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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정족산 사고(史庫)

정족산사고는 조선후기에 설치된 4곳의 외사고(外史庫) 중 하나이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지 않았던 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전주사고본을 인조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보관하던 곳이다. 정족산 사고는 실록과 중요한 문서들을 보관하는 장서각과 왕실으로 족보인 선원보를 같이 보관하는 선원보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 누각으로 지어진 오대산사고나 전주사고와는 달리 정족산 사고는 창고 건물처럼 지어졌다. 전국적으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정족산사고 또한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과 큰 전투가 있어 강화유수부에 보관하던 외규장각 도서와 같은 위험에 처할뻔 하기도 했다. 정족산성내에 있는 전등사는 사찰의 기능도 있지만, 오대산 월정사와 마찬가지로 사고를 지키고 관리하던 승병의 역할도 수행했던 사찰이다.

사고(史庫)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당대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과 국가적으로 중요한 서적이나 문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고려는 개국 직후부터 사관을 두고 실록을 편찬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고종대인 1227년부터는 개경 이외에 해인사에 한부를 보관하였다.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개경에 있던 사고(史庫)를 한양으로 옮겨 춘추관(春秋館)으로 개칭하였으며, 충주에서 외사고(外史庫)를 두었다. 세종대에는 전란이나 화재 등에 대비하여 충주 외에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별도의 사고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자 묘향산,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의 4곳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였다. 인조대에는 청나라 위협을 피해 묘향산 사고를 강화 마니산사고로 옮겨다가 이후 정족산성으로 옮겼다. 정족산 사고에 보관하던 문서들은 1908년부터 규장각 관할하에 두어 오늘날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소장.관리하고 있다.

정족산 사고,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임진왜란(1592)전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충주.성주.전주 등 3개의 외사고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이 화를 면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후 임란의 병화를 피한 전주사고본이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 선조 39년(1606) 4월 복인 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본인 원본은 마니산사고로에 나머지 4부는 춘추관.태백산.묘향산.오대산사고에 봉안되었다.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의 피해와 효종 4년(1653) 11월 사각의 실화사건으로 삼랑성내 정족산사고가 건립되어 이안 봉안되어 왔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 사고의 실록 및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 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정족산사고는 1931년 전후에 파손되어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강화 문화권 사업으로 복원.정비하였다. <출처:강화군청>

OLYMPUS DIGITAL CAMERA강화 정족산 사고. 임진왜란 이후 유일하게 피해를 입지 않은 전주사고에서 보관했던 실록을 비롯한 문서들을 이곳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직후에는 묘향산에 사고를 설치하였으나, 병자호란 이후 이곳으로 다시 옮겼다. 전국의 사고 중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그 터만 남아 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실록을 보관하던 건물인 장사각(藏史閣). 2층 누각형태를 하고 있는 전주사고나 오대산사고와는 달리 단층 건물로 지어졌다. 앞면 4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창고 형태의 건물이다. 습기 등으로 문서가 훼손되지 않도록 벽면 아래쪽에 환기구를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고 출입문. 환기를 위해 헐겁게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조 실록(복제본). 정족산사고에는 원본이라고 할 수 임진왜란 당시 피해를 입지 않은 전주사고본 실록과 의궤들을 보관하고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성황후 산릉 조성 의궤(명성황후 산릉 조성 의궤), 1895~98년, 정족산사고본

1895년(고종 32) 8월부터 1897년 11월까지 명성황후의 산릉을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처음에는 동구릉 숭릉 옆에 ‘숙릉’이라는 능호로 산릉을 조성하다가 공사가 중단되었으나, 1896년 12월 다시 국장이 재개되었다. 1897년 고종이 능호를 ‘홍릉’으로 고치면서 다시 청량리로 산릉을 옮겼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장사각 옆에는 앞면 3칸규모의 작은 건물이 선원보각(璿源寶閣). 이곳에는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를 보관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실 족보인 선원계보기략

OLYMPUS DIGITAL CAMERA사고 옆에 위치한 건물. 사고를 관리하는 관원들과 군사들의 거처하는 곳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족산성을 지키며 사고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았던 전등사.

