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광주부 관아, 남한산성내 설치된 행궁과 관청들

경기도 광주는 고려 성종때 전국에 설치한 12개 행정구역 중 하나인 광주목이 설치된 지역으로 그 범위는 현재의 광주시,성남시, 서울의 강남지역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한성 백제의 수도가 있었던 지역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이성산성을 중심으로 한강유역의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했던 시기에도 광주호족은 전국의 유력 호족 가운데에서도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지역이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광주목은 인조대에 광주부로, 숙종대에는 광주유수로 승격되었다. 원래 광주의 중심지역은 현재 하남시 춘궁동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병자호란 이후에 관아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는 통일신라시대 산성인 이성산성과 고려초기 절터이 춘궁동사지가 있으며, 조선시대 공립교육기관이었던 향교가 남아 있다.

<남한산성 모형>

남한산성 행궁, 국왕의 임시 거처이자 광주유수부 관아

남한산성에 있는 옛 광주부 관아 건물이자 국왕이 임시로 머물수 있는 행궁이 설치된 사적 480호로 지정된 남한산성 행궁이다. 이 행궁은 비상시 국왕이 임시 거처로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 역할을 하는 좌전과 우실을 두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행궁은 일제강점기 이후 없어졌다가 최근에 옛 기록을 참조하여 복원하였다. 행궁은 국왕의 거처로 정전과 편전에 해당하는 하궐과 국왕이 머무는 내전에 해당하는 상궐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편에 광주부 관아 건물인 좌승당과 광주유수의 숙소라 할 수 있는 일장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국왕을 수행한 인원들이 머물 수 있는 많은 행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남한산성 행궁>

행궁(行宮)은 국왕이 궁궐을 떠나 전국 각지를 순행할 때 임시로 머무는 거처를 말하며 행재소(行在所)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국왕은 궁궐 밖에 머무는 경우는 지방의 민정을 살피기 위해 순행하는 경우와 전란을 피해 머무는 경우, 능행이나 신변치료를 위히 명승지를 찾는 경우 등이 있었다. 조선왕조 5백년 동안 국왕이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물렀던 곳은 많았겠지만, 행궁으로 규모를 갖추었던 곳으로는 세종이 치료를 위치 찾았던 온양 행궁,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의 이유로 설치했던 강화와 남산산성의 행궁, 정조가 능행과 정치적인 이유로 세웠던 화성행궁이 잘 알려져 있다.

<남한산성 행궁(오른쪽)>

문루인 한남루를 들어서면 행궁의 출입문이라 할 수 있는 외삼문과 주위에 행각들을 볼 수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비상시 국왕이 피신할 것을 전제로 지은 행궁이기때문에 많은 수행인원이 머물 수 있도록 행각에 많은 방을 두고 있다.

<중문 안쪽 마당>

중문을 들어서면 넓지 않은 마당이 있고, 양쪽에 실무관원들이 머물 수 있는 행각이 마련되어 있다. 중문을 지나면 광주유수가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인 하궐로 들어가게 된다.

<중문 양쪽에 마련된 행각>

비상시 국왕을 수행하는 많은 인원이 머물 수 있도록 많은 방을 두고 있다.

<외행전>

남한산성 행궁의 중심건물인 하궐 외행전 건물이다. 앞면 7칸, 옆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건물이다. 다른 행궁의 예로 볼 때 평상시에는 광주부 유수의 집무공간인 동헌의 역할을 하며, 국왕이 행궁에 머물때에는 국왕이 집무를 보는 정전과 편전의 기능을 하는 공간이다.

<외행전 마당>

다른 관아 동헌과는 달리 중문에서 외행전까지 국왕이 지나가는 삼도가 깔려 있다.

<마당 한쪽편 창고 건물>

<창고 윗쪽 행각>

평상시에는 광주유수부 관리들의 집무공간으로, 비상시에는 국왕을 호위하는 관리들이 머문는 공간으로 보인다.

