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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특별전, 가야 본성] 금관가야의 국제성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가야는 일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파도가 거센 대한해협을 건너기 위해 잠시 쉬었다 가야하는 곳이다. 초기에는 남해안 사천의 늑도, 고성 지역의 소가야를 비롯하여 마산항과 가까운 아라가야, 창원 다호리지역 등이 교역의 중심지였으나 점차 낙동강 하구의 넓은 평야와 낙동강 뱃길을 배경으로 한 금관가야가 교역의 중심이 되었다. 김해 대성동,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중국과 교역의 모습을 보여주는 청동솥, 청동거울을 비롯하여 일본과 관련된 폭넓은 창, 방울 형태의 창끝 꾸미개, 방패장식 등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배모양 토제품, 5세기, 함안 말이산 45호묘, 두류문화연구원>

번영, 가야는 한 번도 빛나지 않았나요? – 4세기 가락국(금관가야)의 국제성
1~4세기 동북아시아는 중국-한반도-왜를 잇는 한반도 서남해안의 바닷길을 따라서 사신과 상인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이때 가락국은 철과 여러 특산품이 모이는 당대 최고의 국제시장으로 번영하였습니다. 가락국의 번영은 김해 양동리와 대성동의 지배자 무덤에 타임캡슐처럼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한 가락국은 백제나 고구려와 달리 주변 소국을 통합하지 않았습니다. 왜 가락국은 통합보다는 공존을 추구했을까요?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야 배모양 토제품은 가야사람들이 실제로 교류했던 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작은 규모의 배를 표현하고 있지만 거친 파도를 헤치기 위해 배의 선수를 높게 만들고 있어 기본적으로 대한해협을 건너는 선박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배모양 토제품, 5세기, 창원 현동 387호묘, 삼한문회재연구원>

가야의 항구에서 볼 수 있었을 선박의 형태를 유추할 수 있는 토기입니다. 멀리 중국과 일본을 잇는 바닷길을 항해하던 배를 모방하여 만든 것입니다. 배의 구조를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여 해상왕국 가야의 위상을 느낄 수 있는 좋은 토기입니다. 배모양 토제품은 강을 건너는 나룻배를 본떠 만들기도 했지만, 창원 현동. 함안 말이산 45호 무덤에서 출토된 것처럼 많은 교역품을 싣고 대한해협을 건너는 대형 선박을 형상화한 것도 있습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가야에서 배모양 토제품이 많이 출토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가야 사람은 그들의 이념을 담고자 여러 형상을 본뜬 토기를 만드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남해안에서 무역을 근간으로 하여 성장한 가야에서 배는 중요한 운송 수단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망자의 영혼이 큰 배를 타고 안전하게 극락세계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배나 등잔에 수레바퀴를 붙인 것도 같은 의미로 생각됩니다. 어쨌든 가야의 유적에서 많이 발견되는 배모양 토제품은 가야가 철을 매개로 중국 군현을 비롯해 다양한 지역과 교류하였음을 말해줍니다. 2~3세기 가락국 지배자의 무덤인 김해 양동리 유적에서는 일본 규슈지역의 청동거울과 청동창, 중국의 청동거울과 청동솥, 서아시아 계통의 유리 금박구슬 등이 발견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배모양 토제품, 5세기, 출토지 모름, 리움>

<배모양 토제품, 5세기, 창원 현동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동북아시아의 기항지
가락국 시장에서는 한(韓).예(濊).왜(倭)의 사신들과 상인들이 가져온 화려한 물품들이 철을 매개로 거래하였고, 정치적인 이유로 교환되거나 바쳐졌습니다. 이때 거래된 물품 중에는 중국 서진의 청동용기와 허리띠를 비롯하여 서역에서 생산된 유리그릇, 북방의 선비족이 사용하는 말갖춤, 왜의 청동기 등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다양하고 화려한 품목을 자랑합니다. 이를 통해 철을 매개로 항구로서 성장한 가야의 국제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400년 광개토태왕의 남정 이후 가락국은 쇠락하며, 고자국 등이 새롭게 무역항으로 부각되지만 예전의 영화를 되찾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쇠도끼, 1~3세기, 1. 창원 다호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2.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4세기 이전에는 얇은 판 모양으로 만든 쇠도끼가 화폐와 같은 기능을 하면서 경제력을 과시하는 지표와 같았습니다. 4세기 이후부터는 덩이쇠가 역할을 대신하였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국거울과 본뜬 거울,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3세기 1. 이체자명대경, 창원 다호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2. 조문박물견, 김해 내덕리유적, 동의대학교 박물관>

