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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특별전, "한국의 도교문화"] 도교의 신들

1. 행복으로 가는길2. 도교의 신들3. 팔선이야기4. 신선세계를 꿈꾸다5. 신선이 되는 법6. 함께하는 도교

도교(道敎)는 중국의 토착신앙으로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諸子百家) 중 하나인 노자와 장자의 도가(道家)와 신선사상 등의 영향을 받아 후한대에 처음 생겨났다. 도교가 도가사상이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실제로 많은 차이가 있다고 한다. 후한대에 도교가 처음 생겨난 이래로 일반민중이나 지식인 층에도 널리 전파되면서 체계적인 교리를 필요성이 제기되어 도가(道家)라 일컫는 노장사상, 전통적인 신선사상, 유교의 주역, 서역에서 전래된 불교의 의례적인 측면 등이 반영되어 남북조시대에 교리(敎理)와 조직을 갖추면서 종교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도교는 하늘과 땅을 숭배한 토착신앙에 출발한 종교로 많은 신들을 존재하며 시대에 따라 생기거나 없어지기도 한다. 초기 도교에서는 노자(老子)를 신격화하여 태상노군이라 부르며 최고의 신으로 여겨졌다. 남북조시대 불교가 전래되면서 그 영향을 받아 도교의 신들로 체계를 갖추게 되고 원신천존(元始天尊)이 최고신으로 신봉되었으며, 이후 송대에는 옥황상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외에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숭배대상인 해와달, 별, 땅의 신, 물의 신 등이 도교의 신으로 자리잡았다.

도교의 중요한 요소인 신선사상 등은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영향을 주었으며, 도교가 종교로서 체계화되었던 남북조시대에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전래되었다. 삼국이 비슷한 시기에 도교를 받아들였지만 고구려에서 국가적차원으로 도교가 크게 성행하였으며, 신라와 백제는 노장사상과 신선사상이 받아들여졌다. 고구려의 계승한 고려에서 도교는 특히 성행하였는데 국가적으로 도교제사인 재초가 행해졌다. 유교국가를 천명한 조선에서 재초 등 국가적인 차원의 의식적인 도교의 모습은 거의 사라졌지만 개인적으로 수련하거나 도가사상을 이해려는 측면의 연구와 생활속의 민간신앙으로서 도교는 그 명맥을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도교삼존상(道敎三尊像, 노군상), 중국 북주, 568년,

기단 4면의 명문에 주존이 노군 임을 밝히고 있고 제작연대도 정확해 남북조시대 도교상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유물이다. 주존의 자리에는 노군(태상노군:노자)이 위치하고, 그 주위에는 관복을 입고 손에는 홀을 들고 머리에는 관을 쓴 협시가 위치한다. 도교상 주존의 지물인 주미(麈尾)가 오른손에 있고, T자형과 유사한 빙궤(凭几)에 왼손을 얹고 있어 협시의 지물인 홀, 머리에 쓰고 있는 관과 함께 이 시대 도교상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신이 된 노자
노자(老子)는 초나라 사람으로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다. 주나라 왕실 도서관의 관리였지만, 주나라가 쇠퇴하자 은퇴를 결심하고 서쪽을 향해 떠났다. 도중에 함곡관(函谷關)을 지키던 관리 윤희(尹喜)가 가르침을 청하자 도(道)와 덕(德)의 의미를 5천여 자로 남기고 떠났다. 이것이 「도덕경(道德經)」이다. 초기 도교에서는 노자를 신격화하여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부르며 최고의 신으로 섬겼다. 수.당대 이후 불교의 영향으로 도교 신들의 계보가 체계를 갖추게 되면서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최고신으로 신봉된다. 송대에 들어서면 원시천존의 자리를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차지하게 되면서, 천계(天界)에서 태상노군의 지위가 더욱 약화되었지만, 민간에서의 인기는 여전히 높아 원시천존 등과 함께 삼청(三淸)의 하나로 모셔졌다. 우리 역사에서는 고구려 영류왕 7년(624) 당 고조가 천존상(天尊像)을 보내온 기록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노자는 키가 9천, 얼굴이 푸른색 입은 새 부리와 같고 코는 높았다. 아름다운 눈썹 길이는 5치, 귀는 7치, 이마에는 세 줄의 주름이 상하로 관통하고 발바닥에는 팔괘 그림이 있었다. 거북을 침대로 삼고 은 계단을 가진 금루옥당(金縷玉堂)에 살며 오색구름으로 옷을 지어 입고 우뢰와 번개로 둘러싸인 높은 모자를 썼다. – 갈홍(葛洪) 「포박자(抱朴子)」