<침전 역할을 하는 내행전>

앞면 7칸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2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일반적인 관아에는 없는 행궁에서만 볼 수 있는 건물이다.

<대청마루>

대청마루로 된 가운데 3칸은 국왕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거나 집무를 볼 수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어좌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일월오봉도 병풍이 놓여 있다.

<상궐 내행전 왼쪽 공간>

<내행전 오른편 공간>

내행전 양쪽으로 국왕을 수행하는 인원이 머무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수행인원들이 머무는 공간이 있다.

<좌승당>

내행전 서쪽편 담장 너머로는 광주부유수의 집무공간이라고 할 수 있는 좌승당이 있다. 건물은 앞면 6칸, 옆면3칸으로 큰 규모의 건물이다. 광주유수는 동헌인 외행전 대신 이 건물을 일상적인 업무공간으로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좌승당 아래 공간>

<일장각>

좌승당 아래쪽으로는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건물인 일장각이 있다. 일반적인 관아 건물의 성격으로 볼 때 광주유수가 머무는 숙소인 내아에 해당되는 건물로 보인다. 일장각은 앞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살림집으로는 그 규모가 작은 편이다. 광주유수는 정2품의 고위 관직으로 나이가 많은 편이어서 단심 부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내아의 규모 또한 작은 편이다. 마찬가지로 각도 감영 관아의 내아 또한 건물규모가 작은편이다.

<일장각 대청마루>

광주유수가 머물던 공간임을 보여주는 가구배치를 하고 있다. 광주유수는 정2품의 상당히 직위가 높은 인물로 대체로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머물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온돌방>

<재덕당 뒷편 언덕에 세워진 정자>

국왕을 위한 시설이라기보다는 광주유수가 손님을 접견하기 위해 세운 작은 정자이다.

<좌전과 우실>

행궁 바깥쪽에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과 우실이 있다.

남한산성행궁은 산성도시 안에서 가장 중심의 높은 지대에 자리 잡았는데, 동.서로에서 직접 바라볼 수 없도록 낮은 언덕으로 가려진 곳에 위치했다.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높낮이 차이를 둔 두 영역인 상궐과 하궐로 구분되고, 뒤에 좌전(종묘)과 우실(사직단)을 설치했다. 이는 전국의 행궁 중에서 유일한 사례로 남한산서의 국가와 왕실의 보장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행궁 뒤 언덕에는 숙동대 재덕당이 세워졌고, 하궐 앞에는 정조 때 한남루라는 외삼문의 누문이 세워졌다. 남한산성 행궁 안에는 광주유수의 집무처가 마련되어 있었다. 따라서 남한산성행궁은 국왕의 임시 거처이기도 하면서 광주부의 행정이 이루어진 곳이기도 하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어 숙종대와 영.정조대에 남쪽 성벽 부근을 비롯하여 방어상 취약했던 지점에 옹성을 쌓는 등 많은 보완이 있었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한강 동남쪽 지역을 관장하던 광주목 관아를 옮기고 행궁을 건설하는 등 행정적으로도 보완이 있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종묘와 사직을 갖춘 유일한 행궁으로 비상시 국왕이 거처할 수 있도록 대비를 하였다. 남한산성을 관장하던 광주목사는 원래부터 정3품의 높은 관직이었지만 병자호란 이후에는 광주부로 승격하여 종2품의 부윤 또는 정2품의 유수가 수장으로 있었으며,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조직인 수어청 수장인 수어사도 겸하게 되었다. 평사시 남한산성에는 약 천명 정도의 군사가 상주하였으며, 주민은 4천명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산성을 축조하고 방어하기 위해 동원한 승병들을 위해 7개의 사찰을 산성내에 두었다고 한다.