 <3. 본뜬 거울,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동의대학교 박물관>

<3. 본뜬 거울,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동의대학교 박물관>

<중국동전, 기원전 2~1세기, 오수전, 여수 삼산면 서도리(거문도), 사천늑도 C지구 패총, 창원 다호리 1호묘, 국립광주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 2. 반량전, 사천 늑도 C지구 패총, 동아대학교 박물관, 3. 화천, 김해 회현리 패총, 국립 회현리 패총, 국립중앙박물관>

인천-해남-여수-제주-김해 등 서남 해안을 따라서 다양한 중국 동전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중국 동전은 교류를 위해 바닷길을 오가던 이들이 남긴 중요한 흔적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청동 꺽창과 투겁창, 2~4세기, 1. 김해 가야의 숲 조성부지내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2. 김해 양동리고분, 대성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청동 투겁창, 2~4세기, 2. 김해 양동리고분, 대성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청동 투겁창은 일본 북부 규슈를 중심으로 발견되며, 제사와 의례 행위를 하기 위해 무기 모양으로 만든 것입니다. 반면 일본의 심장부인 기나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제사와 의례용으로 청동 방울을 제작하였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청동 화살촉,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3세기, 사천 늑도유적, 창원 삼동동유적, 동아대학교 박물관, 신라대학교 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금박유리구슬, 3세기, 1. 김해 양동리 46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2. 천안 청당동 2호묘, 국립중앙박물관, 3. 아산 명암리 밖지므레 16호묘, 국립공주박물관>

유리 사이에 금박을 끼워 넣어 만든 것입니다. 서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서역에서 제작하여 한반도에까지 유통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삼천포항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 늑도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대 한.중.일간의 해상무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1980년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패총, 무덤, 주거유적 등과 청동기에서 철기로 바뀌어가는 초기 철기시대 유물들이 주로 발굴되고 있다. 그중 일본 야요이시대 토기, 중국계 유물인 낙랑토기, 중국 진나라 화폐인 반량전도 발견되고 있어 당시의 국제교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천 늑도(사적)>

창원 다호리 유적은 낙동강이 만든 습지와 그 주변에 만들어진 무덤, 생활공간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유적이다. 가야 초기의 널무덤 70여기와 삼국시대의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등이 발굴조사 되었다. 다호리 유적지는 물과 흙이 섞여 있어서 유물이 잘 훼손되지 않는 주남저수지 부근 논바닥에서 발견되어 유적지 전체가 잘 보존되어 있었다. 도로변 논에서 발견된 다호리 1호무덤과 널무덤이 대표적이며, 평지와 구릉지역에 고분과 생활유적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창원 다호리유적(사적)>

<창원 다호리 1호 무덤(나무널 무덤), 기원전 1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창원 다호리 1호 무덤(나무널 무덤), 기원전 1세기, 국립김해박물관, 1. 쇠도끼>

<1.쇠도끼>


<2. 한국식동검>


<3. 청동 투겁창,>

<4. 손칼과 붓>

<붓글씨 재현품>

무덤 주인공이 문자를 사용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붓은 나무판에 글을 쓰고, 칼은 나무를 깎아 지우는 용도로 썼을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1. 청동 허리띠 부속구>

