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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진흥왕릉 부근에 있는 통일신라 모전석탑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삼층석탑(보물)이다. 흙을 구운 벽돌로 쌓은 전탑을 모방하여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은 모전석탑이다. 모전석탑은 돌을 벽돌모양으로 가공하여 축조한 형식과 크게 가공한 돌을 쌓아서 석탑처럼 만든 형식이 있다. 이 석탑은 후자에 해당한다. 경주 남산동 동.서삼층석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며, 세부적으로는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 석탑 제작기술이 퇴보되는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는 8개의 잘 다듬은 화강석을 2단으로 쌓았으며 그 위에 탑신을 올려놓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1개의 돌로 만들었으며, 1층 몸돌에는 문짝을 새겨 감실을 표현하였다. 문의 양쪽에는 인왕상이 새겨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맞지 않으며 지붕돌을 크게 만들어 둔중한 느낌을 준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서악동 삼층석탑(보물).>

경주 서악동 무열왕릉 동북쪽에 있는 마을 뒷동산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는 진흥왕릉을 비롯한 왕릉들과 크고 작은 고분들이 정비되지 않은 채 산재해 있다. 높이 4.6 m의 모전석탑으로 기단위에 3층 탑신을 올려놓은 일반적인 삼층석탑과 비슷하다. 잘 다듬은 여러개의 큰돌을 쌓아 탑을 만들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면에서 본 모습>

벽돌처럼 생긴 바닥돌 위에 잘 다듬은 8개의 큰 돌을 올려 2층 기단을 만들었다. 기둥모양 같은 장식을 두지 않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기단부>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았다.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새겨놓지 않았으며, 지붕돌을 크게 만들어 둔중한 느낌을 준다.

OLYMPUS DIGITAL CAMERA<탑신부>

1층 몸돌 남쪽에는 감실을 표현한 문짝과 인왕상을 새겨놓고 있다.

보물65호_경주 서악동삼층석탑_012-20170209
<문짝과 인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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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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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에서 본 모습>

무열왕릉과 서악동고분군에서 동북쪽으로 약간 떨어진 선도산 동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석탑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왕릉을 지키는 원찰 성격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주변에 진흥왕릉, 진지왕릉, 헌안왕릉이 있다. <삼국사기>에 왕릉들 앞에 애공사(哀公寺), 영경사(永敬寺), 공작지(孔雀趾)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석탑을 기준으로 왕릉의 위치를 추정하고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석탑 뒷편 진흥, 진지, 문성, 헌안왕릉>

진흥왕이 죽다 ( 576년 08월(음) )
〔37년(576)〕 가을 8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諡號)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북쪽 산봉우리에 장사지냈다. 왕이 어려서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명을〕 법운(法雲)이라고 지어 생애를 마쳤다. 왕비 역시 이에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 〔왕비가〕 돌아가시자, 나라 사람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흥앙,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진지왕이 죽다 ( 579년 07월17일(음) )
〔4년(579)〕 가을 7월 17일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진지(眞智)라고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진지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왕이 유조를 내리고 죽다 ( 857년 09월(음) )
~ 생략 ~ 7일이 지나 왕이 죽으니, 시호를 문성(文聖)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문성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헌안왕이 죽다 ( 861년 01월29일(음) )
~ 생략 ~ 이달 29일에 죽으니, 시호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를 지냈다. (삼국사기 권 제11 신라본기 제11 헌안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석탑이 세워져 있는 절터>

경주 서악리 삼층석탑, 보물 65호, 경주시 서악동 산 92-1
이탑은 화강암으로 축조된 통일신라시대의 3층석탑으로 모전탑 계열에 속한다. 높이는 4.06 m로 서악서원 뒷편 선도산 기슭에 위치해 있다. 바닥돌 위에 다듬은 돌덩이 여덟개를 2단으로 어긋 물리게 쌓아 기단을 만들었으며, 1층 몸체의 남쪽 문틀 양쪽에 인왕상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은 하나의 돌에 밑받침과 윗면의 층급을 표시하였고 몸돌에 비해 커서 무거운 느낌을 준다. 이탑은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탑 형식의 유형분포를 조사.연구하는데 하나의 지표가 되므로 중요시 된다. 경주 남산리 동탑을 모방한 듯하며 시대와 조각수법에서 다소 떨어진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삼국사기,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남산(사적) 용장계곡, 김시습이 머물렀던 절터가 있는 계곡

