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궁박물관특별전,"종묘(宗廟)"] 제향공간과 건축

2014년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종묘(宗廟), Jongmyo, The Royal Ancestral Shine” 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전시회에서는 조선시대 국가를 상징하는 종묘(宗廟)의 유.무형 문화유산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서 종요의 역사, 건축, 유교 제례 문화에 대해서 살펴볼 수 좋은 기회가 되었다. 전시내용은 역대 국왕와 왕비의 위패를 모신 정전을 비롯한 종묘 건축의 특징과 의의, 종묘에 위패를 모시고 절차와 종묘 제례절차, 각종 제기, 종묘제례악 등 종묘와 관련된 다양한 내용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종묘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공간으로 건축이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면서 절제된 모습을 보여준다. 박석을 깔아놓은 월대와 기단, 신로를 표시하는 길, 단청을 비롯한 장식이 거의 배제된 건축물 등 단순한 구성에서 종묘 건축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종묘는 정문인 외대문에서 정전과 영녕전까지는 신로로 연결되어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국왕이 제를 잠시 쉬면서 선왕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공간인 망묘루와 향대청이 있고, 그 안쪽에는 국왕과 세자가 목욕재계를 하면서 제사준비를 하는 공간인 재궁,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과 제정, 수복방 등이 있다.

종묘에서 중심이 되는 건물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정전과 영녕전이다. 정전은 태조와 재위중인 국왕의 4대조상, 사대부 가문에서 불천위조상에 해당하는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있고, 영녕전에 정전에서 모셨던 신주를 옮겨 모시는 공간이다. 종묘 정전은 국보227호로 지정된 건축물 총길이 101m의 긴 건물이며, 영녕전은 보물821호로 지정되었으며 중앙에 정전4칸, 좌우에 협실6칸씩을 두고 있다. 정전 앞 마당에는 역대국왕의 공신을 모신 공신당과 주요 신들을 모신 칠사당이 있다.

“종묘는 조종(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곳이요,
궁궐을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을 내는 곳이며,
성곽(城郭)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곳으로,
이는 모두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하는 것입니다.”
- 『태조실록』 3년(1394) 11월3일 두번째 기사 -

OLYMPUS DIGITAL CAMERA2014년 고궁박물관에서 개최되었던 ‘종묘(宗廟)’ 특별전. 조선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던 종묘와 관련된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던 전시회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조부묘도감의궤正祖附廟都監儀軌』, 정조의 신주를 종묘로 모시는 행렬그림, 1802년

부묘(附廟),
부묘는 흉례凶禮(상례나 장례와 관련된 의식)의 한 과정으로 왕과 왕비의 삼년상을 마친 뒤 신주神主를 종묘에 봉안하는 절차이다. 왕과 왕비의 혼백은 부묘를 통해 종묘에 모셔진 이후에야 신으로서 각종 제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부묘 하루전날 혼전魂殿(왕이나 왕비의 국장國葬 뒤 삼년 동안 신위神位를 모시던 전각)에 봉안되어 있던 신주를 받들어 내어 가마에 싣고 종묘로 나아갔다.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부묘 행렬은 국왕 생전의 행차와 같이 시위군사와 관원들, 각종 의장물로 둘러싸여 위용과 장엄함을 드러내었다. 신련이 종묘에 이르면, 정전 남쪽의 신문神門 밖에 임시로 마련한 막차에 신주를 봉안하였다. 그리고 부묘 당일 새벽, 역대 신위들 앞에서 부묘 사실을 고한 후 새로 마련한 신실에 신주를 봉안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신주 가마와 가마에 다는 발, 신여.주렴(神轝.珠簾)
선왕의 삼년상이 끝난 후 종묘에 부묘할 때 신주를 운반한 가마이다. 휘장이 달린 신련神輦에 비해 간소한 형태이다. 신여는 신실을 수리하기 위해 신주를 임시 봉안처로 옮길 경우에도 사용되었다. 신여에는 주렴珠簾을 달아 신성함을 더했는데 주칠한 대나무살에 초록비단실로 엮어 만들었다. 또한 가장자리를 초록 비단으로 두르고 붉은 술을 단 낙영落瓔 두 줄을 늘어뜨렸다. 『영녕전증수도감의궤永寧殿增修都監儀軌』(1836년)의 반차도에 신여에 드리운 주렴이 그려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영녕전증수도감의궤永寧殿增修都監儀軌』(1836년) 중 신여神轝.와 주렴珠簾

