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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교동향교, 교동도호부 중등교육기관

옛 교동도호부 읍치가 있던  강화 교동도 읍내리에 있는 교동향교(喬桐鄕校)이다. 고려시대 안향(安享)이 원나라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가져와 모셨던 유서깊은 향교이다. 원래 한강이 보이는 화개산 북쪽 기슭에 있었는데 조선 영조때 읍치와 가까운 이곳으로 옮겼다. 강학공간을 앞에, 제향공간을 뒤에 둔 후묘전학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다. 건물은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동.서무,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과 동.서재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강화 교동향교 01-20200302<강화 교동도 화개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교동향교>

강화 교동향교 02-20200302<향교 입구임을 알려주는 홍살문>

강화 교동향교 21-20200302
<하마비>

강화 교동향교 04-20200302<교동향교 전경>

OLYMPUS DIGITAL CAMERA<외삼문 앞 연못>

강학공간은 강당 건물인 명륜당과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를 두고 있다. 명륜당은 앞면 4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교동도 겨울 날씨가 추운 까닭에 대청마루에 문을 달아 놓고 있으며,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온돌방 앞쪽에는 출입문 대신 작은 창문을 달아놓고 있다. 동,서재는 모두 온돌방과 부엌이 있는 ‘ㄱ’자형 건물을 하고 있다. 강학공간에는 은행나무를 심어 행단(杏壇)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강화 교동향교 05-20200302<명륜당>

강화 교동향교 06-20200302<동재>

강화 교동향교 07-20200302<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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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륜당 뒷편 은행나무>

강화 교동향교 13-20200302<담장 안쪽 고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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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한쪽편에 있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노룡암>

노룡암은 원래 교동현 동헌 북쪽뜰 층계 아래에 있었는데, 위에는 울창한 숲속에 늙은 소나무가 있고 아래에는 숙단이 있었다. 1717년(숙종43)에 충민공 이봉상이 노룡암이라고 3자를 지었는데 1773년(영조 49)에 그의 손자 달해가 글지은 것을 새기었다. 1820년(순조 20)에 가서 통어서 이규서가 “호거암장군이 풍기를 깨끗이 하였다’는 7자 글자를 새기었다. 1987년에 교동향교로 옮겼다. <출처:강화군청>.

교동향교 제향공간은 공자와 선현들을 모신 대성전과 동,서무를 두고 있다. 대성전은  크고 웅장하게 짓지는 않았지만, 교동도호부 위상에 걸맞게 앞면 5칸 규모를 하고 있다. 교동향교에는 고려 충렬왕때 안향이 공자의 초상화를 가져다가 모셨다고 한다. ,서무는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강화 교동향교 08-20200302<대성전을 출입하는 내삼문>

강화 교동향교 09-20200302<대성전>

강화 교동향교 11-20200302<동무>

강화 교동향교 10-20200302<서무>

강화 교동향교 12-20200302<대성전 아래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한강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교동도는 섬의 규모가 크지 않아 지금은 강화군에 속한 작은 고장이지만 삼국시대때부터 한강유역을 지키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강화와는 별개로 고목근현이라 불렀으며 신라경덕왕때 교동현이 설치되었다. 한강하구를 지키는 지리적중요성때문에 병자호란 이후 경기수영이 경기도 남양에서 이 곳으로 옮겨지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이후 1633년에는 삼도통어사가 설치되어 경기도.황해도.충청도의 수군을 총괄하였다. 교동도에는 향교와 읍성을 쌓았던 성곽 일부를 제외하고는 옛 교동도호부 관아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강화 교동향교 03-20200302<교동향교 앞으로 옮겨 놓은 교동도호부 관리를 지낸 인물들의 공덕비 등>

교동향교(喬桐鄕校),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향교는 유교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세운지방교육기관이다.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화개산 북쪽에 처음 세워졌다. 조선시대 들어와 영조 17년(1741)에 조호신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이 향교에 처음으로 모셨다고 전한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으며, 제사 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다. 이외에도 내삼문.외삼문과 제기고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 노비, 책 등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1894) 이후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의 기능만 남게 되었다. (안내문, 강화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강화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기도 교동도호부 관아, 교동읍성과 삼도수군통어영