<2. 청동 방울, 3. 청동거울(성운문경)>

<4. 칠그릇>

<1. 유리구슬, 국립김해박물관>

<2. 칠부채>

창원 다호리집단의 성장
가야가 건국되기 전인 기원전 2세기 경, 남해안에서 가장 눈에 띠는 교역항은 사천 늑도 유적입니다. 이곳에서는 일본 야오이 시대의 토기를 비롯해 낙랑토기와 한문화, 중국 동북 지역의 토기 등 다양한 문화가 확인됩니다. 한편 내륙지역에서는 창원 다호리 집단이 두각을 드러내어 변한의 중심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창원 다호리 유적은 현재까지 100기 이상의 널무덤이 조사되었으며, 중국 한대의 청동거울과 동전, 철기, 칠기, 왜계토기 등 국제적인 유물을 확인하였습니다. 하지만 2세기 이후에는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고 있어, 이후 이 집단이 어떻게 되었는지 미궁에 빠져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김해 양동리고분(사적)은 기원전 2세기부터 5세기까지의 무덤 500여기가 산재해 있는 곳으로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 등 모여 있다. 가야 고분 중에서 가장 많은 5천여점의 유물의 발굴된 유적지이다. 한식청동거울과 폭이 넓은 투겁창 등 중국 및 일본계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대형 목곽묘와 외래계유물, 수정제 구슬 등 화려하고 풍부한 껴묻거리는 양동리 고분군이 금관가야가 본격적으로 성립되기 이전 김해지역에서 활동한 주요 세력의 집단무덤이었음을 보여준다.

<김해 양동리고분(사적)>

<김해 양동리 162호 무덤(나무덧널 무덤), 2세기, 동의대학교 박물관>

김해 양동리 162호묘(2세기)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2세기 후반 무렵에 한(韓)과 예(濊)가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서 강성해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양동리 162호 무덤은 이 시기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나무덧널무덤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청동거울과 칼>

이념을 나타낸 청동거울
주인공의 가슴에는 중국거울 2점이, 머리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만든 거울 8점이 놓여 있습니다. 이 시기 거울은 용모를 다듬는 화장용구가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는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특히 2점은 더욱 귀해서 가슴에 놓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신분을 나타낸 칼
주인공의 오른쪽 허리춤에는 여섯 점이 넘는 칼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의 칼을 소유해도 대단한 사람인데, 이렇게 칼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주 높은 신분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무기와 도끼>

<무기와 쇠도끼>

무력을 나타낸 무기
주인공의 머리맡에는 다량의 투겁창과 화살이 있습니다. 무기는 그가 가진 무력을 나타낸 것으로 수량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강했음을 의미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부유함을 보여주는 쇠도끼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이 곳 사람들이 철을 돈처럼 썼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런 철을 녹여 만든 쇠도끼가 무덤에 다발로 놓여 있는 것은 주인공이 엄청난 부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김해 대성동고분(사적)은 길이 약300m, 높이 20m정도의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다른 지역의 가야고분군들과는 달리 거대한 봉분이 보이지 않는다. 금관가야 건국설화와 관련된 구지봉, 대성동고분군, 수로왕릉, 봉황동유적지가 하천을 따라 남북으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1~5세기에 걸친 오랜 시기에 걸쳐서 조성된 무덤군으로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구릉 정상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다. 출토된 유물로는 중국제 거울, 북방계 말갖춤, 방패형동기, 호랑이모양 띠고리, 청동솥 등이 있으며, 당시 한.중.일 문화교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가야의 대외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김해 대성동고분(사적)>

<김해 대성동 29호 무덤(나무덧널 무덤), 3세기, 국립김해박물관>

김해 대성동 29호묘(3세기)
김해 양동리 고분이 2세기 가락국(구야국)의 중심이었다면 3세기에는 김해 대성동으로 중심이 이동합니다. 대성동에서 확인된 첫 번째 왕의 무덤이 29호묘입니다. 내부에서는 북방의 오르도스동복, 도질토기, 순장, 달개가 달린 금동관 등이 처음으로 확인이 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큰칼과 무기, 쇠도끼>

신분을 나타낸 큰칼
주인공의 허리 부근에는 여러 자루의 큰칼이 놓여 있었을 것이지만, 무덤이 파괴되어 3자루가 확인이 됩니다. 이전에 신분을 나타내던 검은 큰칼로 바뀌었습니다. 찌르는데 특성화된 검과 달리 칼은 베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아마도 큰칼로 적장을 베었을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부유함을 보여주는 쇠도끼
주인공이 누운 자리의 바닥에는 90여점의 쇠도끼가 깔려 있습니다. 이전의 양동리 162호에서 40여 점을 부장한 것에 비하면 훨씬 부유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쇠도끼의 무게를 따지면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무기>