OLYMPUS DIGITAL CAMERA신주를 옮기는 가마인 신여神轝, 신주를 임시로 옮길때 사용한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신여에 드리오는 주렴珠簾

OLYMPUS DIGITAL CAMERA
『정조부묘도감의궤正祖附廟都監儀軌』(1802년) 중 홍색교의

OLYMPUS DIGITAL CAMERA
신주를 모시는 의자, 신좌교의神座交椅, 대한제국, 신주를 모시기 위해 사용된 의자이다. 부묘 의식 때 종묘 남문 밖에 천막(신악차神幄次)를 세우고 그 안에 신좌교의를 두어 신주를 놓았다. 이는 승하한 왕의 혼령이 종묘에 들기 전 잠시 머무는 자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붉은색과 은색의 신좌교의가 사용되었지만 대한제국시기에는 황색으로 제국의 위상을 나타내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망묘루에 걸었던 편액, 망묘루편액望廟樓扁額, 1699년(숙종25), 1608년(광해군 즉위) 종묘 재건 시 걸었던 편액이 낡아 1699년(숙종25) 남구만의 글씨로 새롭게 제작한 편액이다. 현판을 교체한 과정이 <망묘루기望廟樓記> 현판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정조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 정조부묘도감의궤正祖附廟都監儀軌, 1802년(순조2), 1802년 6월부터 8월까지 정조의 신주를 혼전魂殿에서 종묘에 부묘한 과정을 기록하였다. 의례담당자, 업무일지, 공문서, 의식절차, 의례에 사용된 기물 및 이를 제작한 장인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반차도의 행렬에는 신주를 운반하는 신련神輦과 신여神轝의 모습이 등장한다.

망묘루望廟樓
왕이 제향시 머물면서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을 추모하고,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건물로 향대청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주로 종묘의 관리들(묘사廟司)이 숙직하는 곳으로 쓰다가 종묘제향 때 왕의 숙소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 내에는 왕이 종묘에서 제향을 지낸 감회 등을 쓴 시나 현판을 걸어 두었으며, 금보도식金寶圖式 등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망묘루는 현재 정면7칸, 측면2칸의 규모인데, 연못방향의 한 칸은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종묘 입구 연못가에 위치한 망묘루. 국왕이 종묘제례를 올릴때 재궁이 들어가기 전에 잠시 쉬면서 선조들을 생각하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망묘루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망묘루 편액 교체를 기념한 현판, 망묘루기현판望廟樓記懸板, 1699년(숙종25),1608년(광해군 즉위) 종묘를 재건할 때 올린 망묘루의 편액이 오래되어 글씨가 잘 안보이자 1699년(숙종25)에 새로 만들면서 쓴 글이다. 당시 망묘루의 모습과 주변 경치, 망묘루를 세운 이유 등을 기록하였다. 예조 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오도일이 짓고, 종묘서 부봉사 이정천이 썼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조가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는 심정을 적은 현편, 1745년(영조21)년 4월7일 영조가 건강이 좋지 않아 제사에 쓸 희생을 살피고 환궁하면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심정을 적은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조가 겨울 제향에 앞서 감회를 적은 현판, 1754년(영조30) 10월6일 영조가 60세 때 종묘에서 겨울 제향에 앞서 희생을 살피고 봉심을 한 감회를 적은 글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영조가 종묘를 배알한 감회를 적은 현판, 1764년(영조40)가 종묘를 배알하고 난 후 감회를 적어 망묘루에 걸어둔 현판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조가 신하들과 함께 지은 시를 적은 현판, 1783년(정조7) 12월25일에 정조가 종묘 납일 친향親享을 위해 망묘루에서 밤을 보내며 신하들과 함께 연운시聯韻詩를 짓고, 현판에 써서 망묘루에 걸도록 하였다. 이 연운시는 이후 정조가 신하들과 함께 지은 시를 모은 책인 『갱재축賡載軸』에 수록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조가 신하들과 함께 지은 시를 적은 책.