<1899년에 편찬된 ‘광주부읍지’에 수록된 광주부의 지도>

1872년에 광주부에서 제작한 ‘광주전도’와 내용이 동일하고 채색부분만 다르다. 산과 하천의 표현이 선명하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광주부
조선시대 광주부의 영역은 경기도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 의왕시, 군포시 일대와 화성군 매송면 일부지역, 안산시 일부지역, 서울 송파고, 강동구 일부지역, 남양주시 와부읍 일부지역에 걸쳐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광주부 지도는 북쪽이 아니라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이는 남한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인 행궁을 중심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광주는 수운과 육로가 주요한 역할을 하는 지역이었으므로 지도에 물길과 도로망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광주의 중앙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광주지역의 행정과 군사를 담당하는 중심지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산성도시를 세우다.
남한산성행궁(사적 480호)은 행궁 중 좌전(종묘)과 우실(사직단)을 갖춘 유일한 곳이다. 이 행궁은 국왕의 임시 거처일 뿐만 아니라 광주의 행정업무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몇 차례 변화가 있었지만 이들 관리들은 대개 군사업무도 겸임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남한산성이 군사방어체계에서 주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산성 내에는 산성 축성과 관리에 동원한 승려들을 위해 창건된 7개의 사찰이 있었으며,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남한산성에는 4천 명의 주민이 거주했다고 한다. 따라서 자연히 다양한 문화와 이야기가 생겨났는데, 지금까지 도당굿과 숭렬전 제례, 현절사 제향의 무형문화유산과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산성 안에 주민이 거주하면서 생업을 꾸리며 상업과 시장이 형성되어 있던 남한산성은 하나의 산성도시였다고 할 수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도, ‘고지도첩’, 17세기 후반.>

이 그림은 남한산성 주요시설물을 간략하면서도 상징적으로 그려놓고 있는데, 지금 남아 있는 남한산성 유적들을 비교하면서 찾아보기 좋은 그림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의 성곽과 중요 건축물, 도로망을 간략하면서도 상징적으로 그렸다. 성곽의 경우 옹성과 대문 등을 자세하게 표현하였다. 산성 내부구조의 경우 최고의 권위 건축물이 행궁을 강조했으며, 중요 관청과 창고.사찰 등 핵심정보를 수록하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 남문 앞에 모아 놓은 광주부를 거쳐간 관리들의 공덕비>

광주목사, 광주부윤, 광주유수는 정2품에서 정3품에 이르는 장.차관급에 해당하는 높은 관직으로 당시 한양에서 고관을 지내던 인물들이 잠시 외관직을 맡았던 곳이기도 하다.

<광주목사와 광주유수 등을 지낸 임연, 조태채, 조관빈의 초상>

남한산성을 거쳐 간 관리들
1559년부터 1899년까지 광주목사.광주부윤.광주유수를 역임한 관리는 379명이다. 이 중 광주부의 읍치가 남한산성 내에 옮겨진 인조 2년부터가 남한산성과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는 관리들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감안하면 남한산성을 거친 조선시대 관리는 총 266명이 된다. 조선시대 광주지역은 여러 차례 읍격의 오름내림에 따라 파견하는 관리의 품계에 차이가 있었다. 목사에서 부윤, 유수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부윤으로 바뀌는 변화가 계속되었다. 남한산성 관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직책이 수어사이다. 초기의 수어청은 한성부 북부 진장방에 본청을 두어 수어사를 한성부윤이 겸직하도록 했다. 그리고 현장인 남한산성은 광주부윤을 부사로 임명해 운영하다가 이후 운영의 효율화를 위해 1795년(정조19)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부윤을 강주유수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게 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중정남한지>

헌종 10년(1844)에 광주유수로 부임한 홍경모가 정조 3년(1779)에 남한수어사 서명응이 하명을 받고 편찬한 ‘남한지’에 광주부의 구지를 참작하고 관계기사를 채록하여 완성한 읍지이다.

