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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 기성관(보물), 거제현 관아 객사

경남 거제시 거제면 읍내로에 있는 기성관(보물)이다. 조선시대 거제현 및 거제도호부 관아 객사로 사용된 건물이다. 조선후기 현종 때 관아가 있던 고현성을 폐쇄하고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1665년) 지어졌다. 이후 여러차례 중건을 거치면서 1909년까지 관아 건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초등학교 교시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1976년에 옛모습을 복원하였다. 해체수리과정에서 상량묵서와 상량문 등이 발견되어 창건 내력 등의 내용이 잘 남아 있다. 관아객사이지만 내부는 전체가 넓은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어 통제영 객사인 세병관(국보)과 마찬가지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영 세병관(국보), 밀양 영남루(보물), 진주 촉석루와 함께 경남지역을 대표하는 관아 건축물로 손꼽힌다.

거제 기성관 (보물) 01-20220221<거제 기성관(보물)>

건물은 앞면 9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가운데 3칸은 궐패를 모시는 정청이며 양쪽에 좌우 익실을 두고 있다. 가운데 정청 지붕으로 좌우 익실보다 약간 높게 지어 전체적으로 솟을 지붕처럼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거제 기성관 (보물) 15-20220221<가운데 정청>

거제 기성관 (보물) 16-20220221<왼쪽 익실>

거제 기성관 (보물) 17-20220221<오른쪽 익실>

거제 기성관 (보물) 05-20220221<기성관 현판>

거제 기성관 (보물) 04-20220221<지붕을 받치는 공포와 겹처마>

거제 기성관 (보물) 07-20220221<내부 천장>

궐패를 모시는 공간도 주위와 같은 높이의 대청마루로 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이 모여 회의를 할 수 있도록 내부가 누각처럼 내부가 개방되어 있다.

거제 기성관 (보물) 06-20220221<정청 내부>

거제 기성관 (보물) 12-20220221<뒷편에서 본 정청>

거제 기성관 (보물) 08-20220221<객사 내부>

거제 기성관 (보물) 09-20220221<앞쪽 통로>

거제 기성관 (보물) 10-20220221<뒷쪽 통로>

거제 기성관 (보물) 14-20220221<정면에서 본 모습>

거제 기성관 (보물) 03-20220221<옆쪽에서 본 모습>

거제 기성관 (보물) 11-20220221<뒷편에서 본 기성관>

기성관(岐城館), 보물, 경남 거제시 읍내로
기성관은 거제현 관아의 ‘객사’로 사용된 건물이다. 객사는 왕과 궁궐을 상징하는 전패를 봉안하고 지방의 관청에서 임금을 공경하고 충성심을 표시하기 위한 의식을 행하는 곳이며, 왕이 지방 군현에 보낸 사신이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기성관 가운데에는 왕의 전패를 모신 정당이 있고, 좌우 양쪽에 사신의 숙소로 사용되던 익실이 있었다. 정면 9칸, 측면 3칸으로 이루어진 사방이 탁 트인 마루로 된 웅대한 구조이다. 현종 5년(1664) 거제현 관아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지금의 위치에 지어졌으며, 1976년 건물 전체를 해체, 복원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해방 당시에는 거제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기성관은 거제현 관아의 다른 건물과 달리 팔작지붕 및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하였다. 이는 객사가 임금의 전패가 안치되어 있던 곳이라는 점에서 임금의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성관은 통영 세병관(국보), 밀양 영남루(보물), 진주 촉석루와 함께 경상남도의 조선시대 4대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거제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경상도 청송도호부 관아, 객사 운봉관(雲鳳館)과 누각

