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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영녕전(보물), 정전에서 옮겨온 신주를 모신 별묘

영녕전(永寧殿)은 정전과 더불어 종묘의 중심이 되는 영역으로 정전에 모셔졌던 신위를 옮기거나 새로이 추존되는 왕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세종대인 1421년에 정전의 신실이 부족하게 되어 정전 서쪽에 새로 지었다. 원래는 6칸 규모였으나, 여라 차례 좌우 협실을 늘려 현재 신실은 모두 16칸으로 1836년(현종2)에 증축한 것이라 한다. 영녕전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 역대 국왕의 신위는 창업주인 태조와 현직 국왕의 4대조, 불천위(不遷位)에 해당하는 생전 업적이 뛰어난 국왕과 왕비들의 신위는 정전에, 정전에서 옮겨진 국왕과 왕비, 새로이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는 영녕전에 모시게 되어 있다. 하지만 대부분 국왕들은 불천위로 간주되어 정전에 모셔지고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 추존왕, 후사가 없어 왕위를 잇지 못한 왕들이 주로 정전에서 옮겨져 모셔졌다. 영녕전에 모셔진 대표적인 왕들로 정종, 문종, 단종, 인종, 명종, 경종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자식이 없어 왕위를 잇지 못한 왕들이다.

<종묘 영녕전 일원>

종묘 정전과 함께 역대 국왕과 왕비들이 신위가 모셔진 영녕전 일원. 영녕전은 정전에서 옮겨온 현직 국왕의 4대조 이전 국왕과 왕비, 추존왕과 왕비를 모신 별묘이다. 정전과 마찬가지로 단순하고 절제되면서도 웅장한 멋을 보여주고 있다. 정전영역에 비해서 의도적으로 격이 낮게 설계되었다.

<영녕전에 모셔진 태조의 4대조와 역대 국왕>

대체로 후사를 잇지 못한 왕과 왕비, 추존된 왕과 왕비들이 모셔져 있다.

<영녕전 남쪽 출입문>

혼령들이 출입하는 신문(神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신도(神道)로 연결되어 있다. 삼문의 형식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정전 신문과는 달리 계단이 없다.

<제례를 준비하는 전사청과 동문으로 연결되는 길>

국왕이 지나다니는 어도가 설치되어 있다.

<동문>

종묘제례에 참석하는 국왕을 비롯하여 제관들은 준비공간인 전사청이 있었던 동문으로 출입한다.

<판위>

영녕전 동문 앞에는 제례에 참여하는 국왕과 제관을 위한 판위가 설치되어 있다.

<찬막단(饌幕壇)>

전사청에서 만든 제사 음식을 제상 위에 차리기 전에 검사하던 곳이다. 안쪽으로는 제수를 준비하던 전사청이 있었는데 지금 그 터만 남아 있다. 담장 안쪽에 영녕전 제기를 보관하던 제기고가 단독건물로 있다.

<안에서 본 동문>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과 비슷하고, 단순하고 절제되면서도 웅장한 멋을 보여주고 있다. 의도적으로 정전에 비해 건물의 규모를 비롯하여 모든면에서 한단계 격이 낮게 설계되었다. 정전과 마찬가지로 2중으로 된 월대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동.남.서 세 곳에 문을 두었다. 영녕전 지붕은 가운데 태실 4칸은 높게, 좌우 협실 6칸은 한단계 낮게 하였다. 태실 4칸은 태조의 4대조를, 동서 협실은 정전에서 옮겨온 왕과 왕비 및 추존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동쪽에 제사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를, 서남쪽 바깥에 제례악을 준비하는 소악공청(小樂工廳)을 두었다. 동쪽 바깥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종묘 영녕전>

가운데 태조의 4대조와 정전에서 옮겨진 국왕과 왕비, 추존된 국왕과 왕비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가운데 태실 4칸은 지붕을 높게 양쪽 협실을 6칸씩 두고 있다. 총16명의 왕과 그 왕비들을 모시고 있다.

<태조의 4대조를 모신 가운데 태실>

<동쪽으로 증축된 협실과 동월랑>

협실은 창건시에는 각 1칸씩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중건하면서 각 3칸, 현종대에 1칸, 헌종대에 각 2칸씩 증축하여 각 6칸으로 되어 있다.

<서쪽으로 증축된 협실과 서월랑>

<신실>

정전 신실과 비슷한 구조이다.

<향대청에 재현해 놓은 신실 내부>

종묘 신실은 신주를 모신 신주장을 중심으로 서쪽에 책장, 종쪽에 보장이 있다. 신주장 앞의 신탑에는 궤가 놓여 있고 그 앞에 제상과 좌우에 봉선과 황개가 놓여 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

단순한 익공계를 사용하고 있으며, 단청과 겹처마를 하고 있지 않다.