무력을 나타낸 무기
주인공의 다리와 머리쪽에는 많은 양의 투겁창과 화살이 있었을 것이지만, 무덤이 파괴되어 얼마 남아 있지 않습니다. 쇠도끼의 양이 크게 증가한 점에서 볼 때 무기류의 수량도 꽤 많았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목단지>

이념을 나타낸 저장의례
주인공의 발치에는 이전의 무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짧은 목단지가 열을 지어 있습니다. 지금은 토기만 남아있지만, 원래는 그 안에 다양한 음식물을 가득 담아놨을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무덤을 만드는 의례가 새로워졌음을 의미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락국(금관가야)이 이은 세계
가락국은 동북아시아를 바다로 잇는 창구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가야의 유적에서 나온 많은 배모양 토기는 철을 매개로 군현을 비롯해 다양한 지역과 교류하였음을 말해줍니다. 2~3세기 가락국 지배자의 무덤인 김해 양동리 유적에서는 일본 규슈지역이 청동거울과 청동창, 중국의 청동거울과 청동솥, 서아시아 계통의 유리금박구슬 등이 나왔습니다. 4세기에는 교역의 폭이 더욱 넓어졌습니다. 이 시기 대성동 고분에서는 왜이 중심부 기나이(畿內) 지역의 바람개비 모양 동기와 통모양 동기, 중국 서진의 허리띠장식, 북방 선비계통의 말갖춤, 서역의 유리그릇 등이 출토되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검, 2세기, 1. 김해 양동리 55호묘, 427호묘, 국립김해박물관>

<검, 2세기, 2. 김해 양동리 55호묘, 427호묘, 동의대학교 박물관>


<사신격자 무늬 거울, 1세기, 3. 전 김해 양동리, 부산박물관>

이 청동거울은 꼭지 주위에 12지의 글과, 무늬의 가장자리에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글의 내용은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을 담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수정 목걸이, 3세기 1. 김해 양동리 270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수정 목걸이는 당시 가락국 사람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던 구슬입니다. 그중에서도 이 목걸이는 가장 화려하게 만들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목걸이, 2~3세기, 2.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목걸이, 2~3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목걸이, 2~3세기, 김해 양동리유적, 국립김해박물관>

<1. 청동 세발솥, 3세기, 김해 양동리 32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입술부분에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다. “서0궁에서 사용하는 솥으로 용량은 1말이며, 무게는 17근 7량 7″으로 풀이됩니다. 제작 시기는 1세기로 추정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1. 쇠솥, 2~3세기, 김해 양동리 31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변한의 지배자 ‘신지’
1.3세기 한반도 남해안에는 여러 작은 나라가 있었으며, 각 나라에는 여러 명의 우두머리가 있었습니다. 우두머리는 세력의 크기에 따라 신지(臣智), 험측(險側), 살해(殺奚), 읍차(邑借)로 나뉘었습니다. 가야 이전 변한 최고의 지배자인 신지는 철을 바탕으로 교역을 하며 부를 축적한 사람들로 생각됩니다. 그들은 이런 교역을 통해 중국과 일본 등지의 다양한 사치품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김해 양동리 162호 무덤은 중국 한나라 환제(桓帝, 재위 146~167년)와 영제(靈帝, 재위 168~189년) 때 중국의 혼란한 정치적 상황으로 한과 예가 강성했다는 역사적 기록과 부합하여, 거대한 덧널무덤을 한반도 남부에서 처음으로 만든 사례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금동관, 보물, 1. 부선 복천동 11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부산 복천동 11호 무덤은 토기와 장식대도 등에서 신라적인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금동관은 신라에서 제작했다는 견해와 가야에서 제작했다는 견해가 모두 있습니다. 당시 부산지역은 대체적으로 5세기 이후 신라의 영향이 크게 미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청동칠두령, 4~5세기, 보물 2. 부산 복천동 22호묘, 복천박물관>

<유리목걸이, 4세기, 3,5. 김해 대성동 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4. 김해 대성동 88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청동그릇, 4세기, 1. 김해 대성동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국 서진의 청동그릇입니다. 유사한 것들이 삼연을 비롯한 북방에서도 확인되어, 서진과의 직접 교류, 삼연을 통한 유입 등 유입경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청동솥, 4세기, 대성동 47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사신 격자무늬 거울, 4세기, 2. 김해 대성동 23호묘, 김해 양동리 441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동의대학교 박물관>