도교사면상(道敎四面像), 중국 서위, 554년,

사다리꼴의 두꺼운 판형 석재의 네 면에 감실이 열려 있는데, 정면과 뒷면의 큰 감실에 삼존(三尊), 좌우 옆면의 작은 감실에 일존(一尊)이 표현되어 있다. 큰 감실 안의 주존은 옷자락을 크게 늘어뜨리고 있어, 여래상에서 흔히 나타나는 상현좌(裳縣座)를 방불케 한다. 또한 비슷한 구도의 북위의 도교 사면상(520년)과 비교할 때 감실 밖의 비천이나 역사(力士), 보살풍의 협시 등의 선각 표현이 보다 치밀해지고 있어 시대적 추이를 읽을 수가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도교삼존상(道敎三尊像), 중국 북위 515년,

노자로 추종되는 주존과 장신의 협시로 이루어진 도교 삼존상이다. 수염을 기르고 보관 쓴 주존은 소매가 긴 앞여밈의 옷을 입고 허리띠를 매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주미라 불리는 위의구(威儀具)를 쥐고 있다. 광배에는 주존의 두부(頭部)를 덮고 있는 듯이 서로 얽힌 두 마리의 용과 괴수(怪獸)가 표현되어 있다. 아래쪽 기단부에는, 정면에 공양자와 상(像)의 발원자인 개씨(蓋氏)의 이름이, 측면에는 연창(延昌) 4년의 기년명이 새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묻다, 문례노담도(問禮老聃圖), 김진여, 1700년

우리나라에 전해오는 『공자성적도(公子聖積圖)』 중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작품이다. 이 중 ‘문례노담(問禮老聃)’은 공자가 제자인 남궁경숙과 더불어 주나라에 건너가서 당시 주왕실의 도서관 사서로 있던 노담에게 예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고사를 그림으로 풀어준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하늘.땅.물의 신
예로부터 사람들은 하늘과 땅과 물을 신성시하였다. 이러한 오래된 종교적 관념은 훗날 도교에도 수용되어, 해와 달, 북두칠성을 비롯한 하늘의 성수신(星宿神, 별자리신)과 후토(后土)와 같은 땅의 신, 용신(龍神)으로 상징되는 물의 신 등이 도교의 신으로 자리잡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천체(天體)와 대지(大地), 물에 대한 토착적인 숭배 관념을 바탕으로 이러한 도교적 신관(神觀)을 받아들였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 국가가 주도한 도교 재초(齋醮)에서 북두칠성 등 별자리신을 대상으로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한 일, 고려시대 석관(石棺)에 해, 달, 북두칠성 등의 별자리를 새긴 일, 백제 무령왕릉 출토 매지권(買地券)이나 고려시대 승려의 매지권에 후토(后土) 등으로 일컬어지는 땅의 신이 등장하는 것, 고대 이래로 강이나 바다 등의 용신을 대상으로 비를 빌거나 선박 운행의 안전을 기원하는 제사를 거행한 일 등이 그러한 사례라 할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도교에서 천계(天界)는 욕계육천(欲界六天), 색계십팔천(色界十八天), 무색계사천(無色界四天), 사종민천(四種民天) 또는 사범천(四梵天), 삼청경(三淸境), 대라천(大羅天)으로 도합 36천(天)이 있다. 득도하여 신선이 되어 천계에 오르면 수명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대라천에는 도교의 최고신인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있고, 그 아래의 삼청(옥청玉淸, 상청上淸, 태청太淸)에는 각각 세 궁전이 있는데 그 궁전에는 선왕(仙王).선공(仙公).선경(仙卿) 등의 현세의 관료조직과 같은 형태를 이루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도교 인물 모양 주전자, 청자인물형주자, 국보, 고려 12~13세기,

