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중앙박물관특별전, 조선의 승려장인] 불상을 제작한 조각승

조선 중기까지 많은 사찰들이 정치,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영향력이 약화되어 큰 불사를 일으키기 힘들었던 것으로보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승병들이 크게 활약하면서 전국적으로 큰 불사를 일으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이 시기에는 많은 불전들이 중건되었는데 이와함께 불상들도 같이 제작되었다. 불상의 제작은 수조각승을 중심으로 여러 명이 함께 하였으며, 함께 작업하는 과정에서 기술이 예술적 특징이 자연스럽게 전승되었다.

조선후기에는 금속을 주조해서 만드는 금동불상보다는 주변에서 쉽게 재료를 구할 수 있는 소조불상이나 목조불상들이 많이 제작되었다. 목조불상은 대체로 세개 이상의 나무로 만든 부재를 연결하였으며 내부는 복장물을 안치하기 위해 깊게 팠다. 조선시대 불상은 조형적인 예술성이나 종교적인 표현 등이 돋보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특색있는 고유의 불상의 형태를 보여준다.

<1.무릎편, 28. 목조불상의 내부 구조를 보여주는 부재, 목조불상편,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1. 따로 만들어 결합했던 무릎편입니다. 무릎 뒤편 중앙의 좌우에는 거멀쇠로 몸체와 고정했던 홈이 파여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보살상 오른쪽 몸체편, 3.보살상 왼쪽 몸체편>

2. 머리에서 몸통까지 중앙과 좌우로 삼등분한 보살상의 오른쪽 몸체 부분입니다. 몸체를 연결했던 ‘ㄷ’자 모양 거멀쇠가 남아 있습니다. 손을 꽂기 위해 뚫은 홈도 확인됩니다. 3. 왼쪽손을 꽂았던 둥근 홈이 파여 있습니다. 하단부가 정연하게 다듬어진 데서 무릎을 따로 제작하여 결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4. 여래상 머리편>

따로 만들어 붙인 나발은 거의 떨어져 나갔습니다. 귀 부분에는 따로 만든 귀를 고정했던 못이 남아 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보살상의 몸체편과 무릎편, 여래상의 머리편입니다. 이 편으로는 원래 모습을 가늠하기 어렵지만 조선후기에 나무를 결합해서 만든 접목조 방식의 목조 불상 내부 구조를 살필 수 있어 매우 중요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9. 내부에 인도 고대 문자를 써넣은 보살상, 목조보살입상편,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나무로 만든 이 보살상 내부에는 먹으로 쓴 범자가 있습니다. 인도 고대 문자인 산스크리트어로, 글자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습니다. 이 범자들은 조선 후기 불교의식집인 <조상경>에 수록된 오륜종자(五輪種子)인 ‘암’, ‘람’, ‘밤’, ‘함’, ‘캄’입니다. 각 범자는 방위와 신체를 상징합니다. 불상 안쪽에 범자를 써넣는 것은 불화에서 부처 신체의 각 부분에 오륜종자를 포함한 각종 범자를 써넣어 상징성을 강화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승려 장인으로 추정되는 제작자가 상을 만들면서 적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30. 나비장으로 표면을 연결한 검은 옻칠의 지장보살상, 목조지장보살좌상,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후기에는 전란으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이들의 명복을 빌고자 많은 사찰에서 명부전을 지었으며,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상을 봉안했습니다. 이 지장보살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지 않은 민머리이고 검은 옻칠의 표면이 눈에 띕니다. 금박이 벗겨진 상 표면에는 나비장으로 목재를 연결한 흔적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불상 내부를 연결하는데 나비장을 사용했으나 후기에는 이처럼 바깥으로 드러나게 연겨래 제작하기 편리한 방향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떤 연유로 금박이 거의 벗겨진 채 전해졌는지 알 수 없으나 금박을 입히기 전 옻칠 단계의 불상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31. 여러 나무를 결합하여 만든 목조불상, 목조여래좌상,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여러 편의 나무를 결합해서 만드는 접목조 방식으로 제작된 불상입니다. 이 불상은 얼굴, 머리 뒤로 이어지는 몸, 무릎을 각각 따로 만들어 접합했습니다. 앞으로 튀어나온 무릎부분은 ‘ㄷ’자 모양의 거멀쇠를 사용하여 상체와 연결했고, 바닥판에는 못 여러 개를 박아 몸체와 고정했습니다. 상체의 옷 주름은 물결치듯 유려하고 변화가 풍부한 반면, 하체의 옷 주름은 비교적 간략합니다. 지긋이 관조하는듯한 얼굴 표정과 둥글둥글한 몸의 조형성이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줍니다. 조성 발원문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조선 후기 조각승의 솜씨로 보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목조불상 완성되기까지
나무로 불상을 만들 때 나무 한 개로 만들 수도 있고(통목조 방식), 나무 여러편을 연결해서 만들기도 합니다. (접목조 방식). 후자의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상의 형태를 정하고 나무를 준비합니다. 일반적으로 세 개 이상의 나무 부재를 연결해 불상을 만들었습니다. 몸체 내부는 나무의 뒤틀림을 방지하고 복장물을 안치하기 위해 깊게 파냈습니다. 손이나 귀, 바닥판 등은 따로 만든 다음 몸체에 결합했습니다. 나무를 연결할 때는 접착제나 쇠못을 주로 이용했습니다.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은 다음 옻을 올리고, 금박을 입히면 불상 제작이 마무리됩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18세기 이후 사회가 안정되면서 불상 제작 수요가 줄어들고 조각승의 활동영역은 크게 줄어들었고 기존에 있는 불상을 수리하고 다시 도금하는 작업이 많아졌다. 이런 작업들을 불화를 그리는 승려들이 주관하기도 했다.