연무관(演武館),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곳

남한산성에는 별도의 군사조직인 수어청(守禦廳)이 정조대에 남한산성으로 옮겨지면서 광주유수가 수어사(守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남한산성내 동쪽편에 위치한 행궁은 광주부 수장으로서 행정의 중심지였다면 산성내 중앙도로 북쪽편에 위치한 연무관과 주위 건물들은 군사조직인 수어청 산하 기관들이 들어서 있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내에는 평상시 약 천명 정도의 군사가 상주하였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승병들을 위한 사찰이 7개, 산성내 마을에는 약 1천호 4천명의 주민이 상주하였다.

<남한산성 내 관아건물 중 현재까지 그 원형이 남아 있는 연무관>

원래 연무당이라 부르던 것을 숙종대 연병관, 정조대에는 수어영이라 개칭했으나 통칭 연무관이라 부른다.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높은 기단 위에 건물이 세워져 있어서 웅장해 보인다. 수원 화성 연무대의 경우는 사방이 뚫려 있는 정자와 같은 형식을 하고 있으나, 남한산성은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내부는 열린 공간이지만, 삼면에 판문을 달아서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연무관 현판>

<기둥에 걸려 있는 주련>

<연무관 내부>

연무관 내부는 칸막이를 하고 온돌을 설치한 일반적인 관아 건물인 동헌과는 달리 내부가 넓은 마루로 되어 있다. 지붕을 받치는 들보에는 용이 그려져 있다. 연무관은 군사조직인 수어청 수사가 병사들의 훈련을 지휘하는 공간으로 수어사를 겸직했던 광주유수 근무처가 행궁내에 있었기때문에 이 곳에서 관리들이 상근했던 곳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수원화성의 연무대와 마찬가지로 군사훈련 지휘소라고 할 수 있다.

<뒷편>

남한산성 연무관은 수원화성 연무대와 달리 바람을 막기 위해 양쪽에 판문을 달아 놓고 있다.

연무관은 군사들의 훈련을 위하여 건립한 곳으로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연무당이라 부르던 것을 숙종 때, 수어사 김좌명으로 하여금 다시 짓게 하고 연병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정조 때에는 수어영이라 개칭하였으나 그 뒤에도 통칭 연병관 또는 연무관이라 부르고 있다. 연무관 규모는 약 330m²로 규모가 크고 육중하며 높은 기단 위에 자리잡고 있어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건물내부 가운데 있는 대들보에는 전,후면에 용을 그렸고 측면쪽 대들보에는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 특이하다. <출처:광주시청>

<연무관 들어오는 길>

남한산성과 그 역사를 같이한 오래된 고목을 볼 수 있다.

<연무관 아래 산성초등학교>

연무관 동쪽편에는 산성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보통 옛 관아가 있던 곳에서는 객사가 초등학교로 변한 경우가 많은데 원래 이 곳에는 수어청 소속 관아 건물들이 들어서 있던 곳이다. 남한산성 옛 지도에는 이곳을 영고(營庫)라 표시되어 있으며, 여러 건물들이 그려져 있는데, 아마도 무기고를 비롯하여 군인들이 근무하던 장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연무관 올라가는 길>

수어청의 설치와 산성수비
조선후기의 군사제도는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 수어청으로 구성된 5군영 체제였는데 이 중 수어청은 남한산성 일대의 방어를 위해 설치된 중앙군영이었다. 처음에는 경기병사 겸 총융사가 관활했으나 병자호란 이후부터는 군영으로 독립해 수어사를 두었다. 초기의 수어청은 한성부 북부 진장방에 본청을 두고 수어사를 한성부윤이 겸직하도록 했다. 이후 운영의 효율화를 위해 정조 19년(1795)에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부윤을 광주유수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하게 함으로써 군사지휘소 역할을 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연무관 상량문>

영조 39년(1763)에 연무관을 중수하면서 쓴 것이다.