청송도호부(靑松都護府)는 경북 청송군 일대를 관할했던 지방행정조직으로 현재의 청송읍, 주왕산면, 부남면 등을 관할하였다. 경북 내륙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고을의 규모가 크지 않은 고려 때 까지 청부현(靑鳧縣)이 있었는데 세종 때 왕비 소왕후의 관향이라 하여 인근 진보현(眞寶縣)과 통합하여 청보군(靑寶郡)이 설치되었다. 이후 지리적인 이유로 진보현이 분리되고 인근 송생현(松生縣)을 합쳐 청송군이라 했다. 이후 세조는 어머니의 관향인 청송군을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종3품 도호부사(都護府使)가 고을 수령이었으며, 규모에 비해 위상이 높았던 고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청송심씨 시조 심홍부의 무덤이 읍치에서 2 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청송도호부 01-20201204<청송도호부 관아가 있는 소현공원>

청송도호부 10-20201204<역대 청송도호부사 공덕비>

청송도호부 읍치(邑治)였던 청송읍 일대는 고을의 중심지이기는 하나 주변에 농경지와 인구가 많지 않으며 진보면소재지와는 약 15 km 정도 떨어져 있다. 산악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읍성(邑城)이나 산성(山城)이 없으며 군사조직인 진보(鎭堡)도 없었다. 관아 건물로는 객사(客舍)인 운봉관(雲鳳館), 동헌(東軒), 향사당(鄕射堂), 누각인 찬경루(讚慶樓, 보물 2049호)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운봉관과 찬경루만이 남아 있다.

청송도호부 06-20201204<청송도호부 객사인 운봉관>

운봉관(雲鳳館)은 청송도호부 관아 객사 건물이다. 건물은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신 정당(正堂)과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좌·우익사를 두고 있다. 정당은 앞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동.서익사는 각각 앞면 5칸으로 넓은 마루와 온돌방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 정당과 서익사는 철거되고 동익사만 남았으나 최근에 고증을 통해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청송도호부 04-20201204<국왕의 전패를 모신 정당>

청송도호부 12-20201204<일제강점기 이후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던 동익사>

청송도호부 11-20201204<복원된 서익사>

청송도호부 07-20201204<서익사 마루>

청송도호부 08-20201204<온돌방>

청송도호부 09-20201204<동쪽에서 본 운봉관>

운봉관(雲鳳館)
운봉관은 세종 10년(1428)에 청송 군수였던 하담이 찬경루와 함께 건축한 것인데 객사로 사용하였다. 선조(宣祖) 때 한차례 손보고 고쳤으며, 숙종 43년(1717)에 부사 성환(成)이, 순조 12년(1812)에는 부사 강휘옥(革)이, 고종 8년(1871)에 부사 윤현기(尹顯岐) 가 각각 중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객사는 고을에서 가장 권위가 있던 건물이며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의 사신들이 머무는 공공 숙박의 기능을 한다. 그리고 객사의 중당(中堂)에는 임금의 전패를 모셔놓고 출장 중인 관원과 고을의 부사가 임금께 예를 올렸다. 특히, 이곳 운봉관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이 내린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무렵인 1896년 3월 12일에 청송의 유생들이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킨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후 운봉관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무렵에 중당(堂)과 서익사가 강제로 철거 되었고, 동익사에 ‘운봉관’ 이란 현판을 달아서 보존하여 왔다. 현재의 운봉관의 모습은 철거지에 대한 발굴조사와 고증을 거쳐 2008년에 중당과 서익사를 원형대로 복원한 것이다. (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찬경루(讚慶樓, 보물 2049호)눈 세종 때(1428년) 군수 하담이 객사와 함께 관아에 속한 누각으로 처음 세웠다. 관아에서 사신접대나 연회 등을 위해 세운 큰 규모의 누각 건물이다. 청송은 작은 고을이었지만 권문세가였던 청송심씨 관향이었던 까닭에 많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큰 규모의 건물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1972년 중건한 것이다.