<32. 의천이 수리한 목조불상, 목조여래좌상, 의천 중수, 조선 16세기 후반 조성 1704년 중수, 국립중앙박물관>

이 불상은 언제 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무릎 폭과 어깨가 좁고 긴 허리에 늘씬한 모습은 15세기 불상의 특징과 비슷하고, 허리에 띠 매듭이 없고 불상 밑바닥에 넓은 판을 대는 방식은 조선후기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16세기 후반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처음 제작될 때의 기록은 찾을 수 없으나 1704년 승려 장인 의천이 중수하며 적은 글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처럼 불상을 만든 다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수리를 하여 오래 보존되도록 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33. 불상을 수리하며 적은 글, 목조여래좌상 중수 발원문, 조선 1704년,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1704년 금을 다시 입혔다고 적은 발원문입니다. 의천이라는 승려 장인 이름과 함께 개금불사에 필요한 황금과 오금(烏金)을 시주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34. 취겸이 조성하고 법총이 중수한 관음보살상, 목조관음보살좌상, 취겸 등 8명이 조성, 법총 등 2명이 중수, 조선 1763년 조성, 1855년 중수, 국립중앙박물관>

머리에 높은 보관을 쓴 관음보살상입니다. 머리와 몸체는 한 나무로 만들었으며 머리 위 보계와 양손 그리고 밑판을 따로 만들어 결합했습니다. 몸체 내부는 나무 속을 파서 만들었기에, 머리 안쪽에도 복장물이 들어 있습니다. 보살상을 처음 만들며 적은 글과 수리하면서 적은 글이 모두 발견되어 1763년 취겸을 비롯한 조각승 8명이 조성했고, 90여 년이 지난 1855년 법총과 혜호가 수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법총과 혜호는 19세기에 불화를 그리던 화승입니다.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불상을 새로 고치거나 금을 입히는 개금을 할 때 화승이 이 역할을 맡기도 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조성발원문, 35. 관음보살상을 조성하고 수리하며 넣은 글, 목조관음보살좌상 발원문, 조선 1763년, 1855년>