두 손에 선도(仙桃)를 받쳐 든 인물 모양의 주전자이다. 의복과 봉황이 장식된 관, 선도를 받쳐 든 모습에서 인물은 최고 여성신인 서왕모(西王母)일 가능성이 있으나, 서왕모의 이미지가 이미 여성적인 것으로 확립되어 있던 점을 감안할 때, 도교 의례인 재초를 집전한 도사(道士)일 가능성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도교인물모양연적, 나무로 만든 도교 인물상

1.도교 인물 모양 연적, 청자인물모양연적(靑磁道敎人物形硯滴), 고려 12세기, 두 손으로 정병(淨甁)을 든 인물을 형상화한 연적이다. 인물은 관(冠)이나 의복의 모습에서 불교 승려나 유교 사인(士人)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도교 의례를 집전한 도사(道士)로 추정된다. 2. 나무로 만든 도교 인물상, 목조도교인물입상(木造道敎人物立像), 도사로 추정되는 인물을 형상화한 목조상이다. 일반적으로 도사의 기본 형태는 관복집홀(冠服執笏)이라하여 관복을 입고 홀을 들고 있으며 어깨 부근에 망토 같은 것을 두른 것이 기본이다. 이 목상 또한 관복을 입고 무언가를 들고 있지만 지물은 파악되지 않고, 어깨에는 금으로 수놓은 망토를 입고 있어 도사상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기린모양 향로, 청자양각기린형향로(靑磁陽刻麒麟形香爐), 고려 12세기,

상상 속의 동물 기린이 고개를 뒤로 돌려 앉아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향로이다. 기린은 중국 고대 이래 용.봉황.거북과 함께 신령스런 동물로 여겨졌고, 도교에서도 등장한다. 이 향로는 고려시대 왕실 제사나 도교 재초 등의 제의(祭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도철무늬 향로, 청자양각도철문향로(靑磁陽刻饕餮文香爐), 고려 12~13세기,

기봉(夔鳳)과 도철(饕餮)이 묘사되는 등 전체적인 형태나 문양에서 중국 고대 청동기의 영향이 보인다. 송나라의 예제(禮制)를 받아들일 때 의기(儀器)들도 수용한 결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 왕실 제사나 도교 재초 등의 제의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제천의식은 고대인들의 주요한 종교 행사이자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의식이었다. 고대의 위정자들은 일월성신의 이변과 같은 자연현상을 국가와 왕실의 운명을 가름하는 척도로 여겨 하늘 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왕실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 도교에서 하늘 신인 천관사복대제(千官賜福大帝)는 복을 주는 신으로 여겨졌다. <출처:중앙박물관>

점치는 돌. 천지판편(天地盤片), 경주 출토, 통일신라,

고대에 천문을 통해 점을 칠 때 사용하던 천지반이다. 원형인 천반(天盤)과 방형(方形)인 지반(地盤)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앙축을 중심으로 두반이 연결되어 있고 위에 있는 천반이 회전되는 구조인데, 천반 일부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경주 첨성대 부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테두리 부분에 팔괘가 새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북두칠성을 새긴 점치는 칠기, 천지반편(天地盤片), 평양 석암리출토, 낙랑,

천문을 통해 점을 치던 천지반 중 천반 일부가 남은 것이다. 천지반 중앙에 북두칠성을 기준으로 10간, 12지, 28수 등이 새겨졌다. <출처:중앙박물관>

별자리무늬 거울, 청동성수문경(靑童星宿文鏡), 고려, 상단에 해, 달,

북극성과 북두칠성 등을 배치한 다음, 중앙은 뉴를 중심으로 좌우에 제물인 소와 구름 위에 올라탄 동물을 대칭되게 새겨 넣었다. 개성 부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별이 밝은 밤에 재초를 지낼 때 사용했던 거울로 판단된다. <출처:중앙박물관>

별자리가 새겨진 거울, 이십팔수명동경(二十八宿銘銅鏡), 고려,

거북.용.봉황.호랑이가 방위에 따라 배치되어 있다. 사방 바깥에 다시 팔괘를 설정하였고, 팔괘 바깥으로 10개의 천간과 십이지 신상이 자리를 잡고 있다. 십이지의 바깥에 또 24자를 두었다. 거울 테두리를 두루둘러는데, 글씨체는 예서와 흡사하다. 거울이 갖춘 4방.8괘.12진.24기의 형상은 모두 우주 원리를 상징한다. <출처:중앙박물관.