OLYMPUS DIGITAL CAMERA전등사에서 사고로 올라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정족산 사고

강화 철종 외가, 구한말 사대부 저택

강화군 선원면에 위치한 철종 외가이다. 구한말 경기지역 사대부 저택 형식을 따르고 있는 이 저택은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에 나란히 배치히고 담장으로 그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이는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아버지인 순조를 위해 창덕궁 후원에 지은 연경당과 비슷하다. 원래는 ‘H’형 구조를 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가운데 행랑채 일부가 헐려 ‘ㄷ’자형을 하고 있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아 폐가처럼 보이지만, 건축연대는 그리 오래되는 않았으며 상당히 규모있는 저택으로 지어진 집이다. 원래부터 철종 외가가 살았던 집은 아니고 철종 즉위 4년후인 1853년에 외삼촌 염보길을 위해 지어준 집이다. 강화에 유배되었던 시절 철종이 도움을 받았던 외가를 위해서 철종 잠저인 용흥궁과 함께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철종은 전계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사도세자(장헌세자)의 아들인 은언군의 손자이기도 하다. 1844년 그의 형 회평군의 옥사로 가족이 강화도로 유배되어 ‘강화도령’이라는 별칭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철종은 헌종의 뒤를 이어 1849년 19세로 즉위했으나 재위기간 14년은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절정기로 삼정의 문란이 극심했고 민란이 끊이지 않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국왕으로서은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이른 나이에 병사했던 왕이다. 강화도에는 그와 관련된 유적이 몇곳있는데, 그가 강화유배기간 동안 살았던 강화유수부 관아부근의 용흥궁과 그의 외가가 남아 있고, 잠시 교동도에 피신했던 철종잠저소 등이 있다.

철종 외가,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철종 4년(1853)에 지어진 집으로 철종의 외삼촌인 염보길이 살았던 집이다. 당초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에 두는 ‘H’자형 가옥 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채만 남아 있다. 평면 구성은 전체적으로 경기지역 사대부 가옥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안채와 사랑채를 ‘-’자로 곧장 연결시켜 회장담(주로 사대부집에서 사용되었던 일종의 담장)으로 간단하게 나눈 것이 특이하다. <출처:강화군청>

OLYMPUS DIGITAL CAMERA철종이 즉위한 후 외삼촌 염보길을 위해 지어준 강화군 선원면에 위치한 철종 외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창덕궁 연경당과 비슷한 구조로 안채와 사랑채가 붙이 있는 건물 배치를 하고 있다. 서쪽에 사랑채와 누마루를 두고 가운데 부엌과 행랑채로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고 있다. 가운데는 행랑채와 담장으로 구분하였으나 지금은 행랑채 일부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아에서 지어준 건물로 솟을대문을 설치하지 않고 문간방이 있는 문간채를 대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문간채는 단촐하게 양쪽에 작은 문간방을 두고 있다. 대문은 사랑채가 있는 마당과 연결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은 앞면 4칸규모로 가운데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앞 툇마루, 안채와는 툇마루로 연결해 놓고 있지 않으며 의도적을 부엌을 설치하여 공간을 분리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한쪽에는 누마루를 달아 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 사랑채에 ‘매헌서당梅軒書堂’이라는 현판을 걸어놓고 있다. 손님을 접대할 수 있는 온돌방과 누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주춧돌로 석재 기둥을 사용하고 있으며 목재난간을 두르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후기 누마루의 형식을 하고 있다. 누마루 아래에 온돌방 아궁이를 설치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전경

OLYMPUS DIGITAL CAMERA안채는 부엌을 포함하여 앞면 5칸 규모이다.  집안행사 등을 위한 공간으로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있으며, 그 양쪽으로 방들이 배치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청마루 내부. 상당히 넓은 편이며 뒷쪽에도 문을 달아서 통풍이 잘되고 시원한 느낌을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분합문을 사용하여 집안행사때 공간을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랑채 옆 부엌. 집안살림을 하는 부엌이 아니라 사랑방에 불을 때기 위한 온돌 아궁이가 있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음식을 마련하는 부엌에 안채 오른쪽 날개채에 있으며, 다락방이 있는 2칸규모로 상당히 큰 편이다. 그 옆으로 행랑채를 달아 내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채 마당 가운데에는 안채와 사랑채를 공간적으로 구분해주는 행랑채가 있었는데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철종외가가 있는 강화군 선원면 일대.