<중수발원문>

흰 종이에 먹으로 1763년 처음 보살상을 만들 때 참여한 사람들 명단과 그들의 바람을, 푸른 비단에는 붉은 글씨로 1855년 다시 수리하며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바람을 적었습니다. 중수에 임한 이들의 마음을 발원문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새롭게 고쳐 봉안하다.
목조불상은 대개 50~80년을 주기로 보수했습니다. 다시 고치고 표면에 금을 입히는 승려 장인의 경건한 마음가짐은 불상을 새로 조성할 때와 다름없었습니다. 조선 후기인 17세기부터 18세기 전반까지는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불상을 새롭게 조성하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그 뒤에는 새로 만들기보다 수리하고 표면에 금을 다시 입히는 불상 중수가 더 많았습니다. 새로운 불상 제작 수요가 줄어듦에 따라 조각승의 활동 영역은 급격히 줄어 들었고, 불화를 그리는 화승이 불상을 고치거나 만드는 일이 잦아졌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36. 나비장으로 나무를 이어 만든 보살상, 목조보살입상, 조선전기, 국립중앙박물관>

제작자를 알 수 없는 조선 전기의 보살상입니다. 이 시기의 불상은 남아 있는 사례가 드뭅니다. 보살상 옆면을 CT로 촬영해보니, 앞뒤판을 결합할 때 나비 모양 부재인 나비장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내부를 나비장으로 결구한 것은 조선전기 불상 제작 방식입니다. 풍성한 치마가 여러 겹 우아하게 몸을 감싸고 어깨에서 팔로 마치 숄처럼 천의를 두르고 있습니다. 기품있는 조선 전기 보살의 자세에서 앞으로 나아갈 듯한 운동감이 느껴집니다. 왼팔을 덮은 천의 끝자락은 나무가 아닌 삼베로 덧대어 보완한 것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37, 나무로 만든 다음 흙으로 세부를 표현한 관음보살상, 소조관음보살입상, 조선전기, 국립중앙박물관>

얼굴 표현이나 중앙에 원형 꽃무늬 장식이 있는 단순한 형태의 가슴장식은 조선 전기 보살상의 특징입니다. 나무 부재를 못으로 연결하여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흙으로 형태를 잡은 다음 옻칠과 금박을 입혀 제작했습니다. 양손은 따로 만들어 구멍에 끼워 넣었습니다. 배 앞부분의 옷주름 일부와 양옆으로 뻗치는 옷자락 중 오른쪽 부분은 나무로 만들어 연결했습니다. 제작자를 알 수 없는 상이지만 나무와 흙을 모두 자유자재로 다룬 빼어난 솜씨를 엿볼 수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38. 나무로 만든 다음 흙으로 세부를 표현한 지장보살상, 소조지장보살입상, 조선전기, 국립중앙박물관>

현재 남아 있는 사례가 매우 드문 조선 전기 소조지장보살상입니다. 제작연대, 발원자와 제작자 등의 정보를 담은 복장물이나 관련 기록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옆의 관음보살상과 마찬가지로 못으로 연결하여 속이 빈 목심을 만들고, 흙으로 지장보살상의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오른손은 높이 들어 올리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앞으로 내밀었는데, 지장보살을 상징하는 지팡이인 석장과 보배구슬을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관음보살상과 이 지장보살상은 아미타여래상의 좌우에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석(zeolite)는 경주 인근 지역에서 주로 산출되는 돌이다. 입자가 작교 표면이 매끄러우면서 단단하고 가벼워 불상의 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불석으로 만든 불상은 재료의 산출되는 경주 인근에서 제작되어 봉안할 사찰로 옮겨졌다. 해남 대흥사 석조천불좌상의 사례로 볼 때 경주 기림사에서 제작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39. 불석으로 반든 관음보살상, 석조관음보살좌상, 조선 전기, 돌(제올라이트), 국립중앙박물관>

비교적 조각하기 쉬운 무른 재질의 돌인 불석으로 화려한 영락과 옷주름, 보관을 정교하게 표현했습니다. 몸체 내부는 마치 목조불상처럼 깊게 파서 복장물을 넣을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높은 보관은 따로 만든 다음 머리 위에 씌웠습니다. 이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 보살상에서 보이는 높은 보관을 재현한 것입니다. 나무로 양손과 무릎 안쪽에 흘러내린 옷 주름을 만들어 몸체에 결합했는데, 이 옷 주름은 부식이 심해 2014년에 복원했습니다. 돌과 나무를 자유자재로 이용한 제작자의 능숙한 솜씨가 돋보이는 조선 전기 석조관음보사랑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40. 불석으로 만든 여래좌상, 석조여래좌상, 조선 17세기 후반, 돌(제올라이트), 국립중앙박물관>