남녀 합장상, 납석제남녀합장상(蠟石製男女合葬像), 통일신라 8~9세기,

뚜껑부분에 부부로 추정되는 남녀가 누워 있고, 그 측면 상단에 큰 원 하나와 선으로 연결된 점이 새겨져 있다. 남성 쪽에는 해와 북두칠성, 여성쪽에는 달과 남두육성(南斗六星)이 새겨져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향을 피워 하늘에 고하다, 분향고천도(焚香告天圖), 윤두서, 조선 1708년

공재 윤두서의 그림으로 북송의 강직한 관리 조변(趙抃,1008~1084)이 밤마다 의관을 갖추고 하늘에 고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는 고사를 바탕으로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나라 제사
도교의 신들에게 올리는 제사를 재초(齋醮)라 한다. 고려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재초를 거행하며, 국왕의 수명장수와 기우(祈雨), 전염병의 소멸 등을 빌었다. 고려의 제15대 왕 예종(1105~1122년)은 도교 자체에 대한 관심이 많아 궁중에 원시천존(도교 최고의 신)의 상(像)을 모셔두고 매달 재초를 거행하였다. 고려의 대표적인 도교사원인 복원궁도 예종 때 건립되었다. 고려시대에 활발히 재초를 거행하던 장소들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시대에 와서 거의 폐쇄되고 소격서 한 곳에서만 재초를 거행하게 되었다. 그나마 16세기에 와서는, 제후국인 조선의 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성리학의 명분에 맞지 않는다는 유신(儒臣)들의 주장에 따라 소격서마저 폐지되었다. 이로써 국가차원의 도교는 한국 역사에서 사실상 소멸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태일(太一)은 하늘의 존귀한 신으로 한대(漢代) 이래 역대로 떠받들어 자주 상서로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전조(前朝)에서는 복원궁.수격전.정사색 등을 설치하고도 따로 태청관(太淸觀)을 세우고 또 간(艮).손(㢲).곤(坤).건방(乾方)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태일이) 머무는 자리를 쫓아 궁관을 지어 초례를 행하였는데 매번 악운 및 재난을 당할 때에는 기도를 행하거나 별도로 태청관에서 초제를 지냈던 것입니다. 만일 군대를 움직이게 될 경우라면 장수가 태청관에 가서 재초를 올리고 떠났습니다. 대개 태일은 인성(仁星)으로 그것이 있는 곳에서는 전쟁과 돌림병이 생기지 않고 나라가 편안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 태종실록 –

1.「정화8년」을 새긴 향로, 정화8년명청동향로(‘政和八年’銘靑銅香爐), 고려 1118년,

2.3.촛대, 청동촉대(靑銅燭臺), 고려


4.「천황전배」를 새긴 병, 청자상감천황전배명병, 고려 12~13세기

5.「칠원전배」를 새긴 접시, 청자상감칠원전배명접시, 고려 13세기,
6.「십일요전배」를 새긴 접시, 청자상감십일요전배명접시, 고려,
7. 「태일전」을 새긴 잔과 받침, 백자상감태일전명탁잔, 조선15세기,


8.「천」를 새긴 접시, 청자상감천명접시(靑磁象嵌’天’銘楪匙), 고려,
9.「지」를 새긴 접시, 청자상감지명접시(靑磁象嵌’地’銘楪匙), 고려 13세기
10.「귀」를 새긴 접시, 청자상감귀명접시(靑磁象嵌’鬼’銘楪匙), 고려 13세기
11.「천」를 새긴 잔, 청자상감천명잔(靑磁象嵌’天’銘盞), 고려
12.「귀」를 새긴 잔, 청자상감귀명잔(靑磁象嵌’鬼’銘盞), 고려 13세기

