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tstory Traveling

Since 2008, Korea & World by younghwan

서울 관훈동 민씨가옥, 구한말 민영휘 일가의 대저택

조선시대 권문세가들이 터를 잡고 살았던 인사동 부근 관훈동 30-1번지 있었던 ‘관훈동 민씨가옥’이다. 4천여평의 부지에 있었던 민영휘 일가의 저택 중 남아 있었던 안채와 중문채, 그리고 복원한 건물인 사랑채와 별당채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안채는 마지막까지 원형이 남아 있었던 건물로 ‘ㄱ’자형 배치를 하고 있는데, 부엌이 6칸이나 되고, 대청마루는 그 넓이가 웬만한 관청 건물의 대청마루보다 넓다.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할 때 남아 있던 안채를 옮겨 지으면서 철거되었던 건넌방 쪽을 되살렸고, 사랑채와 별당채를 새로 지었다.

<남산골 한옥마을로 옮겨진 관훈동 민씨가옥>

구한말 탐관오리이자 일제강점기 대부호였던 민영휘 일가가 살았던 4천여평의 부지위에 있었던 대저택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안채 일부와 중문채만 남아 있던 것을 옮기고, 사랑채와 별채는 새로 복원하였다.

<안채를 출입하는 중문>

<안채>

‘ㄱ’자형으로 배치된 이 건물의 안채는 일반 한옥과는 달리 폭이 2칸씩이기때문에 내부공간은 상당히 넓은 편이다. 사랑채처럼 생긴 구조로 일반적인 한옥에서 거의 볼 수 없다.

<안주인이 사랑방으로 사용하는 건넌방과 대청마루>

<뒤에서 본 모습>

<대청마루>

<대청마루 내부>

안채 가운데에는 집안 행사를 할 수 있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다. 앞면 3칸 규모로 분합문이 있어서 시원한 느낌을 주는 이 대청마루는 웬만한 고을의 동헌보다도 넓다. 원래 한칸의 폭이 넓은데다가 통로로 사용하는 툇마루까지 더해서 전체적으로 10칸이 넘는 큰 대청마루이다. 대청마루 양쪽에 넓은 온돌방을 두고 있다.

<툇마루로 둘러져 있는 건너방>

안주인이 손님을 접견하는 사랑방처럼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청마루 안쪽에 있는 안방>

중간에도 넓은 대청마루가 있고 그 안쪽에 온돌방들이 있다.

<부엌 옆으로 있는 앞면 3칸의 안방>

기둥과 기둥 사이를 말하는 칸의 넓이 또한 상당히 넓다.

<툇마루>

많은 방들과 대청마루 앞에는 통로로 사용되는 툇마루가 있다. 궁궐 내전과 비슷한 규모이다.

<문간방과 부엌>

중문을 들어서면 식사를 준비하던 하인들이 머물던 문간방과 부엌이 있다.

<부엌>

안방 옆으로는 6칸 규모의 엄청나게 큰 부엌이 있다. 부엌에는 당시 상류층에서 많이 사용했던 생활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실제로는 전시된 것도 많은 살림도구들이 있었을 것이다.

<술통>

술을 담가두었던 술통과 술을 증류하던 항아리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양반집에서는 손님접대를 위해서 술을 준비하는 것이 상당히 큰 일 중에 하나였다고 한다.

<뒷마당 출입문과 문간채>

각종 생활 용구들을 보관하는 광과 작은 문간방이 있다.

<안채와 뒷마당>

안방에는 뒷마당을 출입하는 문과 걸터 앉아 쉴 수 있는 툇마루가 있다.

<장독대>

서울 대표하는 대저택이지만 장독대의 규모는 생각보다 크지 않은 편이다.

<별채>

안채 뒷편에는 앞면 3칸 규모의 작은 별채. 행랑채와는 달리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아마도 결혼한 아들이 잠깐동안 사는 공간으로 보인다.

<옆에서 본 모습>

별채는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있다. 앞쪽 툇마루도 일반 한옥에 비해 넓은 편이다.

<사랑채 담장>

안채 바깥에 큰 규모의 사랑채가 있다. 안채와 사랑채는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사랑채>

바깥주인이 손님을 접견하고 일상적인 생활공간인 사랑채. 안채에 비해서는 작은 규모지만 앞면 5칸에 누마루를 두고 있는 상당히 큰 건물이다.

