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기동에 있던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이다. 1900년대 초에 지어진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등지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으며 건물 뒷편에 사당이 있다. 건물은 안채와 사랑채가 한건물로 이어저 ‘-‘자형을 이루고 그 앞에 행랑채가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왼쪽은 여자들이 생활공간인 안채, 오른쪽은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 영역이다. 중앙에는 가운데 마당과 대청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이 가옥은 전통 한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성으로, 순종 일행이 재실에 머물때 남.녀가 따로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집은 순종의 장인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그의 딸이 1906년 동궁 계비로 책봉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갈때 즈음에 지은 재실이다. 이 건물은 순종이 제사지낼때 사용하기 위해 지은 재실이라고 하는데, 근처 명성황후의 능이었던 홍릉에 들릴때 머물기 위해 지은 것으로 보인다. 윤택영이 동궁 계비 간택을 로비하기 위해 이 건물을 지은 것으로 보인다. 돈을 물쓰듯이 썼던 윤택영이 상당히 크고 화려하게 지었다.
<제기동 윤택영 재실>
순종의 장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딸이 간택되면서 로비 목적으로 지은 재실이다. 이 재실은 명성황후가 묻혔던 홍릉과 가까운 제기동에 있던 것이다. 순종이 홍릉을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해 지은 재실이다.
<출입문 마당>
재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오른쪽에는 사랑채 출입문이. 가운데에 중간마당 출입문이 있다. 순종 일행이 머물 수 있도록 재실로 지어진 이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가 비슷한 규모로 등지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으며, 안채와 사랑채는 공간적으로 분리되어 있다.
<왼쪽편 안채 마당으로 들어가는 중문>
<안채와 사랑채 사이 중간 마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안채>
안채는 몸채, 행랑채, 문간채가 ‘ㄷ’형을 이루고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국왕을 수행하는 많은 인원이 머물 수 있도록 많은 방을 두고 있다. 대청마루를 그리 넓게 하지 않으면서 방을 여러개 두고 있는 것이 일반 주택과는 다른 형태이다. 순종의 계비인 순정황후가 홍릉에 제사를 올릴때 머물렀을 것이다.
<안주인이 머무는 안방>
안채와 사랑채는 ‘-‘자형으로 하나의 몸채를 이루고 있다. 안채 왼쪽편에는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 있는데 규모는 크지 않다.
<몸채와 문간채 사이에 연결된 행랑채>
많은 일행이 머물 수 있도록 방이 많은 편이다. 순정황후와 수행원들이 묵을 수 있도록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행랑채 온돌방>
<문간채>
2개이 광이 있는 문간채이다. 광에는 제사 등에 필요한 물품 등을 보관하고 있다.
<뒤에서 본 모습>
안채와 사랑채는 ‘-‘자형으로 하나의 몸채로 되어 있다.
<뒷마당에 위치한 사당>
<사랑채>
사랑채도 안채와 마찬가지로 몸채, 행랑채, 문간채가 연결되어 ‘ㄷ’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 또한 수행원들을 위해 많은 방을 두고 있다.
<누마루>
사랑채 한쪽 끝에는 정자 역할을 하는 누마루가 있다.
<누마루 내부>
<넓은 대청마루>
<사랑방>
<날개채>
사랑채에는 문간채 대신 날개채를 두고 있다. 안채와는 달리 수행원들이 머물 수 있는 방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 마당 출입문>
윤택영은 순종의 두번째 비인 순정황후의 아버지로 조선의 마지막 부원군으로 순종보다 두살 어렸다고 한다. 그의 형인 윤덕영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작위를 받는 등 주요 친일파 명단에 올라 있는 인사이다. 이 인물은 당시에 헤픈 씀씀이로 ‘채무왕’이라고 불리웠으며, 채무관계로 파산 선고를 받아 불명예실작하기도 했으며, 1930년대에 채무때문에 북경으로 도망가서 죽었다고 한다.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에 한심하게 살았던 친일인사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인사이다. 그의 형이 첩을 위해서 지었던 옥인동 윤씨가옥과 나란히 한옥마을을 지키고 있다.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齋室)
이 집은 순종의 장인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그의 딸 순정황후가 1906년 동궁 계비로 책봉된 후, 이듬해 황가가 되어 창덕궁에 들어갈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집은 일반적인 주택이 아니라 순종이 제사하러 올 때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해 만든 재실이다. 이 집은 동대문구 제기동 224번지에 있었는데, 1998년 남산골 한옥마을을 조성하면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건물배치는 으뜸 원(元)자 모양이다. ‘-‘자형으로 된 사당은 집의 제일 안쪽의 높은 터에 있다. 이는 1960년에 소실되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다시 지은 것이다. 그 앞 남쪽의 한단 낮은 터에 몸채가 있다. 몸채는 안채와 사랑채가 한 건물로 이어져 ‘-‘형을 이루고, 그 앞에 동서로 행랑채가 연결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는데 왼쪽은 안채, 오른쪽은 사랑채의 영역으로 남녀의 공간이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다. 정 중앙에는 가운데 마당과 대청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이 집은 다른 전통 한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성이다. 안채와 사랑채의 공간을 대칭되게 만들면서도 내부의 공간 쓰임은 편리하게 배분했다. 이외에도 나무를 가공하거나 벽면, 창호, 장식 등 세부를 처리하는 데서 고급 건축기술을 엿볼 수 있다. <출처: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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