경상북도 경주 일대에서 발견되는 무른 석재인 불석으로 만든 여래좌상입니다. 불석은 백색을 띠며 입자가 작고 표면이 매끄러워 ‘옥석’으로도 불렸는데, 석질이 무른 덕에 세밀한 조각이 가능했습니다. 조선초기부터 불상 제작에 불석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며, 조선 17세기 이후에는 조성 살례가 급격히 늘어납니다. 이 불상은 둥글고 높은 머리와 처진 어깨, 높은 무릎, 편평한 면이 강조된 옷 주름 표현이 특징입니다. 불석제 불상 조각에 매우 능한 조각승 승호가 17세기 후반 무렵에 조성한 불상과 매우 유사하며, 이 불상 역시 승호 또는 그와 관련된 조각승이 만든 것으로 추정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41.일본 화가의 눈에 비친 대흥사 승려, 조선표객도, 우키다 잇케이, 일본 에도 1838년, 종이에 엷은색, 한림대학교박물관>

일본 화가 우키다 잇케이가 1818년 1월 쓰시마저에 갔을 때 표류하다 일본에 머물렀던 대흥사 승려들을 만났고 20년 뒤인 1838년 11월에 그떄의 기억을 되살려 그린 그림입니다. 화면 위쪽에 대흥사 승려들과 운송하던 천불상의 일부로 추정되는 불상들이, 아랫쪽에 흰옷을 입은 뱃사공 둘이 있습니다. 짧은 편지글은 조선 승려가 우키다에게 쓴 답장인데, 어떤 제안을 완곡히 거절하는 내용입니다. 아마도 불상과 함께 일본에서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조선표객도>는 대흥사 천불상이 일본에 표류한 사실을 뒷받침하면서, 일본 화가의 눈에 비친 조선 승려 장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드문 자료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42. 일본에 표류했다 극적으로 돌아온 천불상, 대흥사 석조천불좌상, 현정 등 44명, 조선 1817년, 돌(제올라이트), 해남 대흥사>

1817년 현정을 비롯한 서울, 영남, 전라 지역 승려 44명이 협력하여 경주 일대에서만 채취되는 불석으로 만든 천불상입니다. 불타 버린 해남 대흥사 천불전을 재건하려고 승려 윤우가 현장과 다른 승려 장인들을 이끌고 경주 기림사에서 조성했습니다. 불상을 만든 다음 대흥사로 옮기던 중 바닷길에서 예기치 않게 표류하여 일본에 7개월 동안 머물다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대흥사 석조천불좌상은 19세기 초 여러 지역 조각승의 협력 양상, 불상 재료의 산출과 수급 과정, 일본 표류와 귀환 과정 등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좋은 돌에 대한 열망
경상북도 경주 인근 지역에서는 ‘불석’이라불리는 제올라이트(zeolite) 재질의 돌이 많이 산출되었습니다. 입자가 작고 표면이 매끄러우며 흡착력이 좋은 불석은 단단하지만 가볍고 조각하기 쉬워 불상 재료로 애용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불석제 불상 조각에 능한 승려 장인도 등장합니다. 조각승 승호가 대표적입니다. 목조나 소조불상은 대부분 가까운 곳에서 구한 재료로 만들었으나 특정 지역에서만 나는 불석과 같은 재료로 불상을 만든 뒤 봉안할 사찰까지 옮긴 사례도 있었습니다. 주문 제작이 끝난 다음 바닷길로 운반하던 중 멀리 일본까지 표류했다 돌아온 대흥사 천불의 사연은 원하는 재료를 구하기 위해 애썼던 승려의 마음을 전해줍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43. 조각승 진열이 만든 관음보살상, 목조관음보살상, 진열 등 12명, 조선 1720년, 국립중앙박물관>