강화역사박물관, 공예미술품

강화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공예 미술품들이다. 강화지역에서 출토되거나 소장되어 왔던 것은 아니고,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 박물관에 기탁,기증되어 전시되고 있는 문화재들이다. 청동기시대부터 여러곳에서 출토되는 금속이나 옥, 유리 등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장신구와 불상을 비롯한 불교공예품, 고려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재인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옛 공예
공예란 사람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여러가지 용품을 주변의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제작하기 시작하면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으로 생활의 편리함을 도모하기 위해 고안된 여러가지 물건들을 모두 포함하므로 역사가 매우 길며 분류기준에 따라 그 종류도 다양하다. 재료에 따라 금속공예.돌공예.목공예.칠공예.죽공예.종이공예.가죽공예.도자공예.밀초공예.유리공예 등으로 나눌 수 있으며, 수요계층과 사용처에 따라 종교용품, 왕실용품, 사치품, 민예품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따라서 공예품은 그 민족의 오낸 역사와 더불어 생활터전이 되어온 자연환경과 주거환경, 종교, 생활철학에 따른 민족의 정서가 빚은 고유한 아름다움이 드러나 있다. 우리나라의 공에품에는 각 시대의 특징이 녹아 있다.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진 빗살무늬토기, 고운무늬가 새겨진 청동기시대의 거울 등을 통해 당시의 발달된 기술과 미감을 엿 볼 수 있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금관과 금제 귀걸이 등에서는 정교한 금은 세공기술이 돋보이며, 고려의 청자, 담백한 조선백자, 분청사기 등의 도자공예품은 세계도자사에서도 그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청렴한 선비문화가 그 주축이었던 조선시대에는 간결하고 쾌적한 목공가구들과 화려하면서도 운치 있는 나전칠기 등이 조선시대의 아름다움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공예품은 각 시대마다의 이념과 기술, 에술성이 담겨 있으며, 여기에 실용성까지 겸비하여 발전되어 왔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검부속구(청동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동말모양띠고리(철기~원삼국시대), 청동초두(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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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시대 철제투구와 갑옷

OLYMPUS DIGITAL CAMERA철제환두대도, 허리띠고리, 발걸이, 마구 (삼국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철제투구(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수저(고려~조선시대), 금입사초문화형접시(고려시대), 금동잔탁(고려시대)

불교조각
불교조각은 불교도들이 예배대상인 부처와 보살의 모습을 돌과 나무 등을 이용하여 형상화한 것을 말한다. 부처는 본래 모니를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비로자나불(진리의 빛을 형상화한 부처), 아미타불(대승불교에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법을 설한다는 부처), 약사불(중생들이 모든 질병을 치유해주는 부처) 등의 개념이 형성되어 다양한 불상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는 기원 후 4세기 경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면서 불상도 함께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초기에는 중국의 것을 단순히 모방하는 수준이었으나, 점차 우리나라 특유의 조형감각이 돋보이는 불상을 제작하여 <서산 마애삼존불>,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걸작이 탄생하게 되었다. 한편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일제의 중생을 구하려 애쓰는 자를 일컫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 이전의 석가모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불상과 마찬가지로 보살상도 큰 공덕을 쌓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석가모니불을 보조하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아미타불을 보좌하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 그리고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이 있다. 그중에서도 관음보살과 미륵보살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고 복을 가져다 주는 존재로 믿어져 대중에게 가장 친근한 보살로 신앙되어 왔다. 일반적으로 보살상은 불상과 달리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몸에는 화려한 장신구를 두른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 외에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으로서 사천왕, 팔부중 등도 조각으로 다수 제작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좌불상(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동경(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명문금고(고려시대)