경주 남산(사적)은 북쪽의 금오산(해발 466 m)와 남쪽 고위산(해발 495 m)을 연결하는 남북으로 약 8 km, 동서로 약 4 km의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남산의 대표적인 불교유적지인 용장사 절터가 있는 용장계곡은 길이가 약 3 km 되는 남산에서 가장 크고 깊은 골짜기이다. 이곳은 금오신화의 저자 김시습이 머물렀던 곳으로 계곡에는 많은 절터와 석탑, 불상 등이 남아 있다. 김시습이 머물렀던 용장사를 제외하고 대부분 절터들은 대부분 그 내력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남산 용장골 계곡 입구>

경주 남산 용장골 계곡은 금오산과 고위산 사이에 형성된 약 3 km의 계곡으로 남산에서 가장 큰 규모이다. 계곡은 바위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경주 남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계곡은 바위 사이로 맑은 물>

OLYMPUS DIGITAL CAMERA<입구에서 멀지 않은 계곡.>

OLYMPUS DIGITAL CAMERA<계곡을 찾는 사람들이 쌓아 놓은 돌탑>

OLYMPUS DIGITAL CAMERA<큰 바위 위로 흐르는 계곡>

OLYMPUS DIGITAL CAMERA<용장골 계곡 명소인 설잠교 부근.>

OLYMPUS DIGITAL CAMERA<계곡 안쪽으로 보이는 설잠교 다리 기둥>

OLYMPUS DIGITAL CAMERA<계곡을 거너는 작은 다리인 설잠교>

이곳에서 머물렀던 설잠스님 김시습을 기리기 위해 설장교라는 명칠을 붙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설잠교 상류 방향 계곡>

OLYMPUS DIGITAL CAMERA<설잠교를 지나 용장사 절터로 오르는 산길 입구>

설잠교를 지나 숲길을 한참 오르면 정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비교적 넓은 공터가 나타난다. 이곳에 옛 용장사에 속했던 건물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OLYMPUS DIGITAL CAMERA<절터에서 보이는 용장사 남쪽 고위산 주변 봉우리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로 오르는 계단>

불상과 석탑이 남아 있는 절터로 오르는 길은 꽤 함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탐방객의 안전을 위해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용장사 절터>

남산의 많은 절터 가운데에서도 역사적인 내력이 있으며, 문화재도 많이 남아있으며,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미륙장육상으로 여겨지는 석조여래좌상(보물 187호)이 있는 이곳이 불전이 있는 중심영역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용장사 절터에서 내려다 보이는 용장계곡>

OLYMPUS DIGITAL CAMERA<불상 뒷편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보물)>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불상이 있는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불상이 있는 공간을 지나 석탑이 있는 공간으로 올라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용상자 불전이 있었던 공간. 주변에 석탑과 건물 부재들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산을 대표하는 장면인 용장사 삼층석탑(보물)>

용장사 절터를 지나서 조금 오르면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바위가 나타난다.

OLYMPUS DIGITAL CAMERA<전망 좋은 바위>

OLYMPUS DIGITAL CAMERA<용장사 절터를 지나서 남산일주도로가 있는 능선으로 오르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용장계곡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 이곳을 넘으면 남산일주도로와 연결된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산일주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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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여래좌상, 경주 남상 용장골 출토, 8세기말~9세기초>

모든 질병뿐만 아니라 무지의 병까지도 고쳐준다는 부처인 약사여래이다. 왼손에 약단지를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원래 남산 용장골에 있던 것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머리에 몸체가 떨어져 있었는데 1975년에 복원하였다. 그런데 약단지를 빼면 석굴암 본존불과 그 모습이 비슷하다.