<재갈, 4세기, 4.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말방울, 4세기, 5.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삿갓모양 말방울은 대성동유적에서만 출토되었습니다. 중국 조양(朝陽) 원대자 벽화 무덤, 안양(安陽) 효민둔 154호 무덤 등에서 출토되어 북방의 유목국가(모용선비)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허리띠 꾸미개, 4세기, 1. 김해 대성동 88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가락국 지배자의 무덤에 부장한 중국식(서진) 허리띠 꾸미개입니다. 중국에서 두 마리의 용을 장식한 허리띠 꾸미개는 황제나 왕족이 착용한 최고급 위세품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금동말띠 꾸미개, 4세기, 2,4,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말머리 꾸미개, 4세기, 3.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유리잔, 4~5세기, 1. 김해 대성동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2. 경주 금관총, 국립경주박물관(비교자료)>

바람개비 모양으로 나무나 가죽으로 된 방패에 붙인 것이다. 뒷면에는 방패에 매달기 위한 고리가 있다. 일본과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바람개비모양 동기, 4세기, 1. 대성동 88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2. 김해 대성동 1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일본 고분시대의 문물로 방패나 화살통에 붙인 청동 꾸미개로 추정됩니다. 일본 기나이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가나가와현 오즈카 고분, 서로는 후쿠오카현 마루쿠야마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속이 빈 둥근 통 속에 청동 또는 철로 된 작은 구슬이 들어 있어 흔들면 소리가 난다. 장대에 꽂아 사용한 것이다. 일본의 경우 다양한 지역의 여러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다.

<3. 통모양 동기, 4세기, 김해 대성동 2호묘, 39호묘, 88호묘, 94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일본의 경우 44기의 무덤에서 59점이 출토되었습니다. 기나이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사이타마현 구마노신사 고분, 남으로는 구마모토현 시미즈 고분에서 출토되는 등 넓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왜계무기, 3~4세기, 김해 양동리, 대성동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4. 창, 5. 돌화살촉, 6. 청동촉>

<7. 화살촉>

<8. 가락바퀴모양 석제품, 4세기, 대성동 18호묘, 8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가야의 지배자
3~4세기에 이르러 변한은 가야로 성장합니다. 가야는 강력한 국가가 등장하는 국제환경 속에서 삼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발전해 나갔습니다. 가야의 지배자는 많은 제사음식을 담은 토기를 발치에 늘어놓고, 무력을 의미하는 갑옷과 무기를 다량으로 부장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사후세계에서 함께할 시종을 순장했습니다. 김해 대성동 29호 무덤은 명실상부한 가야 최고 지배자의 무덤입니다. 이 무덤에서는 회청색의 도질토기, 순장, 달개가 달린 금동관, 오르도스형 청동솥 등이 한반도 남부에서 최초로 확인되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뚜껑, 6세기, 1. 동해 추암동 43호묘, 국립춘천박물관, 2. 고령 지산동 72호묘, 국립경주박물관>

 경북 고령에서 200km 이상 떨어진 강원도 동해 추암동 이곳에서 발견된 가라국의 토기
526년 싸움에 져서 가야는 신라에 병합되었지만, 가야금은 신라 천년의 악기가 되었고 오늘의 선율이 되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가락국(금관가야)이 이은 세계
가락국은 동북아시아를 바다로 잇는 창구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가야의 유적에서 나온 많은 배모양 토기는 철을 매개로 군현을 비롯해 다양한 지역과 교류하였음을 말해줍니다. 2~3세기 가락국 지배자의 무덤인 김해 양동리 유적에서는 일본 규슈지역이 청동거울과 청동창, 중국의 청동거과 청동솥, 서아시아 계통의 유리금박구슬 등이 나왔습니다. 4세기에는 교역의 폭이 더욱 넓어졌습니다. 이 시기 대성동 고분에서는 왜이 중심부 기나이(畿內) 지역의 바람개비 모양 동기와 통모양 동기, 중국 서진의 허리띠장식, 북방 선비계통의 말갖춤, 서역의 유리그릇 등이 출토되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