 있다. 경복궁 건물 배치를 고려하면 정전 뒷편 편전에 해당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주건물이 대규모 공식행사를 하는 공간이라면 뒷편은 회의 등 일상적인 업무나 생활을 하는 공간인 것으로 보인다. 사찰 가람배치에서는 강당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을 따라서 빗물이르 흐르도록 만든 배수로로 추정되는 석조 유구를 볼 수 있다.
석조 유구
건물터를 따라 연결되는 이 석조 유구(石造 遺構)는 건물 지붕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흐르도록 만든 뚜껑없는 배수로로 생각되며 물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게 되어 있어 그 끝은 연못에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 남아 있는 석조 유구는 그 일부분으로서 길이가 83 m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주건물이 있는 영역 뒷편 모퉁이에는 복원된 제 3건물을 볼 수 있다. 안압지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 건물로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의 상당히 큰 누각건물이다. 경복궁에서 국가적인 연회가 열렸던 경회루와 같은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臨海殿)이 8차례 등장하는데 대부눈 큰 연회를 베풀었다는 내용이다. 이 건물이 임해전으로 보이는데 확인된 것은 아니다.
복원 건물: 제 3건물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된 연못 서쪽가의 5개 건물터 중 현재 복원된 3동의 건물(제 1, 3, 5건물)은 원래 기단부가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하고 건축부재는 목부재와 기와 등 출토 유물을 본따 신라시대의 원형대로 추정 재현한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목조 팔작지붕으로 건명 187 ㎡, 건물 높이 10 m의 누각 형태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안압지 서쪽은 석축을 높게 쌓았는데 석축에는 5개의 돌출된 건물지가 있다. 다양한 규모의 누각 건물들이 있어 다양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게 해준다.
<다양한 규모의 누각 건물들이 있는 안압지 서쪽 석축>
뒷편에 있는 제5건물은 앞면 3칸의 단층 목조건물이다. 뒷마당에 약간 떨어져 있는 누각 건물로 안압지 호수와 동궁 누각 건물들이 만드는 경치를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복원 건물: 제5건물
발굴 조사 결과 확인된 연못 서쪽의 5개 건물터 중 현재 복원된 3동의 건물(제1, 3, 5건물)은 원래 기단부가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복원하고 건축부재는 목부재와 기와 등 출토 유물을 본따 신라시대의 원형대로 추정 재현한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3칸의 단층 목조 사모 지붕으로 건물 43.5 ㎡, 건물높이 9 m로서 이 건물텉터 주변의 연못 속에서 나온 돌난간 부재를 본따 난간을 복원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경주 임해전지, 사적, 경북 경주시 인왕동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별궁 안에 있던 것으로 그 안에는 임재전을 비롯한 부속 건물들과 정원이 있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궁 안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귀한 새와 기이한 짐승들을 길었다. 임해전은 931년 경순왕이 고려 태조 왕건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군신들의 연회나 귀빈 접대 장소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못 이름은 원래 월지(月池)였는데 조선시대에 폐허가 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들어 ‘안압지(雁鴨池)’라고 부르게 되었다. 1975년 준설을 겸한 발굴조사에서 산라 떄 축조되었던 안압지의 모습을 거의 확인하였고, 임해전터에서 출토된 보상화문전에 새겨진 기년명으로 궁궐의 축조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苑池)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출처>
- 안내문, 경주시청, 2009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 Cultural Heritage Wiki, 문화재청, 2022년
-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