종묘의 제향공간(祭享空間)과 건축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고 제향의식을 행하는 공간인 정전과 영녕전이다. 정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재위중인 왕의 4대조상, 공덕이 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다. 영녕전은 정전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옮겨 모시기 위해 지은 별묘이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을 종묘라 하였으나, 현재는 정전과 영녕전 및 부속 건물을 모두 합쳐 종묘라고 부른다. 조선왕조가 50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지속하면서 정전과 영녕전 내부에 모실 신주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두 건물 모두 몇차례에 걸쳐 증축되었다. 그 결과 정전은 19칸의 신실에 좌우 익실 각3칸을 갖춘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긴 목조건물이 되었으며, 영녕전 또한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다. 종묘는 매년 제사의식을 반복적으로 거행하는 공간으로 계획되었다. 정전과 영녕전에는 대규모의 월대가 설치되었으며, 왕과 왕세자가 위치하는 자리를 알려주는 판위板位 등을 전돌로 높게 마감하고 동선을 표시하는 등 일반 건축과 차이를 보인다. <출처:고궁박물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곳, 정전(正殿)
종묘의 중심 건물로 조선을 건국한 태조太祖를 비롯하여 역대 왕 중에서 특히 공덕이 크다고 평가된 19명의 왕과 그 왕비의 신위 총 49위를 모셨다. 건립 초기 7실의 단일 건물이었으나 생전의 공이 커서 정전에 계속 모셔지는 불천위不遷位,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사후에 추존되어 모셔지는 경우 등이 늘어남에 따라 몇 차례에 걸쳐 증축되었다. 정전은 창건 시 7칸으로 세워졌으나, 1546년(명종1)에 신실4칸을 더하여 총11칸으로 늘어났다. 이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에 11칸으로 복원되었고, 1726년(영조2)에 15칸으로, 1836년(현종2)에 19칸으로 증축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정전의 좌우에는 협실이 각3칸, 동서월랑 각5칸이 설치되어 ‘ㄷ’자형 건물을 이룬다. 동협실은 제기를 보관한 제기고이며, 서협실은 신주를 모시고 이동할 때 쓰는 신여神轝, 욕석褥席, 병풍屛風 등을 두는 장소(의물고儀物庫)로 쓰였다. 정전의 남쪽 동편에는 공신당功臣堂, 남쪽 서편에는 칠사당七祀堂, 동편 담에는 수복방守僕房, 동편 담 밖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자리잡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곳, 정전(正殿)

OLYMPUS DIGITAL CAMERA종묘대제때 정전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
종묘 정전에 모셔진 역대 국왕과 왕비, 조선전기까지는 나름 공이 뚜렷한 국왕들이 모셔졌으나 중기이후에는 그 규칙이 약화되고 정전 규모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우주를 묻은 위치를 표시한 책, 왕과 왕비의 신주가 부묘되기 전 혼전魂殿에서는 3년 동신 신주로 뽕나무로 만든 우주虞主를 사용했다. 신주를 부묘하면 쓰임새를 다한 우주는 정전 뒤뜰 담장 아래에 묻었는데 이 위치를 그림에 표시한 것이다. 정조를 비롯한 여러 왕과 왕비의 우주를 묻은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우주가 주로 묻혔던 정전 뒷뜰

OLYMPUS DIGITAL CAMERA신주도설神主圖說,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禮』,1474년(성종5)