교동도호부(喬桐都護府)는 한강 입구 강화 교동도에 설치된 조선시대 행정구역이다. 교동도는 섬의 규모가 크지 않아 지금은 강화군에 속해 있지만 삼국시대때부터 한강유역을 지키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강화와는 행정구역이 설치되었다. 교동도는 개화산을 비롯하여 여러 섬으로 되어 있었으나 간척사업으로 넓은 들판이 형성되면서 하나의 섬이 되었다. 삼국시대 고구려가 고목근현이라 불렀으며 신라경덕왕때 교동현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조선후기 경기수영이 남양에서 이 곳으로 옮겨지면서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1633년에는 삼도통어사(三道統禦使)가 설치되어 경기도.황해도.충청도의 수군을 총괄하던 고장이다. 도호부사는 원래 종3품의 외관직이지만, 교동도호부사는 경기수영을 담당하던 정3품의 수군절도사가 겸임하였다.

강화 교동읍성 01-20200302<교동읍성 남문>

삼도수군통어영과 교동도호부 관아가 있던 강화 교동도 읍내리에는 관아 건물은 남아 있지 않고 읍성을 둘러싸고 있던 읍성 석축 일부와 남문 홍예만이 남아 있다. 성벽의 둘레는 약 430 m이며, 동.남.북에 성문을 두었다.

OLYMPUS DIGITAL CAMERA<2017년 문루를 복원하기 전 홍예만 남은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홍예>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문루 내부의 석축. ‘南樓’라고 적힌 글자가 보인다.>

강화 교동읍성 13-20200302<안쪽에서 본 남문 유랑루(庾亮樓)>

OLYMPUS DIGITAL CAMERA<삼도수군통어영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三道’라고 적힌 글자>

OLYMPUS DIGITAL CAMERA<작은 표지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거북받침돌>

성벽은 높이 6 m 정도이며 바깥쪽에 바깥쪽에 잘 다듬은 돌로 석축을 쌓은 조선후기 성벽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방어시설로는 옹성(甕城), 치(雉) 등을 두고 있다.  현재는 성벽은 돌로 쌓은 석축 일부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앞 옹성을 쌓았던 석축>

강화 교동읍성 12-20200302<남문 동쪽 성벽>

강화 교동읍성 02-20200302<남문 서쪽 성벽>

강화 교동읍성 14-20200302<마을 민가 담장으로 사용되었던 서쪽 성벽>

강화 교동읍성 15-20200302<서쪽 성벽>

강화 교동읍성 07-20200302<북문 공북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자리>

강화 교동읍성 06-20200302<북문 동쪽 성벽>

강화 교동읍성 08-20200302<북문 서쪽 성벽>

교동읍성 북문을 나서면 교동향교와 화개산성이 있는 화개산으로 연결된다. 비상시 북문을 통해 화개산성으로 대피할 수 있다.

강화 교동읍성 10-20200302<북문에서 보이는 화개산>

강화 교동읍성 11-20200302<아래에서 본 북쪽 성벽>

교동읍성(喬桐邑城),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
읍성이란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 기능을 함께 하는 성을 말한다. 이 읍성은 조선 인조 7년(1629) 교동에 경기수영을 설치할 때 돌로 쌓았다. 둘레 430m, 높이 6m 규모로 세 개의 문을 내고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문을 유랑루(庾亮樓), 북문을 공북루(拱北樓)라 하였다. 동문과 북문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로 문루 부분이 무너졌던 것을 2017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른다. (안내문, 강화군청, 2020년)

교동도에 지금은 옛 교동부 관아의 흔적은 읍성을 쌓았던 성곽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아 있지 않고, 교동도의 주산인 화개산 남쪽 기슭에 관아에서 운영하던 교육기관이 향교가 남아 있다. 교동향교는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가져와 모셨던 유서깊은 향교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한강 입구가 보이는 화개산 북쪽 기슭에 있던 것을 조선 영조때 관아와 가까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교동향교는 후묘전학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으며,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동.서, 유생들이 공부하던 명륜당과 동.서재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문 안으로 보이는 읍내리 마을>

