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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화성박물관] 수원화성을 건설한 사람들

수원 화성의 건설은 1789년(정조13) 수원도호부의 관아가 있던 읍치를 화산에서 현재의 위치인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면서 시작하였다. 수원지역은 조선시대 육상교통로 중 가장 통행량이 많고 중요했던 제주대로의 핵심으로 삼남지방인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서 한양을 올 때 반드서 거쳐야 했던 지역이다. 수원에 화성이 건설되기 전에는 수원부 읍치는 융건릉이 있는 화산일대였으나 정조가 자신의 개혁정치를 펼치고 노후에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머물기 위해 대규모 신도시를 건설하였다. 신도시 수원은 한양을 방어하는 성곽도시의 성격과 함께 시장의 설치, 대규모 둔전의 개발 등 다양한 노력으로 경제적으로 자급능역을 갖춘 대규모 도시로 빠른 시일내에 정착할 수 있었다.

수원화성박물관은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원화성과 신도시 건설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문박물관으로 세워졌다. 전시 내용으로는 화성을 건설한 주역인 정조와 정약용, 채제공 등의 인물과 관련된 유물을 비롯하여 『화성성역의궤』 기록된 자료를 바탕으로 수원화성 축성과 행궁 건설, 시전을 설치를 통한 상업발전, 둔전개발을 통한 농업생산력 확보, 수원화성의 문화 등을 보여준다.

황금갑옷을 입은 정조
정조는 조선시대 국왕 중에서 가장 많은 행차를 한 분이었다. 백성들과의 직접 만남을 통해 사회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고자 하는 의도와 장엄한 행차를 통해 국왕의 위엄성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정조의 행차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1795년 윤2월의 화성행차였다. 어머니 혜궁궁 홍씨의 회갑연을 위한 화성행차는 약 6,000여 명이 동원된 대규모 행사였다. 이 행차에 정조는 강력한 왕권의 상징적 표현으로 ‘황금갑옷’을 입고 화성에 입성하였다. 이는 화성의 완공(1796)을 앞두고 왕조의 중흥과 그 권위를 통하여 관료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계몽 군주로 백성들에게 믿음을 주어 왕권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자 함이었다. 행렬 앞에 세우는 대장기 ‘둑纛’과 용이 그려진 대형 깃발 ‘용기龍旗’ 역시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정조의 대표적의 행차였던 1795년 혜경궁 홍씨 회갑연을 위한 화상행차를 재현하고 있다.


정조가 그린 파초그림, 보물, 18세기 후반, 복제본,

왼쪽 위에 정조의 호인 ‘홍재弘齋’ 낙관이 있다. 이 파초 그림은 시화와 학문을 사랑한 정조의 면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정조가 그린 국화그림, 보, 19세기 후반

조선시대 법전의 정비
조선의 건국이념과 통치 질서가 담길 법전 편찬의 논의는 개국 초기부터 활발히 진행되었다. 삼봉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비롯하여 『경제육전經濟六典』, 『육전등록六典謄錄』을 거쳐 성종대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비로서 법전체계가 집대성되었다. 이후 영조대에 이르러 조선후기의 사회적인 변화상을 반영하여 『속대전續大典』이 편찬되었다. 이러한 법전들은 별책으로 되어 있고 그 외에도 여러 법전서들로 나뉘어 있어 법제를 운영하는데 불편이 많았다. 그래서 정조는 『속대전』의 미진한 부분을 보완하고 법전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새로운 법전 편찬을 명하여 『대전통편大典通編』을 완성하였다. 이는 『경국대전』 이후 300여 년 만에 조선의 법전을 재정비하고 더불어 정조의 통치이념과 체제정비를 확고히 하여 왕권강화의 기틀이 반석위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1394년(태조3) 3월 삼봉 정도전이 왕에게 지어 바친 사찬(私撰)법전을 1395년 처음 간행한 초간본으로 현전하는 유일본이다. 6전(六典)에 따라 조선왕조를 다스리는 경국의 기준을 종합적으로 서술하였는데 그 내용은 『삼봉집三峯集』에도 수록되어 있다. 주나라 제도인 『주례周禮』의 6전 체제를 모범으로 삼았으나, 조선의 현실에 맞게 조정하였다. 6전 앞에는 치국治國의 요지로서 정보위正寶位, 국호國號, 정국본正國本, 세계世界, 교서敎書를 서론으로 실었다. 이 법전은 개인이 저술했지만 조선왕조의 건국이념을 정리, 제시한 국가운영의 실질적인 설계도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뒤에 『경제육전』과 『육전등록』 등을 거쳐 성종 때 『경국대전』이 편찬되는 모체가 되었다.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최고의 법전으로 국보급 문화재로 평가된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경국대전經國大典,