<누마루 내부>

손님을 접견하는 장소로 활용하는 누마루. 개방된 구조로 정자같은 분위기를 준다.

<뒤에서 본 모습>

2칸을 앞으로 달아내어 ‘ㄱ’자형 구조를 하고 있다. 일반적인 사랑채와는 달리 부엌을 두고 있다.

<옆에서 본 모습>

<밖에서 사랑채를 출입하는 문>

조선시대 민간 가옥은 정부의 규제를 받았기때문에 99칸 이상으로 건물을 크게 지을 수 없었으나, 이 가옥은 구한말 혼란기를 틈타서 궁궐 전각에 버금가는 규모로 크고 웅장하게 지었다. 구한말 민영휘 일가가 세상을 대하는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가옥은 구한말 부마도위 박영효 가옥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구한말 민씨 일족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친일파인 민영휘의 가옥인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원래 위치인 관훈동 집터에는 ‘경인미술관’이라는 사설미술관이 들어서 있으며, 그 옆에는 민영휘의 손자가 살았던 개량한옥인 ‘경운동 민병옥가옥’이 아직도 남아 있어 민영휘 일가의 화려했던 생활모습을 살펴 볼 수 있다. 남산골 한옥마을에 있는 5채의 전통 한옥 중 그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하다.

<민영휘 일가가 살았던 관훈동 일대>

이곳에는 천도교중앙교당, 라이온스회관, 운현궁, 탑골공원이 모여 있는 곳으로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부호들이 모여살았던 종로 도심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안채와 중문간채가 남아 있던 곳>

이곳은 4천여평의 대지위에 있었던 친일파 민영휘 일가가 살았던 대저택 중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1998년 남산골 한옥마을을 조성하면서 옮겨졌던 ‘관훈동 민씨가옥’ 중 남아 있던 안채와 중문간채가 있던 곳이다.

<안채가 있던 자리>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안채와 중문간채가 있던 곳에는 사설미술관인 ‘경인미술관’이 세워져 있다. 미술관은 여러동의 한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래 건물들을 남산골 한옥마을로 옮기면서 새로 지은 건물들이라고 한다.

<미술관>

원래 민영휘 일가가 살았던 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고, 미술관으로 조성되어 있다.

<한옥의 형태로 지어진 전시관>

민영휘는 명성황후와는 먼 친척이지만 여흥민씨를 대표하는 인물로 관직생활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는 구한말의 대표적인 탐관오리 중 한명으로 오랜 기간동안 백성들로부터 지탄을 받아 임오군란때에는 그의 집이 부서지는 사고를 입기도 하고 갑오경장때에는 탐관오리로 논죄되어 유배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수탈한 재물을 불려서 당시 조선 최고의 갑부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휘문고등학교와 풍문여고의 설립하기도 하였으며 친일행위자로 분류되어 2007년 국가로 환수되기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관훈동 민씨 가옥
이 집은 민영휘 저택 가운데 일부였다. 그는 관훈동 일대 너른 땅에다 집을 여려 채 짓고 일가붙이와 함께 살았는데, 옛 터의 위치는 주로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였다. 원래 집터에는 안채와 사랑채 외에도 별당채와 대문간채, 행랑채 같은 집채가 있었다고 전하나 나중에 소유자가 바뀌면서 안채와 여기에 연결된 중문간채만 남기고 모두 헐려졌다. 1998년 남산골한옥마을을 조성할 때 남아 있던 안채를 옮겨 지으면서 철거되었던 건넌방 쪽을 되살렸고, 사랑채와 별당채를 새로 지었다. 전체배치는 사랑채 뒤로 안채와 별당채를 구성하였으며, 담과 문으로 적절하게 공간을 나눴다. 보통 서울지방 안채는 안방 앞쪽에 부엌을 둬서 ‘ㄱ’자형으로 꺽어 배치하는 편인데, 이 집은 드물게 부엌과 안방을 나라하게 놓았다. 이 밖에도 고주 두개를 세워 짠 넓고 큰 목조구조와 6칸에 달하는 부엌의 규모, 그리고 마루 밑에 뚤려 있는 벽돌 통기구 등은 당시 일반 가옥과 다른 최상류층 주택의 변화를 확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출처:서울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