청송도호부 15-20201204<찬경루>

청송도호부 05-20201204<객사에서 본 찬경루>

청송도호부 03-20201204<찬경루 옆 작은 부속건물>

<출처>

  1. 안내문, 청송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상도 청도군 관아, 객사인 도주관과 동헌

경북 청도군 화양읍 일대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 청도군 관아 건물들이다. 청도군 읍치였던 청도읍성내에는 옛 관아건물로 객사인 도주관, 군수가 근무했던 동헌, 얼음창고인 석빙고(보물 323호)가 남아 있다. “도주관(道州館)”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는 객사는 조선 현종 때 지어진 것으로 가운데 정청과 우익헌이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좌익헌을 다시 지어 옛모습을 복원해 놓고 있다. 동헌은 객사 뒷편 초동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데 학교건물로 사용하면서 많이 훼손되었는데 최근에 옛모습으로 복원해 놓고 있다. 읍치였던 화양읍 일대가 원래 청도군 중심지였으나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청도역이 있는 청도읍이 중심지로 바뀌었다.

청도군은 대구 남쪽, 경주 서쪽에 위치한 조선시대 지방행정구역으로 종4품 군수가 고을 수령이었던 비교적 큰 규모의 고을이었다. 경주로 가는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가 건국하면서 주변지역을 통합하면서 지금의 청도군을 형성하였다. 고려초 현급인 감무가 설치되었다가 고려 충햬왕 때 청도군으로 승격되었다. 고려말 이후 큰 성씨들이 많아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으로 알려졌으며 김일손, 김대유 등 사림파 문신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주변에 운문산, 가지산, 천왕산 등 큰 산들이 많으며, 동창천.청도천 등 큰 하천이 밀양강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청도 청도군 관아 01-20200106청도군 관아 중심건물이었던 객사. 가운데 궐패를 모시는 궐패를 두고 양쪽에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된 동.서익헌을 두고 있다.

청도 청도군 관아 17-20200106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신 정청. “도주관”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도주는 청도의 다른 이름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5-20200106정청 내부. 일제강점기 이후 면사무소 건물로 사용되면서 개조되었던 것을 복원하였다.

청도 청도군 관아 21-20200106관리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던 동익헌. 앞면 6칸 규모로 상당히 큰 편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02-20200106옆에서 본 모습.

청도 청도군 관아 20-20200106서익헌. 앞면 6칸 규모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없어진 것을 복원해 놓았다.

청도 청도군 관아 06-20200106서익헌 앞 마루.

청도 청도군 관아 03-20200106객사 뒷편.

청도 청도군 관아 19-20200106객사를 출입하는 객사문.

청도 청도군 관아 08-20200106객사 마당 한쪽편에 남아 있는 창고로 보이는 건물

도주관, 경북 청도군 화양읍 서상리
조주는 청도의 옛이름으로 이 건물은 조선시대 청도군의 객사로 쓰이던 곳이다. 객사는 중앙에 정청을 두고 좌우에 동헌, 서헌을 둔 구조로 정청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어 지방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였으며, 동.서헌은 접객시설로 외국사신들이나 중앙관리들의 이동시 접대 및 유숙하는 곳이었다. 도주관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으나 노후하여 중종 38년(1543) 관찰사 임백령이 중창하였고 주세붕이 쓴 “도주관 중수기문”에 중창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후 정청과 우객사만이 남아 있었으나 2006년 좌객사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정청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익공집이며, 동.서헌은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정청의 외관은 기둥을 건물 폭에 비하여 높게 세워 좌우 건물보다 고준한 느낌을 준다. 도주관 앞에는 고종 8년(1871) 병인.신미양요를 치른 뒤 쇄국의 결의를 다지고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옮겨져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군 관아 13-20200106화양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동헌. 앞면 7칸 규모로 비교적 큰 규모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16-20200106청도군수가 공식 업무를 보던 공간인 넓은 대청마루.

청도 청도군 관아 15-20200106동헌 뒷편으로 2칸 정도 누마루를 달아내어 정자처럼 손님을 접견하는 공간으로 사용했다.

