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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충렬사, 병자호란 때 순절한 인물들을 모신 곳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에 위치한 충렬사(忠烈祠)이다. 이 서원은 1641년(인조19)에 김상용을 비롯하여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인물들을 모시기 위해 강화부(江華府)의 지원을 받아 건립된 사당이다. 건립 당시에는 ‘현충사(顯忠祠)’라 하였으며, 효종대에 국왕으로 ‘충렬사(忠烈祠)’라는 이름과 현판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강화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서원으로 원래는 유생들이 공부하는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제사기능만 남아 있다.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없고 사당, 외삼문, 수직방과 전사청 등만 남아 있다. 삼학사를 모신 남한산성 현절사와 함께 병자호란으로 순절한 인물들은 모신 곳으로 구한말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강화 충렬사>

강화도 선원면 강화산성 남쪽 언덕 아래에 위치한 충렬사. 강화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서원으로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순절한 인물들을 모신 곳이다.

<충렬사 외삼문>

<외삼문 안쪽으로 보이는 비각>

<강학공간이었던 외삼문 안마당>

강당인 명륜당과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서재는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이 공간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과 살림집인 수복방이 마당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마당 왼쪽에 위치한 전사청>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건물은 가운데 1칸은 대청마루, 양쪽에 2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서원 전사청으로는 건물  규모가 큰 편이며,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용도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맞은편에 위치한 서원 관리인이 사용하는 수복방>

부엌과 광을 두고 있는 살림집으로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다.

<충렬사 바깥에 새로 지은 살림집>

<충렬사 내삼문>

김상용(金尙容)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병자호란때 왕자들을 모시고 강화로 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충렬사가 처음 건립되었을때는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 공조판서 이상길을 비롯하여 순절한 6인을 모셨으나, 이들과 함께 순절했으나 사당에 모셔지지 못한 인물의 후손들의 호소로 이들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현재는 김상용을 주향(主享)으로 총 28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순절한 인물들을 모셨다는 곳으로 강화유수를 통해 국가의 특별한 지원을 받았던 곳이다.

<사당>

사당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앞쪽에는 제사 준비를 위한 퇴간을 두고 있다. 서원 사당 건물 중에서는 비교적 큰 규모로 강화유수의 지원을 받았음을 느낄 수 있다.

<충렬사 앞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일대>

충렬사(忠烈祠),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병자호란(1636~1637)때 종묘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강화가 함락되었을 때 순절한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을 비롯하여, 병조판사 이상길 외 26위를 배향한 사당이다. 인조 19년(1641)에 지을 당시에는 「현충사」라 하였으나, 효종9년(1658) 임금이 유수 허휘에게 현판과 전답을 내리면서 「충렬사(忠烈祠)」라 개칭하였다. 당초에는 유생들이 배움을 익히고 닦는 명륜당과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동재.서재가 있었으나 지금은 외삼문, 사당, 대문의 양측에 설치된 수직방, 전사청(제사때 제수용품을 준비하던곳), 비각 등만이 남아 있다. <출처:강화군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