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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태화산 마곡사, 충남지역 중심 사찰

충남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에 있는 사찰인 마곡사(麻谷寺)이다. 신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창건했으며, 고려중기 보조국사가 크게 중건했다고 한다. 국사당에는 통일신라 구산선문 중 사굴산문을 열었던 승려 범일을 모시고 있어 선종 사찰로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세조가 이곳을 다녀가 ‘영산전’ 현판 글씨를 남겼으며, 임진왜란 이후 공주 충청감영의 지원을 받아 크게 중건하였다.  오늘날 수덕사와 함께 충남지역을 대표하는 조계종 사찰로 약 70여개의 사찰을 관리하고 있다.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7곳의 사찰 중 하나이다.

<공주 마곡사>

마곡사는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계열 사찰로 가람의 배치에 형식적인 요소가 별로 없으며, 승려들의 수행을 위한 요사채 건물들을 많이 두고 있다. 마곡천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대웅보전과 대광본이 있는 화엄신앙 공간을 북원이라고 하고, 남쪽의 영산전이 있는 선(禪) 수행 공간을 남원이라고 한다. 가람배치나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전남 순천의 송광사와 비슷하다.

<공주 마곡사 위성사진, 2023년>

들어가는 길

마곡사는 공주에서 금강을 건너 온양과 예산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온양온천과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의 중간 지점 쯤에 있어 지역을 여행하던 사람들이 마곡사를 하루정도 묵었을 것으로 보인다. 마곡사 입구 주차장에서 마곡천을 따라 연결되는 길은 중간에 일주문이 있어 사찰 경내를 오가는 길로 보이지만 원래는 공주와 온양을 연결하는 주요 교통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곡사 일주문>

<마곡천과 북원>

<남원>

마곡사는 출입문으로 해탈문과 천왕문을 두고 있다. 해탈문과 천왕문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조선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해탈문 내부에는 금강역사상과 보현, 문수동자상을 모시고 있는데, 이런 경우 보통 금강문이라고 부르는데 마곡사에서는 해탈문이라고 한다.

<마곡사 입구>

<해탈문>

공주 마곡사 해탈문
마곡사의 정문으로서 이 문을 지나면 속세를 벗어나 불교 세계를 들어가게 되며 해탈을 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여 해탈문이라 한다. 중앙 통로 양편에 금강역사상과 보현, 문수 동자상을 모시고 있다. 고종 1년(1864)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천왕문>

공주 마곡사 천왕문
천왕문은 해탈문에 이어 마곡사의 두번째 대문으로 조선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안쪽에는 동서남북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인 사천왕상이 안치되어 있다. 사천왕은 천상계(天上界)의 가장 낮은 곳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할하는 신적 존재로, 부처님이 계신다는 수미산의 중턱 사방을 지키면서 인간들이 불도를 따라 사는지 살피어 그들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해탈문과 천왕문을 지나면 대웅보전과 석탑이 있는 북원 앞으로 마곡천이 흐르고, 그 위에 극락교라는 지나 북원으로 들어간다. 북원 입구에 누마루가 있는 강당을 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별도 건물없이 넓게 개방된 구조를 하고 있다.

<마곡천과 극락교>

<계곡에서 보이는 남원>

<계곡에서 보이는 북원>

<북원 마당에서 보이는 극락교>

<대웅보전 아래 계곡>

<마곡사 극락교>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산사는 한반도 남쪽 지방에 위치한 통도사, 부석사, 봉정사, 법주사, 마곡사, 선암사, 대흥사 7개 산지승원을 일컫는 것이다. 7세기에서 9세기에 창건된 이들 7개 사찰은 신앙과 수행, 일상생활을 중심으로 한 한국 불교의 역사적인 발전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한국 선불교의 특징인 자금자족이 가능한 사찰 관리, 승려 교육, 수행과 교리 학습 뿐만 아니라 한국 불교의 무형적, 역사적 측면도 확인할 수 있다. 경내에는 한국의 다양한 불교신앙이 수용되어 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다수의 구조물과 전각, 유물, 문서 등은 한국불교의 표용적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산사는 조선시대 억압과 전란으로 많은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신성한 장소로서, 신앙과 일상적인 종교적 실천이 살아 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마곡사 북쪽 권역(북원), 교화공간

북원은 고려시대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서쪽에 응진당, 조사당 등 불전을, 동쪽에 요사채인 심검당 등을 두고 있다. 고려 때 중건한 전각들은 임진왜란 때 대부분 불타버렸으며, 조선후기 효종 때 크게 중건하여 현재와 같은 가람배치를 이루었으며 그뒤 화재로 다시 소실된 것을 중건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0

<마곡사 북원>

마곡사 오층석탑(보물)은 2층 기단 위에 오층 탑신을 올려 놓은 오층석탑이지만 세부적으로는 기존 석탑과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탑신 몸돌에는 부처, 보살 등을 조각해 놓고 있으며, 청동으로 만든 머리장식은 중국 원나라 또는 청나라에서 세운 라마교 불탑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고려말 원나라와의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물로서 의미가 있다.

