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문경시 산북면 사불산(四佛算)에 있는 사찰인 대승사(大乘寺)이다. 삼국시대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진 문경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삼국유사> 따르면 진평왕 때 하늘에서 사면에 불상이 새겨진 큰 돌이 떨어져 그곳에 절을 세우고 ‘대승사(大乘寺)’라 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전각들이 소실된 것을 중건하였다. 그후에도 여러차례 화재로 전각들이 소실되었으며 현재은 건물들은 1966년에 중건한 것이다. 소장 유물로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국보)>과 관계문서(보물)>,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사면석불 등이 있다.
<문경 대승사 전경>
대승사는 사면석불이 있는 사불산 정상 바로 아래 해발 500m 이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공간은 비교적 넓은 편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죽령 동쪽 100리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서쪽 100리 정도 떨어져 있다. 백두대간의 주요 교통로였던 죽령과 조령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며 삼국시대 백제와 영토분쟁이 많았던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이 신라의 영토임을 알리고 영토를 수호하고자 하는 호국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문경 대승사 사면석불>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四佛山 掘佛山 萬佛山)
죽령(竹嶺) 동쪽 1백리 가량 떨어진 마을에 높은 산이 있는데, 진평왕(眞平王) 46년 갑신(甲申)에 홀연히 사면이 한 발이나 되는 큰 돌에 사방여래(四方如來)를 조각하고 모두 붉은 비단으로 감싼 것이 하늘로부터 그 산 정상에 떨어졌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그곳에] 가서 쳐다보고 예경한 후 드디어 그 바위 곁에 절을 창건하고 이름을 대승사(大乘寺)라 하였다. ≪법화경(法華經)을 외우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 비구를 청하여 절을 맡게 하여 깨끗하게 하고 돌을 공양하며 향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그 산을 역덕산(亦德山)이라고 하며, 혹은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한다. 비구가 죽자 장사지냈더니 무덤위에서 연(蓮)이 났었다. (출처: 삼국유사 권 제3 제4 탑상(塔像第四)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대승사는 여러차례 화재로 소실되면서 중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들은 대부분 1966년 새로 지어졌다고 한다. 요사채로 솟을대문을 하고 있는 백련당과 강당겸 누각인 만세루, 주불전인 대웅전이 경사진 지형에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동쪽에는 극락전, 명부전, 응진전 등 불전들이, 서쪽에는 요사채인 청련당이 배치되어 있다. 사불산 정산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지만 공간은 상당히 넓은편으로 예로부터 상당히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승사 가람배치>
사찰 출입문으로 금강문이나 천왕문 등을 두지 않고 조선후기 한옥형태를 하고 있는 요사채 가운데 있는 솟을대문을 사찰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백련당 솟을대문>
강당으로 사용되는 2층 누각건물인 만세루를 출입문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세루>
<대웅전에서 본 만세루>
주불전인 대웅전에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국보)이 모셔져 있다. 원래 부석사에 있던 것을 조선후기 고종 때 (1869년) 대승사로 옮겨졌다. 당시 이와관련하여 소송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관련 소송문서 11점(보물)이 남아 있다.