청도 청도군 관아 14-20200106옆에서 본 청도동헌.

청도동헌,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
동헌은 조선시대 지방관아 건물로 관찰사.수령 등의 정청으로서 일반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행해지던 곳이다. 1917년 군 청사를 고수동으로 신축 이전함에 따라 동헌건물은 도주학원 및 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되어 왔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앞쪽 칸은 퇴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동헌이 없어지고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은 현실에서 조선시대 지방사회의 역사성과 관아건축 연구에 귀중한 문화재이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청도 청도군 관아 11-20200106읍성 동문 안쪽에 복원해 놓은 옛 관아 건물인 고마청

고마청은 민간의 말을 삯을 주고 징발하는 일을 맡아보는 관아이다. 조선 숙종 때 고마법의 실시로 사신이나 수령 등 지방관의 교체와 영송에 따른 제반 비용ㅇㄹ 마련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청도관련 고문헌에 도마청이 최초 기록된 것은 영조 년간에 편찬된 『여지도서』 「창고」조이다. 이후 1895년 청도군읍지에 고마청의 위치가 동문 안에 있으며 현감 조원붕이 신.구관 환송비용으로 준비된 녹봉을 줄여 세웠고 수기와 현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문헌 기록을 토대로 청도읍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 복원되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0

청도 청도군 관아 10-20200106청도읍치를 둘러싸고 있는 읍성.

청도 청도군 관아 09-20200106읍성 동문 밖에 있는 석빙고(보물 323호). 전국에 남아 있는 6곳의 석빙고 중 하나이다.

청도 청도군 관아 31-20200106읍성 앞에 모아놓은 청도군수를 지낸 인물들의 공덕비.

청도 청도군 관아 18-20200106객사 앞으로 옮겨 놓은 구한말에 세운 척화비

청도 청도군 관아 12-20200106옛지도에 나타난 청도군

청도군의 연혁
청도군은 선시시대 유적 중 바위그늘과 지석묘, 석관묘 등의 유적이 각지에서 발견되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변한 12국 중 우유국의 위치가 청도라고 비정되기도 하나 확실치는 않고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실린 이서국이 청도에 존재했던 초기국가이다. 이서국은 유리왕 19년(42) 신라에 복속되었다고 하나, 유례왕 14년(297) 이서국이 금성(지금의 경주)을 공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라의 지배체제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은 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전후해 솔이산성, 오도산성, 가산성으로 신라에 편입되었고 경덕왕 16년(757) 소산현, 형산현, 오악현으로 개명하고 밀성군(지금의 밀양)의 속군이 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 3현을 합하여 청도군이 되고 – 일명 도주 – 직급이 낮은 지방관인 감무가 파견되는 곳이었다. 1342년(충혜왕 3) 이곳 출신인 김선장의 공로에 의해 지군사로 승격되었고, 다음해 강등되었으나 김한귀의 청원으로 1366(공민왕 15) 다시 지군사가 되어 조선시대에도 청도군의 읍격은 그대로 유지되어 내려왔다. 1896년 도제의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에 속하게 되고 1900년대 초 대구에 속했던 풍각, 각북, 각초면이 청도군에 편입되고, 외서면은 밀양군에 속하게 되는 등 여러 번의 행정구역 변경을 거쳐 2읍 7면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청도군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전라도 나주목 관아(사적), 객사인 금성관과 내아

전남 나주시 금계동 일대에 남아 있는 옛 나주목 관아터(사적)이다. 나주시 구도심 중심부에 위치한 관아터에는 객사인 금성관, 내아인 금학헌,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 등이 남아 있다. 객사인 금성관은 조선초 처음 건립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구한말에 중수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군청사로 사용하면서 개조되어 정청만 남아 있다가 최근에 동익헌과 서익헌, 망화루 등이 복원되었다. 내아인 금학헌은 구한말에 다시 지어진 것으로 일제강점기에 나주군수 관사로 사용되면서 일부 변형이 있었으나 최근에 원형을 복원하였다. 관아 건물들은 일제강점기에 일부 변형이 있기는 하지만 지방관아 중 비교적 큰 규모였던 나주목 관아의 옛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서깊은 유적지이다.

