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 본성] 가야의 토기

가야 토기는 같은 시기 한반도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는 어떤 토기보다 단단하며 형태적으로도 아름답다.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높은 온도의 밀폐가마, 고속 회전 물레 등 발달된 토기 제작기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회청색의 아주 단단한 토기를 만들었다. 가야의 토기는 곡선적인 다리를 가진 굽다리접시, 짧은 목항아리, 다양한 형태의 그릇받침이 특징적인데 연맹체 국가답게 지역별로 다양한 특징을 보여준다. 높은 기술수준과 조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지역별로 다양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가야의 토기>

가야토기 – 다양성
토기는 가야의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가장 귀한 유물입니다. 비슷한 형태의 토기들이 각자의 개성에 맞추어 다양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굽다리접시만 보더라도 바깥으로 벌어진 입을 가진 가락국, 불꽃무늬의 구멍으로 장식한 아라국, 삼각형으로 구멍을 낸 고자국 등 작은 차이지만 제각기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가야토기는 굽다리접시, 짧은 목항아리, 그릇받침 등 여러 형태를 제각기 개성있게 만드는 제작기술의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특히 아라국의 항아리는 흡사 조선시대 달항아리를 연상케 합니다. 크고 둥근 이 토기는 지금 우리의 미감에도 떨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야연맹체 주요 유적지(고분) 분포>

가야의 공존
높다란 언덕 위에 봉긋이 솟은 고분들은 가야의 존재방식인 공존을 잘 보여줍니다. 낙동강과 섬진강 일원, 지리산 너머의 지역을 아우르는 곳에서 가야의 고분들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무덤의 크기와 형태는 제각기 다르고, 토기와 철기 등은 자신들이 가진 고유한 문화에 따라 만들었습니다. 가야 고분군은 가야의 존재방식인 ‘공존’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야 토기의 종류로는 굽다리접시, 항아리, 그릇받침 등이 있다. 신라의 굽다리접시는 굽다리가 직선적이고 창은 사각형이며 상하가 서로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다. 이에 비해 가야의 굽다리접시는 곡선적이며 창의 형태가 다양해 불꽃모양이나 작은 원형도 있다. 이와 더불어 신라나 백제에 비해 다양한 형태와 무늬를 가진 그릇받침은 가야 토기 중 가장 특징적이다

<1. 가야의 뚜껑접시, 2. 가야의 여러토기, 3. 가야의 짧은 목항아리, 5~6세기>

<4. 가라국의 긴 목항아리, 5~6세기>

창녕 지역에 있었던 비화가야(비사벌국)은 초기에는 가야의 특징을 갖춘 토기를 생산했으나 점차 신라 토기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비화가야의 토기는 가야와 신라 토기의 특징들을 같이 보여주고 있다.

<5. 비사벌국토기, 창녕 계성리 1호묘, 4~5세기>

<5,6. 비사벌국토기, 창녕 계성리 1호묘, 4~5세기>

<비사벌국 토기의 특징>

비사벌은 낙동강의 본류를 낀 교통의 요지에 자리한 나라였습니다. 신라의 힘에 눌려 크게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4세기에는 가야를 대표하는 나라 중의 하나였습니다. 비사벌이 언제부터 신라에 예속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지만, 대략 5세기 후반부터는 신라의 영향력이 높아집니다. 비사벌은 처음에 가야의 특징을 갖춘 토기를 생산하다가 점차 신라토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시작했습니다. 굽다리접시는 부드러운 곡선의 다리에 상하 일렬의 창을 배치했습니다. 그 후 직선적인 모양으로 바뀌고, 뚜껑의 꼭지는 단추 모양에서 창을 뚫은 다리 형태로 변합니다. 나머지 토기도 굽다리접시와 마찬가지로 가야와 신라토기의 요소가 공존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소가야(고자국)는 경남 진주, 사천과 고성 반도의 남해안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다. 해로와 육로를 이어주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한 교역으로 발전하였다. 소가야 특유의 토기로는 키가 작고 네모 구멍이 뚫린 굽다리접시와 위가 벌어진 항아리 등이 있다.

