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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금관가야 생활유적

경남 김해시 봉황동 일대에 있는 봉황동유적(사적)이다. 김해 구도심 수로왕릉과 대성동고분 남쪽에 있는 봉황대라 불리는 작은 언덕에 있는 조개더미(패총)과 무덤유적 등이다. 조개더미에서는 토기, 뼈나 뿔로 만든 도구, 석기, 가락바퀴, 불탄쌀, 중국 동전, 동물뼈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중국 동전은 왕망의 신나라 때(기원전 14년)에 만든 것으로 유적이 형성된 시기와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언덕 서쪽에서는 가야 토성과 창고형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남쪽에서는 가야시대 배가 발견되어 해반천을 통해 선박이 왕래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해 준다. 청동기시대 이래 사람이 살았던 곳이 금관가야 중심 거주지역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곳으로 조개더미인 회현리패총과 봉황대 일대의 주거유적을 합쳐 봉황동유적(사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봉황대 남쪽으로는 넓은 김해평야와 낙동강이 펼쳐 있고, 북쪽으로는 분산성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산들이 있다. 평야지대 낮은 구릉에 목책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는 고대 성읍국가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 곳이다. 봉황대 서쪽에는 해반천이 흐르고 있어 낙동강을 통해 중국, 일본과 교류한 것으로 보인다.

<유적 일대 위성 사진>

봉황동 유적은 집터와 조개더미로 이루어진 곳으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유물은 없지만, 가야 고상가옥 등을 복원하여 도심 공원으로 조성해 놓고 있다. 봉황대는조선시대 김해부사를 지낸 정현석이 언덕이 봉황의 모습을 닯았다고 하여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봉황대 언덕>

봉황대 서쪽 해반천 옆에는 창고로 추정되는 건물유적과 선박접안시설 등이 발견되어 금관가야 교역의 중심지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지금은 옛가야의 생활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고상가옥과 가야선박을 재현해 놓고 있다.

<선박 접안시설을 재현해 놓은 연못>

봉황대 남쪽 옛 봉황초등학교 부근에서 가야시대 선박이 발견되었다. 연못에는 당시 선박을 재현해 놓은 배를 볼 수 있다. 좁은 수로를 항해할 수 있도록 날렵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가야의 배>

<배모양 토제품, 5세기, 함안 말이산 45호묘, 두류문화연구원>

가야의 배
가야는 고대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교역을 통해 성장한 정치체이며 수로와 해로를 통하여 왜와 한사군에도 철기를 수출하였다. 가야의 배는 현재까지 실물이 발굴된 사례는 없으나, 가야시대의 배를 본떠 만든 배모양토기가 여러 점 남아 있어 구조와 형태, 크기 등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복원된 배는 호림박물관에 서장된 배모양토기를 토대로 당시의 항해술과 선박의 구조 등을 고려하여 제작한 것으로, 가야시대 조선술과 선박구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연못 옆에는 다수의 고상가옥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당시 교역에 필요한 물품들을 저장하는 창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상가옥 건물터와 가야시대에 만들어진 집모양토기를 참조하여 고상가옥을 복원해 놓고 있다.

<고상가옥>

여기에 복원된 고상가옥은 봉황동유적에서 발굴된 가야시대 고상건물지와 가야시대 집모양토기를 참고하여 추정 복원한 것이다. 고상가옥은 건물바닥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인데,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된 특수 용도의 건물이 많다. 가야시대의 접안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해반천변에 입지한 조건이나 구조 및 열을 지어 다량으로 분포하고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이 곳에서 발굴된 고상가옥들은 대외교역을 위한 창고시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망루>

<김해 해반천>

봉황대 정상에는 황세바위, 여의각 등이 있으며, 황세바위 앞에는 가락국의 천제단을 만들어 놓았다. 김해 도심과 주변이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봉황대 오르는 길>

<봉황대 황새바위>

<천제단>

<봉황대 북쪽 분산성(사적)>

<봉황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해반천>

봉황대 동남쪽은 생활유적인 회현리 조개더미(패총)가 확인된 곳이다. 이곳에는 주변에서 확인된 집터와 가야토기를 참조하여 고상가옥과 주거지를 재현해 놓고 있다.

<고상가옥과 주거지를 재현해 놓은 곳>

수혈주거 가옥은 난방을 위해서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이며, 고상가옥은 곡식 등을 저장했던 창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혈주거 가옥>

<수혈주거 가옥>

<집모양토기, 전 대구 달성, 삼국시대(가야) 5~6세기>

<고상가옥>

<집모양토기, 4~5세기, 1. 창원 석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2. 함안 말이산 45호묘, 두류문화연구원
3. 김해 봉황동 유적,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고상가옥과 주거
여기에 복원된 고상가옥과 주거 등은 봉황동유적에서 발굴조사된 가야시대 건물지 등을 참고로 하여 2002년 봉황동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한 것이다.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인데, 여기에 복원된 수혈주거지는 봉황대 진입 소방도로내 유적 제46호 주거지를 참조하여 추정복원한 것이다. 고상가옥은 가야시대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서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된 특수 용도의 건물이 많다. 즉, 고상가옥은 난방시설이 용이하지 않아 일반주거용 건물로는 부적합하지만 지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만들어져 짐승과 습기, 침수 등으로부터 방해, 방재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창고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재현해 놓은 목책>

<산책로>

<목책>

봉황대 동남쪽에 위치한 회현리 패총에서는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 중국 왕망시대의 동전 등이 출토되었다.

<회현리 패총>

<전시관>


<김해 회현리 패총(단면)>

<항아리, 김해 봉황동, 삼국시대 가야>

김해 회현리 패총
김해 회현리 패총은 1907년 이후 어려 번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조사성과를 바탕으로 사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2001년 봉황대 유적과 함께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가야인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토기, 동물뼈, 뼈조각품과 함께 ‘화천(貨泉)’이라고 불리는 중국 동전과 거울조각, 일본 야요이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벼농사의 기원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김해 봉황동유적, 사적
가야시대 대표적인 조개무덤으로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져서 2001년 2월 5일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패총에서는 소위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 골각기 등과 함께 중국 왕망시대이 ‘화천’이라는 동전이 출토되어 당시의 교역상황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쌀농사의 기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또한 구릉위에는 황세장국과 여의낭자의 전설과 관련된 여의각, 황세바위 등이 남아 있으며 가야시대 고상가옥, 주거지 등이 발굴되었다. 2002년 ~ 2005년 해상포구, 고상가옥, 수혈주거, 망루, 목책 등을 복원 정비하였으며 1999년 3월 부산대 박물관에서 회현리 패총을 재발굴하여 2006년 단면전시관 형태로 개관하였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2. 안내문, 김해박물관, 2012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