나주는 전남지방을 흐르는 영산강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던 큰 고을로 고려시대부터 큰 규모의 지방행정 조직인 나주목(牧)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전주와 함께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읍치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나주목지도 등 여러 문헌에 관아 건물들의 위치와 형태 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현존하는 관아건물 등과 비교할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 출입문인 망화루. 객사인 금성관과 함께 조선초에 처음 세워졌다. 다른 지방 객사문과는 달리 문루 형식을 하고 있다. 내부에 중삼문과 내삼문을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 금성관 중삼문. 최근에 복원된 것으로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전통 객사문의 형식을 하고 있다. 삼문형식을 하고 있으며 문루에서 거친 박석으로 삼도형식이 통로가 조성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인 금성관. 가운데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신 정청을 두고 양쪽에 동익헌과 서익헌을 두고 있다. 일제강점기 군청건물로 사용하면서 정청만 남아 있었는데 최근에 동익헌과 서익헌을 다시 지어 원형을 복원하였다. 동.서익헌 건물의 규모가 다른 것이 특이하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객사 정청. ‘금성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앞면 5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로 지방관아 객사를 대표하는 건물 중 하나이다.

SANYO DIGITAL CAMERA정청 내부. 넓은 마루가 깔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천정은 우물천장과 서까래가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 섞여 있다.

SANYO DIGITAL CAMERA앞면 6칸의 상당히 큰 규모를 하고 있는 동익헌. 가운데 2칸은 온돌방이며 오른쪽에 넓은 마루가 있다. 최근에 복원한 건물로 ‘벽오헌’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서익헌은 앞면 5칸으로 동익헌에 비해 약간 작은 규모이다.

SANYO DIGITAL CAMERA서익현 앞쪽 툇마루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나주목 객사.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객사 앞 마당. 가운데 내삼문 터가 있다. 궁궐 정전 영역처럼 마당에 박석이 깔여 있으며 가운데 통로가 있다.

금성관은 나주목의 객사 정청이다. 객사는 관찰사가 관할구역을 순행할 때 업무를 보는 곳이며 중앙의 사신이 묵던 곳이다. 특히 정청(나주목은 금성관)에는 전패와 궐패를 모셔두고 망궐례를 행하던 공간이었다. 즉 사신을 접대하고, 왕정의 위덕을 펴서, 관부의 위엄을 세우는 곳이었다. 나주목 객사 금성관은 이유인 목사(1487.4.12 ~ 1489 재임)가 망화루와 함께 건립하였다. 이후 임란때 피해를 입어 김개목사가 1617년 4월 21일 중수하고 1774년 이명중 목사가 개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나주군청사로 사용되다 1963년 보수를 거쳐 1876년 완전해체 복원하였다. 이후 나주목 금성관 복원정비 사업을 통해 금성관 앞을 가리고 있던 나주군청사를 헐고 금성관의 동익헌(벽오헌).서익헌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객사 마당 한쪽편에 모아 놓은 공덕비들.

SANYO DIGITAL CAMERA객사 서쪽편에는 나주목사가 근무했던 동헌과 살림집인 내아가 자리잡고 있었다. 지금은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와 내아인 금학헌이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 동헌 출입문인 정수루.

SANYO DIGITAL CAMERA정수루를 들어서면 오른쪽에 내아였던 금학헌이 남아 있다. 구한말에 지어진 것으로 일제강점기 나주군수 관사로 사용하다가 최근에 원형을 복원하였다.