<고자국토기(古自國), 5~6세기>

 <고자국토기(古自國), 5~6세기>

<고자국토기(古自國), 5~6세기>

<고자국(소가야) 토기의 특징>

고자국은 남해안의 해상 강국이었습니다. 대체로 4세기 무렵까지는 가락국의 기세에 눌려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5세기 이후에는 가라국 및 아라국과 함께 가야를 대표하는 나라로 성장하였습니다. 고자국은 바닷길에 위치하여 왜와의 교류가 잦았으며, 이에 따라 왜계 토기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고자국도 가야의 다른 나라처럼 독자적인 모양의 토기를 생산하였습니다. 굽다리접시에는 길이가 길고 폭이 좁은 삼각형의 구멍을 뚫었습니다. 바리모양 그릇받침은 마치 깔때기의 주둥이와 비슷하고 입술이 수평으로 크게 벌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신라의 굽다리접시는 굽다리가 직선적이고 투창은 사각형이며 상하가 서로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다. 이에 비해 가야의 굽다리접시는 굽다리가 곡선적이며 투창의 형태가 다양해 불꽃모양이나 작은 원형도 있다. 사각형의 투창은 상하 일렬로 뚫어 놓은 것이 대부분이다.

<1,2. 신라지역에서 나온 토기, 6세기, 동해 추암동고분, 3. 신라토기, 비교자료, 5~6세기,4. 가야의 굽다리접시, 4~5세기>

가야 고분들에서는 많은 유물들을 묻혀 있었는데 그중 상형토기는  철제무기류와 함께 가야를 상징하는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인물이나 기물 등을 본떠서 만든 토기인 상용토기는 가야와 신라지역에서만 주로 출토되는 유물로 수레.배.집 등의 토기에서는 당시 가야인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해주며, 각종 동물모양의 토우에서는 그들의 사후관이나 정신세계를 추론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지금도 바퀴모양토기를 가야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각배라고도 하는 뿔모양의 잔에서는 중앙아시아와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등 다양한 문화교류의 흔적을 남겨놓고 있다. 진시황 무덤의 병마용, 당삼채를 비롯하여 중국 고대 무덤에서 출토되는 것들과 같은 성격을 갖는 것으로 한,중,일 해상무역로를 통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5. 가야의 본뜬 토기, 4~5세기>

<새모양 토기>

<새모양 토기>

각배로 말이 뿔모양 잔을 지고 있는 모이다. 낙동강 유역의 가야와 신라 지역에서 발견되며 남성적이고 신성한 말에 대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이런 각배는 다양한 형태의 유물로 남아 있다. 중앙아시아 민족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제사 의식 등에 사용한 그릇이다.


<각배>

<새모양 토기>

둥글고 큰 수레바퀴를 뿔잔의 양 옆에 붙여 만든 것으로 무덤에서 출토된다. 영혼을 나르는 의미로써 제사 등의 의례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바퀴모양 토기>

<바퀴모양 토기>

사후세계에 불을 밝히는 등잔으로 보이는 토기이다. 등잔은 무덤을 구성하는 주요 껴묻거리 중 하나이다.

<등잔>

<투호처럼 생긴 토기>

사슴이 붙은 구멍단지로 제사나 각종 행사에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인들에게 사슴은 신령스러운 동물이었다. 사슴은 특히 시베리아 지역에서 신성시 여겨지는 동물로 샤머니즘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사슴모양이 있는 토기>

<등잔>

이 항아리는 조선시대 달항아리를 연상케 한다. 크고 둥근 이 토기는 지금 우리의 미감에도 떨어지지 않는 아름다운 형태를 가지고 있다.

