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제례에서 각종 음식과 술을 준비하고 제사상 위에 올리기 위한 도구인 제기(祭器)는 정전과 영전에 마련된 제기고(祭器庫)에 보관하였다. 종묘제례에 사용되는 제기는 민간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형태를 하고 있다. 제기들은 역대 왕조의 제도(禮制)를 참조하여 각종 제기의 모양, 규격, 무게, 용례 등을 설명한 제작 법식을 정해 만들어졌다. 종묘제례는 벼농사 위주의 한반도의 생활형태보다는 주나라의 예법인 주례(周禮)를 많이 참조했기때문에 춘추시대 황하지역의 생활양식과 환경이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종묘제례에 사용되는 제기로는 고기를 담는 조와 생갑, 땅과 물의 산물을 담는 변과 두, 고깃국을 담는 등과 형, 곡식을 담는 보와 궤 등이 제사상에 올려졌다. 그리고 제례의식의 진행과 관련한 향과 향합, 어둠을 밝히는 촛대와 등잔 등이 함께 쓰였다. 신실 밖에는 다양한 종류의 술을 담은 이, 준, 뢰 등의 항아리가 놓여졌다. 종묘제례에 사용되는 제기들은 항상 깨끗한 상태를 보존하고 낡은 것은 수시로 교체하기때문에 조선이 건국된 이래로 종묘제례에는 제기가 사용되었지만 오래된 것은 없고 대부분 조선후기난 대한제국기의 유물들이 남아 있다.
종묘 영녕전과 정전의 제기고 내부 사진. 영녕전 제기고 내부에도 붙박이 형식의 제기장이 마련되어 있다.
종묘 제향을 위한 그릇, 종묘 제기
제기祭器는 종묘 제향에서 각종 음식과 술을 준비하고 제사상 위에 올리기 위해 사용한 도구이다. 조선시대에는 역대 예제禮制를 상고하여 각종 제기의 모양, 규격, 무게, 용례 등을 설명한 제작 법식을 정해 신을 모시는데 착오나 모자람이 없도록 노력하였다. 국가의 가장 큰 제사인 종묘 오향대제에는 고기를 담는 조와 생갑, 땅과 물의 산물을 담는 변과 두, 고깃국을 담는 등과 형, 곡식을 담는 보와 궤 등이 제사상에 올려졌다. 그리고 제례의식의 진행과 관련하여 신을 부르는데 사용되는 향과 향합 등의 제기와 어둠을 밝히는 촛대와 등잔 등이 함께 쓰였다. 신실 밖 준소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술을 담은 이, 준, 뢰 등의 항아리를 계절별로 다르게 놓았다. 이밖에도 제사 음식을 준비하거나 의식의 진행을 위해 다양한 제기들이 사용되었다. 신에게 바치던 기물이었으므로 제기가 낡거나 파손되어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땅에 묻었고, 수리가 가능한 경우에는 솜씨 좋은 장인을 선정하여 맡겼다. 제향에 끊임없이 사용되어 훼손되거나 파손되면 제기를 새로 제작하였기에 현재 전해지는 종묘제기는 대부분 조선후기와 대한제국기의 유물들이다. <출처:고궁박물관>
구름모양 장식이 달린 받침대, 운점雲坫, 준과 산뢰를 올리는 받침대로 『대명집례大明執禮』를 따라 이彛를 올리는 주舟와 함께 새롭게 제작한 기형이다.
닭.봉황.벼.눈을 새긴 술동이, 이彛, 『대명집례大明執禮』의 영향으로 제작된 기형이다. 받침을 만들어 그 위에 이를 올려 준소상에 진설하였다.
음양을 형상화한 술동이, 호준壺尊과 착준著尊, 가을.겨울 제사에 앙체(탁주)와 예제(단술)를 담는 술동이이다. 산을 새긴 술동이, 산뢰山罍, 사계절 제사에 청주와 현주를 담는 술동이이다.
술잔, 작爵, 작세위爵洗位에서 정결하게 씻은 후 준소상에 놓였다가 삼헌례 때 술을 담아 신위 앞에 올린다.
닭.봉황.벼.눈을 새긴 술동이, 이彛, 조선후기까지 제기도설에 나타난 이는 ‘U’자형 몸체에 문양이 새겨진 단순한 형태로 제작되었다.
소.코끼리 모양 술동이. 상준象尊.희준犧尊, 소와 코끼리 형상을 본 떠 만든 제기로 봄.여름 제사에 사용된다. 몸통에 술을 보관한 형태와 몸통 위에 항아리를 올리 두가지 유형이 있다.