<마곡사 오층석탑(보물)>

대광보전(보물)은 마곡사의 주불전으로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로 상당히 큰 규모의 불전이다.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화려한 다포계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내부 불단은 서쪽에 배치되어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닫집을 꾸며 엄숙함을 더해주고 있다. 대광보전의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 알 수 없고,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 순조 때(1813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마곡사 대광보전(보물)>

내부에는 비로자나불상을 단독으로 모시고 있는데 동쪽을 향하고 있다.  불상을 모시는 불단에는 닫집을 설치하였다. 전체적인 내부 모습은 부석사 무량수전을 연상시킨다.

<대광보전 내부>

대웅보전(보물)은 조선후기 효종 때(1651년) 각순대사가 마곡사 불전들을 중건할 때 다시 지은 건물이다. 불교 경전을 모시는 대장전으로 지은 건물인데 그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석가여래, 약사여래, 아미타여래를 보시는 대웅전으로 바뀌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다포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다. 건물내부는 뚫려 있는 하나의 공간으로 넓고 시원한 느낌을 준다.

<대웅보전(보물)>

<대웅보전 내부>

응진전은 선종 사찰을 성격을 잘 말해주는 수행을 하고 있는 승려들을 중요시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마곡사는 크고 작은 암자들을 많이 두고 있으며, 다른 사찰에 비해서 승려들의 수행공간인 요사채를 상당히 많이 두고 있다. 마곡사와 같은 선종 사굴산문 계열인 순천 송광사와 비슷하다. 응진전 현판은 강세황이 쓴 글씨라고 한다.

<응진전과 조사당이 있는 공간>

<응진전>

공주 마곡사 응진전
이 건물은 부처님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16나한은 중생에게 복을 주며, 중생을 바른 법으로 인도하기를 원하는 성자를 말한다. 철종 3년(1852)에 중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 전면에만 창호를 달아 출입하도록 하고, 나머지 삼면은 회사벽으로 마감한 특징이 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응진옆 요사채인 백범당>

조사전은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불전이다. 원래 국사당에 모셔던 자장, 범일, 도선, 보조국사 영정을 이곳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조사전>

요사채 건물인 심검당은 대광보전 앞 마당 동쪽편에 있는 ‘ㄷ’자 모양을 하고 있는 건물로 조선후기 상류층이 살았던 살림집을 연상시킨다. 마당을 향하고 있는 본채는 앞면 5칸 규모이며 양쪽에 온돌방들이 있는 날개채가 달려 있다. 조선후기 정조 때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건물 형태로 볼 때 거의 다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건물 규모는 상당히 큰 편이며 큰 사찰 요사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심검당>

<뒤쪽에서 본 모습>

고방은 2층으로 된 창고 건물로 심검당과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목판 등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로 보인다.

<고방>

<심검당 안쪽 요사채>

<심검당 앞 요사채>

<템플스테이 공간>

<요사채 공간>

공주 마곡사 북쪽 권역(북원)
마곡사 북원은 대광보전과 오층석탑이 있는 교화의 공간이다. 마곡사는 태화산 산골짜기 평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경내에는 모두 19동의 전각과 12개의 암자가 있는데, 그 위치에 따라 남원과 북원으로 구분하고 있다. 마곡사는 약 8000여 평의 면적에 경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마곡천 계곡을 사에 두고 남북으로 나뉘어 있어 마치 두 개의 사찰이 자리한 듯 보인다. 이 중 북쪽 권역인 북원에는 대웅보전, 대향각, 응진전, 범종각이 있고, 승려들의 생활하는 공간인 심검당, 고방, 요사 및 백범 김구의 자취가 남아 있는 백범당과 향나무 등이 있다. 마곡사의 가람이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배치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을 보면, 1650년 각순 스님이 공주목사 이태연의 도움을 받아 폐허가 된 절을 다시 지어 북쪽 구역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이 무렵 예산 안곡사에서 범종을 보내왔고, 1741년에 법당의 중종을 만들었다. 오층석탑의 북쪽에 대광보전을 짓고, 다시 축대 위에 대웅보전이 자라한 ‘일탑쌍금당’식의 배치는 매우 휘귀한 사례이다. 마곡사는 한때 승려가 천 명에 이를 정도로 번성하였지만 1782년에 화재로 대법당을 비롯한 천여 칸의 건물이 불아 타는 사건이 있었다. 그 다음 해에도 화재가 일어나 대광보전도 소실된 채 탑과 불상, 대웅보전만 남게 되었다. 이에 제봉당 채규 스님이 중심이 되고 충청도관찰사 심풍지 등이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1785년에 대광보전을 다시 세우고 1788년에 표암 강세황이 쓴 ‘대광보전의 현판을 걸었다. 대웅보전은 본래 대장경을 보관하는 ‘대장전’이었는데 이 시기에 부처를 모신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다. 1791년 응진전, 1789년에는 심검당도 지었다. 그 후 수차례의 보수 과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마곡사 남쪽 권역(남원), 수행공간