OLYMPUS DIGITAL CAMERA<교동도후부 관아가 있었던 읍성 내부 마을>

강화 교동읍성 16-20200302<마을에서 보이는 남문>

조선시대 선정을 펼친 교동지역의 목민관인 수군절도사겸 삼도통어사 도호부사, 방어사 등의 영세불망비 등 총 39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들은 교동면 관내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91년도부터 강화군 및 교동유림에서 이 곳으로 이전하여 관리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교동향교 입구 마을에 세워진 읍내리 비석군>

화개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교동향교는 고려시대 성리학을 도입한 유학자 안향이 원나라에서 공자의 초상화를 가져와 모셨던 유서깊은 향교이다. 한강 입구가 보이는 화개산 북쪽 기슭에 있던 것을 조선 영조때 관아와 가까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교동향교>

교동도는 인구가 많지 않은 작은 섬이지만 세금으로 걷어들인 곡식을 비롯하여 한양으로 향하는 많은 물자가 오가는 연안 수로의 주요 교통요지였다. 조선후기 인조 때 강화도 방어를 위하여 남양(화성시)에 있던 삼도수군통어사를 이곳으로 옮겼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 조선수군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도수군통어영이 남산포 선착장>

강화 교동읍성 04-20200302<남산포 앞 바다>

강화 교동읍성 03-20200302<교동읍성 앞 해안 갯벌>

OLYMPUS DIGITAL CAMERA<교동읍성 남쪽 갯벌 안쪽 들판, 이 곳에 선박들이 정박해 있으면서 훈련도 하였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화개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교동읍성과 남산포 일대>

삼도수군통어영지(三道水軍統禦營址)
조선 인조7년(1629)에 한성 방어를 위해 남양 화량진에 설치되어 있던 경기수영을 교동으로 옮긴 다음 인조 11년(1633)에는 3도(경기, 충청, 황해) 수군 통어영을 교동 남산포에 설치하였다. 이곳에는 수군을 훈련하던 훈련장 및 정박시 배를 묶어두던 계류석 1기가 현존하고 있다. (안내문, 강화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강화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강화 용흥궁(龍興宮),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잠저(潛邸)

강화읍 관청리에 소재한 조선 25대 철종이 강화도 유배시절에 살았던 잠저(潛邸)인 강화 용흥궁이다. 용흥궁은 원래 초가였던 것을 철종이 즉위한지 4년이 되던해에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관아가 있던 지역이라 좁은 골목안에 대문을 세우고 일반 민가처럼 사랑채, 안채, 문간채를 지었는데, 이를 별전, 내전, 외전이라고 부른다. 조선시대 잠저는 인조, 철종, 고종처럼 정상적으로 왕세자를 거쳐서 왕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국왕이 후사가 없거나 반란 등의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왕위에 추대된 왕이 민간인 신분으로 살았던 집을 말하며 태조의 함흥본궁, 인조의 저경궁, 영조의 창의궁 등이 있다.

은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로 그의 형 회평군의 옥사로 가족이 강화도에 유배되어 살다가 헌종 사후 덕완군으로 책봉되었다가 1849년에 왕위에 즉위했다. 철종철종의 재위시기는 구한말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했으며, 청나라의 몰락 등 동아시아 정세 또한 극히 나빴던 시기이기도 한다.강화읍 관청리는 역사유적지구라고 할 수 있는 고려궁지, 강화유수부 동헌, 강화성당, 강화성공회성당 등이 모여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강화유수부 관아가 있었기때문에 강화도로 귀향을 왔던 철종 가족들은 강화유수의 감시를 받으면서 관아 주변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강화 용흥궁,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조선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쳐하였던 잠저로 강화유수 정기세가 철종 4년(1853)에 지금과 같은 건물을 짓고 용흥궁이라고 하였다. 좁은 골목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낭채를 두고 있어 창덕궁 낙선재와 같이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궁 안에는 철종 잠저임을 기록한 비석과 비각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이다. <출처:강화군청>

OLYMPUS DIGITAL CAMERA강화 용흥궁 전경. 강화읍 관청리 언덕에 세워진 강화성공회 성당 아래 주택가에 세워진 한옥건물이다. 원래는 초가였던 것을 철종 즉위 후 강화유수 정기세가 크게 지었다고 한다. 창덕궁 낙선재처럼 구한말 서울지역 양반가 저택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솟을 대문과 양쪽으로 외전이라고 불리는 문간채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집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던 문간채가 있다. 골목과 붙어 있는 문간채는 솟을대문 양쪽으로 2칸씩 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문간채에 해당하는 외전 마당. 안채와는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외전에서 내전(안채)을 출입하는 중문과 담장.

