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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숭의전(사적), 고려 왕조의 종묘 역할을 하는 곳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에 있는 숭의전(崇義殿, 사적)이다. 고려 태조를 비롯한 4왕과 16 공신들을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고려왕조의 종묘(宗廟) 역할을 하는 곳이다.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 있던 고려 왕조 종묘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 왕조 종묘를 세웠다. 이후 고려왕조 대한 예우와 민심을 고려하여 태조 왕건을의 원찰이었던 이곳에 태조 왕건을 모시는 사당(廟殿)을 세웠다. 이후 정종 때(1399년) 고려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충경왕), 충렬왕, 공민왕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문종 때(1452년) 건물을 고쳐지으면서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 왕조 4왕인 태조, 현종, 문종, 원종의 위패와 고려 공신 16명을 함께 모시도록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 왕씨 후손으로 하여금 전각의 수호와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현재의 건물들은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0년대에 복구하였다.

<연천 숭의전(사적)>

숭의전이 있는 이곳은 태조 왕건이 기도를 올리던 앙암사(仰庵寺)가 있던 곳이다.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 있던 고려 왕조 종묘를 대신하여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세워 제사를 올리면서 전조에 대한 예우를 한다는 명분과 개경에서 고려왕조의 흔적을 지우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숭의전 주변은 임진강변 단애절벽(斷崖絶壁)이 있는 명승지로, 수목이 울창한 곳이다. 숭의전은 임진강이 내려다 보이는 아늑하고 풍치좋은 곳에 강변 언덕 위에 자리잡고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주고 있다. 안동의 도산서원과 비슷한 분위기이다.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헐고, 그자리에 새 종묘를 짓도록 하다
고려 왕조의 종묘(宗廟)를 헐어버리고 그 땅위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하였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0월 13일 신유 3번째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의정부에서 왕씨의 후사가 봉사하는 조건을 의논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왕씨(王氏)의 후사(後嗣)가 봉사(奉祀)하는 조건을 의논하기를,
“1. 건국 초기에 왕씨(王氏)를 마전(麻田)의 앙암사(仰庵寺)에서 제사지냈는데, 사우(祠宇)가 좁고 누추하여, 신묘(神廟)에 적합하지 못했습니다. 기사년312) 에 관찰사(觀察使)로 하여금 고쳐 건축하도록 하였으나, 지금까지 성취되지 못하여 빗물이 새어 무너졌으니, 선대(先代)를 존숭(尊崇)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예조(禮曹)에 명하여 기지(基地)를 살펴 정하고 묘사(廟祠)를 고쳐 세우게 하소서.  — < 중략 > —-

하니, 그대로 따라서 예조(禮曹)에 명하여 법을 제정하게 하였다. (문종실록 12권, 문종 2년 3월 18일 신해 2번째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연천 당포성에서 보이는 숭의전 주변 임진강>

<숭의전 입구 홍살문>

<숭의전 들어가는 길>

 왜 연천의 마전에 숭의전을 세웠을까?
연산군의 폭정에 조강에 몸을 던진 당대의 뛰어난 시인 정희량이 마전의 한 객관에 머물며 남긴 시를 보면 당시까지만 하여도 마전은 매웅 궁벽하고 한적한 시골마을임을 알 수 있다. 왜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임진강변의 외딴 시골마을에 태조 이성계는 전조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을 세웠을까? 이는 마전의 앙암사가 고려 태조 왕건이 자주 들러 기도를 드리던 기도처(원찰)이었기 때문이다. 태조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 있을 때 개경에서 철원 궁성으로 가는 길은 180리로 배를 타고 임진강을 거슬러 마전에 이르면 날이 저물어 하루를 쉬어가야 했다. 임진강변의 잠두봉 중턱에 자리잡은 앙암사는 개경에서 딱 90리 지경으로 경치가 수려하고 한적하여 기도처로 더없이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태조 왕건은 하루를 쉬어가며 몸과 마음을 추스르곤 하였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전조의 종묘를 태조 왕건의 원찰이었던 마천군의 앙암사에 두게 함으로써 전조를 예우한다는 명분과 개경 밖으로 전조의 흔적을 지워 유폐시킴으로써 민심의 동요를 예방하는 실리를 함께 얻을 수 있었다. (안내문, 연천군청, 2022년)

숭의전은 임진강변 절벽에 세워져 있어 경치가 좋다. 앞쪽에는 조선 문종 때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를 볼 수 있다.