경국대전』은 세조의 명으로 편찬에 착수해서 4차례의 편찬과 수정을 거쳐 1485년(성종16)에 완성하여 반포한 조선왕조 통치체제의 대강을 규정한 법전이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모범 삼아 6전 체제를 따랐다. 이 책은 1471년(성종2) 초주갑인자로 인출한 보물 제1521호의 『경국대전』 권3 「예전禮典」과 동일본으로 현재까지 알려진바 없는 권4 「병전兵典」 1책과 권5 「형전刑典」과 권6 「공전工典」을 합친 1책이다. 조선시대 법제사 연구와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가 있는 보물급 문화재로 평가된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홍재전서(弘齋全書),

1814년, 조선22대 국왕 정조의 시문집. 정조의 사상 및 당시 사회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자료이다.

정조어필 파직비망기 (正祖御筆 罷職備忘記), 

1796년(정조20) 2월 12일 좌의정 채제공을 파직하는 비망기이다. 정조가 채제공이 제자 유하원을 유배시킬 때 채제공이 유하원을 두둔하자 격분한 정조는 직접 어필로 파직을 명해버렸다. 며칠 뒤 채제공이 오히려 상소를 올려 견책을 청하자 정조는 평소 채제공에 대한 돈독함과 믿음이 커서 책망한 말도 지나쳤다며 자신의 사사로운 정을 알아달라는 비답을 내렸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정조의 4대 개혁정책 – 1778년 경장대고
정치를 바로잡고 백성들이 살기 좋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개혁을 시도했던 정조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기득권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옳은 대로 행동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民産 백성들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고, 人 인재를 양성하고, 戎政 국방을 개혁하고, 財用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하겠다.

개혁이 기반도시 수원
1789년(정조13) 7월15일 정조는 수원도호부의 관아를 비롯한 행정기구와 읍치의 중심지를 팔달산 아래로 이전하였다. 이 지역은 조선 6대로의 하나인 제주대로의 핵심지역이자 충청 전라 경상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역이다. 조선후기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 받는 유형원은 자신의 저서인 『반계수록』에서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성한다면 서울을 방비하는 대도회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정조는 유형원의 글을 읽고 수원도호부의 중심지로 삼게 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수원화성 고지도. 오늘날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다.

팔달산 아래의 개방된 장소에 자리잡은 명실상부한 경제 신도시
정조가 수원신도시를 조선의 제2도시로 건설한 것은 바로 자신의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기반도시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개혁 정책을 위해 수원 지역에 농업과 상업이 발전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여 자급자족의 도시로 만들고 장용외영을 설치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국방 강화의 중심지역으로 성장시켰다. 나아가 자신이 국왕의 지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평생 거처하며 개혁을 완수할 수 있는 수도와 같은 도시를 만들고자 하였다. 결국 정조는 수원부 읍치를 사방으로 열려있는 팔달산 아래의 개방된 장소로 옮기고 명실상부한 경제도시로 키움으로써 자신의 꿈과 이상도 함께 실현하고자 하였다. <출처: 수원화성박물관>

화성유수부로 승격
이로 인해 1789년(정조13) 7월부터 9월까지 약2달 동안 각종 관청과 244호의 집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화성 축성 계획이 세워지고 1793년(정조17) 수원이 도시 이름도 화성으로 바뀌면서, 화성유수부로 승격되었다. 유수부는 수도 서울을 방비하는 군사 대도시로 전국에 개성, 강화, 광주, 화성 4곳에 존재했으며, 그 중에서도 화성은 수도인 한성부 다음으로 큰 도시로 성장해 갔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수원부기복도,

지금 보는 모형은 수원이 옛 읍치에서 신읍으로 옮겨간 이전 경로를 보여주고 있다. 남쪽이 화산 아래에서 북쪽 팔달산 아래로 이전되면서 읍성이었던 화성은 유수부로 승격된다.

묘(墓)에서 원(園)으로 격을 높이다.
조선시대 왕실 무덤은 왕과 왕비의 경우 능陵, 세자와 세지빈 그리고 왕의 친어머니인 경우 무덤은 원園, 왕족이지만 세자가 아닌 경우 묘墓로 불렀다. 양주 배봉산(현 서울시 동대문구 전농동 서울시립대학교 뒷산)에 있던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은 수은묘로 불리며 세자로 대우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영조가 사도세자의 장례를 치르면서 일반 왕자의 예법으로 치르라고 지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도세자는 왕실 및 백성들에게 세자의 대우를 받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정조 역시 정통성이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정조는 1776년 3월 즉위하면서 사도세자의 무덤을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여 세자의 지위를 회복시켰고 경모궁(현 서울대학교병원 자리) 이라는 사당도 만들었다. 그로부터 13년의 세월이 흐른 1789년, 정조는 다시금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의 읍치가 자리잡고 있던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이름도 현명하신 분을 융성스럽게 받든다는 이미를 담은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면서 정통성 회복을 꾀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동궁보묵(東宮寶墨), 1743년, 복제본,