금고(金鼓), 불교 의식 용품으로 금속으로 만든 타악기의 하나이다. 절에서 대중을 불러 모으거나 급한 일을 알리는데 사용한다. 얇은 북과 같은 형태로서 세 개의 고리가 있어 달아맬 수 있게 되어 있다. 표면은 동심원이 여러겹으로 새겨져 있고 중앙에는 연화문이 배치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주조된 이 금고의 측면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고려시대에 제작된 금고 중 명문이 있다고 알려진 금고는 50여기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고는 865년(신라 경문왕5)에 제작된 금고이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금고는 널리 사용되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옥기의 역사
구석기시대에는 옥제품을 비롯한 장신구가 보이지 않으나 신석기시대 이후에는 옥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신석기시대에는 주로 점판암제, 곱돌제, 대리석제 등 보통의 돌을 사용하고 있지만 비취제나 흰색 옥돌, 벽옥제도 소량으로 사용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굽은옥, 대롱옥, 구슬 등이 사용되었는데 이들의 재료는 천하석, 벽옥, 유리 등으로 고인돌이나 돌널무덤에서 출토된다. 철기시대 옥의 형태는 정형화된 굽은옥, 6면체로 정교하게 다듬은 여러면옥, 주산알 모양의 옥과 구슬이 있다. 삼국시대에 이르면 옥은 정형화되고 다양한 형태가 나타난다. 목걸이에 사용된 옥의 종류는 둥근옥, 여러면옥, 대롱옥, 백옥, 굽은옥 등이 있다. 삼국시대의 옥이 다양해지는 것은 중국 옥문화의 영향으로 해석된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옥기(玉器, Jade)
옥으로 만든 장신구로, 옛사람들은 옥을 천지의 정수이며 음양에 있어 지극히 순결한 것이라 생각하고 귀하게 여겼다. 옥의 원석을 갈고 다듬어 작은 구멍을 뚫으면 구슬이 되고, 이 구슬을 꿰어 달아 길이가 목에 두르는데 알맞으면 목걸이가 되고, 가슴까지 걸치면 가슴걸이, 손가락에 끼우면 반지, 팔목에 끼우면 팔찌가 된다. 그리고 팔에 끼우면 완천이 된다. 옥은 형태에 따라 구슬, 대롱옥, 둥근옥, 굽은옥 등으로 분류되며, 옥에 사용되는 물질에는 석제, 유리, 마노, 수정, 호박, 비취, 황옥 등이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옥구슬(삼국시대)

유리구슬(Glass Bead)
유리로 만든 장식용 구슬로, 삼국시대 비금속 장식구를 대표한다. 한국의 고대 유리구슬은 형태.크기.제작기법.용도.색 이외에도 화학 조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형태상으로는 둥근 구슬, 굽은 구슬 등을 기본으로 변형하여 만든 각형 구슬, 대추형 구슬, 참외형 또는 메론형 구슬, 꽃잎형 구슬, 연주형 구슬, 코일형 구슬 등이 있으며 구슬 표면에 나타난 장식적 무늬에 따라 다른 색상의 줄무늬를 돌린 연리문구슬, 점무늬로 동심원을 그린 청령옥, 유리 표면에 사람 얼굴 등 어떤 형상을 나타낸 모자이크장식 구슬, 투명유리 내부에 얇은 금박을 입힌 금박구슬이 있다. 또한 크기가 아주 작은 구슬들을 소옥이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유리구슬(삼국시대),

곱은옥(Curved Jade)
보통 ‘C’자형으로 만곡한 몸체의 한쪽에 구멍을 뚫어서 매달게 되어 있는 치레걸이로, 형태상 ‘C’자형, 반원형, 반월형 등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곱은옥이라고 한다. 청동기시대 곱은옥의 재료는 대부분 천하석이지만, 철기시대 이후에는 수정, 삼국시대에는 유리 등의 재질로 변화한다. 곱은옥의 사용방법은 유적에서의 출토상태를 고려하여 볼 때 대롱옥과 반월형 곱은옥이 세트를 이루어 목걸이가 되며, 이때 곱은옥은 펜던트의 역할이다. 반면 곱은옥이 귀걸이로 이용된 듯 출토되는 예도 있다. 이 외에도 대롱옥과 연결된 목걸이나 머리장식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곱은 옥장식 목걸이(삼국시대),

대롱옥
원통의 대롱과 같은 형태로, 길이 방향의 중앙에 구멍을 뚫어 연결해서 사용하는 치레걸이이다. 재질은 대부분 벽옥이지만, 응회암과 같은 돌을 이용하여 만든 것과 흙으로 만든 것도 있다. 옥구슬 중에는 가장 먼저 발생한 것으로, 대롱옥은 고인돌이나 돌널무덤 등 무덤에서 주로 출토되는데, 대체로 목걸이로 이용된 것으로 보이나, 숫자가 적은 경우는 귀걸이 등 다른 치레걸이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곱은옥 등 다른 형태의 옥과 결합되어 세트를 이루기도 한다. 무덤에서 출토되는 경우 무덤의 외곽이나 상부 등에서 출토되는 것을은 장송의례와 같은 매장의례에 이용된 것들로 판단된다. 아직 벽옥제 대롱옥을 제작한 흔적은 어느 유적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대롱옥