1720년 진열과 태원을 비롯하나 조각승 열두 명이 조성한 관음보살상입니다. 불상 조성을 주도한 진열의 이름이 발원문 중 조각승 명단 가장 앞에 적혀 있습니다. 진열 앞에는 ‘상(上)’, 두번째로 적힌 태원의 이름 앞에는 ‘부(副)’가 붙어 있어서 조각승들의 위계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온화한 얼굴에 비교적 긴 상반신의 신체 비율은 1720년대 초반에 제작한 다른 불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귓볼을 타고 내려온 머리카라 두 줄이 어깨 위에서 원을 겹쳐 그리며 세 가닥으로 늘어지는 모습은 그가 조성한 다른 보살상에서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진열은 18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조각승으로, 앞 시기 조각승이 이룩한 불상 양식을 응용해 다양한 불상을 만들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44. 관음보살상을 조성하며 넣은 글, 목조관음보살 발원문, 조선 1720년, 국립중앙박물관>

운흥사가 두곳으로 갈라진 뒤 나한상을 고쳐 새로 조성할 때, 관음불상 한 구를 함께 만들어 절의 동남쪽 법운암에 봉안했다는 내용의 글입니다. 진열로 시작되는 조각승 집단을 ‘조화(雕画)라고 표현했습니다. 진열과 태원을 비롯한 일성, 치상, 처림, 청휘, 관성, 수영, 운익, 옥총, 일호, 취상 등 조각승 열두 명의 이름이 차례로 적혀 있습니다. 승려 석만은 불상 조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모든 중생이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기를 염원하는 내용을 함께 적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45. 화승이자 조각승 취겸이 만든 관음보살상, 목조관음보살좌상, 취겸 등 7명, 조선 1766년, 국립중앙박물관>

1766년 취겸 등 승려 장인 일곱 명이 조성한 관음보살상입니다. 발원문에 취겸은 ‘증명을 겸한 용안’이라 적혀 있습니다. 용안(龍眼)은 단청이나 불화를 그리는 승려인 화승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용면(龍眠)을 표기하려던 것 같습니다. 증명(證明)은 불상이나 조성이 교리에 맞는지 살펴보고 복장 의례를 총괄하는 스님입니다. 불상과 불화를 만든 승려 장인 중에는 제작자뿐만 아니라 증명을 겸할 정도로 그 역할ㅇ르 확장하기도 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46. 관음보살상을 조성하며 넣은 글, 목조관음보살좌상 발원문, 조선 1766년,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1766년 관음보살상과 법당에 봉안할 불화 3점을 함께 조성하며 적은 글입니다. 불사에 참여하며 다른 역할을 맡은 승려와 불상을 제작한 승려 장인 일곱 명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발원문 첫머리에 불사에 임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드러나 있습니다. “평소 발원을 하려면 마음을 부처님께 모아 먼저 그 마음을 재계한 다음 삼엄을 맑게 해야 합니다. 물속의 달처럼 청정한 도량에서 허공같은 마음으로 조성하니, 그것이 곧 불상이나 불화로서 절집의 주인이라 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과학의 눈으로 들여다 본 불상
오랜 세월을 견뎌 낸 불상에는 수많은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최근 컴퓨터 단층촬영과 같은 과학 기술에 힘입어 불상 내부의 비밀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불상은 어떻게 나누고 연결했을까요? 상 산의 복장물은 어떻게 봉안했을까요? 조선시대 불상 제작 당시 조각승의 생생한 손길을 과학의 눈으로 들여다 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조각승들은 불상 뿐만 아니라 사찰에서 필요한 다양한 물품을 제작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전란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명부전(지장전)이 많이 조성되었다. 지장전에서 볼 수 있는 시왕상과 동자상 등이 당시 조각승들이 제작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외에도 국왕이나 부처를 상징하는 전패나 불패, 개인적인 용도로 휴대하는 작은 불감 등도 있다.