13.「삼관」을 새긴 접시, 청자상감삼관명접시(靑磁象嵌’三官’銘楪匙), 고려 13세기
14.「삼관대배」를 새긴 잔, 청자상감삼관대배명잔(靑磁象嵌’三官大盃’銘盞), 고려
15. 「소전색」을 새긴 잔, 청자상감소전색명잔(靑磁象嵌’燒錢色’銘盞), 고려 12~13세기
16. 「소전」을 새긴 잔, 청자상감소전명잔(靑磁象嵌’燒錢’銘盞), 고려 13세기

별자리를 새긴 석관 뚜껑, 석관개석(石棺蓋石), 고려,

해와 달, 북두칠성과카시오페아 등 별자리가 새겨진 석관 뚜껑이다. 고려시대에는 이처럼 북두칠성이나 북극성 등의 천체를 새긴 예가 많은데 이는 도교적인 성수신(星宿神)들이 우리 고유의 하늘 숭배 신앙과 자연스럽게 결합된 결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땅 신 지관(地官)은 후토신(후토신)과 연결되며 여성으로 취급되었다. 죄를 사해주는 땅 신에게 잘 보여야 좋은 세상에 간다고 믿고 묘지명(墓誌銘)에 망자의 생전의 업적을 잘 적어 주었다. 또 땅 신의 노여움을 풀어주기 위해 땅 신에게 땅 사용을 허가받는 매지권(買地券)을 묻어 주거나 압승(壓勝)의 의미로 동전도 함께 묻어 주는 것도 오랜 기원(祈願)의 형태였음이 확인된다. 도교에서 땅 신 지관은 지관사죄대제(地官赦罪大帝)로 불리며 죄를 사해 주는 신으로 여겨졌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려시대 매지권

1. 송천사 주지 세현 매지권, 松川寺 住持 世賢 買地券, 고려 1143년, 고려시대 송천사의 주지 세현(~1143)의 무덤에 넣은 매지권이다. 사방으로 각각 청룡, 백호, 주작, 현무에 이르는 무덤 땅을 도교의 신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 신인 황천부(皇天父)와 땅의 신인 후토모(后土母)로부터 구입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2. 현화사 주지 천상 매지권, 玄化寺 住持 闡祥 買地券, 고려 1141년, 고려시대 현화사의 주지 천상(?~1141)의 무덤에 넣은 매지권이다. 황천부와 후토모로부터 무덤 땅을 매입한 것과 서왕모.동왕공 등은 기록하지 않았으나, 무덤땅의 경계를 사신으로 표현한 것과 신선들로 보증인을 세운 것은 송천사 주지 세현이 매지권과 같다. <출처:중앙박물관>

톱니무늬 거울, 청동거치문경(靑銅鋸齒門鏡), 중국 수나라,

경주 황룡사지 목탑의 심초석 아래에서 발견된 세 점 동경 중 한점이다. 뉴에는 청동고리가 남아 있다. 빛이 발하는 듯한 문양은 다뉴경에서부터 보이는 전통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건물의 안전을 비는 진단구와 동전, 진단구.개원통보, 경주 안압지 출토, 통일신라,

안압지 서편 임해전지로 추정되는 건물들 사이에서 출토된 진단구이다. 내부에서 개원통보 4점, 유리옥 4점, 부식된 뼈조각이 출토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수락암동 무덤 십이지 모사도, 수락암동벽화모사도(水落巖洞壁畵模寫圖), 고려,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양릉리 수락암동에 위치한 대형 벽화 무덤의 모사도이다. 상단에는 십이지 신상을 하단에는 사신도를 배치하였다. 십이지 신상은 모두 관을 쓰고 홀을 잡고 소매가 넓은 도포를 입었으며, 관 위에 십위지 동물을 그려 전형적인 수관인신상(獸冠人身像)을 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사신을 새긴 석관, 사신문석관(四神文石棺), 고려 1144년,

