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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원성왕릉(사적), 신라 38대 원성왕

경북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년)의 능이다 원성왕은 상대등 김양상 (선덕왕)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선덕왕 즉위 후 상대등이 되었고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당나라와 통교하였으며 유교정치를 지향하여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였다. 김제 벽골제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선덕왕과 원성왕 집권기는 귀족들이 요직을 장악하고 그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통해서 왕위를 계승하는 통일신라 후대의 정치 혼란상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경주 원성왕릉(사적)>

원성왕이 즉위하다 ( 785년 01월(음) )
원성왕(元聖王)이 즉위하였다. 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으로 나물왕(奈勿王)의 12세손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계오부인(繼烏夫人)이고 왕비는 김씨로 신술(神述)5 각간(角干)의 딸이다. 일찍이 혜공왕(惠恭王) 말년에 반신(叛臣)이 발호(跋扈)하였는데, 선덕왕(宣德王)이 당시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앞장서서 임금의 곁에 있는 나쁜 무리를 제거할 것을 주장하였다. 경신이 그에 동조하여 난을 평정하는데 공이 있었기에, 선덕왕이 왕위에 오르게 되자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자, 여러 신하들이 회의를 한 후에 왕의 집안 조카인 주원(周元)을 옹립하고자 하였다. 주원의 집은 서울에서 〔왕궁으로부터〕 북쪽으로 20리(里) 떨어진 곳에 위치였는데, 마침 큰비가 와서 알천(閼川)의 물이 넘쳐 주원이 알천을 건너 〔왕궁으로〕 오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人君]은 큰 자리라 진실로 사람이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 갑자기 비가 쏟아진 것은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동생으로 평소 덕망이 높고 왕의 자질이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뜻이 모아져 경신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그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외쳤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원성왕이 죽다 ( 798년 12월29일(음) )
〔14년(798)〕 겨울 12월 29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諡號)를 원성(元聖)이라 하고, 유명(遺命)에 따라 관[柩]을 옮겨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원성왕릉은 괘릉(掛陵)으로도 불리는데, 무덤을 조성할 떄 물이 괘어 널을 걸어 묻었다는 조선시대 민간신앙과 결부된 전설에 따른 것이다. <삼국유사>에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에 있는데, 동곡사는 당시 숭복사로 최치원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다’는 기록과 괘릉 근처에 숭복사터가 있어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성왕릉 입구>

<입구에서 보이는 능역>

<봉분 앞에서 보이는 능역 입구>

왕의 능은 토함산(吐含山) 서동(西洞) 곡사(鵠寺)에 있는데,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비가 있다. 또한 보은사(報恩寺)와 망덕루(望德樓)를 창건했으며, 할아버지인 훈입 잡간(訓入 匝干)을 추봉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이라 하고, 증조 의관 잡간(義官 匝干)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삼았으며, 고조 법선 대아간(法宣 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삼았다. 현성대왕의 아버지가 바로 마질차 잡간(摩叱次 匝干)이다. (삼국유사 권 제2 제 2기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원성왕릉은 12지신상으로 둘레돌을 돌린 원형봉토분으로 봉토 주위에는 수십개의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했으며, 중앙에는 안상이 조각된 서역풍의 상석이 놓여 있다. 봉분에서 떨어진 왕릉 입구에은 사자 2쌍, 문무인석 각 1쌍, 석화표 1쌍이 서 있다. 괘릉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 신랑왕릉 중에서는 형식적으로 가장 잘 갖추어져 있으며, 십이지상석을 둘레돌에 새겨 넣는 등 신라 특유의 봉분 양식도 잘 반영되어 있다.

<원성왕릉 능역>

봉분은 봉분은 밑둘레 70 m, 지름 21.9 m, 높이 7.7 m 규모로 둘레석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바깥쪽에 난간을 세웠다.

<원성왕릉>

봉분 앞에 세워진 상석(床石)은 후대 조선왕릉이나 다른 신라 왕릉과는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서구의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제단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는데, 무인석과 함께 서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봉분 앞에 세워진 상석>

<난간석>

봉토 둘레에는 방향에 따라서 이에 해당하는 십이지신상을 새겨놓고 있는데 그 조각수법이 상당히 세밀하고 뛰어나다.

<봉분 둘레석>

<쥐(子), 0시>

<소(丑), 1시>

<호랑이(寅), 2시>

<토끼(卯), 3시>

<용(辰), 4시>

<뱀(巳), 5시>

<말(午), 6시>

<양(未), 7시>

<원숭이(申), 8시>

<닭(酉), 9시>

<개(戌), 10시>

<돼지(亥), 11시>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인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원성왕릉은 신라 왕릉 중에서 형식적으로 가장 잘 갖추어져 있는 왕릉으로 후대 왕릉 조성의 표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서 봉분을 조성하고 그 앞에는 문.무인상을 비롯한 석물을 세워놓고 있다. 조선왕릉의 석물이 봉분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반면에 원성왕릉은 봉분과 떨어진 왕릉 입구 출입로 양쪽에 세워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왕릉 입구 서쪽편에 세워진 석물들>

상스러운 동물인 사자 2마리, 문인석, 무인석, 화표석이 나란히 서 있는 배치를 하고 있다. 석물들은 봉분 둘레석의  12지신상과 더불어 신라 왕릉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서쪽편 석물들>

무인석은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의 얼굴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서역인 얼굴 특징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서역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 중 하나이다.


<무인석>


<무인석>

<사자상>

경주 원성왕릉, 사적
이 능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년)을 모신 곳이다. 경주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약 12 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밑둘레 약 69 m, 지름 약 22 m, 높이 약 7.4 m이며, 능의 둘레에 있는 호석石에는 십이지신상이 돋을새김되어 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다. 봉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화표석, 문인석, 무인석과 돌사자를 좌우로 마주보게 세웠으며,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 모습을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능은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조각 수법도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 원래 이곳에는 곡사라는 절이 있었으나 현재의 숭복사터로 옮기고 그 자리에 왕릉을 만들었다. 별칭으로 괘릉(掛陵)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널을 걸어 묻었다는 조선시대의 민간신앙이 결부된 전설에 따른 것이다. 왕은 독서삼품과라는 제도를 두어 인재를 뽑았으며 벽골제를 고치기도 하였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5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4. 삼국유사 권 제2 제 2기이,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