분청사기 제기,
제기는 제기도설의 법식에 따라 금속기로 제작되어야 했지만 조선시대 초기에는 금속의 부족과 사회, 경제작인 이유로 도자제기로 대체되어 생산되었다. 15세기 전반부터 분청사기 제기가 제작되기 시작해 국가와 왕실 기관 등의 제사에 이용되었는데 금속제기와 문양과 기형 면에서 유사하게 제작되었다. 이들 분청사기 제기는 조선전기 제기의 법식을 정립해 가는 과정에서 ‘상준’과 ‘희준’의 경우 몸통에 코끼리와 소를 그려 넣는 것과 코끼리와 소를 형상화한 기형이 혼재했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출처:고궁박물관>
종묘의 백자제기,
정조대에 각종 제향과 절차들을 기록하고 관련된 사항들을 문답식으로 기록해 둔 책인 『매사문每事問』에는 칠사당과 공신당 제향 진설도 중에서 『국조오례의』와 차이나는 부분이 별도로 기재되어 있다. 『국조오례의』에서 보이던 ‘보궤簠簋’는 ‘자완磁碗’으로, ‘작爵’은 ‘자잔磁盞’으로, ‘호준壺尊’은 ‘자준磁尊’으로 대체하였다고 하여 이러한 기형이 백자제기로 대체되었고, 주 사용처가 공신당과 칠사당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굽이 있는 백자 제기, 사자완沙磁碗, 백자잔 받침, 사잔대沙盞臺, 백자항아리, 沙尊, 백자잔, 사잔沙盞
만력 33년명 궤(簋), 현재 연대가 가장 이른 계기로 만력萬曆 33년(1605)에 제작되었다. 굽의 바닥면 안쪽에 “만력33년 3월에 제작했다. 뚜껑을 갖추었다. 8근12냥이 들었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종묘의궤』 등의 제기도설에 따르면 생갑은 대생갑과 소생갑으로 나뉘어 각각 날고기와 익힌 고기를 올리는데 사용되었다. 정조대에 이르러 종묘 신실의 증가에 따라 제향 시간이 길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합생갑三合牲匣이 등장했다. 삼합생갑은 큰 생갑안에 작은 생갑을 넣은 것으로 『정조부묘도감의궤』에 도설이 나타난다. 또한, 제작의 편의를 위해 생갑 내부를 세 칸으로 구획한 형태가 제작되어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촛대燭臺, 제향을 모실 때 초를 꽂아 제상祭床와 준소상에 불을 밝히는데 쓰이는 제기로 다양한 크기의 촛대가 전한다.
촌농을 담는 그릇과 가위, 촛농을 담는 그릇과 초의 심지를 자르는 가위이다. 심지를 자를때 촛농을 흘리지 않고 받아내기 위해 가윗날에 접시를 붙착하였다.
등잔과 등잔대, 제상의 북쪽 좌.우 끝에 놓아 신위神位의 주변을 밝히는 제기이다. 잔에 기름을 붓고 심지를 세워 불을 밝힌다.
희생의 털과 피를 담는 그릇, 모혈반毛血盤, 희생犧牲의 털과 피를 담는 그릇이다. 소.양.돼지의 털과 피를 조금씩 담아두었다가 신관례가 끝날 무렵 상에 올려 신이 희생을 살피게 하며, 제향이 끝난 후 축을 태울 때 땅에 묻는다.
향로와 향합, 향로는 향을 태운 연기로 천상天上의 혼을 내려 모시는 의식에 사용하는 제기이다. 신관례晨祼禮 때 초헌관初獻官은 향로에 향을 세번 나누어 사른다. 향을 담아두는 향합은 향로의 동쪽에 진설한다.
곡식을 담는 둥근 제기, 궤簋, 원형의 용기로 몸체 전면에 수파문.뇌문 등 기하학적 무늬와 귀면이 장식되었다. 보는 메기장(서黍)와 찰기장(직稷)을 담아 신위 한 위位 당 한 쌍씩 올렸다.
곡식을 담는 사각형 제기, 보簠, 곡식을 담아 제상의 가운데에 올리는 제기로 몸통을 사각형으로 만들어 쌀(도稻)과 수수(양粱)을 담는다.