고려중기 문신 허재(1062~1144)의 석관이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식 화장을 하고 남은 뼈를 수습하여 석관에 넣는 풍습이 유행하였다. 석관의 바깥면에는 죽은 이를 지키는 수호신의 의미로 사신을 새기는 일이 많았고, 이 석관처럼 십이지신이나 묘지명까지 함께 새기는 일도 있었다. <출처:중앙박물관>

남쪽편 주작(朱雀)을 새겨 놓은 면

무령왕릉은 웅진시기 백제인의 도교적 세계관 구현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도교적 풍습이 반영된 매지권과 동전, 벽사와 승선(昇仙) 도구로 사용된 진묘수, 얼굴을 비춰 요괴임을 식별해주는 동경과 정체가 드러난 사악한 요괴를 베어 버릴 검은 벽사의 결정체로 부장되었다. 여기에 저승길을 밝혀 줄 등잔의 존재는 무령왕의 신선세계 도달을 기원하고 금동신발은 무령왕이 하늘에 올라 신선이 되었음을 증거해 준다. <출처:중앙박물관>

무덤을 지키는 상상의 동물, 진묘수(鎭墓獸), 국보, 공주 무령왕릉 출토,

진묘수는 침입자나 악귀를 막고, 죽은자의 영혼을 승선시키는 의미로 놓인 것으로 해석된다. 입과 몸통에는 벽사의 의미로 불게 칠해져 있으며, 뿔과 몸통의 날개는 죽은 이를 승선(昇仙)시키려는 듯 운기문(雲氣文)으로 표현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진묘수(앞쪽)

무령왕릉 묘지석(왕), 武寧王陵 墓誌石, 국보, 공주 무령왕령출토,

왕릉의 널길 입구에 놓여 있던 2장의 지석이다. 그 위에서 오수(五銖)라는 글씨가 새겨진 철전이 발견되었는데, 토지신에게 무덤터를 사기 위해 돈을 무덤안에 넣은 것으로 중국 도교 사상의 영향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무령왕릉 묘지석(왕비), 국보, 공주 무령왕령출토,

왕비 지석 뒷면은 525년 8월12일에 돈 1만매로 사마왕이 지신(地神)에게서 토지를 매입하였다는 내용의 매지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신령스러운 동물무늬 거울, 청동신수문경, 국보, 공주 무령왕릉 출토,

왕의 발쪽에 놓여 있던 거울이다. 도교에서는 요괴임을 확인하는 방법이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얼굴을 비춰 확인하는 방법과 발뒤꿈치를 비춰 요괴임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무령왕릉은 왕의 얼굴 부근에서 1점이, 발치부근에서 1점이 출토되어 두가지 식별법이 모두 동원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오수전, 철제오수전(鐵製五銖錢), 공주 무령왕릉 출토, 중국 남조,

무령왕릉의 매지권 위에 꾸러미로 놓여 있었으며 그 숫자는 90여 개에 달한다. 매지권에는 이 돈으로 토지신에게서 무덤터를 산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무덤에 돈을 넣는 것은 한대 이래로 유행하던 풍속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고리자루칼, 금동환두대도(金銅環頭大刀), 백제, 공주 무령왕릉 출토,

둥근고리를 이루는 자루 끝장식은 2마리의 용이 엇갈려 감겨 있고 그 안에 용을 표현하였다. 자루의 위와 아래에는 거북등무늬와 봉황무늬, 인동무늬로 장식하였고, 자루 중심부는 금실과 은실을 교대로 빽빽하게 감았다. <출처:중앙박물관>

도교에 물 신은 수관해액대제(水官解厄大帝)로 불리며 액을 풀어주는 신으로 여겨졌다. 액을 풀어주는 물 신에게는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내용의 기원이 행해졌다. 물의 신은 용으로 대표되어 기우제의 대상이 된다거나 액을 제거하고 사악함을 씻어내기 위해 강, 바다, 우물 제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화왕산성 출토 인형 목간 등에 보이듯 액을 막고 치병활동을 돕는다든지 물의 신성성을 확보하기 위해 행해진 우물제사의 복숭아처럼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기원들을 들어주는 대상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사람모양 목간