마곡사 남원은 영산전을 중심으로 요사채와 강당들이 배치되어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주불전에 해당하는 영산전에는 천불상을 모시고 있으며,  맞은편에는 큰 규모의 강당인 흥성루가 있다. 마당 양쪽으로 승려들의 수행공간인 요사채 건물이 마주보고 있다. 남쪽 건물은 수선사, 북쪽 건물을 매화당인데 북쪽 건물의 규모가 큰 편이다. 매화당 뒷편 마당에는 신도들을 위한 공간이라 할 수 있는 명부전이 있으며 그 뒷편 언덕에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다. 계곡방향으로 열려 있는 북원과는 달리 담장이 둘러져 있다. 흥성루 아래 큰 길은 사람의 통행이 많았던 교통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곡사 남원>

영산전(보물)은 조선후기 효종 때(1651년) 각순대사가 마곡사를 중건할 때 다시 지은 불전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내부에는 천불을 모시고 있어 천불전으로도 불린다. 마곡사 남원(남쪽영역)에서 주불전 역할을 하고 있다. 영산전에 모셔진 칠불좌상은 조선후기 단응과 열아홉명의 조각승의 제작한 작품으로 동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힌다.

<공주 마곡사 영산전(보물)>

내부에는 칠불좌상과 천불상이 모셔져 있다. 칠불좌상은 수조각상 단응이 1681년 2월부터 6월까지 열아홉 명의 조각승을 이끌고 제작한 불상이다. 일곱 부처 중 석가모니로 불리는 이 목조여래좌상은 오른손을 무릎에 댄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크기도 다른 여섯구의 불상보다 10센티미터 정도 더 크다.

<영산전 내부>

강당건물인 흥성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강당건물이다. 보통 강당 건물은 법회가 열리는 공간이자 신도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이다. 수행공간에 있는 마곡사 강당은 신도들보다는 수행을 하는 승려들이 주로 사용하는 장소로 보인다.  누각처럼 바깥 계곡과 큰 길을 내려다 볼 수 있지만 주로 판문으로 닫혀 있다.

<마곡사 흥성루>

<바깥에서 본 모습>

매화당은 ‘ㄷ’형 건물로 앞면 6칸, 옆면 6칸의 상당히 규모이다. 승려들이 조용한 분위기에서 수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보인다.

<매화당>

<뒷편에서 본 모습>

<바깥에서 본 매화당>

수선사는 마당 남쪽에 있는 요사채 건물로 ‘ㄱ’자형 한옥 형태를 하고 있다. 일반한옥과는 달리 부엌이 보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수선사>

<바깥에서 본 수선사>

매화당 뒷편 마당에는 지장보살을 모신 명부전이 있으며 언덕에는 산신각이 있다. 명부전과 산신각은 신도들을 위한 공간으로 매화당과는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명부전>

공주 마곡사 명부전
이 건물은 지장보살과 염라대왕을 비롯한 시왕을 모신 곳으로 1939년에 건립되었다. 지장보살은 불교에서 구원의 상징으로, 모든 인간을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맡은 보살이다. 시왕은 인간이 죽은 후에 지옥에서 죄가 크고 작음을 가리는 10명의 왕으로 염라대왕은 그 중 다섯 번째 왕이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명부전 뒷편 언덕에는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 건물은 원래 자장, 범일, 도선, 보조국사를 모신 국사당이었는데 북원에 조사당을 지으면서 산신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곡사 산신각>

공주 마곡사 국사당(산신각)
마곡사 국사당은 자장.범일.도선.보조(지눌) 등 신라~고려 시대 최고의 승려인 국사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조선후기까지 ‘삼국사명당’이라 하여 세 분의 국사만 모시다 보조국사의 영정을 더하였다. 신라 때 자장율사가 마곡사를 지은 후 도선이 보수하였으며 신라 말에 범일이 절을 다시 세웠다는 설화에도 나타나듯 모두 마곡사의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고려 시대에 보조국사 지눌은 폐허가 되어 도둑들이 숨어 지내던 마고사 터에 와 춤을 추며 “금방울 소리가 소나무 사이에서 울린다.”라는 시를 읊고 절을 새로 지었다고 한다. 그 후 마곡사의 승려들이 옛 고승의 뜻을 기리기 위해 개울 서남쪽에 작은 사당을 세운 것이 국사당의 기원이다. 지금의 건물은 1796년에 지은 것이며, 1868년에 ‘삼국사당’ 현판을 걸었다가 현대에 산신도를 두면서 ‘산신각’으로 바뀌었다. 국사당 옆에 천 년이 된 잣나무가 있었는데, 조선 후기에 바람에 쓰러져 그 나무를 영은암의 기둥으로 썼다고 한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산신각에서 내려자 보이는 북원>