OLYMPUS DIGITAL CAMERA내전이라 불리는 안채. ‘ㄱ’자형 건물로 각 앞면 3칸씩으로 가운데 2칸짜리 넓은 대청마루가 있다. 낙선재와는 달리 경북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폐쇄적인 ‘ㅁ’자형 구조대신 개방적인 ‘ㄱ’자형 건물배치를 하고 있다. 서울도심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주택의 구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청마루. 앞면 2칸규모이며, 앞쪽에는 통로로 사용하는 툇마루를 달아놓아 넓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안방은 양쪽으로 큰 문을 달아놓아서 시원해 보인다. 구한말 양반가옥에서 사용했던 가구들을 놓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에는 앞면 5칸 규모의 행랑채가 있다. 하인들이 머무는 작은 방과 마루, 3개의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 민간주택에 비해서 광이 많은 편이다. 행랑채 왼편에는 안채에서 외부로 출입하는 출입문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골목 담장쪽에 만들어 놓은 광. 행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바깥 골목에서 본 행랑채. 서울지역 도시 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채뒷편의 작은 우물과 별전이라 불리는 사랑채와 연결되는 쪽문.

OLYMPUS DIGITAL CAMERA일반 사대부 저택의 사랑채라고 할 수 있는 뒷편에 있는 별전. 앞면4칸에 누마루를 두고 있는 조선후기 양반가 사랑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에는 작은 온돌방과 대청마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시 양반가 저택에 비해서는 상당한 소박한 규모의 사랑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마당에 있는 우물

OLYMPUS DIGITAL CAMERA우물 왼편 언덕에는 이곳에 철종이 머물렀던 잠저임을 알려주는 비석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이 곳이 철종이 머물렀던 잠저(潛邸)임을 적어 놓은 비석.

 

강화 부근리 지석묘(사적), 동아시아 고인돌을 대표하는 유적지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에 소재한 지석묘(사적)이다. 하점면 일대 40여기의 고인돌과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에 분포하는 많은 고인돌을 대표하는 고인돌이다. 높이 2.6m, 덮개돌 길이 6.5m의 대형 고인돌로 탁자모양을 하고 있는 북방식 고인돌이다. 부근리 일대에서 무문토기조각과 간돌검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덮개돌, 받침돌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사체를 넣은 막았던 판석은 남아 있지 않다. 그 형태가 웅장하여 제단 기능을 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강화 고인돌은 2000년 12월 고창, 화순의 고인돌유적과 함께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강화고인돌은 밀집도가 높고 다양한 형식이 함께 존재한다는 점이 높게 평가받았다. 강화 고인돌은 157기가 보고되어 있으며, 주로 고려산 북쪽과 별립산 일대에 분포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탁자형태를 하고 있는 북방식과 바둑판 형태를 하고 있는 남방식이 고루 분포하고 있어 남쪽과 북쪽의 고인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아시아 일대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무덤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강화 부근리 지석묘(사적137호). 묘실을 구성했던 판석이 남아 있지 않아 탁자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이 제단과 비슷하여 제단으로 보는 견해도 일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측면에서 본 고인돌

OLYMPUS DIGITAL CAMERA부근리 일대에서 출토된 간돌화살촉. 청동기시대 유물들이 부근에서 출토되고 있어 조성연대를 청동기시대로 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기시대 고인돌을 조성하는 모습을 재현해 놓은 모형(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에서 본 모습. 안정감을 보여주는 정면과는 달리 약간 불안정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뒤쪽(북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서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강화도의 주산이라 할 수 있는 고려산.

강화에서는 약 40여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데 주로 고려산 북쪽 언덕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간척으로 지금은 고려산 북쪽에는 넓은 농지가 있지만, 원래는 갯벌이었다고 한다. 한강하구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지역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고인돌을 조성할 수 있는 지배계층이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부근리 서쪽 별립산 주변에도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강화 부근리 고인돌은 사적 13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찾는 강화도의 명소이다. 주변에는 고인돌을 조성한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기시대 주거지인 움집

OLYMPUS DIGITAL CAMERA강화 부근리 고인돌 유적지.