OLYMPUS DIGITAL CAMERA제사 때 신주를 기대는 대, 궤几는 ‘의궤儀几’ 또는 구불거리는 형태때문에 ‘곡궤曲几’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주의 수에 맞게 제작되어 평소에 신탑 위에 놓였다가 대제 때 궤 앞에 신주를 모셨다. 이 궤에는 ‘일십삼’이라는 묵서명이 있어 정전1실에 부묘된 신덕왕후의 궤로 추정된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주나무, 신주목神主木, 밤나무를 깎아 왕과 왕비의 신주로 쓰기 위해 만든 것이다. 정육각형의 몸체에 윗부분은 둥글게 하였다. 상.하와 사방에 구멍(규竅)을 내었다. 신주목의 중앙부분에 왕은 모호廟號.시호諡號.존호尊號를, 왕비는 시호.존호.휘호徽號를 순서대로 적어 신주로 봉안하였다. 신주를 봉안하는 함, 복제, 뚜껑과 받침대로 구성되며 받침대 안에 좌자座子를 깔고 신주를 봉안하였다. 1421년(세종3)에 궤의 앞뒤가 바뀔 수 있다고 하여 뚜껑과 받침대 앞면에 붉은 글씨로 ‘전前’자를 써서 구별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앞면이 막힌 신주궤를 사용하다가 1637년(인조15) 이후 내궤의 앞면을 비워 신주의 출납을 편리하게 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탑에 까는 자리, 욕석褥席, 신탑 위에 깔았던 화문석이다. 신주를 놓는 곳에는 황화문석, 자방주요, 황화문석의 세겹으로 된 욕석을 깔아 신주를 모셨다.

정전에서 옮겨온 신주를 모신 별묘, 영녕전永寧殿
정전에서 옮겨온 신주를 모신 별묘로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와 그 비妃들은 지붕이 높은 가운데 칸에 모셔졌다. 가운데 칸은 4칸으로 이루어졌는데, 벽으로 좌우의 협실과 구분되어 있다. 각6칸으로 이루어진 동서 협실은 정전에서 옮겨온 왕과 왕비 및 추존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영녕전은 1421년(세종3)에 중앙4칸과 동서 협실 각 1칸 규모로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에 중건되면서 중앙4칸과 동서 협실 각3칸, 총10칸 규모로 건축되었다. 1667년(현종8)에 동서 협실을 각 1칸씩 증축하였고 1836년(현종2)에 다시 동서 협실을 각2칸씩 증축하여 현재와 같은 중앙4칸, 협실 각6칸 등 모두 16칸의 규모를 갖게 되었다. 현재 영녕전은 정면 16칸에 동서월랑이 각5칸으로 이루어진 ‘ㄷ’자형 건물이다. 영녕전에 사용한 제기를 보관한 제기고는 동북쪽에 단독 건물로 세워져 있다. 담 밖에는 영녕전 제향에 쓰인 제수를 준비하던 전사청典祀廳의 주초석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정전에서 옮겨온 신주를 모신 별묘, 영녕전(永寧殿)

OLYMPUS DIGITAL CAMERA영녕전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
영녕전에 모셔진 국왕과 왕비. 대체로 직계후손이 왕위를 잇지 못한 국왕들이 영녕전으로 모셔졌다.

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공신당功臣堂
역대 군왕들의 재위 중 공이 크다고 평가 받은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고 배향하는 사당으로 배향당配享堂이라고도 한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정전에 모신 역대왕의 공신 83위의 위패를 안치하였다. 종묘가 창건된 1395년(태조4)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5칸으로 정전 가까이에 있었으나, 1410년(태종10)에 동서월랑을 지으면서 월대 아래로 옮겨졌다. 성종대에는 3칸짜리 건물이어으나 1778년(정조2)에는 4칸으로, 헌종 대에는 6칸으로 증축되었다. 현재는 정면 16칸, 측면1칸의 건물로 정전의 남측 동편에 위치해 있다. 전면 중앙부 3칸에는 나무판자로 된 판문板門이 설치되었으며, 나머지 칸에는 광창을 설치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역대 공신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 공신당功臣堂

