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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관왕묘(보물), 삼국지 영웅 관공(關公, 관우)을 모신 사당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위치한 동관왕묘(東關王廟, 보물)이다. 동묘(東廟)라고도 불리는 동관왕묘는 삼국지의 영웅인 관공(關公, 관우)과 최측근인 관평(關平), 주창(周倉) 등 4명의 상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한양도성 동대문에 해당하는 흥인지문(興仁之門) 바깥에 위치하고 있다. 관왕묘(關王廟)는 중국에서는 공자의 위패를 모신 문묘(文廟)만큼이나 인기가 많다. 이곳에 동관왕묘가 들어선 것은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왕이 직접 액자를 써서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으며, 선조 32년(1599)에 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601년에 완성되었다. 한양에는 동.서.남.북 4곳에 지어졌으나 지금은 이곳 동묘만이 남아 있다. 관우는 충의와 무용의 상징으로 중국 민중의 많은 숭배를 받아왔으며, 도교의 신으로 무신(武神) 또는 재신(財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관우 숭배는 임진왜란때 파병된 명나라 명사를 통해 전해졌으며, 일제강점기까기 성행했다고 한다.

<동관왕묘>

동묘라고도 부르는 동관왕묘(東關王廟)는 삼국지 영웅 관공을 모시는 사당으로 임진왜란때 세워졌다. 보통 특정인의 위패를 모시는 곳은 사당이라는 의미로 __사(祠)락 부르지만, 종묘나 문묘처럼 이곳도 동관왕묘(東關王廟)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동관왕묘 정문인 외삼문>

종묘나 문묘의 전통적인 사당출입문과는 달리 독특한 형태의 솟을대문을 하고 있다. 가운데 삼문이 있고, 양쪽에 행각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다. 바깥에는 서울의 대표적인 벼룩시장인 황학동시장이 들어서 있다.

<안쪽에서 본 외삼문>

동묘 들어가는 길에는 답도나 삼도를 만들어 놓고 있았다.

<내삼문>

앞면 3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출입문이다. 일반적인 사당의 내삼문과는 달리 외벽을 벽돌로 쌓는 등 중국 건축 양식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입구에 하마비(下馬碑) 와 ‘금잡인(禁雜人)’이라고 적힌 비석을 세워 놓고 있다.

<내삼문에 걸린 동묘(東廟)라 적힌 현판>

규모는 문묘(文廟)인 성균관이나 주요 향교의 대성전보다 크지 않은편이다. 동묘는 조선중기에 세워진 중국풍의 건물로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형태를 하고 있다. 동묘 앞에는 오래된 향나무 또한 중국 분위기를 느끼게 하고 있다. 무(武)를 숭상하지 않는 조선시대의 특성으로 인해 관리가 잘 되어 있지는 않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건물배치와 형태는 깔끔하게 되어 있다. 건물 형태도 문묘와는 달리 중국 북경의 국자감 대성전과 비슷하다. 위패를 모신 문묘나 전통 사당과는 달리 관우의 조각상과 그의 부하들을 모신 본실과 제사를 올리는 공간인 전실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중국의 사당이나 절에서 볼 수 있는 건물의 양식이라 한다. 목조 구조물을 돤 전통 한옥과는 달리 구운벽돌을 이용해서 쌓은 건물로 중국 건축물과 한옥의 특징이 합쳐졌다.

<정전(正殿)으로 들어가는 길>

<정전(正殿)>

전체적으로 ‘丁’자 모양의 지붕을 하고 있으며 앞쪽 ‘-‘자형 건물에는 맞배붕을 하고 있다.규모는 앞면 5칸·옆면 6칸이고 지붕은 T자형의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지붕 무게를 받치는 장식은 새의 부리처럼 뻗어 나오는 익공계 양식이다. 평면상의 특징은 앞뒤로 긴 직사각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과 옆면과 뒷면의 벽을 벽돌로 쌓았다는 점이다. 지붕은 한국식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벽은 구운 벽돌로 쌓은 중국식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뒤에서 본 모습>

<뒷쪽 출입문>

<오른쪽에서 본 모습>

정전은 2개의 건물이 합쳐진 형태로 앞쪽에는 출입문있고 3면에 벽돌로 쌓아 지붕을 받치고 있다. 건물자체는 중국식도, 한국식도 아닌 퓨전한 양식으로 아마도 임진왜란이라는 혼란기에 세워져서 그런것으로 보인다.

<정전 지붕과 추녀마루 잡상>

잡상에 세워져 있는 것은 궁궐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음을 말해준다.

<관우 목조상>

<관우상 위쪽에 걸린 현판>

<정전 가운데 천장>

<정전 내부 왼쪽 문>

<천장 아래에 걸려 있는 현판>

<정전 오른쪽 문>

<오른쪽 천장 아래에 걸려 있는 현판>

<월대>

정전 앞 월대는 낮게 조성되어 있다. 월대 입구에는 머리만 있는 석수(石獸)가 있다.

<정전 월대에 세워진 석물>

<마당>

정전 앞 마당에 심어진 향나무 등에서 중국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월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내삼문에서 정전으로 들어오는 길>

삼도의 형식을 하지 않고 넓은 판석을 깔아 놓고 있다.

<동무( 東廡)>

앞면 5칸, 옆면 1칸반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이다. 성균관이나 향교와는 달리 판문을 하지 않고 있다. 정전과 마찬가지로 벽돌로 벽면을 쌓은 중국풍의 건물이다.