OLYMPUS DIGITAL CAMERA최근에 조성한 강화역사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2009년 강화 부근리 고인돌

강화 부근리 지석묘(사적137호),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우리나라는 고인돌의 나라라고 할 만큼 수량면에서 전세계적으로 단연 으뜸이다. 강화도 고인돌은 동북아시아 고인돌의 흐름과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유적이다. 강화도 지석묘로 잘 알려진 이 고인돌은 이른바 탁자식(북방식) 지석묘라고 분류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인돌이다. 해발 약 30m 높이의 능선 위에 세워진 이 고인돌은 흙으로 바닥을 수십층 다진 뒤 받침돌(지석)을 좌우에 세우고 안쪽 끝에 판석을 세워 묘실을 만들어 사체를 넣은 다음, 판석을 막아 무덤을 만들었으나 두끝의 마감돌은 없어진 상태여서 석실 내부가 긴 통로 같지만, 제단 기능의 고인돌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규모는 덮개돌이 긴축의 길이가 6.4m, 너비 5.23m, 두께 1.34m에 전체 높이 2.45m이다. <출처:강화군청>

강화역사박물관, 강화의 민속

강화역사박물관에는 다른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민속품을 전시하고 있다. 민속품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가구를 비롯하여 사랑방에서 바깥주인이 사용하던 문방구, 안방에서 사용하던 다양한 생활용품들을 들 수 있다. 민속품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던 물건으로 오래세월 사용하는 동안 대부분 낡거나 파손되는 경우가 많아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생활용품조차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대부분의 민속품들은 19세말 또는 20세기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유물로서 큰 가치는 없지만 당시 사람들이 생활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강화도 행렬(작가미상, 19세기), 1849년 조선 25대 철종을 모시러 오는 왕실의 행렬을 그린 기록화이다. 길을 따라 구불구불 길게 늘어선 행렬과 강화의 전경을 12폭 병풍에 담았다. 위엄있고 장엄한 행렬을 화면 중심에 배치하고 성곽과 건물들, 강화주민의 생활풍경을 자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강화도 행렬 중 강화행궁과 유수부 관아가 있었던 강화산성. 행렬은 갑곶나루를 건너 남문으로 입성한다.

한국의 민속품
민속품은 옛부터 백성들이 여가를 이용하여 직접 생활도구나 장식품을 만들면서 전승 되어 왔으며, 생활풍습과 취미, 기호에 맞게 만드는 실용적인 조형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민속품은 재료 자체에서 오는 질감을 자연스럽게 살리면서 때에 따라서는 정교한 솜씨와 대담한 터치로 인간미를 느끼게 한다. 상류층의 민속품은 고가의 재료와 화려한 문양을 자랑하는 반면에 일반적인 서민들은 실용성에 초점을 맞춰서 제작하고 있는 것을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재료와 쓰임새에 따라서 그 형태와 문양이 다르며, 공예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지역, 시대에 따라서 기법과 기형을 변화시키고 있어 독창성까지 엿볼 수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민속품은 대부분 조선후기 유물로 당시 시대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으며 특히 돌, 나무, 흙, 종이 등의 기본적인 재료를 이용하여 한국 고유의 전통미를 솔직하게 담고 있다. 또 지역적으로 전승되어 내려온 전통적 기법과 장인의 손길을 통해서 예술적 가치와 선조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강화도는 농토가 넓고 강화유수부가 있었던 큰 고을이었지만, 양반들의 고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강화지역 사대부 저택으로 강화군 선원면에 있는 철종외가를 들 수 있다. 서울이나 경북지역 등과는 달리 넓은 마당과 개방된 경기지역 한옥의 형태를 하고 있다.