OLYMPUS DIGITAL CAMERA공신당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
종묘 공신당에 배향된 황희의 위패, 복제, 세종의 배향공신인 황희의 위패이다. 공신의 위패는 밤나무로 제작하고 중앙에 ‘관직명.시호.이름’순으로 썼다. 왕이 불천지주가 되면 공신당에 게속 머무를 수 있었지만 왕의 신위가 종묘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옮겨지면 제향공신 위패도 내어서 자손에게 돌려보냈다. <출처:고궁박물관>

일곱 소신小神의 위패를 모신 사당, 칠사당七祀堂
인간생활의 여러 가지 일들을 사찰하고 처벌하는 일곱 소신의 위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서쪽으로부터 도로통행을 주관하는 국행지신國行之神, 후손없이 죽은 옛날 제후로 사형을 주관하는 공려지신公厲之神, 도성의 대문을 주관하는 국문지신國門之神, 거처를 주관하는 중류지신中霤之神, 음식에 관한 일을 주관하는 사조지신司竈之神, 출입을 주관하는 사호지신司戶之神, 삼명三命(나이, 선을 행하고도 흉한 일을 당하는 것, 선한 일과 악한 일에 따라 보응하는 것)을 살피는 사명지신司命之神을 모셨다. 늦어도 1414년(태종14)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건물 규모는 3칸으로 1713년(숙종39)에 일부 수리가 되었다는 기록이 전할 뿐 공간에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으로, 중앙에 판문이 설치되고 좌우칸에 살창을 설치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 일곱 소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 칠사당(七祀堂)

OLYMPUS DIGITAL CAMERA칠사당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
칠사당 공려지신, 복제, 일곱 소신 중 후손 없이 죽은 옛날 제후로 사형을 주관하는 공려지신의 위패이다.

종묘 건축의 변천

1395년(태조4), 종묘 창건
- 정전 대실 7칸(석실5칸, 동서 협실 각1칸), 신문3칸, 동문3칸, 서문1칸,
- 공신당 5칸(정전 바깥 영역), 신주7칸, 향관청5칸, 재궁5칸

1410년(대조10)
- 정전 좌우에 동서월랑을 증축, ‘-’자형 형태에서 ‘ㄷ’자형 형태를 갖춤.
- 공신당을 정전 담의 안 동쪽으로 옮김.

1421년(세종3), 영녕전 건립
-영녕전 6칸(태실4칸, 동서 협실 각 1칸)

1474년(성종5)
- 정전7칸, 동서 협실 각2칸
- 영녕전 4칸, 동서 협실 각2칸

OLYMPUS DIGITAL CAMERA『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중 <종묘전도宗廟全圖>

OLYMPUS DIGITAL CAMERA국조오례의의 설명과 도설,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1474년(성종5),『국조오례의』의 내용을 보완하기 위해 실제로 의례를 행하는데 필요한 참고사항을 오례의 서례序例에 맞추어 설명하고 도설을 붙인 책이다. 길례吉禮 항목에 실린 <종묘전도宗廟全圖>는 종묘의 창건 당시 모습에 가장 가까운 그림으로 월랑月廊만 제외하면 창건때의 건축과 같다. <출처:고궁박물관>

1546년(명종 즉위)
- 정전 신실 4칸 증축(신실 11칸)

1592년(선조25)
- 임진왜란으로 소실

1608년(광해군 즉위), 종묘 재건
- 종묘궁궐영건도감(1606년) 설치
- 정전은 신실11칸, 동서 협실 각2칸
- 영녕전은 중앙4칸, 동서협실 각3칸의 규모로 재건

1667년(현종8)
- 영녕전 동서 협실 각1칸 증축(정전 4칸, 협실 각 4칸)

OLYMPUS DIGITAL CAMERA『종묘의궤』중 <종묘전도>

OLYMPUS DIGITAL CAMERA영녕전을 증축한 공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 영녕전수개도감의궤, 1667년(현종8) 영녕전 동.서 익실의 각1칸을 증축한 공사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1608년 임진왜란 때 불탄 종묘를 중건한 후 60년 가까이 지나며 건물의 퇴락이 심해지자 1663년 영녕전을 수리하기 위한 임시관청인 도감을 설치했으며 1667년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로써 영녕전은 모두 12칸의 신실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1726년(영조2)
- 종묘 정전 4칸 증축(신실15칸, 동서협실 각3칸)

