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김해 김해읍성, 옛 김해도호부 읍치에 쌓은 읍성

경남 김해시 동상동 옛 김해도호부 읍치에 남아 있는 김해읍성이다.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쌓았던 읍성 중 하나이다. 일본과 가까운 까닭 지리적인 상황으로 상당히 견고하게 쌓았던 읍성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16년에 석성으로 축조된 김해읍성은 둘레 4,418척(약 1.3km) 정도이다. 동.서.남.북에 성문을 두고, 성벽 바깥에는 해자 두고 있었다. 왜구 대응하기 위해 쌓은 전형적인 읍성의 전형적인 형태를 하고 있으며, 읍성북쪽에는 산성인 분산성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성벽과 성문은 대부분 철거되어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2008년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던 북문(공진문)을 복원하였다.

<김해읍성 북문(공진문)>

병조에서 각 지역의 성 쌓는 공사와 관련하여 아뢰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금년 안으로 충청·전라·경상 3도의 각년(各年)에 시작해 쌓는 성(城)의 마치지 못한 것을 금년 안으로 마쳐 쌓게 하옵시며, 그리고, 남해에 쌓는 성은 일찍이 선군(船軍)을 부리어 쌓게 하였사오니, 극심한 추위와 장맛비와 더위와 방어하기에 가장 긴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하여 쌓게 하고, 또 해문(海門)의 요충(要衝)인 김해의 읍성(邑城)도 금년에 시작하여 쌓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65권, 세종 16년 8월 1일 을사 1번째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김해시 구도심에 있던 성벽들은 대부분 철거되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그 흔적을 찾아 보기는 힘들다. 북문은 성벽과 옹성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김해읍성 고지도>

<김해읍성 위성지도>

옛 김해읍성의 북문에 해당하는 공진문은 2008년에 복원되었다. 성문은 옹성 형태를 하고 있있는데 조선후기에 읍성을 중건하면서, 당시의 축성경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문루에는 조총을 방어하기 위해 총구를 설치해 놓는 판문을 달아놓고 있다.

<성문과 문루>

<안쪽에서 본 성문과 문루>

옹성은 성문 바깥쪽에 반달모양의 장애물 형태의 옹성을 쌓아서, 성문을 공격하는 적을 효율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방어시설이다. 조선후기 중국 성곽의 사례를 참조하여 많이 축성되었다.

<옹성 성벽(바깥쪽)>

<옹성 성벽(안쪽)>

<옹성 출입로>

읍성 성벽은 일제강점기 대부분 허물어지면서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수로왕릉 부근에서는 삼국시대 토성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읍성 서문터 부근>

김해읍성 북문, 김해시 동상동
김해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16년(1434) 석성으로 축조되었으며, 문종 원년(1451)에는 둘레 4,418척, 높이 13척, 여장 931개소, 적대, 20개소, 옹성을 갖춘 문 4개소, 냇물 한곳, 우물 28곳, 해자는 둘레 4,683척의 규모를 갖추었다고 한다.<김해읍지>에 나타난 읍성 4대문의 명칭은 각각 해동문, 해서문, 진남문, 공진문으로서 북문인 공진문은 현종7년(1666)에 부사 이화악이 중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해읍성은 일제강점기에 읍성철거정책으로 철거되고 고종 32년(1895) 이후 거의 흔적이 없어졌다. 현재의 김해읍성 북문은 동상동 현 위치에 성벽과 옹성일부가 잔존하던 것을 2006년부터 2년간 전면 발굴을 하여 하부구조 및 축성기법을 조사, 분석하고 <김해부내지도> 등의 고지도류와 각종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2008년 3월 복원하였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2. 조선왕조실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3. 위키백과,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