OLYMPUS DIGITAL CAMERA<불상 머리. 용장골에 있던 것을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OLYMPUS DIGITAL CAMERA<불상머리. 용장골 출토>

경주 남산 용장골(茸長谷)
용장계곡은 금오봉과 고위봉 사이 골짜기로 남산에서 가장 큰 계곡이며 용장사지 등 18개소의 절터와 7기의 석탑, 그리고 삼륜대좌불 등 5구의 불상이 남아 있다. 이곳에서 400m 아래로 내려가면 용장사터가 있는데 용장사는 이 계곡에서 가장 큰 사찰이었다. 용장사터 동쪽 높은 바위 위에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삼층석탑이 우뚝 솟아 장관을 이루고 삼층석탑 아래에는 삼륜대좌불과 마애여래좌상이 자리잡고 있다. 용장사는 통일신라시대 법상종을 개창한 대현스님이 거주하신 곳이며 조선 세조 때의 대학자이자 승려인 설잠스님(김시습)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대현스님이 삼륜대좌불을 돌면 부처님도 따라 머리를 돌렸다고 하며, 그 뒤쪽 바위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은 지금도 따뜻한 미소로 사바세계를 굽어보고 있다. (안내문, 경주국립공원관리공단, 2016년)

<출처>

  1. 안내문,경주국립공원관리공단, 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6년

경주 남산(사적), 금오산 정상 부근 능선길.

경주 남산(사적)은 북쪽의 금오산(해발 466m)와 남쪽 고위산(해발 495m)을 연결하는 남북으로 약 8km, 동서로 약 4km의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남산에 있는 많은 골짜기들에는 다양한 불상과 석탑 등 많은 불교유적들이 남아 있다. 남산의 많은 골짜기에서는 불교 유적들을 돌아볼 수 있는 문화탐방이 되었다면,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 능선에서는 남산의 자연과 주변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자연탐방을 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릉계곡 정상부 제9사지에서 바둑바위로 들어가는 길.>

남산에는 서북쪽에 위치한 포석정에서 출발하여 동쪽 서출지 부근으로 연결되는 일주도로가 있으며, 능선을 따라서 많은 계곡들과 연결되는 등산로가 있다. 남산일주도로 주변으로 해목령, 이영재와 같은 고갯길과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한 바둑바위, 상사바위와 같은 명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 남산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용장사지와 칠불암 또한 남산 능선에서 가까운 전망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바둑바위>

바둑바위는 경주 남산에서도 전망이 좋은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신선이 앉아서 바둑을 두며 놓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으로 남산 서쪽과 북쪽 도심이 한눈에 들어온다.

OLYMPUS DIGITAL CAMERA<바둑바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상사바위>

상사바위는 남산신이 살고 있다고 전설을 비롯하여 많은 이야기가 전해오는 남산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이곳에는 작은 석불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작은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사바위와 포석곡 제9사지 석조여래입상
상선암 뒤로 높이 솟아 있는 깎아지는 듯한 바위 봉우리가 남산신 상심이 살고 있는 상사바위이다. 남쪽편은 산아당으로서 사람들이 아이 낳기를 기도하였는데 영험이 있었다 한다. 1856년에 새긴 ‘산신당(産神堂)’이라는 명문이 있다. 상심은 신라 49대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했을 때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기도 하였다. 동쪽 면에는 남근석과 기도용 감실이 있는데 상사병이 걸리 사람이 빌면 영험이 있다고 한다. 감실 앞에 머리와 대좌를 잃어버린 작은 석불이 있는데 남산에서 발견된 가장 작은 석불이다. 통인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고신라 불상일 가능성도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금오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능선길>

상사바위에서 금오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연결하는 능선길은 걷기에 좋은 곳이지만, 숲이 울창해서 주변 경치를 보기는 힘들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산 봉우리를 이루고 있는 큰 바위>

OLYMPUS DIGITAL CAMERA <능선을 따라서 이어지는 숲길>

OLYMPUS DIGITAL CAMERA<능선길에서 내려다 보이는 삼릉계곡>

OLYMPUS DIGITAL CAMERA<삼릉계곡 남쪽 비파골 능선>

능선의 모양이 비파같이 생겼다고 하여 비파골이라 부른다.