<연무관 도리>

들보에 직각으로 기둥과 기둥 사이에 둘러 얹혀서 연직하중 또는 수평하중을 받는 가로재이다. 숙종 28년(1702) 3월 30일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등단록>

조선후기 각 군영대장의 의망,수점단자를 모은 책으로 편자는 미상이다. 이 등단록은 총 3책의 등단록 중 제2책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장용대장, 총위대장, 수어사 등이 실려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수어영교리노졸수효기>

남한산성을 방어하던 수어청 광주부 소속의 군대 편성과 병력을 볼 수 있는 문서이다. 장교로부터 잡색군까지 직능별 병종과 인원이 앞뒤로 적혀 있고, 15겹으로 접게 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고아주부 소속 병력은 총 736명으로 장교 172명, 서리청직 121명, 군졸 238명, 잡색군 142명, 승군 63명으로 편성되어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이위정기 탁본첩, 1816년>

이위정은 순조 중엽(1815)에 남한산성에 세워졌던 사정이고, 기문을 쓴 사람은 김정희이다. 내용은 이렇다 “내가 여기에서 활쏘기를 하는 것은 호시를 일삼아 길이 힘쓰고자 함이 아니라 성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인의와 충용이 길이 날로 일어났으면 하는 큰 바람에서이니 어찌 천하가 위복하지 않겠는가” <출처:경기도박물관>

<이위정기 편액, 1816년>

침괘정(枕戈亭), 무기제작소로 알려진 관아 건물

광주부가 있었던 광주부에는 행궁을 비롯하여 많은 관청들과 성벽을 관리하던 사찰과 큰 마을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없지고 관아건물로는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연무당과 연못인 지수당, 무기제작소로 알려져 있지만 관아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침괘정 정도만이 남아 있다. 조선 영조대에 지어진 침괘정은 문헌상 기록으로 무기제작소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건물의 형태는 온돌방과 마루바, 회랑 역할을 하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는 집무실로 사용했던 관아 건물로 보인다. 아마도 부근에 무기를 제작하는 공방과 창고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한산성 행궁 앞 광장에는 산성내에 시간을 알려주는 종각이 설치되어 있는데, 원래 이곳에는 국보 280호로 지정된 천흥사 종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침괘정>

<오른쪽에서 본 모습>

남한산성내 광주부 관아 역항를 했던 남한산성 행궁 앞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무기제작소로 알려져 있으나, 상당히 큰 규모의 관아 건물로 사무실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면 7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일반 주택과는 달리 앞과 뒤가 똑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오른쪽 5칸은 회랑형식으로 툇마루를 앞뒤로 둘렀다.

침괘정
침괘정은 무기제작소라 알려져 왔으나 온돌과 마루방, 회랑처럼 된 툇마루 등 건물 구조로 보아 집무실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최초의 건립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주변에 있던 무기창고를 명나라 사신 정룡이 ‘총융무고’라 이름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27년(1751) 광주유수 이기진이 고쳐 짓고 ‘枕戈亭’이라고 이름 지었는데 ‘침과정’을 ‘침괘정’이라 부르는 까닭은 명확하지 않다. 무기제작소와 무기창고는 침괘정 부근에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광주시청>

<침괘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산성 광장>

<남한산성 행궁과 함께 복원된 종각>


<천흥사종(국보)>

이곳에는 천흥사 종(국보)이 걸려있었는데 지금은 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고, 복제품을 종각에 걸어 놓고 있다. 천흥사종이라고 불리는 이종은 천안 성거산 천흥사에 있던 범종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남한산성에서 시간을 알리는 데 사용된 종이다. 서울의 보신각 종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행궁 앞 광장에서 남한산성 동문으로 연결되는 큰 길>

<연무관 입구>

오일장이 열리던 장터였다한다. 조선말까지 성내에 읍지소가 있었고 민가가 일천호나 되는 큰 마을이었다. 주민들간에는 지금도 이곳을 장터라 부른다.