<47. 조각승 현윤이 만든 아미타삼존상 불감, 목조아미타삼존불감, 현윤, 조선 1637년, 동국대박물관>

문을 여닫을 수 있게 만든 작은 휴대용 불감입니다. 가운데에 아미타여래상을, 그 양쪽에 보관을 쓴 관음보살상과 합장한 지장보살상을 모셔습니다. 1637년 8월에 화원 현윤이 제작했고 풍배, 성규 등이 대시주로 참여했습니다. 현윤은 17세기 전반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활동한 조각승으로 청헌, 청허 등과 함께 작업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48. 연꽃을 잡은 동자를 새긴 작은 받침대, 목조대좌, 조선 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연꽃과 노니는 두 동자가 조각된 원통 모양 받침대입니다.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것으로 무엇인가를 올려 놓을 수 있도록 윗면에 편평한 넓은 면을 만들었습니다. 뒷면은 속을 깊게 파냈습니다. 파란 물결 위에 솟아오른 연꽃 좌우에는 동자둘이 연봉오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상은 사찰의 불단이나 불교공예품에서 주로 보이지만, 목포 <달성사 명부전 지장보살좌상>과 같이 목조대좌에서도 나타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49. 불전 위쪽에 매달았던 등잔, 봉황 모양 등잔,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불전 천장 또는 닫집 부분에 매달아 내부를 장엄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봉황 모양 등장입니다. 등 위에 얕게 홈을 파서 등잔을 얹었습니다. 날개를 펼쳐 날면서 두 발을 오므려 무언가를 잡으려는 자세를 실감나게 표현했습니다. 오므린 두 발의 발톱 사이에는 구멍이 있어 원래 무엇인가를 쥐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1621년 중건한 강화도 전등사 대웅보전 닫짐에 달린 봉황은 발톱에 여의주를 쥐었는데, 이 봉황도 여의주와 같은 것을 잡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상상의 새인 봉황을 능숙하게 표현하나 승려 장인의 기량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50. 명부전에서 시왕상을 모시는 동자상과 동녀상, 목조동자입상과 목조동녀입상,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조선후기 동자상과 동녀상은 주로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명부전에서 시왕상 옆에 서 있습니다. 이는 동자와 동녀가 죽은 자를 심판하는 시왕의 시종 역할을 한다는 경전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조선 후기 승려 장인은 명부전의 주존인 지장보살상을 만들면서 동자상을 비롯한 판관상, 사자상, 장군상 등을 한꺼번에 제작했습니다. 명부전과 응진전에 모시는 상들은 다른 전각보다 수량이 많고 다양한 표현이 가능했으므로 승려 장인은 예술적 기량을 마음껏 발휘해서 이 상들을 만들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51. 나한전에 모셨던 제석천상, 목조제석천의좌상, 조선후기, 국립중앙박물관>

의자에 앉아 있는 제석천상으로 나한전 또는 응진전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후기 나한전에는 주존인 석가모니삼존불 좌우로 십육나한과 제석천 한쌍이 좌우에 놓이고, 이어 일반적으로 판관과 사자(使者), 장군이 배치되었습니다. 나한전을 구성하는 존상들은 불사가 있을 때 한꺼번에 제작됩니다. 따라서 제석천을 포함한 나한전 상들에는 중아에 봉안된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의 조각적 특징이 상당 부분 그대로 반영됩니다. 특히 얼굴에서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52. 소원하는 글을 담은 통, 목조소통, 조선 17세기, 통도사 성보박물관>

소통(疏通)은 소망을 담은 글을 적어 넣어두는 통으로, 소대(疏臺)라고도합니다. 소통은 불단에 올리는 의식구이지만, 불패, 촛대와 함께 불전을 장엄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부처를 봉안한 불단은 종교적 상징과 구원의 이미지를 입체적으로 나타내려고 다양한 도상과 무늬로 장식되는데, 소통에는 불단에 새겨진 도상과 무늬가 동일하게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소통은 장엄구로서 불단과 함께 불교의 상징성을 보여주며, 섬세하고 다양한 조각과 화려한 채색 등으로 조선 후기 불교 목조공예를 대표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53. 세상 가등한 불교의 세가지 보물의 덕성을 기리는 불전 장엄구, ‘시방삼보지존’이 쓰여진 목조불패, 조선 17세기 후반, 국립중앙박물관>