OLYMPUS DIGITAL CAMERA<남산 서쪽편에 위치한 단석산(해발 827m), 벽도산(해발 424m), 망산(해발 232m) 등>

망산(望山)은 나즈막한 야산이지만 남산과 쌍을 이루는 산이다. 남산의 유래에 얽힌 전설에 따르면 남신은 남산으로, 여신은 망산으로 바뀌어 이곳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남산(南山)과 망산(望山)의 유래.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 또는 ‘새벌’이라 했으며 새벌은 동이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처주는 광명에 찬 당이라는 뜻으로 아침 햇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땅이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느날 두 신이 찾아 왔다. 한 신을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男神)이었고, 또 한사람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 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이었다. 두 신은 아름다운 새벌을 둘러보고 “야! 우리가 살 땅은 이곳이구나!” 하고 외쳤고, 이 소리는 너무 우렁차 새벌의 들판을 진동하였다. 이때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놀라 소리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산 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 족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처녀는 겁에 질려 “산 봐라!”하고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 같이 큰 사람 봐라!”라고 해야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하고 외쳤던 것이다. 갑자기 발아래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소리에 두신도 깜짝 놀라 그자리에 발을 멈췄는데 그만 왠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다. 두 신은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남신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이 되었고, 여신은 남산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이 되었다고 전해져온다. (안내문, 경주국립공원사무소,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금오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숲길>

OLYMPUS DIGITAL CAMERA<금오산 정상 표지석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금오산 정상. 주변에 숲이 우거져서  경치를 감상할 수는 없다.>

OLYMPUS DIGITAL CAMERA<금오산 정상에서 남산일주도로 방향으로 내려가는 숲길>

일주도로는 금오산 정상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오산 정상에서 비파골로 내려가는 길. 비파골에 대한 안내표지판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상 뒷편 남산일주도로>

남산 일주도로는 비포장이지만 차량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은 넓고 잘 정비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오산 정상에서 남산 동쪽 서출지로 이어지는 일주도로>

OLYMPUS DIGITAL CAMERA<일주도로 주변의 남산 봉우리>

OLYMPUS DIGITAL CAMERA<남쪽으로 계속 이어지는 일주도로>

OLYMPUS DIGITAL CAMERA<일주도로에서 남산 서남쪽 용장사지 절터가 있는 용장골로 연결되는 등산로>

OLYMPUS DIGITAL CAMERA<용장골로 이어지는 숲길>

OLYMPUS DIGITAL CAMERA<용장사 절터가 있는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

경주 남산 일원, 사적 311호
남산은 남북으로 약 8km, 동서로 약 4km 지름을 가진 타원형의 화강암 바위산으로 조상들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과 다양한 지질경관들이 공존하고 있다. 남산은 한국에서 가장 젊은 편에 속하는 신생대 제3기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강암은 마그마가 지하 깊은 곳에서 서서히 식으면서 만들어진 단단한 암석이다. 남산과 남산의 여러 석조 문화재들이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화강암 때문이다. 암석이 힘을 받아 깨진 틈을 단열이라고 부르는데, 남산의 화강암에는 약 51만 년전에 있었던 강력한 단층활동에 의해 생긴 단열들이 존재한다. 선각육존불이나 마애석가여래좌상 등의 불상은 이러한 단열면에 새겨진 불상이다. 한편, 남산의 북서쪽에는 넘어져 있는 불상인 선각보살입상이 있는데, 이는 신라시대에 발생한 지진에 의한 것으로 판단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6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6년
  2. 안내문, 경주국립공원사무소,2016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6년

경주 남산(사적) 탐방, 삼릉계곡(배리 삼릉~상선암)

경주 남산(사적)은 신라 불교의 성지로 많은 절터들이 골짜기마다 남아 있다. 각 절터에는 다양한 양식의 불상과 석탑 등 많은 유물들이 남아 있다. 신라 마지막 박씨 왕들의 무덤인 배리삼릉에서 금오산 정상 아래 바둑바위까지 이어지는 삼릉계곡은 많은 골짜기들 중에서도 불교 유적들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불교 유적을 탐방하거나 남산 등산을 위해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코스가 삼릉계곡일 것이다.

