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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여유당(與猶堂), 팔당호에 자리잡은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집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 정약용선생 유적지에 있는 고택인 여유당(與猶堂)이다. 건물은 ‘ㄱ’자 형 안채와 대문과 행랑채와 붙어 있는 ‘ㄱ’자형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지만 안채와 사랑채가 붙어 있지 않고 안마당을 넓게 쓰는 중부 지방의 전형적인 양반 가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 자체는 화려하지 않으면서 단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원래는 마을입구에 있었는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 홍수로 유실된 것을 1986년 현재의 위치에 복원한 것이다. 이 집은 정조말년(1800년)에 관직에 물러나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올 때 지은 집이라 한다. 이집은 그가 살았던 집이라기 보다는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가족들이 살았고, 그리워했던 집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높은 벼슬을 했던 사람이지만 이 건물은 그런 느낌은 주지 않는 평범하면서 잘 만들어진 집으로 보인다.

<남양주 여유당>

<사랑채>

<사랑채 툇마루>

앞면 4칸으로 이루진 사랑채이다. 손님을 맞을 수 있도록 개방된 구조로 되어 있다. 큰 방과 작은방 2개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 앞에는 비교적 넓은 툇마루를 두고 있다. 툇마루에 걸터 앉아 손님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며, 사랑방 내부가 잘 보이지 않도록 하는 효과도 있다.

<사랑방 침실>

정약용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로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정조대 관직에 진출하여 주요 관직을 역임하고 수원화성을 설계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정조 사후에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는데 외가였던 윤선도 일가가 터를 잡은 강진에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를 저술하였다.

<안마당을 출입하는 대문>

사랑채와 문간채를 연결하나 ‘ㄱ’자형으로 사랑채를 이루고 있다.

<문간채>

문간채에는 방을 두지 않고 외양간과 광으로 사용하고 있다. 보통은 사랑채 기단을 높여 문간채에 비해 격을 높이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집은 문간채와 사랑채가 같은 높이로 다산 정약용의 소탈한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행랑채>

반면에 행랑채는 지붕을 약간 낮게 하고 툇마루를 두고 있지 않다.

<행랑채 온돌방>

<‘ㄱ’자형의 된 안채>

앞면 5칸으로 가운데 3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안채 마루가 상당히 넓은 구조로 되어 있다.

<안채 대청마루>

앞면 3칸 규모로 집안행사를 위해 대청마루를 넓게 사용하고 있다.

<대청마루 분합문>

<안방 내부>

<날개채>

<안채 뒷마당>

안주인을 위해 안방 뒷편에 작은 툇마루를 두고 있다.

<대청마루 뒷편>

대청마루에는 두꺼운 판문을 달았다.

<바깥으로 출입하는 작은 협문>

남양주 여유당,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생가 여유당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유실되었던 것을 1986년 복원한 것으로 집 앞으로 내가 흐르고 집 뒤로 낮은 언덕이 있는 지형에 자리잡고 있어 선생은 수각이라고도 표현하였다. 당호인 여유는 선생이 1800년 (정조24년) 봄에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서 지은 것이다. <출처:남양주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