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 경내에 있는 무량수전(국보)이다. 고려시대에 지어진 건축물로 봉정사 극락전, 수덕사 대웅전과 함께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손꼽힌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건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주심포식 공포를 하고 있다. 부석사의 주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는데, 불상이 동향을 하고 있어, 앞면으로 보이는 부분은 사실상 옆면이다. 앞뒤 양쪽에 출입문을 두고 있는데, 앞면은 가운데 3칸에 문합문을 달고, 양쪽 1칸은 창으로 쓰고 있다. 반면, 뒷면은 가운데 1칸은 판문, 양쪽 1칸씩 살창을 두고, 바깥은 벽면을 하고 있는데 전통적인 고려시대 불전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이라 한다. 이 건물이 가장 극찬을 받는 부분은 가운데가 굵고 아래.위로 조금씩 가늘게 하여 시각적으로 안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효과를 가장 잘 구현한 배흘림 기둥이다. 고려시대에 지은 건축물로 주심포계 공포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단아한 조형미를 주고 있다. 팔작지붕을 사용하고 있는 지붕은 처마를 넓게 하여 웅장하면서도 날렵한 느낌을 주고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앞면5칸, 옆면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간결하면서 세련된 조형미를 주고 있는 주심포양식을 쓰고 있다. 주심포양식은 지붕의 하중이 기중에 집중되기 때문에 구조상 단점이 있어 추녀마루 끝에 나무기둥(활주)를 세워 지붕의 하중을 받치고 있다. 지붕도 팔작지붕을 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에 세워진 건물들과는 다른 느낌을 주고 있다. 1916년 해체.수리과정에서 묵서명이 발견되었는데, 1376년(고려 우왕2)에 중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량수전은 통일신라시대에 크게 성행한 아미타여래를 모시는 불전으로 주로 극락전과 비슷한 의미라 할 수 있다. 아미타여래는 서방 극락을 주재한다는 부처로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다는 의미로 ‘무량수불’이라고도 부른다. 현판의 글씨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무를때 쓴 글씨라고 전하며, 전통적인 사찰 등에서 볼 수 있는 형태와는 다르다. 원나라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살창과 판문으로 되어 있는 안쪽 출입문은과 창은 고려시대 일반적인 건축양식이라 할 수 있다. 바깥쪽은 가운데 3칸은 분합문이 달려 있고, 양쪽은 1칸씩은 창문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중수하는 과정에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외관상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배흘림기둥을 쓰고 있으며, 주심포양식이 가장 잘 남아 있다. 배흘림기둥은 중간을 굵게 하고 위.아래를 점차 가늘게 하는 형태로 착시현상으로 안정적인 느낌을 주는 방식으로 파르테논신전을 비롯하여 그리스 신전 등을 비롯하여 세계적으로 많이 쓰는 방식이다. 한국의 전통건축에서도 대부분 배흘림 기둥을 적용하고 있으나, 그 중 배흘림 기둥을 가장 잘 적용한 건축물로 부석사 무량수전을 손꼽고 있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건축양식인 주심포양식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주심포방식은 지붕의 하중을 전달하고 장식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얹는 공포를 기중위에만 배치하는 양식으로 고려시대 중국 남송에서 전해졌다. 간결하면서도 절제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지어진 건축물에서 주로 볼 수 있으며, 조선 중기 이후는 하중을 분산시키면서 장식적인 효과가 큰 다포계나 단순한 형태의 익공계 공포를 주로 사용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지붕의 하중를 받치기 위해 추녀마루 아래에 나무기둥(활주)를 세워 놓고 있다. 무수전 뒷편에는 고려시대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살창형식의 출입문이 남아 있다.
무량수전에 모셔진 소조여래좌상(국보45호). 높이 2.78 m 의 대형 소조불상으로 현존하는 소조불상 중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 석가여래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동쪽을 향하고 있어 비로자나여래는 의견도 있으나, 무량수전에 모셔져 있어 아미타여래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국보 45호
이 불상은 진흙으로 만든 소조불상인데,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불상 높이는 278 cm이며,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으로 표현하였다. 일반 사찰과는 달리 법당 중앙의 정면이 아닌 서쪽에 마련된 불단 위에 모셔져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법당이 서방 극락정토의 아마타불을 모신 무량수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 ‘원융국사비’ 비문에 “좌우에 다른 보살을 모시지 않고 아미타불 한 분만 모셨다”라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통일신라시대 불상 조형을 충실히 계승한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온몸에 금빛이 화려하며,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수법을 보이는 걸작이다. (안내문, 영주 부석사, 2017년)
부석사는 삼국시대 의상대사가 676년에 창건한 사찰로 왕명을 받들어 화엄을 가르치는 곳으로 전국의 화엄사찰 중 종찰이었던 곳이다. 창건초기에는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뛰어난 승려들을 배출하고 왕실 등의 후원을 받아 점차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사찰은 고려 공민왕대에 진각국사 원응이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중건하는 하였다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당으로 극락정토의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그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고려 현종7년(1016)에 원융국사가 고쳐지었으며, 고려 공민왕 7년(1358)에 외적에 의해 불에 타, 고려 우왕 2년(1376) 원흥국사가 다시 지었다. 조선 광해군3년(1611)에는 폭풍우로 건물 일부가 파손되자 이를 복구하였으며, 이후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며, 기둥은 중간이 굵고 밑이나 위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지는 배흘림기둥이다.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한 구조물인 공포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의 대표적 건물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와 형식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장식적인 요소가 적은 간결한 형태이나 건물의 규모나 완성도 면에 있어서 장엄하고 깊이 있는 법당으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안내문, 영주 부석사, 2017년)
<출처>
- 안내문, 영주 부석사, 2017년
-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