사람모양 목간, 인형목간(人形木簡), 하남 이성산성 출토, 통일신라, 부정과 재앙을 목상으로 옮겨 물에 던짐으로써 이를 씻어 흘려보내는 주술물로 보인다. 「용왕」을 쓴 사람 모양 목간, 용왕명목간(‘龍王’銘木簡), 창녕 화왕산성 출토, 통일신라, 정수리와 몸통 부분에 금속제 못이 꽂힌 채 출토됐고 나머지 목과 다리(관절) 부분에 못으로 찌른 흔적이 있어 사람 대신 제물로 바쳐진 목제인형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용왕(龍王)’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어, 당시 용왕을 대상으로한 제사가 행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1.2. 짧은 목 항아리와 목간, 단경호.목간(短頸壺.木簡), 하남 이성산성 출토, 통일신라

남근모양 목간

3.남근 모양 목간, 남근형목간(男根形木簡), 백제, 남근모양의 목간으로, 네 면 가운데 두 면은 거꾸로 글을 썼다. 글의 내용은 “서라”를 세차례 반복하며 남근의 발기를 재촉하는 주문이다. 4.남근모양나무제품, 남근형목제품(男根形木製品), 하남 이성산성 출초, 통일신라. 5.「용왕」을 쓴 목간, 용왕명목간(龍王銘木簡), 경주박물관 확장부지 우물출토, 통일신라, 『삼국사기』에는 용왕전(龍王典)이라는 관청이 보이고, 전 인용사지 유적의 우물에서 출토된 목간에도 ‘용왕’이라는 글귀가 있다. 이처럼 당시에는 우물에 용왕이 살고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목간은 우물에서 벌어진 제사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용왕’을 새긴 토기

1.「신심용왕」을 새긴 토기, 신심용왕명토기(‘辛審龍王’銘土器), 경주 안압지 출토, 통일신라.
2.「용왕」을 새긴 토기, 용왕명토기(‘龍王’銘土器), 경주 안압지 출토, 통일신라. ‘신심용왕(辛審龍王, 용왕님께 정성스럽게 바침)’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그릇으로 당시에 용왕제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신라의 관청 중에 용왕전이 있었다고 한다. <출처:중앙박물관>

3.아연으로 만든 둥근 판, 아연원형판(亞鉛圓形板), 경주 안압지 출토, 통일신라.

고대로부터 복숭아나무는 귀신을 쫓는 신력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어 사악한 기를 몰아내고 뭇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효험이 있다고 믿어졌다. 그래서 복숭아나무 가지에 복을 기원하고 재앙을 물리치는 말을 써 넣거나 더러는 복숭아 나무를 사람 모양으로 깎아 재앙을 막아 주기를 바랐다고 한다. 우물을 비롯해 유적에서 출토되는 복숭아도 사악함을 피하고 귀신을 축출하는 의미로 매장되었을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1.복숭아씨, 도종자(桃種子), 경주박물관 확장부지 우물출토, 통일신라.

부안 죽막동 수성당.

서해안 연안항로에 위치한 대표적인 제사유적지이다. 뱃길이 험한 변산반도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본 뜬 석기와 청동거울, 모형석기.청동경(模型石器.靑銅鏡), 부안 죽막동 출토, 백제,

칼이나 거울 등을 대신해 돌로 간단하게 축소, 모조한 것으로 몸체의 중앙이나 끝부분에 소형 구멍이 1~2개 뚫려 있다. 직경 3m 범위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된 점으로 볼 때 제사 지낼 때 신에게 바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본 뜬 석기.


긴목항아리와 그릇받침, 장경호.기대(長頸壺.器臺), 부안 죽막동 출토, 백제,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 출토된 항아리와 그릇받침으로 깨진채 유적에 뿌려져 있었다. 당시 토기를 깨 바다신에게 제사지내던 모습을 보여준다.

「황비창천」을 새긴 거울, 황비창천명청동경(‘煌丕昌天’銘靑銅鏡), 고려,

‘황비창천’이라는 명문과 함께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를 항해하고 있는 선박과 일상, 월상, 용 등의 무늬를 새겨 놓았다. 바다의 신산(神山)을 찾아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거나, 무사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거울에 새겨진 그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