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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 본성] 가야의 왕

삼한 중 변한을 계승한 가야연맹체는 중국.한반도.일본과의 해상무역로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런 지리적인 잇점과 철의 생산과 가공으로 가야는 상당한 경제력을 축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해안과 가까운 지역이 해상무역의 중심지였으나 점차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5세기와 6세기에는 대가야와 아라가야를 중심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대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토기와 화려한 금제품 그리고 대형봉토분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신라, 백제와 힘을 겨룰만큼 강한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토기에는  “대왕(大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가라국의 지배자를 <왕>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유물이다.

<“대왕”을 새긴 긴목항아리, 5~6세기, 출토지 모름, 충남대학교 박물관>

가야의 왕
<일본서기>는 가야의 지배자를 ‘왕’과 ‘한기’라는 두가지 이름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왕이라는 칭호는 가락국과 아라국의 지배자에게 사용하였는데, 고령 지산동 고분군과 함안 말이산 고분군의 규모와 출토품으로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중 고령 지산동 44호 무덤은 가라국 왕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32개의 순장덧널에 함께 묻힌 사람은 호위무사와 마부 등 왕을 보필하는 전문 집단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이런 가야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섬진강 유역의 여수와 남원 등지의 세력들도 공존이라는 가야의 가치 아래 함께 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대가야의 관은 6세기 즈음에 이르러 관테에 풀과 꽃 모양의 세움장식을 세우는 것으로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다. 가야 고분에서는 여러 점의 금관과 금동관이 출토되고 있다.

<금관과 금제장식, 6세기, 국보, 전 고령, 리움>

<반대편에서 본 모습>

<금제장식(국보)>

금관(국보 제138호)
가라국이 전성기일 때 만든 금관이어서 매우 안정적이면서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비교적 넓은 관테에는 일본에서 수입한 경옥제 곡옥을 매달고, 풀잎 모양 세움장식 4개을 세웠습니다. 세움장식의 끝 부분은 꽃봉우리 모양으로 마무리하여 화려함과 신비감을 더했습니다. 금관은 가라국이 왕을 정점으로하는 신분사회였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독자적으로 정치적 상징물을 제작할 만큼 국력이 컸던 나라임을 보여줍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금동관, 5세기, 고령 지산동 30-2호묘, 국립대구박물관>

지산동 30호 무덤은 왕의 무덤이 있는 주능선에서 이어지는 갈래 능선의 말단부에 있습니다. 봉분의 크기는 동서로 18m이고, 으뜸 덧널(주곽)과 딸린 덧널(부곽) 그리고 3기의 순장 덧널을 갖추었습니다. 30-2호는 으뜸 덧널(주곽)의 동쪽에 있는 순장 덧널이며, 금동관의 크기로 볼 때 어린 아이의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금동관은 띠모양의 금동판에 3개의 세움장식을 붙이고 4개의 달개를 매달았습니다. 금동판의 양끝에는 가죽끈을 연결할 수 있는 구멍을 뚫었습니다. 지산동 30호 주인공은 무덤의 위치와 규모, 3개의 순장 덧널을 갖춘 점 등에서 왕족 또는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금동관, 5~6세기, 보물, 고령 지산동 32호묘>

<고령 지산리 32호 무덤>

<3. 금동관, 6세기, 고령 지산동 45호묘, 국립경주박물관>

<1. 금귀걸이, 6세기, 고령 지산동 45호묘, 국립경주박물관>

가라국은 백제 금귀걸이의 영향을 받아 대략 5세기 후엽부터 독자적으로 귀걸이를 제작하였습니다. 가라국의 금귀걸이는 대부분 가는 고리에, 원추 모양 등 다양한 형태의 장식을 매달았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2. 금제장식, 6세기, 고령 지산동 45호묘, 국립경주박물관>

<고령 지산리 45호 무덤>

<목걸이, 5~6세기, 4. 고령 지산동 73호묘, 대가야박물관, 5, 고령 지산동 45호묘, 국립경주박물관>

대가야에서 만든 칼은 백제에서 출토되는 것과 달리 용이나 봉황 같은 장식을 따로 제작하여 손잡이에 끼웠다.