삼릉계곡에는 입구의 제1사지부터 바둑바위 아래 제9사지까지 여러 절터가 남아 있으며, 계곡입구의 망월사와 삼불사, 정상부 아래 작은 암자인 상선암이 신도와 탐방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삼릉 계곡 입구 삼불사에 있는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63호), 제6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666호),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진 제6사지 석조약사여래좌상 등 석조불상들과 마애관음보살상, 선각육존불 등 다양한 형식의 마애불상, 경주 박물관으로 옮겨진 삼층석탑 등 다양한 석조유물들이 남아 있다. 또한 계곡 입구의 배리 삼릉은 울창한 소나무 숲에 자리잡고 있는데 경주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남산(사적) 탐방로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삼릉계곡 입구>

OLYMPUS DIGITAL CAMERA<배리 삼릉 앞을 지나는 도로>

OLYMPUS DIGITAL CAMERA<삼릉계곡 입구 부근에 있는 망월사>

OLYMPUS DIGITAL CAMERA<망월사 뒷편 삼불사 경내에 남아 있는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일제강점기에 여러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곳으로 옮겨 놓은 것이지만, 조각수법이나 형태가 비슷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삼존불로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불사 부근에서 본 경주 남산>

OLYMPUS DIGITAL CAMERA<배동 삼릉 (사적)>

3기의 왕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쪽에는 신라 8대 아달라왕, 가운데에 53대 신덕왕, 뒤쪽에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배동 삼릉 소나숲.>

경주에서도 손꼽히는 울창한 소나무숲으로 경주 특유의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릉계곡 탐방로 입구>

계곡을 들어서면 첫번째로 볼 수 있는 불교 유물들. 삼릉계곡 제1사지에 있던 탑재와 불상들을 한곳에 모아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를ㅇ곡 제1사지 탑재와 불상>

삼릉곡 제1사지 탑재와 불상
계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곳에 모아 정비하였다. 앉은 불상은 약합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상이며, 옷 주름 조각이나 특별한 양식이 없어 시대를 알 수 없다. 또 한 점의 불상 조각은 여래입상이다. 허리 위와 발 대좌는 잃어 버렸다. 옷의 주름 조각 양식으로 보아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2점의 탑재는 각기 다른 탑의 조각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6년)

탐방로는 계곡을 따라서 이어지고 있다. 입구의 제1사지부터 바둑바위 부근 제9사지까지 계곡 주변에 많은 절터들이 산재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남산에서도 가장 많은 탐방객들이 찾는 코스로 등산로는 비교적 평이하며 잘 정비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릉계곡 2번째 절터>

몸통만 남아 있는 석조여래좌상이 남아 있다. 부근 땅속에 묻혀 있던 것을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절터 뒷편에 언덕에 남아 있는 마애관음보살상>

OLYMPUS DIGITAL CAMERA<2번째 절터를 지나 오르는 등산로>

계곡 한쪽편에는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비교적 넓은 공터와 바위에 선으로 새긴 선각육존불을 볼 수 있다. 오른쪽은 석가여래를 본존으로 한 석가삼존불로 가운데 연꽃대좌에 석가여래가 앉아 있고 양쪽에 보현보살과 문수보살을 표현하고 있다. 왼쪽은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한 삼존불상으로 가운데에는 아미타여래가 연꽃대좌 위에 서 있고 양쪽에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 꽃쟁반을 받쳐들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선각육존불이 있는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선각육존불이 있는 절터를 지나 계곡을 따라서 이어지는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계곡 중턱에 위치한 제6지로 올라가는 길>

제6사지에는 석조여래좌상(보물)를 비롯하여 마애선각여래좌상 등이 남아 있다. 이곳에 있던 석조약사여래좌상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석탑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비교적 큰 규모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제6사지 절터>

제6사지에서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삼층석탑이 있었던 터가 있다. 이곳에 있던 삼층석탑은 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졌다

OLYMPUS DIGITAL CAMERA<제6사지 삼층석탑이 있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경주박물관 야외에 전시중인 삼층석탑>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석조여래좌상과 삼릉계곡>

절터에서 내려와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탐방로에 마애선각여래좌상과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있던 자리를 볼 수 있는 곳에 안내표지판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안내판>

OLYMPUS DIGITAL CAMERA<마애선각여래좌상이 새겨진 바위>

절터 뒷편 바위 틈에 석조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고 한다. 부근에서 기와 등이 발견되어 원래 불전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조약사여래가 있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중인 석조약사여래좌상>

OLYMPUS DIGITAL CAMERA<제6사지를 지나 남산 정상부 아래에 위치한 상선암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OLYMPUS DIGITAL CAMERA<삼릉계곡에 위치한 상선암>