SANYO DIGITAL CAMERA나주목사가 거처했던 살림집인 내아. ‘ㄷ’자형을 하고 있는 건물로 구한말 상류층 저택의 형태가 잘 남아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내아에 딸린 행랑채에 해당하는 부속건물

나주목사 내아. 금학헌
이곳은 조선시대 나주목사가 기거하던 살림집을 상류주택의 안채와 같은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성안에 있던 관아건물 중에서 객사 금성관과 동헌의 출입문 정수수와 함께 원형의 모습을 간직한 소중한 유산이다. 내아가 처음 세워진 때는 알 수 없으나 안채 상량문에 1825년(순조 25) 7월 1일 주춧돌을 놓고 7월 20일 상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문간채는 1892년(고종 29)에 건립된 것으로 보아 19세기에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군수 관사로 사용하면서 원형이 변형되었으나 최근에 모두 충실하게 복원하였다. 목사내아는 주변에 객사, 정수루가 함께 있어 조선시대 관아건축 양식의 원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SANYO DIGITAL CAMERA내아 부근에 남아 있는 의열각

나주목 관아.나주읍성
이곳은 천여년 동안 나주의 중심공간으로 금성관을 중심으로 하는 객사공간과 나주목사가 직접 정무를 보았던 나주목 동헌(정수루, 목사내아)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이곳을 정점으로 동문(동점문), 서문(서성문), 남문(남고문), 북문(북망문)의 사대성문과 성벽을 쌓아 도시의 위용을 갖추었으며, 현재 규모는 김계희목사(1457.811 ~ 1459.11.21 재임)가 완성하였다. 나주읍성은 둘레가 3,679 m 면적은 974,390 ㎡ 이었다. 1789년 『호구총수』에는 읍성을 중심으로 동부면(16개리) 서부면(24개리)이 편재되어 1,361호 4,662명이 살았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이 378명이 많았다. 또한 남문밖에는 전라우영(현 나주초등학교)이, 서문밖에는 나주향교가 자리하고 동문밖에는 석장(석당간, 보물 49호)이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까지도 읍성을 중심으로 석당간, 나주향교, 목사내아, 정수루, 주사청 등의 건물이 있다. 좌측의 나주목고지도는 영.정조 때 비변사에서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지도로 나주읍성과 관아의 각 건물들의 모습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나주는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나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여수 진남관(국보), 전라좌수영 객사

전남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진남관(국보)이다. 여수에 있었던 옛 전라좌수영 객사 건물로 현존하는 단층 목조건물 중 가장 큰 규모이다. 건물 규모는 앞면 15칸, 옆면 5칸으로 전체 면적은 240평 정도이다. 잘 다음은 돌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민흘림 기둥읠 세웠는데 총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주심포와 다포계 양식을 절충한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인 객사와는 내부에 벽면으로 공간을 분리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넓게 개방되어 있다. 천정은 서까래등이 노출된 연등천장이며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임진왜란 직후 처음 건립되었다가 숙종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크게 중건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학교 건물로 사용되면서 크게 훼손된 것을 해방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수리하였다. 객사는 지방 관아 중심 건물로 국왕의 궐패를 모시고 관아를 방문한 사신.관리 등이 머무는 장소이다. 조선시대 대부분 관아에는 객사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건물이 전라좌수영 객사인 진남관과 통제영 객사인 세병관이다. 통제영이나 수영에 큰 규모의 객사가 설치된 것은 진(鎭) 등 관할에 속한 함선이나 어선들을 모아 훈련을 했으며, 비상시에는 수영에서 모여서 함대를 편성하고 해전을 지휘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여수 진남관(국보). 앞면 15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로 전라좌수영 객사였다. 좌.우에 익랑을 두는 일반적인 객사 건물과는 달리 단일 건물로 되어 있다.