사도세자가 8세때 쓴 글씨를 모아 엮은 필첩筆帖이다. 표제는 ‘동궁보묵’이고 내용은 해서체 큰 글씨로 쓴 “군신유의君臣有義, 군의신충君義信忠, 군신지분의君臣之分義”이다. 말미에 첨부된 장악원첨정 이익준의 발문에는 사도세자가 자신의 아들 갑득에게 써 준 것을 1746년 장첩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사도세자 글씨의 필획이 정대하고 자체가 정엄하여 성적의 기상이 있다고 감상평을 남겼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개혁 의지를 천하에 알리다.

아!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즉위 첫날인 1776년 3월10일 정조가 한 말이다. 여조는 세손이 정치적 대립 구도 속에서 뒤주에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로 남아 있을 경우 왕위 계승이 어려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세손을 일찍 죽은 첫째 아들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그러나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공표하였다. 이는 친아버지 사도세자의 정통성을 복권시키기 위한 준비이다, 반역죄로 죽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처지때문에 발생할 지도 모를 왕위의 정통성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사도세자 영서 (思悼世子 令書), 1757년, 필사본,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 대신 국정을 운영하던 1757년 조돈을 경기관찰사에 임명한다는 명령서이다.

용주사 상량문,1790년,

정조는 1790년 용주사를 창건하고 사도세자의 원찰로 삼은 뒤 영의저어 채제공에게 직접 상량문을 짓고 쓰도록 명하였다. 용주사의 창건내용과 국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내용 등을 담았다.

화성을 만든 대표 실학자 – 다산 정약용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의 완성자로 평가된다. 정약용은 실학에 관심을 가진 집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성리학만이 아니라 토목학과 건축학도 공부하였다. 이러한 능력으로 정약용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이전할 때 한강을 건너기 위한 배다리를 설계하였다. 그리고 31세의 나이에 정조의 명을 받아 화성 축성 계획을 세웠다. 정약용은 기존의 축성을 바탕으로 이제까지 조선의 성곽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시설물을 설계하였다. 뿐만 아니라 편리한 시공을 위해 거중기, 유형거 등 여러가지 기구들을 설계하여 기술자들의 안전과 축성비용을 절감하게 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반계수록(磻溪隨錄), 1770년, 목판본

조선후기 실학의 선구자인 반계 유형원의 글을 모은 문집이다. 이 책에는 정조가 수원의 치소를 팔달산 아래로 정하는 데 영향을 준 글이 실려 있다.

축성을 계획하다.
1790년 강유는 사도세자가 묻힌 곳이며, 서울과 통하는 길목인 수원에 성 쌓기를 정조에게 건의하였다. 정조는 수원 신도시의 건설로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치 개혁 의지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경험을 토대로 조선 성곽의 문제점을 해결함과 동시에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축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위해 서학을 익힌 규장각 소속의 신진 관료인 정약용에게 축성 계획을 지시하였다. 정약용은 정조의 의중을 꿰뚷고 중국과 일본의 성제城制는 물론 중국을 통해 입수한 서양 과학 기술 서적을 연구하여 1792년 성을 쌓기 위한 이론과 기술을 정리한 「성설城說」을 정조에게 올렸다. 정조가 축성의 기본 방향을 밝힌 「어제성화주략」에는 그의 의견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목민심서(牧民心書), 1906년, 연활자본,

정약용이 지방관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히고 지방관리들의 폐해를 비판한 책.