공주 마곡사 남쪽 권역(남원)
마곡사 남원은 영산전이 있는 수행의 공간이다. 마곡사는 마곡천을 사이에 두고 남원과 북원의 두 공간으로 나뉜다. 북원의 대광보전과 남원의 영산전을 중심으로 독립적인 사찰이 두개인 것처럼 보인다. 북원과 남원 양쪽에 불전, 요사, 누각 등 사찰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건물이 각각 배치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남원은 마곡사의 입구로 오른쪽은 해탈문을 지나 천왕문으로 연결되고 왼쪽은 영산전과 명부전,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가람 배치는 1920년에 발간된 <고적조사보고>를 통해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의 배치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남원은 영산전을 주불전으로 삼고 있다. 영산전의 앞에는 ‘홍성루’가 있고 북쪽에는 매화당, 남쪽에는 연향각이 있다. 매화당과 연향각은 각각 건물을 담장으로 둘러싸서 외부에서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건널 수 있는 다리가 현재와 비교해 보면 훨씬 동쪽에 있다. 즉, 현재의 종각 부근에 다리가 있어 천왕문을 지나면 동쪽으로 이동해야만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마곡사 석가모니불 괘불탱(보물)은 높이 11m, 너비 7m에 이르는 대형 괘불로 17세기에 조성된 작품이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6대보살, 10대 제자, 제석천과 범천, 사천왕, 천자, 아수라, 용왕 등이 대형 화면에 가득히 그려져 있다. 남아 있는 글에 따르면 시주자를 비롯한 여러 승려와 일반인들이 제작에 참여했으며 석가탄신일과 수륙재, 49재에 쓰였던 그림이라고 한다. 전체적인 형태, 화려한 색채 등이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공주 마곡사 석가모니불 괘불탱(보물)>

마곡사의 연혁
마곡사는 100여 개에 이르는 충남.대전.세종 지역 조계종 사찰을 관장하는 대본산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 7개 사찰 중 하나이다. 태화산에 자리를 잡은 마곡사는 봄이 가장 아름답다고 하여 “봄은 마곡사, 가을은 갑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이곳은 산과 물이 ‘쌍태극’을 이루는 명당이라 전란이나 흉년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마곡사는 백제 의자왕 때 자장율사가 세웠다고도 하고 신라의 보조선사 체징이 세웠다고도 한다. ‘마곡’이란 말의 유래는 보철화상이 설법할 때 계곡에 모여든 사람들이 마치 삼밭을 이룬 것 같아 ‘삼골’, 즉 ‘마곡(麻谷)’이라 하였다는 설과 신라의 고승 무염이 중국 마곡사의 법을 이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고려 시대에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 오층석탑과 대광보전의 본존불이 있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 불교는 힘을 잃었지만, 마곡사에는 왕실의 손길이 이어졌다. 1465년경 세조가 찾아와 직접 쓴 ‘영산전’이란 글을 내리며 타고 왔던 가마를 남겨 주었고, 공주목사와 충청감사는 재물을 지원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의 집결지이기도 했는데 전란으로 절이 황폐해지자 1650년에 ‘각순’이란 스님이 절을 다시 세워 제 모습을 찾았다. 이때 승려들을 모아 놓고 종이를 생산해 나라에 진상하고 기와를 구워 살림을 꾸려갔다. 1782년 큰불이 나서 건물이 모두 탔지만 조정의 지원을 받아 빠르게 제 모습을 찾았다. 1970년 정조의 아들 순조가 태어났을 때에는 마곡사에서 천일기도를 올린 덕분이라 하여 승려들을 힘들게 했던 종이를 진상하는 공역을 없애는 동시에 충청도의 으뜸 사찰로 지정하였다. 그 위상은 일제강점기에도 그대로 이어져 전국 31본산 중 하나가 되었다. 이곳 마곡사에는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데 1898년에 23세의 백범 김구도 마곡사를 찾아와 자취를 남겼다. 마곡사에는 19동의 전각과 12개의 암자가 있다. 마곡천 물길을 사이에 두고 남쪽에는 영산전 등 수행 공간이 있고 북쪽에는 대광보전 등 교화 공간이 있다.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출처>

  1. 안내문, 공주 마곡사, 2023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마곡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4. 위키백과,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