<연천 숭의전>

<숭의전 앞 느티나무와 임진강>

고려 왕실을 지키는 나무(느티나무)
이 느티나무(550년)는 조선 문종 2년 왕씨 자손이 심었다고 전해진다.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고려 태조.현종.문종.원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사당으로 이성계가 세웠다고 한다. 이 나무가 철따라 웅웅 소리를 내며 울면 비나 눈이 많이 오고, 이 나무에 까지가 모여들면 마을에 경사가 나며, 까마귀들이 모여들면 틀림없이 초상이 난다고 한다. (안내문, 연천군청, 2022년)

숭의전은 고려의 왕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종묘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일반적인 문중 사당과는 격을 달리하지만, 실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건물은 고려 태조를 비롯한 4왕들의 위패를 모신 숭의전과 공신 16명의 위패를 모신 배신청(陪臣廳), 위패를 임시로 모실 수 있는 이안청(移安廳),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앙암재와 전사청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왕의 위패를 모시는 숭의전에 비해서 공신들을 모신 배신청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 이는 공신들의 후손들이 조선시대에도 크게 번창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연천 숭의전>

<숭의전 삼문>

숭의전 정전은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8대 현종, 11대 문종, 24대 원종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다. 건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규모이다. 서원에 모셔신 인물들의 사당과 비슷한 규모로 멸망한 왕조의 비애를 잘 보여주고 있다.

<숭의전 정전>

<정전 툇간>

조선초 태조 때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위패와 동상과 함께 2대 혜종, 6대 성종, 8대 현종, 11대 문종, 24대 원종, 25대 충렬왕, 31대 공민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후 세종 때 조선의 종묘에는 오실(五室)을 제사하는데 고려 왕조 팔위(八位)를 제사하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안다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왕만을 모시게 하였다. 이후 지금까지 이곳에는 4왕의 위패만 모셔져 있다. 31대 공민왕의 위패는 서울 종묘에 별도로 모시고 있다.

<태조 왕건의 위패를 모신 곳>

<문이 열린 모습, 위패와 영정사진이 내부에 있다.>

<8대 현종의 위패를 모신 곳>

<11대 문종, 24대 원종의 위패를 모신 곳>

숭의전 연혁
역성혁명를 통해 왕조를 찬탈하였지만 고려의 신하였던 태조 이성계는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잊지 않았다. 조선이 개국하자 후대의 불안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대사헌 민개의 주청으로 개경 내에 거주하던 모든 고려의 왕족들은 개경에서 쫒겨나 거제도와 강화도로 보내지게 되었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 두번째 항목에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천명하며 공양왕의 아우 왕우와 두 아들 조와 관에게 경기도의 마전을 주고 귀의군에 봉하여 왕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태조 1년(1392년) 개경에서 고려태조의 위패와 동상을 마전으로 옮긴 후 2대 혜종, 6대 성종, 8대 현종, 11대 문종, 24대 원종, 25대 충렬왕, 31대 공민왕의 위패를 함께 모시게 함으로써 고려조 8대왕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러나 전왕조에 대한 예우를 중시했던 태조 이성계가 죽자 전조에 대한 신하들의 예우는 점전 더 소흘해져 갔다. 심지어 세종 대에 이르러 조선의 종묘에는 오실(五室)을 제사하는데 전조의 사당에는 팔위(八位)를 제사하는 것은 예에 합당하지 안다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4왕만을 모시게 하고 봄, 가을에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452년 문종 대에 이르러 허물어가는 사당을 고쳐 짓고 고려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인을 함께 사당 내에 배향하도록 하니 비로서 역대시조제의 하나인 숭의전이라 불리게 되었다. (안내문, 연천군청, 2022년)

정전 옆에 있는 이안청(移安廳)은 정전 건물을 수리할 때 위패를 임시로 모시는 공간이다.