OLYMPUS DIGITAL CAMERA은장도(조선시대), 노리개(조선시대)

고려청자
우리나라의 청자는 백토로 형체를 만들어 말린 후 섭씨 700~800도에서 한번 굽고, 그 위에 석회질의 유약을 입혀 1,300도 정도의 고온에서 구워내는 자기의 일종이다. 그릇을 두 번 구우면서 태토의 색이 흐린 회색이 되기 때문에 청자의 색은 회색바탕에 비취색 유약이 입혀지게 되어 이를 비취색, 곧 비색이라고 부른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정치.경제.문화 등 사회 전분야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일대 사건이었다. 초기에는 중국의 월주요 청자의 영향을 받았지만 차츰 고려청자만의 특색있는 형태와 무늬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상감 기법의 발달은 고려청자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상감연당초문매병(고려시대), 청자음각모란문장경병(고려시대), 청자상감국화문소병(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상감쌍어문대접(고려시대), 청자상감운학문대접(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상감운학문완(고려시대), 청자음각연당초문잔탁(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흑백상감류문소병(고려시대), 청자상감연판문호(고려시대), 분청사기귀얄문편호(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상감국화문접시(고려시대)

조선백자
조선시대에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도자기문화에서 중심을 이루었다. 분청사기는 비교적 짧은 기간동안 제작되었으나 백자의 경우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만들어졌고 사용되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도자기라고 할 수 있다. 분청사기는 조선전기 약 150년간의 짧은 기간동안 만들어졌던 그릇으로 미술사학자인 고유섭선생은 회청색의 바탕흙에 백토를 바르고 유약을 씌워서 구워냈다고하여 “분장회청사기”라고 불렀으며 그 줄임말이 분청사기이다. 청자에서 사용되었던 대부분의 기형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표면에 백토를 입히는 여러가지 방식에 따라서 다양한 장식효과를 보여준다. 이러한 분청사기는 1467~1468년 경기도 광주에서 관요가 설치된 이후 국가에서 필요한 그릇을 백자로 제작하면서 지방 분청사기 가마들은 점차 지방 관청과 일반 백성을 위한 도자기를 만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분청사기의 질은 떨어진 반면 백자의 생산량이 늘어났고,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이전인 16세기 중엽 분장분청사기를 끝으로 백자에 흡수되었다. 분청사기를 제작했던 가마터로 공주 학봉리를 중심으로 한 계룡산지역과 광주 충효동을 중심으로 한 무등산 지역이 가장 대표적이다. 조선시대의 도자를 대표하는 백자는 청자제작에 사용된 흙보다 순도가 높으며 안정된 흙을 사용했다. 백자를 굽는 온도도 청자의 경우 1280도 가량이지만 백자는 1300도 정도가 일반적이다. 백자는 세종때부터 왕이 사용하는 그릇인 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조선왕실에서 많은 양의 백자를 필요로 했다. 때문에 대궐 내의 식사와 잔치를 담당하던 사옹원에서 백자의 제작을 책임지는 관청이 되어, 도자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분원’을 만들어 따로 관리하였다. 경기도 광주에 설치된 분원이 왕실과 중앙 관처용 백자의 제작을 담당했던 관요의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관요의 설치와 운영에 따라 백자는 발전하고 쇠퇴하기도 하였다. <출처:강화역사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분청사기인화문대접(조선시대), 분청사기인화문접시(조선시대), 청자화형접시(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백자호(조선시대), 백자주병(조선시대), 백자호(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자라병(조선시대), 백자편병(조선시대), 흑유어문편병(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백자호(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상감철화연당문초문발(조선시대), 백자음각연판문꽈리형연적(조선시대), 백자합(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백자명기인형(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백자명기소호(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백자좌불(고려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화백자운용문호(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화백자운용문병(조선시대), 청화백자운용문병(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화백자어문대야(조선시대), 청화백자수복문합(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화백자목단문호(조선시대), 청화백자봉황문호(조선시대), 청화백자수자문소호(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 청화백자박쥐문호(조선시대), 청화백자칠보문호(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화백자국화문호(조선시대), 청화백자봉황문소호(조선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