<서무(西廡)>

<2011년 동관왕묘>

관우신앙
소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으로 충의와 용맹의 상징인 관우, 관제 또는 관왕으로도 불리는 관우는 명대에 도교의 신으로 우뚝 섰다. 관우에 대한 신앙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이후 조선의 왕들은 관왕묘(關王廟)를 건립하는 등 관우를 높이는 정책을 폈다. 특히 19세기 말 고종대에는 관우신앙과 관련된 서적을 다수 출판하는 등 관우에 대한 존승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국가 차원의 관우숭배는 1910년에 관왕묘 제사가 폐지되면서 끝을 맺었다. 민간에서도 임진왜란을 계기로 관우신앙이 퍼져 나갔다. 조선후기를 통해 무속화해 간 관우신앙에서 관우는 병을 다스리고 복을 내리며, 재물을 관장하는 영험한 신으로 받들어졌다. 민간의 관우신앙은 20세기초까지 지속되다가 쇠퇴하였다. <출처:중앙박물관>

<관우도, 19세기>

 관우는 황실, 관청, 민간에서 널리 모셔졌다. 화격으로 보아 관청의 부군당에 모셨던 그림으로 보인다.

<관우상.유비상.장비상, 조선 19세기>

동관왕묘 정전의 좌우 벽에는 여러개의 감실이 세워져 있다. 그 중 정전의 왼쪽벽에 배치된 목조 감실 중 한 감실에 관우를 비롯한 세 구의 조각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조각상은 모두 크기가 작은 목조상으로 주칠한 용상 위에 앉아 있는 의좌상이다. 모두 용머리를 장식한 용상 위에 앉아 있다. 용상의 답장에는 용무늬를 비롯한 각종 무늬를 장식한 최고급 화문석에 황실을 상징하는 자주색 선을 두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황룡이 그려진 부채, 조선 19세기>

동관왕묘 정전 앞에서 4점의 황룡선(黃龍扇)이 발견되었다. 부채의 앞면에는 각각 한쌍의 용을 그려 넣었다. <출처:중앙박물관>

<관성제군보고, 조선 19세기후반>

관제신앙의 경인 『관성제군보고』를 청색안료로 쓰고 그 위에 투명 유약을 입혀 구워낸 것이다.

<과화존신(過化存神), 조선 1880년,>

고종의 명령으로 관제신앙의 경전들을 모아 한글로 옮겨 1880년(고종17)에 편집, 간행한 책이다. 번역자나 편집자는 알 수 없다. 원래 본문은 「각세진경(覺世眞經)」, 「구겁문(救劫文)」, 「부대련구(附對聯句)」, 「영험기(靈驗記)」, 「교유문(敎諭文)」, 「배심성훈(拜心聖訓)」 등으로 이루어졌으나, 이 책에는 「교유문」과 「배심성운」은 빠져있다. 관제신앙과 국어사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관제보훈상주, 1882년>

 관우와 관련된 도교서적이다.

<관성제군명성경, 1886년>

관우를 신격화하여 모시는 종교인 관성교의 경전이다.


<백자 ‘동묘’명 병, 19세기>

동묘에 치성을 드릴 때 사용했던 것이다.

관왕묘에서 치성을 드릴때 사용하던 백자병이다. 몸체 상단부에 돋을새김으로 ‘동묘치성병 경진삼월일’이라는 명문이 있어 이 백자병의 용도를 알 수 있다. 또한 이 유물의 제작기법과 기형을 고려해 보면 명문 중의 경진(庚辰)은 1820년(순조20)이거나 1880년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무안왕묘비명(武安王墓碑銘) 탁본, 조선>

관우의 충절을 기려 제사 지내던 동묘에 1785년 정조가 세운 무안왕묘비를 탁본한 것이다. 비명은 정조가 직접 글을 짓고 전서(篆書)로 썼다. 맨끝에 정조 자신이 이 글을 짓고 써서 관제 제사때 악가(樂歌)로 쓰도록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서울 동관왕묘(東關王廟), 보물, 1601년(선조 34), 서울 종로구 숭인동
동관왕묘는 서울의 동쪽에 있는 관왕묘라는 뜻으로, 관왕묘는 중국의 장수 관우의 조각상을 두고 제사를 드리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의 요청으로 1601년(선조34)에 지었다. 명나라에서는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문묘처럼 관우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무묘라 하여 크게 숭배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 후기에 무묘를 많이 지었다. 동관왕묘의 중심건물은 두 개의 건물이 앞뒤로 붙어 있는데, 이것은 중국의 절이나 사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붕은 높은 丁자 모양과 -자 모양이 합쳐진 工자 모양이다. 실내 공간도 앞뒤로 나뉘어 있는데, 앞은 제례를 위한 전실이고 뒤는 관우와 부하장군들의 조각상을 둔 본실이다. 전실과 본실을 감싼 벽돌 벽의 바깥에는 다시 기둥을 두어 처마를 받치고 있다. 관왕묘는 서울의 동서남북에 모두 지어졌는데 그 중 동관왕묘가 제일 규모가 크고 화려하다. 넓은 벽돌벽과 독특한 지붕모양, 조각상, 실내의 구성과 장식 등에서 중국풍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는 17세기 제사시설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출처:서울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