OLYMPUS DIGITAL CAMERA종묘의궤의 속편, 종묘의궤속록宗廟儀軌續錄, 1706년 편찬된 『종묘의궤』의 속편으로 1706~1741년 사이의 건축, 제향 대상, 의식 등 종묘의 변화상을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종묘전도宗廟全圖>에는 1726년(영조2)의 정전 증축, 1732년(영조8) 재사齋舍 중건 등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정전의 좌우 협실에는 제기고祭器庫, 서고西庫가 있으며 신주神廚는 전사청으로 표기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1767년(영조43)
- 공신당 증축

OLYMPUS DIGITAL CAMERA『춘관통고春官通考』<금의종묘영녕전전도> 중 ‘공신당功臣堂’

 

OLYMPUS DIGITAL CAMERA예조의 업무를 기록한 책, 춘관통고春官通考, 1788년(정조12), 예조禮曹 소관의 업무 전반을 서술한 책으로 조선 초기부터 정조 초기에 이르는 전례의 변화가 반영되어 있다. 1474년의 종묘의 모습은 <원의종묘原儀宗廟>에, 1667~1726년 증축 이후의 모습은 <속의종묘續儀宗廟>.<속의영녕전續儀永寧殿>에, 1788년의 종묘는 <금의종묘영녕전전도今儀宗廟永寧殿全圖>에 묘사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1836년(헌종2)
- 정전4칸 증축(신실 19칸0
- 영녕전 동서 협실 각 2칸을 증축(정전4칸, 협실 각6칸)
- 현재 종묘와 동일한 규모를 갖춤

OLYMPUS DIGITAL CAMERA영녕전 증수 과정을 귀록한 의궤,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의궤宗廟永寧殿增收都監儀軌,1836년(헌종2)에 영녕전 동.서 익실 각 2칸을 증수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이공사로 영녕전 16실이 갖추어졌고 같은 해에 정존 또한 4칸이 증수되어 모두 19실을 갖추게 되었다. 이 의궤에는 채색도설이 실려 있어 당시 종묘의 건축적 변화는 물론 증축에 뒤따르는 의례의 절차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종묘친제규제도설 병풍宗廟親祭規制圖說屛風> (부분), 1866~1899년

OLYMPUS DIGITAL CAMERA종묘.

 종묘(宗廟)
종묘는 역대 임금과 왕후의 신위를 봉안하고 제향의식을 행하는 장소로 왕실의 근본이자 정통성의 기반이었다. 조선이 개국하여 한양으로 천도할 때 가장 먼저 입지와 배치를 결정하고 영건한 건물이 종묘이다. 조선시대에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은 모두 종묘에 고해졌으며, 종묘 정전에 모셔지는 국왕와 배향공신의 결정, 봉안되었다가 축출되는 출향(黜享)이나 사후에 봉안되는 추향(追享) 사건 등은 당대 정치사와 문화사의 흐름을 반영해준다. 조선시대의 국왕은 종묘 제향을 통해 선왕의 공덕을 기리고 가호에 보답하며 왕조의 번영과 영속을 기원하였다. 또한, 충성과 효도를 바탕으로 한 유교적 통치이념을 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후대에 전승하고자 하였다. 제향에서 국왕은 술과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아름다운 제기에 담아 선왕의 신령들에게 공경의 마음으로 바쳤다. 종묘는 16세기에 중건된 이래 온전하게 유지된 유교적 왕실 사당으로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물다. 또한, 종묘 제향 의식과 종묘제례악이 조선 오백년사를 거쳐 현재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이 같은 가치를 인정받아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에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이번 종묘 특별전은 나라의 기틀을 상징한 종묘의 유.무형 문화유산을 종합적으로 살펴보면서 종묘의 역사, 건축 그리고 유교 제례 문화의 정수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