물기 있는 음식을 담아 올리는 제기, 두豆, 물기 있는 음식을 담아 올리는 제기로 변과 동일한 장구 형태이다. 각 실마다 12개를 놓는데 제사상 서편에 세로 2줄, 가로 6줄로 놓여진다. 『세종실로』 「오례」의 도설을 따라 문양을 장식한 것과 『국조오례의』 도설처럼 문양이 없는 것 두종류의 유형이 전해진다.
간을 한 국을 담는 제기, 형䤯, 간을 가미해 끓인 고깃국인 화갱和羹을 담는 제기이다. 전사청에서 동해에 담아온 화갱을 형에 옮겨 담아 등㽅의 앞줄에 진설했다. 기형은 항아리형의 몸체에 뾰족한 발 세 개가 부착되어 있는 것과 『대명집례』 도설과 유사한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마른 음식을 담는 제기, 변籩, 포와 떡 등 물기 없는 음식을 담는 제기로 제사상 동편에 세로 2줄, 가로6줄로 총12개가 놓인다. 『종묘의궤』 도설에는 뚜껑도 함께 묘사되었으나 현존하는 유물에는 뚜껑이 없다.
간을 하지 않은 국을 담는 제기, 등㽅, 다섯가지 맛을 넣지 않고 끓인 국인 대갱大羹을 담는 제기로 현행 종묘제례에서 사용되고 있다.
놋쇠로 만든 두 모양 제기, 유두鍮豆, 각종 예서의 「제기도설」에서 등은 두와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대명집례』 ‘등㽅’의 도설에는 등.두.변이 재료는 각기 다르나 모두 규격이 동일하다고 하며, 후대에 구리를 사용했다고 한다. 현재 놋쇠로 만든 두 형식의 제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등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왕이 손을 씻는 제기, 제사를 지내기 전 왕은 제관과 같은 곳에서 손을 씻지 않고 별도로 마련된 물동이(이匜)와 대야(반槃)를 사용하였다. 형태는 『대명집례』의 도설과 유사하며 대한제국기 이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관이 손 씻을 때 사용한 제기, 제관이 손 씼을 물(盥洗水)를 담아두는 항아리와 물을 뜰 때 사용하는 국자(세작洗勺), 씻은 물을 받는 대야(세洗)이다. 세뢰에서 세작으로 뜬 물을 세 위에서 부으면 제관이 손을 씻었다. 세작은 영조 대부터 준소에서 작爵에 술을 담을 때 쓰는 용작龍勺과 구별하기 위해 용머리 대신 꽃받침 모양(화악化萼)을 장식하여 사용하였다.
제상과 준소상의 제기 배치를 그린 그림, 제기도祭器圖, 종묘제례 때 신주 앞에 차리는 제상과 문 밖에 차리는 준소상의 제기 배치를 그린 그림이다. 이와 준 구름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받침대인 운점 위에 얹어 놓은 형식은 이 그림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종묘에서 사용한 목가구, 종묘제항에는 향과 축, 폐백을 받치는 상(향축상, 축상, 폐상), 헌관과 제관이 손 씻는 그릇과 수건을 올리는 상(관세상), 작을 씻는 그릇과 수건을 올리는 상(작세상), 축문을 태우는 망료례를 행하기 위해 먕료기와 망료저를 놓는 상(망료상) 등 의례 진행을 위해 다양한 종류의 상이 사용되었다.
제기의 보관처, 제기고(祭器庫),
종묘 제향에 사용되는 제기는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명에게 바치던 기물이었기에 조선초부터 정성껏 관리되었다. 1416년(태종16) 제기를 보관하기 위한 별도 공간인 제기고를 마련하였으며, 영조 대에는 당시 제기고로 쓰인 정전 동협실 내에 대규모 제기장을 설치하였다. 이 제기장은 1836년(헌종2) 정전이 동쪽으로 4칸 더 증축될 때 철거되지 않고 일부 수리된 채 현재의 동협실로 이전되어 전해지고 있다. 정전 동협실의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붙박이장 형태의 대규모 제기장(대장大欌)은 종묘 오향대제 때 사용된 제기를 보관한 대제제기장(大祭祭器欌)이다. 2층으로 이루어졌으며 내부에는 선반을 별도로 달아 많은 양의 제기를 보관하기 용이하도록 하였다. 제기장2층의 서쪽에는 일종의 별실이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보.궤의 뚜껑을 두었던 장소이다. 영녕전의 제기고는 별도의 건물로 영녕전의 동북쪽에 자리하였다. 고종 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내부에는 정전 제기고와 유사한 형태의 2층으로 된 벽부형 제기장이 설치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