유교의 위패와 비슷하게 부처 이름을 써넣은 장엄구입니다. 연꽃받침 위에 몸체를 올리고 가운데에 틀을 마련하여 ‘시방삼보자존(十方三寶慈尊)’을 새겼습니다. ‘시방’은 열가지 방향을, ‘삼보’는 불.법.승을, ‘자존’은 자비로운 존재를 뜻합니다. 세상에 가등한 불교의 자비로운 세 가지 보물을 기린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뒷면에는 산송에 있는 전각과 그 주위로 봉황, 용, 호랑이 등을 조각했습니다. 바위산의 형태가 완전하지 않지만 수미산을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54. 보리 등의 승려 장인이 왕, 왕비, 세자를 위해 만든 전패, 목조 전패, 보리 등 3명, 조선 1701년, 국립중앙박물관>

국왕, 왕비, 세자를 위해 절에 봉안한 삼전패(三殿牌) 가운데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世)’라고 적은 전패입니다. ‘주상전하수만세’ 전패의 받침 안쪽에 1701년 9월부터 10월까지 승려 장인 보리, 정윤, 민성이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모난 받침대 위에 따로 만든 몸체와 머리 부분을 끼워 완성했습니다. 몸체는 조각으로 문양을 표현했고 뒤쪽은 그림으로 장식했습니다. 국왕의 전패에는 위엄있는 용을 표현한 반면 이 전패와 함께 만들어진 ‘세자저하수천추’를 적은 전패에는 모란을 새겨 위계에 차이를 두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무엇을 만들어 드릴까요?
사찰에는 근엄하고 위엄 있는 부처와 보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승 세계를 관장하는 명부전에서는 어린아이 모습을 한 천진난만해 보이는 동자상도 만날 수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전란으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이들의 명복을 빌고자 많은 사찰에서 명부전을 지었습니다. 동자상은 사람이 죽은 다음의 세계를 관장하는 시왕상을 보좌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한편 멀리 이동하거나 개인 수행을 위한 용도로 추정되는 작은 불감(佛龕)도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처럼 승려 장인은 봉안 목적과 공간을 고려하여 불상과 보살상뿐만 아니라 다양한 조각상과 공예품을 제작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불상과 불화를 만든 공간
불상과 불화 조성은 오랜 수련으로 실력을 갖춘 승려 장인을 초빙하는 일로 시작되었습니다. 조각승과 화승은 불사가 있는 사찰의 기존 공간을 이용하거나 때로는 임시 작업장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함께 작업하는 과정에서 수조각승과 수화승의 기술과 작품은 후배나 제자들에게 자연스럽게 전해졌습니다. 부처의 형을 표현하는 것은 일반 조각이나 회화와는 다른 매우 신성한 작업이었습니다. 불사 현장에 모여든 승려 장인은 필요한 다른 소임을 맡은 승려들과 함께 신성한 예배상을 조성할 공간을 마련했습니다. 작업 전에는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작업 중에는 바깥 출입을 삼갔습니다. 형상을 완성한다고 모든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법당에 봉안하는 예배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절차가 필요했습니다. 불교 의식집인 <조상경(造像經)>의 내용에 근거하여 불복장(佛腹藏) 의식을 마무리하면 마침내 불상과 불화는 종교적 예경의 대상으로 생명력을 갖추게 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조각승의 스튜디오
조선후기로 갈수록 조각승은 불상의 재료로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와 흙을 선호했습니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 널리 유행한 목조불은 통목조보다 여러 부재를 연결하는 접목조방식이 더 많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불상을 제작하기 위한 조각승의 선택이었습니다. 때로는 특정 지역에서만 나는 불석(沸石)과 같은 재료로 불상을 만들고자 해당 산지에서 직접 만든 다음 봉안할 사찰로 옮겨 오기도 했습니다. 불상의 조성은 수조각승을 중심으로 여러 명이 함께 하였으며, 이들은 성스러운 부처와 보살을 정성스레 만들었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3. 위키백과,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