삶 그리고 문화
조선시대 남한산성 내에는 큰 길가 양 옆으로 초가로 지은 상점들이 연이어 들어섰고, 일반 민가들은 행궁보다 낮은 저지대인 비교적 평지에 밀집되어 도시적 마을을 형성했다. 주거지는 중앙의 동서로를 기준으로 남동과 북동으로 나뉘어졌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여지도서’의 통계를 보면 산성내 남동에 614호로 남자 1,119명 여자 1,055명, 북동에 462호에 남자 1,009명 여자 853명이 살아서 대략 6:4의 비율로, 개천이 흘러 생활여건이 상대적으로 나은 남동의 규모가 더 컸다고 보인다. 남한산성에서는 다양한 문화가 꽃피웠다. 군역동원을 위해 세운 사찰을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형성되었으며,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고 무속신앙이 성행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에는 숭렬전 제례와 도당굿 등 무형문화와 각종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지수당(池水堂)과 비상시 대비 물을 저장했던 연못

산성내에는 비상시에 대비하여 3개의 큰 연못이 파고 물을 저장해 두고 있다. 원래의 연못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매몰되거나 훼손되어 현재는 2의 연못이 남아 있다. 연못에는 1672년에 부윤 이세화가 세운 정자인 지수당이 복원되어 있으며 1804년 유수 김재찬이 지은 관어정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남한산성 내에는 조선시대 차관급에 해당하는 군사조직인 수어사를 겸했던 정2품의 광주유수가 근무했던 행궁과 관아가 있었고, 연못의 정자는 관아에서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한산성내 연못과 정자는 조경과 연회를 위한 공간이기도 했지만, 군사적인 목적의 저수지 기능이 중요시 되었던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 3개의 연못 중 가운데 연못에 세워진 작은 정자인 지수당>

<뒤에서 본 모습>

이 정자는 1672년에 처음 세워졌다가 1925년 홍수로 매몰된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지수당은 앞면 3칸, 옆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정자이다. 광주부 유수가 차관급에 해당하는 종2품의 높은 관직에 있었지만, 군사방어상 중요했던 남한산성의 입지를 말해주듯이 그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다.

<지수당 앞 연못>

풍류를 즐기는 정원의 성격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산성내 물을 저장하는 공간이라는 기능적 측면이 강한 연못이라서 장식성을 배제하고 있다.

<서쪽편 연못>

산성내 물을 저장하는 중요한 연못으로 그 규모가 큰 편이다. 연못한 가운데에는 작은 섬을 만들어 놓고 있다. 방형(사각형)연못에 원형의 작은 섬을 두고 있는 도교사상이 반영된 연못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연못 동쪽편에는 1804년 유수 김재찬이 지은 관어정(觀魚亭)이 있었다. 3개의 연못 중에서 서편 소도에 있는 정자로 지수당과 마주하고 있으며 소선을 두어 왕래하였다. 제갈량이 못에 임하여 방책을 경정하며, 적을 헤아렸다는 데서 그 이름을 취하였다고 한다.

지수당
지수당은 현종 13년(1672)에 부윤 이세화가 건립한 정자로 건립 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정자의 동쪽에는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제3연못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논으로 바뀌어 있다. 정자의 남쪽에는 서에서 동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정자 옆의 연못은 ‘ㄷ’자형으로 파서 연못이 정자를 둘러싼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으나 을축년 대홍수(1925) 때 매몰된 것을 근래에 고증을 통하여 복원한 것이다. <출처:광주시청>

<연못 동쪽으로 흘러가는 개천>

산성 동쪽편 좌익문을 통해 광주지역으로 흘러내려 간다.

<망월사>

남한산성 축성과 방어를 위해 동원한 승병들을 위해 세운 7개 사찰 중 하나인 망월사.

<남한가람지>

1931년. 남한지를 중심으로 남한산성의 사찰과 승군의 제도를 정리한 책이다.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 위치한 광주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