<고리자루 큰칼, 5~6세기, 6. 출토지 모름, 리움>

<7, 고령 지산동 47호묘, 국립중앙박물관>

화합, 가야의 여러 나라는 어떻게 공존하였나요?
5세기 한반도는 삼국이 팽팽하게 대치하면서 힘의 균형이 작용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한때 백제에 귀속되었던 호남 동부지역의 기문(己汶)과 대사(帶沙)가 가야와 함께 하였습니다. 남원의 운봉고원과 순천 등지에서 발견되는 가야 무덤은 그와 같은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렇듯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찾은 가라국은 476년에 중국의 남제(南齊)에 사신을 파견하여 국제적 위상을 새롭게 정립했습니다. 그리고 가실왕은 우륵에게 가야금 12곡을 만들게 하여 여러 가야의 화합을 도모하였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순장(殉葬)은 고대 왕이나 귀족 등이 죽었을 때 처자나 노비 등을 함께 매장하던 일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두루 행해졌던 장례방식이다. 중국에서도 전국시대까지 순장이 일부 이루어졌으나 순장이 금지되면서 점차 진시황릉 병마용처럼 나무나 흙으로 만들어 넣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에 순장에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으며, 가야의 창녕 교동 고분과 고령 지산동 고분에서 그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지증왕 때(502년) 순장을 금지하는 영을 내렸다고 하며, 그 이후 고분에서는 흙으로 만든 인형을 대신 묻었다.

<으뜸방- 화려한 금관을 쓴 왕, 방의 길이 9.4m, 너비 1.75m>

<고령 지산리 44호 무덤>

고령 지산동 44호 왕의 무덤
여기는 가라국을 전성기로 이끈 왕의 무덤을 실제 크기를 느껴볼 수 있도록 재현한 곳입니다. 가라국의 왕은 수도가 한 눈에 들어오는 주산의 언덕에 잠들었으며, 44호 무덤은 길게 뻗은 언덕의 중앙이면서 우뚝 솟은 곳에 있습니다. 왕의 무덤은 직경이 27m 높이 6m이고, 사방에 32기의 순장 방이 있습니다. 순장자는 호위무사, 마부, 옷감관리인 등 왕을 모시는 신하들과 그의 가족이 보입니다. 35명이 넘는 순장자가 따로 방을 가지고 있는 것은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부장품은 도굴로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은 알 수 없지만, 무덤 자체만으로도 가라국을 전성기를 이끈 왕의 위용이 느껴집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1. 투구>

< 2. 청동그릇, 3. 토제등잔,>

<4. 쇠투겁창>

<5.숫돌, 6. 구슬,>

 <7. 큰칼>

<8. 제사토기>

 <9. 널못>

<10. 꺾쇠>

<11. 쇠화살촉>

<12. 제사토기>

<13. 말띠드리개>

< 14. 말띠꾸미개>

<15. 말안장 장식>

으뜸방- 화려한 금관을 쓴 왕, 방의 길이 9.4m, 너비 1.75m>
화려한 금관을 쓰고 큰칼을 찬 왕이 잠들었습니다. 왕이 가진 보물은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머리맡과 발치에는 가까이서 왕을 모시던 신하가 같이 잠들었습니다. 왕의 주위에는 부장품을 가득 넣은 방 2개와 순장된 사람들이 잠든 방 32개가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마부, 고령 지산동 44호묘 25호 순장곽, 5세기, 국립경주박물관, 1. 제사토기>


<2.발걸이>


<3. 말 띠고리, 4. 말방울>

<5. 재갈>

25호 방, 왕의 말을 부린 사람, 방의 길이 2.48m, 너비 0.6m
바닥이 편평하고 둥근 손잡이가 붙은 뚜껑을 덮은 단지 안에 무엇이 들었을까요? 꿀단지는 아니었을까요? 머리맡에 따로 공간을 만들어 소중하게 두었습니다. 여기에는 말을 탈 때 쓰는 발걸이와 재갈도 함께 있습니다. 말을 부려서 왕을 모셔야 하니까요.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무사, 고령 지산동 44호묘 11호 순장곽, 5세기, 국립경주박물관, 1. 제사토기>

<2. 금귀걸이>

<3. 손칼,  5. 쇠화살촉>

<4. 큰칼>

11호 방, 허리에 칼을 찬 남자, 방의 길이 1.8m, 너비 0.41m
왕에 가까운 방에 누운 이 남자, 허리에 칼을 차고 있는 호위무사입니다. 나이가 40대로 지긋학, 화려한 금귀걸이를 하고 있으니 신하 중에서도 꽤 높은 호위대장이었나 봅니다. 머리 쪽에 놓인 굽다리접시에는 닭고기가 들었습니다. 평소에 닭을 무척 좋아하기도 했겠지만, 고기를 먹어줘야 칼을 제대로 썼겠지요.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라국(대가야)의 순장
순장은 죽은 실력자들을 위하여 산 사람을 함께 묻는 행위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야만적인 관습처럼 보이지만, 문헌 기록에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순장할 사람을 결정하고 있어 지금과는 다른 시각으로 순장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야에서는 왕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을 함께 순장하였습니다. 순장은 죽은 왕이 저승에서도 이승에서처럼 편안한 삶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결국 저승에서도 이승에서 처럼 삶을 살아간다는 사후 관념이 순장을 행하게 하는 이유였을 것입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2. 위키백과,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