<추녀마루 잡상>

<동월랑>

삼면이 개방된 누각 형태로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정전 동월랑에 비해 작은 규모이다.

<창고형태로 지어진 서월랑>

<2008년 종묘 영녕전>

<신도>

영녕전 남쪽 신문을 들어서면 종묘제례 의식이 거행되는 넓은 월대가 조성되어 있고 중간에 혼령들이 이동하는 신도가 설치되어 있다. 월대는 궁궐 조정과 마찬가지로 거친 박석이 깔려 있으며, 혼령이 지나가는 신도와 어도, 국왕을 비롯한 제관들이 위치를 알려주는 판위에는 전돌을 깔았다.

<하월대>

영녕전도 정전과 마찬가지로 하월대와 상월대 위에 지어졌다. 정전 월대에 비해서 높이가 낮은 편이다.

<영녕전 남문 안쪽 마당>

<신문에서 영녕전으로 연결되는 신도>

그 옆에 국왕이 위치하는 판위가 설치되어 있다.

<천막을 설치하기 위한 고리>

<제례 후 축문을 태우는 망료례를 행하는 장소>

<악공들이 출입하는 서문>

<영녕전 서쪽 담장 밖>

<소악공청>

서쪽 담장 밖에는 악공들이 대기하는 소악공청이 있다.

<영녕전 남문 바깥쪽>

<소악공청에서 본 영녕전 일원>

<2008년 모습>

종묘 영녕전(永寧殿, 보물)
정전의 신위를 옮겨 모시기 위해 1421년에 새로 지은 별묘로 건물 이름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 일원과 유사하지만 정전보다 규모가 작고 좀 더 친밀하게 지어졌다. 정전 일원과 유사하게 2중으로 된 월대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동.남.서 세 곳에 문을 두었다. 원래 6칸 규모였으나, 여러 차례 좌우 협실을 늘려서 현재 신실은 모두 16칸이다. 가운데 4칸은 태조의 4대조를 모신 곳으로 좌우 협실보다 지붕이 높다. 동쪽에 제사도구를 보관하는 제기고를, 서남쪽 바깥에 제례악을 준비하는 소악공청(小樂工廳)을 두었다. <출처:문화재청>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중 <종묘전도宗廟全圖>

영녕전을 증축한 공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 영녕전수개도감의궤, 1667년(현종8)

영녕전 동.서 익실의 각1칸을 증축한 공사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1608년 임진왜란 때 불탄 종묘를 중건한 후 60년 가까이 지나며 건물의 퇴락이 심해지자 1663년 영녕전을 수리하기 위한 임시관청인 도감을 설치했으며 1667년 공사가 완료되었다. 이로써 영녕전은 모두 12칸의 신실을 갖추게 되었다. <출처:고궁박물관>

영녕전 증수 과정을 귀록한 의궤, 종묘영녕전증수도감의궤宗廟永寧殿增收都監儀軌,1

836년(헌종2)에 영녕전 동.서 익실 각 2칸을 증수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이공사로 영녕전 16실이 갖추어졌고 같은 해에 정존 또한 4칸이 증수되어 모두 19실을 갖추게 되었다. 이 의궤에는 채색도설이 실려 있어 당시 종묘의 건축적 변화는 물론 증축에 뒤따르는 의례의 절차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영녕전(永寧殿), 정전에서 옮겨온 신주를 모신 별묘
정전에서 옮겨온 신주를 모신 별묘로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 태조의 4대 조상인 목조穆祖, 익조翼祖, 도조度祖, 환조桓祖와 그 비妃들은 지붕이 높은 가운데 칸에 모셔졌다. 가운데 칸은 4칸으로 이루어졌는데, 벽으로 좌우의 협실과 구분되어 있다. 각6칸으로 이루어진 동서 협실은 정전에서 옮겨온 왕과 왕비 및 추존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영녕전은 1421년(세종3)에 중앙4칸과 동서 협실 각 1칸 규모로 창건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8년(광해군 원년)에 중건되면서 중앙4칸과 동서 협실 각3칸, 총10칸 규모로 건축되었다. 1667년(현종8)에 동서 협실을 각 1칸씩 증축하였고 1836년(헌종2)에 다시 동서 협실을 각2칸씩 증축하여 현재와 같은 중앙4칸, 협실 각6칸 등 모두 16칸의 규모를 갖게 되었다. 현재 영녕전은 정면 16칸에 동서월랑이 각5칸으로 이루어진 ‘ㄷ’자형 건물이다. 영녕전에 사용한 제기를 보관한 제기고는 동북쪽에 단독 건물로 세워져 있다. 담 밖에는 영녕전 제향에 쓰인 제수를 준비하던 전사청典祀廳의 주초석이 남아 있다. <출처: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