한국의 사랑방
한국의 주택에서 집의 안채와 따로 떨어져 있는 방으로, 바깥주인(남편0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기도 하는 방을 말한다. 가옥의 구조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문을 들어서면 하인들이 거처하는 행랑이 있고 조금 떨어져서 손님방으로 사용하는 수랑, 그리고 아이들이 쓰는 작은사랑, 웃어른이 거처하는 큰사랑이 있는데, 작은사랑.큰사랑을 함께 사랑이라 한다. 사랑방은 학문과 예술의 장소인 동시에 주인의 안목과 격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선비들은 사회지배층이지만 부귀를 나타내는 화려함을 속된 것으로 여겨 사랑방 역시 단정하면서도 깔끔한 멋이 배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사람방 목가구는 번잡한 장식이나 과다한 배열을 피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절제된 생활을 추구하는 선비의 취향에 맞게 간결한 선, 단순한 구조, 쾌적한 비례를 고루 갖춘 것이 선호되었다. 이와함꼐 사랑방에 갖추어 놓고 사용하는 기물 중 소중히 다루었던 것은 종이, 붓, 먹, 벼루의 문방사우였으며, 이를 편리하게 사용하고 보관하기 위한 여러가지 용품도 함께 갖추어져 있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학문과 예술 세계의 중심지였던 사랑방은 깊이 있는 내면생활을 추구하였던 그들의 격조와 품위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문서함, 문갑

OLYMPUS DIGITAL CAMERA사각함, 서류함

OLYMPUS DIGITAL CAMERA책장, 빗접,

OLYMPUS DIGITAL CAMERA서안

한국의 안방
안방은 안채의 중심으로서 가장 폐쇄적인 주공간이며, 주택의 제일 안쪽에 위치한다. 따라서, 외간남자의 출입이 금지되며 남자로서는 다만 남편과 그의 직계비속만이 출입을 할 수 있다. 또한, 주부의 실내 생활의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집안일 중 안살림을 모두 관리하는 생활의 중추가 되는 공간이다. 안봥 좌우로 부엌이나 마루.고방.윗방 등이 연결된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안방가구
안방의 가구배치를 살펴보면, 아랫목의 다락 미닫이문이나 화조도를 배치, 화사하고 온화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머리맡에는 낮고 자그마한 머릿장을 놓아 문서.귀중품들을 안전하게 보관하면서도 손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 위에 함을 올려 놓았다. 또 옆 마당으로 통하는 미닫이 문턱 아래나 옆 벽면에는 낮고 긴 문갑을 배치하여 뒷마당을 내다볼 수 있도록 하였다. 아랫목에 반짇고리와 화로를 배치하고 머리맡에 몸단장을 위한 좌경과 빗접을 놓았으며, 윗목에는 장과 농, 함 등을 배치하였다. 좌경과 빗접은 앉은 자세에 맞춰 설계되었는데 지나친 몸단장을 삼가며 또 외형적으로 나타냄을 꺼려 사용치 않을 때는 접어둘 수 있게 제작하였다.
1.서민주택의 안방
안방은 서민주택이나 상류주택이냐에 따라 마감 재료나 가구, 윗방의 유무 등에서 차이가 있다. 서민주택의 안방은 대부분 부엌과 접해 있으며, 배면과 측면이 벽으로 막혀 있어 상당히 어두침침하다. 바닥은 장판지 마감이거나 온돌 흙바닥 위에 삿자리(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를 깔았다. 사면의 벽은 벽지 마감이며 천장은 주로 종이반자로 하였는데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하는 경우도 있다.
2.상류주택의 안방
상류주택은 대개 안방과 부엌 사이에 벽장이 있고, 그 옆에는 부엌 위 다락으로 통하는 다락문이 달려 있다. 그리고 방의 옆이나 윗목에 반닫이, 장롱 등을 놓고 의류 등을 보관하기도 하며 겨울철에는 외풍을 막기 위해 창 쪽을 병풍으로 가리거나 벽과 창문에 각각 방장(방문이나 창문에 치거나 두르는 휘장)을 치기도 한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기반닫이, 강화반닫이

OLYMPUS DIGITAL CAMERA강화반닫이, 의걸이장,

OLYMPUS DIGITAL CAMERA삼층장,

OLYMPUS DIGITAL CAMERA비녀, 동곳

OLYMPUS DIGITAL CAMERA동경

OLYMPUS DIGITAL CAMERA담뱃대, 약수저, 은장도, 쪽집게

OLYMPUS DIGITAL CAMERA떡살, 다식판, 인두

OLYMPUS DIGITAL CAMERA다듬이

OLYMPUS DIGITAL CAMERA철제솥, 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