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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교동도호부 관아, 교동읍성과 삼도수군통어영

교동도호부(喬桐都護府)는 한강 입구 강화 교동도에 설치된 조선시대 행정구역이다. 교동도는 섬의 규모가 크지 않아 지금은 강화군에 속해 있지만 삼국시대때부터 한강유역을 지키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강화와는 행정구역이 설치되었다. 교동도는 개화산을 비롯하여 여러 섬으로 되어 있었으나 간척사업으로 넓은 들판이 형성되면서 하나의 섬이 되었다. 삼국시대 고구려가 고목근현이라 불렀으며 신라경덕왕때 교동현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조선후기 경기수영이 남양에서 이 곳으로 옮겨지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633년에는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가 설치되어 경기도.황해도.충청도의 수군을 총괄하던 고장이다. 도호부사는 원래 종3품의 외관직이지만, 교동도호부사는 경기수영을 담당하던 정3품의 수군절도사가 겸임하였다.

<교동읍성 남문>

삼도수군통어영과 교동도호부 관아가 있던 강화 교동도 읍내리에는 관아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읍성을 둘러싸고 있던 읍성 석축 일부와 남문 홍예만이 남아 있다. 성벽의 둘레는 약 430 m이며, 동.남.북에 성문을 두었다.

<2017년 문루를 복원하기 전 홍예만 남은 모습>

<남문 홍예>

<문루 내부의 석축>

‘南樓’라고 적힌 글자가 보인다.

<안쪽에서 본 남문 유랑루(庾亮樓)>

<성벽에 새긴 글자>

삼도수군통어영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三道’라고 적힌 글자가 있다.

<작은 표지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거북받침돌>

성벽은 높이 6 m 정도이며 바깥쪽에 바깥쪽에 잘 다듬은 돌로 석축을 쌓은 조선후기 성벽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방어시설로는 옹성(甕城), 치(雉) 등을 두고 있다.  현재는 성벽은 돌로 쌓은 석축 일부만 남아 있다. 

<남문 앞 옹성을 쌓았던 석축>

<남문 동쪽 성벽>

<남문 서쪽 성벽>

<마을 민가 담장으로 사용되었던 서쪽 성벽>

<안쪽에서 본 모습>

<북문 공북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리>

<북문 동쪽 성벽>

<북문 서쪽 성벽>

교동읍성 북문을 나서면 교동향교와 화개산성이 있는 화개산으로 연결된다. 비상시 북문을 통해 화개산성으로 대피할 수 있다.

<북문에서 보이는 화개산>

<아래에서 본 북쪽 성벽>

교동읍성(喬桐邑城),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이 읍성은 조선 인조 7년(1629) 교동에 경기수영을 설치할 때 돌로 쌓았다. 둘레 430m, 높이 6m 규모로 세 개의 문을 내고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문을 유랑루(庾亮樓), 북문을 공북루(拱北樓)라 하였다. 동문과 북문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로 문루 부분이 무너졌던 것을 2017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안내문, 강화군청, 2020년)

교동도에 지금은 옛 교동부 관아의 흔적은 읍성을 쌓았던 성곽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아 있지 않고, 교동도의 주산인 화개산 남쪽 기슭에 관아에서 운영하던 교육기관이 향교가 남아 있다. 교동향교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가져와 모셨던 유서깊은 향교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한강 입구가 보이는 화개산 북쪽 기슭에 있던 것을 조선 영조때 관아와 가까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교동향교는 후묘전학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으며,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동.서,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과 동.서재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남문 안으로 보이는 읍내리 마을>

<교동도후부 관아가 있었던 읍성 내부 마을>

<마을에서 보이는 남문>

조선시대 선정을 펼친 교동지역의 목민관인 수군절도사겸 삼도통어사 도호부사, 방어사 등의 영세불망비 등 총 39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들은 교동면 관내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91년도부터 강화군 및 교동유림에서 이 곳으로 이전하여 관리하고 있다.

< 교동향교 입구 마을에 세워진 읍내리 비석군>

화개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교동향교는 고려시대 성리학을 도입한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가져와 모셨던 유서깊은 향교이다. 한강 입구가 보이는 화개산 북쪽 기슭에 있던 것을 조선 영조때 관아와 가까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교동향교>

교동도는 인구가 많지 않은 작은 섬이지만 세금으로 걷어들인 곡식을 비롯하여 한양으로 향하는 많은 물자가 오가는 연안 수로의 주요 교통요지였다. 조선후기 인조 때 강화도 방어를 위하여 남양(화성시)에 있던 삼도수군통어사를 이곳으로 옮겼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조선수군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삼도수군통어영이 남산포 선착장>

<남산포 앞 바다>

<교동읍성 앞 해안 갯벌>

<교동읍성 남쪽 갯벌 안쪽 들판>

이 곳에 선박들이 정박해 있으면서 훈련도 하였다고 한다.

<화개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교동읍성과 남산포 일대>

삼도수군통어영지(三道水軍統禦營址)
조선 인조7년(1629)에 한성 방어를 위해 남양 화량진에 설치되어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옮긴 다음 인조 11년(1633)에는 3도(경기, 충청, 황해) 수군 통어영을 교동 남산포에 설치하였다. 이곳에는 수군을 훈련하던 훈련장 및 정박시 배를 묶어두던 계류석 1기가 현존하고 있다. (안내문, 강화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강화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