<6. 가야의 달항아리, 함안 말이산 4호묘>

아라가야(아라국)은 지금의 경남 함안 지역에 있었다.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자리잡은 아라가야는 편리한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발전하였다. 아라가야의 대표적인 토기는 굽다리접시의 상하 폭이 같은 통모양의 것과 불꽃모양의 구멍이 뚫린 굽다리접시가 있다.

<아라국(阿羅國) 토기, 4~5세기>

<아라국(阿羅國) 토기, 4~5세기>

<아라국(아라가야) 토기의 특징>

아라국은 4세기 이전부터 강국이었던 만큼 독자적으로 토기를 생산했습니다. 아라국은 가락국의 뒤를 이어 높은 온도에서 토기를 구워냈습니다. 4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아라국은 돗자리무늬를 장식한 둥근 항아리를 생산하여 여러 지역에 유통시켰습니다. 아라국에서는 특히 불꽃무늬 구멍을 굽에 뚫은 굽다리접시가 유명한데, 아라국의 상징이라 할 수있을 정도로 독보적인 토기입니다. 아라국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독보적인 토기입니다. 또 바리모양 그릇받침은 다리의 폭이 좁고 길며, 접시 부분은 마치 공을 반으로 쪼갠 듯 깊고 둥그스름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대가야(가라국)는 경북 고령 지역이 중심지였다. 철의 생산지인 합천 지역을 차지하면서 성장의 기반을 마련하고 점차 주변의 전북 남원.장수, 경남 하동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후기 가야연맹을 주도하였다. 대가야의 특징적인 토기는 얕은 접시에 작은 네모 구멍이 뚫린 굽다리접시와 잘록한 목항아리, 몸통에 세로로 띠를 붙여 장식한 원통모양 그릇받침 등이 있다.

<가라국(加羅國) 토기, 4~5세기>

<가라국(加羅國) 토기, 4~5세기>

<가라국(加羅國) 토기, 4~5세기>

<가라국(대가야) 토기의 특징>

가라국은 4세기 후엽 무렵부터 성장하기 시작하여 5세기 후반에 전성기를 누린, 가야의 신흥 강국이었습니다. 그 전성기에는 낙동강에서 섬진강에 이르는 가야의 여러 나라들을 규함하여 크게 세력을 떨쳤습니다. 가라국의 토기가 독창적인 모양으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라 할 수 있으며 실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유통되었습니다. 가라국의 토기는 통모양의 그릇받침과 굽다리접시에서 가장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통모양 그릇받침은 뱀 또는 용의 형상을 띠 모양으로 길게 붙였고, 굽다리접시는 그릇의 두께가 두껍고 접시의 깊이가 낮아 납작해 보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금관가야(가락국)는 경남 김해와 부산지역에 있었다. 금관가야는 초기부터 철을 매개로 대외교역을 장악하면서 성장하여 전기 가야연맹의 중심체가 되었다. 금관가야의 토기는 물결무늬가 새겨진 화로모양의 그릇받침과 입술이 바깥으로 크게 꺾인 굽다리 접시가 주를 이룬다.

<가락국(駕洛國) 토기, 4~5세기>

<가락국(駕洛國) 토기, 4~5세기>

<가락국(駕洛國) 토기, 4~5세기>

<가락국(금관가야) 토기의 특징>

가락국은 3세기 후엽,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먼저 1200℃ 정도의 불에서 단단하게 구운 토기를 생산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짧은 목을 가진 항아리에서 시작하여 점차 굽다리접시와 손잡이를 붙인 화로모양토기 등, 토기의 종류가 늘어났습니다. 화로모양토기는 몸체에 띠모양의 손잡이를 붙였습니다. 이 두 토기는 가락국 토기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가락국은 가야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토기의 생산 기술이 가장 앞서 있었습니다. 토기의 모양은 균형이 잘 잡혀 있고, 높은 온도에서 흙 속의 광물이 녹아 표면에서 유리광택을 내고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