진남관의 규모
진남관의 정면길이는 54.5 m, 높이는 14 m, 넓이는 748 ㎡, 기중은 68개나 되는 우리나라 최대이 단층목조 건물로서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이 기둥사이가 15칸이나 되는 건물은 사찰의 회랑, 궁전의 행랑, 종묘의 정전 같은 건물을 제외하고는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과 진남관 단 두 곳 뿐이다. 진남관은 지방관아 건물이었다는 점에서 규모의 특징을 찾을 수 있으며 학술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건물이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낮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OLYMPUS DIGITAL CAMERA기둥을 올린 막돌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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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과 공포, 서까래, 지붕 등의 모형.

진남관의 건축적 특징
진남관은 돌을 다듬어 단정하게 쌓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우고 벽체 없이 팔작지붕을 얹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하고 그 사이사이에는 화반을 받쳤는데, 주심포와 다포양식을 절충한 것이다. 외부의 살미첨자는 쇠서와 함께 연꽃모양의 화문을 조각하여 하나의 장식판처럼 변형되었고, 건물의 전.후면에서 안쪽으로 제2주열에 높은 기둥들을 배열하여 그 위에 대들보를 가구하면서도 내부 곳곳에 내고주를 세워 중간을 받치게 하였다. 특히 기둥의 배열에서 건물 양쪽 끝 세번쨰 측면 기둥만은 열을 흐트러 놓아 내부가 복도처럼 보이지 않게 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모든 부재들이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지붕마루와 추녀 마루는 양성을 하였고, 네 추녀끝을 활주로 지탱하고 있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궐패를 모셨던 가운데 정청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내부. 좌.우 익랑 구분 없이 하나의 넓은 공간으로 되어 있다.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 지휘부가 이곳에 모여서 회의를 하거나 수군훈련을 참관할 수 있는 용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에서 내려다 보이는 여수항. 포구 주변에서 수군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휘할 수 있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여수항 앞 바다에서 보이는 진남관. 여수항의 랜드마크가 되었던 건물로 객사에서 보내는 신호에 따라 선박을 운행하면서 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남관의 용도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진남관은 전라좌수영의 객사로 건립되었다. 객사는 성 안의 중요한 위치에, 또는 관아와 함께 세워지는 중심 건물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비와 궐패를 모셔놓고 관아의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 또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향궐망배’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지방 관리들이 임금을 가까이 모시듯 선정을 베풀 것을 다짐하던 곳이다. 또한 진남관은 외국의 사신과 중앙으로부터 왕의 명을 받들고 내려온 대신을 접대하는 건물로 사용하기도 했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진남관.

OLYMPUS DIGITAL CAMERA정청부분 내부. 내부는 통로로 사용되는 툇마루보다 약간 높게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내부 천정은 서까래 등이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기둥위에만 있는 주심포양식에 기둥 사이에도 화반을 받쳐두는 절충적인 형태의 다포계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진남관의 축조
진남관은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곳에 선조 32년(1599)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이 건립한 건물이다. 진남관은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세운 성의 중심 건축물로서 숙종 42년(1716)에 화재로 없어진 것을 숙종 44년(1718) 이제면 전라좌수사가 다시 세웠다. 1959년 5월 30일 보물 제324호로 지정되었다가 그 중요성과 가치가 인정되어 2001년 4월 17일 국보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야경.

진남관, 국보 304호
진남관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1599년(선조32) 통제사 이시언에 의해 건립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716년(숙종42) 화재로 불탄 것을 1718년(숙종44)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이순신 전사 120년이 되는 해를 기려서 다시 세운 것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여수공립보통학교 등으로 사용되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남쪽의 왜적을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뜻을 가진 진남관의 중건기는 1953년 보수 공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글씨는 중건 당시에 이제면이 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면모가 곳곳에 서려 있는 핵심적인 유적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방 관아 건물 중에서 가장 크다. 진남관 앞에 있는 2개의 돌기둥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 수군들의 밤 훈련을 위해 불을 밝힐 목적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당시에는 4개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이 전한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