흠흠신서(欽欽新書), 1907년, 신식활자본,

정약용이 살인 사건의 조사.심리.처형 과정이 매우 형식적이고 무성의하게 진행되는 것을 비판하며 저술한 형법서


지지대비 탁본,

수원시 장안구 파장도 지지대고개에 있는 지지대비의 탁본이다. 정조가 현륭원 참배후 돌아갈 때 이곳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게 하고 현륭원 쪽을 뒤돌아 보며 아쉬워하면서 떠나지를 못했다고 한다. 이 비석은 1807년(순조7)에 화성어사 신현이 건립하였는데, 홍문관 제학 서영보가 비문을 지었고 윤사국이 글씨를 썼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조직 운영의 묘를 살리다.
정조는 화성을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건설하여 비용과 노력을 줄이고자 했다. 이를 위해 공사 총 책임자인 총리대신 채제공과 화성유수 조심태를 비롯하여 약347명으로 이루어진 성역소(城役所)라는 임시 기구를 만들어 현장을 관리 감독하게 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완벽한 공사실명제의 추진으로 공사에 대한 책임감을 높이다.
기술적 지식을 가진 장인을 직접 통제하는 ‘패장’이라는 직책을 두어 공사의 질을 높였다. 또 오랫동안 현장에서 일을 해온 석수와 목수들은 ‘편수’라는 이름으로 편제하여 조정에서 나온 감독관들을 도와 현장을 지휘하도록 했다. 기술자들을 천시하던 기존의 풍토를 없애고 국왕을 비롯한 관료들이 기술자들에 대한 우대를 실시하자 이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였다. 또한 팔달문, 장안문 등 화성의 각 성문에는 공사책임자, 중간간부, 기술자의 이름을 새겨 공사에 대한 채임감을 높였다. 더불어 축성공사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는 참여한 기술자와 막일꾼들의 이름을 모두 적어 놓아 완벽한 공사 실명제를 추진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성역소(城役所)
성역소는 화성 성역을 주관했던 특별기구로 총책임자인 총리대신(總理大臣) 채제공과 현장에서 공사책임을 맡은 감동당상(監董堂上) 조심태, 공사 전반의 실무업무를 주관한 도청(都廳) 이유경이 중심이었다. 도청은 공사의 기술에 관한 제반 문제나 감독관, 패장 및 장인을 통솔하는 업무를 주로 맡았다. 도청 하위 조직으로 공사 관리 분야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은 책응도청(策應都廳)인데 주로 돈이나 자재의 출납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으며, 책응도청 아래 감관(監官)이 있어 지시에 따라 일을 수행하였다. 공사 기술 분야를 책임지고 있었던 것은 별감동, 별간역, 감동, 간역으로 이들은 공사의 기술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감독 관리였으며, 그 아래 패장으로 하여금 실질적인 관리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기술분야의 하부 조직에는 각종 장인이나 단순한 노역자들이었던 모군(募軍)이 포함되어 있어 축성공사의 실질적인 작업을 담당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수원화성 팔달문 공사실명판, 공사 책임자, 중간간부, 기술자의 이름이 새져겨 있다.

효율적인 관리체제로 완성되는 화성
정조는 국가의 큰 공사에서 무임으로 백성을 징발하던 관행을 버리고 축성공사에 동원된 일꾼들에게 임금을 지불하였다. 그리하여 일꾼의 사기가 올라 작업기간이 단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튼튼한 성을 쌓을 수 있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운영일꾼들의 사기를 북돋우다.
17세기 이후 전통적인 농업 위주의 생산 체계가 무너지고 상업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농토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은 일감이 많은 도회지로 나와 임금 노동자가 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수는 늘어갔다. 정조는 이러한 사회현상을 고려하여 국가의 큰 공사에서 무임으로 징발하던 관행을 버리고 축성공사에서 동원된 일꾼들에게 일하는 형태와 날자를 따져서 임금을 지불하게 하였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왕세자 책봉기념 세금탕감 윤음(綸音),

1784년 정조가 문효세자를 책봉한 기쁨을 백성과 함께 누리기 위해 각 도에서 납부해야 할 신포身布와 군포軍布를 절반으로 탕감한다는 윤음이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화성 축성 당시 동원된 인원과 재정, 조직 등과 관련된 내용은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전국에서 동원된 석수, 목수, 미장이와 같은 장인들이 직종별, 지역별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장인들의 이름, 일한곳, 날짜, 능력에 따라 다르게 주어졌던 임금과 관련된 정보도 담겨 있다. 또 화성 건설 과정에서 수용된 집이나 논밭에 대한 보상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결과 일꾼들의 사기가 크게 올라가 본래 10년으로 계획된 작업 기간이 33개월로 단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튼튼한 성이 완성되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

홍재전서(弘齋全書),

 1814년, 권63에 정약용이 화성을 쌓을 때 유의할 점으로 지적한 ‘성화주략城華籌略’이 실려 있다.

화성성역의궤, 1801년, 영인본,

화성축성에 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1796년 9월에 편찬을 시작하여 그해 11월에 원고가 완성되었고, 1801년 9월에 간행되었다.

프랑스판 화성성역의궤, 1899년 활자본,

파리동양어대학도서관 소장본을 프랑스 민속박물관장 Henri Chevalier가 홍종우에게 번역을 의뢰해 간행한 책.

거중기, 화성건설에 이용하다.
거중기는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만든 것이다. 정약용이 저술한 「기중도설(起重圖說)」에 거중기에 대하여 그림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실려 있으며 1794년 화성을 건설할 때 처음으로 사용하여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정약용이 거중기를 만들게 된 것은 그의 창의적인 생각과 정조가 그에게 왕실에 있던 서양과 중국 기술 서적을 연구하게 한 결과였다. 명나라 때 중국에 온 선교사 겸 과학자 요한네스 테렌츠(Joannes Terrenz)가 지은 「기기도설(奇器圖說)」이 참고가 되었다. <출처:수원화성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