<위패를 임시로 모시는 공간인 이안청>

배신청(陪臣廳)은 고려조의 충신 16명(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공신 중에는 고려 종묘에 개별 국왕의 배향공신으로 모셔졌던 인물도 있지만 일부는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여 국난극복에 큰 역할을 했던 점을 인정받아 배신청에 모셔진 인물도 있다.  후손들은 조선시대에도 대부분 크게 번창하여, 종묘 공신당과 마찬가지로 배신청의 존재가 후손들에게 크게 중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배신청>

배신청에 모셔진 인물 중 복지겸, 홍유,신숭겸, 배현경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 큰 역할을 했던 개국공신이다. 서희/강감찬/윤관/김취려/조충은 거란을 비롯한 북방민족의 침입을 물리친 인물이며   안우, 이방실,김득배는 공민왕 때 홍건적과 싸움에서 공을 세웠다. 고려말의 충신 정몽주, 그리고 김부식/김방경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복지겸, 홍유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

<위패>

숭의전 서쪽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과 앙암재(仰巖齋)가 있다. 앙암재는 재실 건물로 향, 축문, 폐백, 제복 등을 보관하고 제례 전반에 대한 준비를 하는 곳이다.

<앙암재>

건물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보통 양반 집안의 재실에 비해서도 그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앙암재>

고려 종묘의 제사를 숭의전으로 옮겨오면서 종묘에 모셔졌던 태조 왕건의 동상도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후 세종 때 동상과 진영(초상화)를 위패로 대신하게 되면서 동상은 개경의 현능 옆에 매장되었다. 최근 북한에서는 현틍 정비공사 과정에 태조 왕건 동상이 발견되었다.

<앙암재에서 볼 수 있는 태조 왕건 동상과 현릉 사진>

숭의전에 모셔졌던 태조 왕건의 동상
왕건의 동상은 본래 고려의 도읍인 개경에 있었으나 조선이 개국하고 개경의 고려 종묘를 헐고 연천의 마전 앙암사에서 전조의 제사를 모시게 되면서 이곳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 대에 이르러 주자가례에 입각한 제례법의 개혁으로 동상과 진영(초상화)를 목주(위패)로 대신하게 되자 잠시 충청도 문의현으로 옮겨 보관하였다가 세종 11년 현능 곁에 매장하였다. 최근 고려 태조 왕건의 능인 현능 정비 공사때 발견되었으나 처음에는 북한 학자들이 금동불상으로 잘못 판단하여 개성박물관에 보관해 오다 1997년 개성박물관을 방문한 서울대 노명호 교수가 왕건의 동상임을 알아내어 현재는 평양의 중앙역사박물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아내문, 연천군청, 2022년)

 

전사청은 제례 때 사용할 제수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곳이다. 숭의전은 종묘와 마찬가지로 생식제례를 올리기때문에 전사청에는 굴뚝이 없다.

<전사청>

연천 숭의전, 사적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전 왕조인 고려의 태조 왕건을 비롯하여 나라를 부흥시킨 4명의 왕들과 고려 충신 16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 사당이다. 조선 초기 처음 사당이 건립되어, 1451년(문종1)에 숭의전이라 이름 지어졌으며 이후로 숭의전의 관리와 절례도 고려왕조의 후손에게 맡겨졌다. 숭의전의 설치 배경에는 조선이 유교국가로서 역대 시제의 의례체계를 정비한 과정과 더불어 고려 왕족 및 고려 유민 등에 대한 회유차원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이해된다. 숭의전 건립 이래 수차례에 걸쳐 중수와 보수가 이우어져 왔으나, 한국전쟁으로 전각이 모두 소실되었다. 숭의전의 복원은 1972년부터 1986년 까지 수번에 걸쳐 이루어져 오늘에 이루고 있다. 현재까지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숭의전 대제가 이어지고 있다. 숭의전은 고려시대 옛 왕조의 영광과 고려왕조를 사모한 충절이 깃들인 곳이다. (안내문, 연천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연천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화재청,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