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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 정록청, 관원들이 근무하던 공간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고려시대 국자감을 계승하였다. 조선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직후부터 도성을 구성하는 중요 기관 중 하나로 성균관을 건설하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7)에 대성전을 비롯한 문묘와 명륜당 등의 강학공간 건물들을 완공하였다. 성균내 관헌들이 근무하는 공간으로는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뒷편에 위치한 정록청(正錄廳)과 성균관 서리들이 근무하는 서리청(書吏廳) 등이 있다.

<경국대전>의 성균관 직제는 지사(정2품, 겸임) 1인, 동지사(종2품, 겸임) 1인, 대사성 제주(정3품) 1인을 비롯하여 하급관리인 종9품인 학록, 실무자인 서리 등 많은 관헌들을 두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 관헌들은 외형적으로 우대를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헌부.사간원 홍문관 같은 삼사(三司)와는 달리 주요 벼슬길에 진출할 수 있는 청직이 아니었고 비교적 한직에 속하는 벼슬이었다고 한다. 정록청은 성균관 성립 초기에는 각종 과거 응시자들의 예비 심사를 하기도 하고, 시정(時政)을 뽑아 적어서 보관하는 등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성균관을 관리하고 유생들을 지원하는 실무적인 업무만을 담당했다고 한다.

<성균관 정록청>

정록청, 성균관 관헌들이 근무하던 사무실

성균관 유생들의 생활공간이었던 동재 주변에는 유생들이 식사하는 식당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있으며, 성균관 관헌들은 주로 동재 안쪽 공간에서 근무하였다. 성균관 동재와 관헌들의 사무소인 정록청 사이에는 문간채로 분리되어 있는데, 정록청 대청마루에서 문을 통해 동재 마당을 감시하고 있는 형태이다. 정록청 오른편에는 살림집처럼 생긴 폐쇄된 구조의 서사청과 그 앞으로 실무자들의 사무실로 보이는 행각들이 들어서 있다. 성균관 기숙사인 동재와 식당, 관리들의 사무실인 정록청을 보면 옛날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바쁜 일과를 보는 듯 하다.

<앞에서 본 모습>

건물은 앞면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작은 규모의 건물로 지방 관아 동헌같은 분위기를 하고 있다. 정록청는 실제로 성균관 참하관이 입하여 중요한 시정(時政)을 기록하던 곳이지만, 조선후기에는 참하관들의 휴게소로 사용하거나 관원들이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정록청을 출입하는 중문>

<정록청에서 보이는 동재 마당>

성균관 정록청을 출입하는 문이자, 기숙사인 동재를 출입하는 중문이다. 정록청 대청마루에서는 중문을 통해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마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동재 출입문을 통해 오가는 사람들과 유생들의 출입을 감독하기 쉬운 위치이다.

<정록청 마당>

<작방>

성균관 관헌들이 근무하던 정록청 앞에 있다. 성균관 운영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관하던 창고로 보인다.

명륜당 동쪽에 남향, 8간(間)으로 이루어진 건물로서, 태조 7년(1398)에 명륜당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이후 선조 25년(1592)에 소실되었다가 인조 4년(1626)에 중건되었다. 정록청이란, 성균관 관리의 관직인 학정(學正)과 학록(學錄)의 끝 글자(字)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서 성균관 관원의 사무실이었다. 정록청 설립 초기에는 각종 과거 응시자들의 예비 심사를 하기도 하고, 시정(時政)을 뽑아 적어서 보관하는 등 중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이러한 기능은 폐지되고 관내의 서무만을 전담하는 기구로 축소되었다. <출처:성균관>

<서리청(書吏廳)으로 들어가는 길>

<서리청>

성균관 정록청 뒷편에 있는 서리청(書吏廳)이다. 정록청 부속 건물로 성균관 서리(書吏)들이 근무하는 공간이다.

<서리청 행각>

서리청 앞 쪽문 안쪽으로 행각들이 있다. 서리들이나 성균관 유생들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으로 보인다.

<안쪽에서 본 서리청>

관청이라기보다는 숙소에 가까운 건물이다.

향관청(享官廳), 대성전 제사 향축을 준비하고 보관하는 공간

정록청 뒷편으로는 성균관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인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에 올린 제사를 준비하던 향관청과 실무자들이 머물던 공관인 동.서월랑이 있다. 향관청은 향축을 보관하고 준비하던 곳이라고 하는데, 앞면 4칸 건물로 가운데는 대청마루, 양쪽1칸씩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실제로 이 건물은 향축을 보관한다기보다는 제사업무에 관련된 관리들의 사무실 기능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향관청 앞마당에는 동.월랑 건물이 양쪽에 들어서 있다. 동.서월랑은 감찰집사들이 근무하던 공간으로 향관청 마당을 등지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향관청으로 들어가는 협문>

<성균관 제일 안쪽에 위치한 향관청>

제사에 쓰일 향축을 준비하고 보관하는 건물로 재실과 비슷한 형태의 건물이다. 향축을 보관하는 건물이지만 관련 업무를 하는 관리들의 사무실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앞면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온돌방 1칸씩을 두고 있다.

<대청마루>

<향관청 앞 마당>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마당이 비교적 넓은 편이다. 마당 양쪽에는 마당을 등지고 있는 형태의 건물인 좌.우월랑이 있다.

<향관청 좌.우월랑>

<반대편 모습>

앞면 4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행각처럼 지어진 작은 건물이다. 향관청 좌.우월랑은 앞면 4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행각같은 건물로 이곳은 향관청 업무와는 상관없이 성균관내 감찰을 담당하는 집사들이 머무는 공간이라고 한다.

문묘 제사 때에 제관(祭官)들이 재계(齋戒)하고 향축(香祝)을 보관하던 곳으로서 성현(成俔)의 건의로 성종 4년(1473)에 명륜당 북동쪽에 남향, 10간(間) 규모로 건립되었다. 이후 왜란(倭亂)으로 소실되었다가 효종 4년(1653)에 중건되었다. 중앙에는 제사에 쓰이는 향축(香祝)을 보관하고 좌우에는 헌관방(獻官房)이 있다. 한편, 향관청의 좌우에는 감찰(監察) 집사(執事)들이 사용하던 동·서향 6간(間)으로 건조된 동월랑(東月廊)과 서월랑(西月廊)이 있다. <출처:성균관>

<태학계첩, 1474년>

성균관 대사성 이정보의 「태학숙록」완성을 기념하여 만든 계첩으로 문묘, 명륜당, 동.서재가 그려져 있다.

<성균관인과 양현고인>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과 성균관 유생들의 식량.물품 공급을 담당했던 관청인 양현고의 관인이다.

 국립대학 성균관과 중등학교 사학
수도 한양은 정치.경제의 중심지인 동시에 교육의 도시이기도 했다. 유학을 최고 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는 최고 학부인 성균관을 두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1398년(태조7) 숭교방(현재 명륜동)에 건립한 성균관은 생원과 진사들을 교육하고, 중국과 우리나라의 명현들에게 제사하는 기능을 갖추었다. 명륜당에서는 학생들을 교육하였고, 문묘에서는 공자를 비롯한 5성과 10철, 우리나라 18현 등의 위패를 모셨다. 1411년(태종11)에 건립된 사학은 오늘날의 중등교육과정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성균관 관원이 파견되어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성적이 우수한 학생은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중부학당은 관방방(현재 중학동)에 설치되었으며, 동부학당은 창선방(현재 종로6가), 서부학당은 여경방(현재 태평로1가), 남부학당은 성병방(현재 남학동)에 두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