<대웅전>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국보)>
<관계문서(보물)>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국보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나무판을 조각해서 만든 후불탱화로, 불화와 조각을 절묘하게 접목했다 해서 흔히 ‘목각탱(木刻幀)’이라 부르기도 한다.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은 대승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데, 판목 10장을 조합하여 아미타여래가 말씀하는 장면과 극락세계에 구품왕생(九品往生)하는 장면을 장엄하게 표현하였다. 이 설법상은 숙종 1년(1675)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크며, 부처와 보살상을 조각한 수법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원래 영주 부석사 금색전에 모셔져 있다가 고종 6년(1869)에 대승사로 옮겨졌다. 이때 발견된 소송 문서 11점이 전하며, 이 중 4점은 보물 제575호(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 관계문서)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문경 대승사, 2022년)
<노주석>은 <불우리>, <화사석>이라고도 하며 야간법회 등의 행사 때에 주위를 밝히는 석등의 일종으로서 국내에서는 봉암사, 김용사 등 몇 곳에 없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문경 대승사 노주석(露柱石)>
경내 동쪽으로는 불전들 주로 배치되어 있다. 주요 불전으로는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전, 석가모니 제자들을 모신 응진전,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 등이 있다. 극락전에 모신 금동아미타여래좌상(보물)은 고려말에 제작된 것으로 고려중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대웅전 동쪽 영역>
<극락전>
<금동아미타여래좌상(보물)>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보물
아미타불은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해 주는 부처이다. 대승사 극락전에 모셔진 문경 대승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은 불상의 머리 부분에서 고려 충렬왕 27년(1301)에 제작된 아미타삼존다라니가 발견됨에 따라 14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양손 엄지와 약지를 구부리고 있고, 손바닥에 우물 정(井)자 모양의 손금이 남아 있다. 이 불상은 고려 후기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개성 지역 불상과 달리 고려 중기 불상의 전통을 잇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시기 유행한 금동 불상 가운데 조형적 완성도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안내문, 문경 대승사, 2022년)
<명부전>
<응진전>
<삼성각>
<조사전>
대웅전 서쪽 영역에는 요사채인 청련당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외에도 대승사에는 대승선원을 비롯하여 많은 요사채들을 두고 있다.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어 예로부터 많은 신도들이 찾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 전통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련당>
<대승선원>
<금동관음보살좌상(보물)>
문경 대승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보물
문경 대승사 금동관음보살좌상은 대승선원에 모셔져 있으며,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15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머리에는 화려한 금속의 관을 썼으며 양쪽 귀에 걸친 머리카락은 여러 가닥으로 흩어져 어깨를 덮었다. 가슴, 배, 무릎에 표현된 구슬 장식이 영덕 장육사 건칠보살좌상(보물)과 비슷하지만 어깨와 등의 번잡한 장식이 옷 속에 감추어진 점이 다르다. 긴 상체의 가운데에 때매듭과 치마상단을 둘러 마치 보살상을 둘로 나눈 것처럼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안내문, 문경 대승사, 2022년)
<백련당>
<아래쪽 요사채들>
사불산 대승사(四佛山 大乘寺)
사불산 대승사는 문헌 기록상 문경에서 가장 먼저 세운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이다 <삼국유산>에 따르면 죽령 동쪽 산꼭대기에 사방 여래불상이 조각된 큰 돌이 나타나 진평왕이 587년에 행차하여 예배하고 바위 옆에 절을 지어 ‘대승사’라 하였으며, 연경(蓮經, 법화경)을 외는 비구를 청하여 주지로 삼고, 산명은 ‘사불산’이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승사 선원에는 “천강사불 지용쌍련(天降四佛 地聳雙蓮)”, 즉 하늘에서 사면석불이 내려오고 땅에서 쌍연꽃이 솟았다는 창건 설화 내용을 담은 현판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건물을 복구하면서 17~18세기에 걸쳐 대승사는 조선시대 산중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러나 철종 13년(1862)에 대승사에 다시 큰 불이 나서 여러 건물이 불탔으나 1966년에 대웅전, 응진전, 대방, 일주문 등을 다시 지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대승사 부속암자로는 나옹혜근의 출가처이자 성철스님이 정진했던 묘적암, 비구니 선원으로 이름난 윤필암 등이 있다. 현재 대승사에는 국보 외에도 보물로 지정된 선방의 금동관음보살좌상, 극락전의 금동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 유물이 있다. 그리고 마애여래좌상, 사면석불, 노주석, 나옹화상 영정 등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외에도 응진전의 오백나한 등 지정문화재 못지 않은 문화 유적이 대승사와 산내 암자 곳곳에 남아 있다. (안내문, 문경 대승사, 2022년)
<출처>
- 안내문, 문경 대승사, 2022년
-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