이 사찰에 내력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는 편이지만 현재 남아 있는 남산의 사찰 중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계곡 상류 바위절벽 아래에 약간의 터를 잡고 불상을 모신 불전과 작은 요사건물을 세웠다. 남산에 남아 있는 많은 절터의 옛 모습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상선암 경내에는 제9사지에 있던 선각보살상이 옮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상선암 뒷편에서 보이는 금오산 정상부>

OLYMPUS DIGITAL CAMERA<상선암을 지나 제9사지로 올라가는 탐방로>

OLYMPUS DIGITAL CAMERA<바위에 새겨진 선각마애불상이 남아 있는 제9사지>

삼릉계곡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내려다 보이는 주변 경치가 아름답다.

OLYMPUS DIGITAL CAMERA<삼릉곡 제9사지 부근>

OLYMPUS DIGITAL CAMERA<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남산 능선>

OLYMPUS DIGITAL CAMERA<배리삼릉 주변 들판>

경주 남산 일원, 사적 311호
남산은 신라의 왕도였던 서라벌의 남쪽에 솟아 있는 금오산과 고위산 두 봉우리를 비롯하여 도당산, 양산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를 통틀어 남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산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동서로 가로지른 길이가 약 4km, 남북의 거리는 약 8km에 이른다. 신라가 불교를 국교로 한 이후 남산은 부처가 머무는 영산으로 신성시되었으며, 수많은 불적들이 산재해 있다. 불교 관련 유적 이외에도 남산에는 신라의 건국 전설이 깃든 나정(蘿井), 신라 왕실의 애환이 서린 포석정터, 서라벌을 지키는 중요한 산성인 남산신성 등 왕릉, 무덤, 궁궐터 등을 망라한 많은 유적들이 간직되어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여러 전설.설화들이 남산 곳곳에 깃들어 있어 마치 야외 박물관이라고도 할 만큼 신라의 예술문화가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00년 12월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6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6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6년

경주 사라리 유적, 경주의 대표적인 삼한시대 고분 유적지

경주시 서면 사라리에서 발견된 고분유적이다. 1995년 이곳에 공장을 세우는 과정에서 유물이 발견되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청동기시대 주거지, 원삼국시대 목관묘, 삼국시대 적석목관묘 등 다양한 시기의 무덤들이 확인되었다. 확인된 무덤 중 130호분에서는 삼한시대를 대표하는 호랑이모양 청동허리띠고리를 비롯하여 청동검과 칼집, 청동거울 등이 출토되었다. 영천 어은동 출토유물과 함께 삼한시대 진한세력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유믈들이다. 56호분에서는 5세기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말머리가리개와 이형투구, 철갑옷 등이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고조선 유민들이 경주지역으로 이주하여 6촌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라리는 대구에서 영천을 통해 경주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조선에서 남하한 유민들이 낙동강을 거쳐 대구 경산과 영천를 거처 이곳에서 자리잡았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무덤의 주인들은 신라 건국초기에는 이 지역의 지배계층이었으며, 4~5세기 신라를 건국한 박씨집단이 건천읍 일대에서 이주한 이후에도 지역의 주요세력으로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건천읍 사라리 일대>

경주 건천읍 일대에 유력세력의 무덤들이 발견된 사라리 일대는 1995년 이곳에 공장을 세우는 과정에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발굴.조사 과정 이후에 공장이 세워져 있는 유적지>

경주 사라리고분군<영상사진으로 본 사라리 고분군이 있던 유적지>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앞 야산>

OLYMPUS DIGITAL CAMERA<사라리 마을>

OLYMPUS DIGITAL CAMERA<고분군이 있던 공장>

사라리 고분군은 영천에서 경주로 연결되는 중요한 교통로에 자리잡고 있다. 고조선 유민들이 정착했던 삼한시대 유적지이다. 고조선 유민들이 낙동강을 통해 대구와 영천을 거처 경주에 정착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남쪽편에 신라를 건국한 박씨세력들이 이주하면서 조성된 금척리 고분군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라리 고분군에서 가장 많은 유물의 출토된 130호분의 형태>

1~2세기 삼한시대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껴묻거리로 한국형 동검, 호랑이모양 허리띠고리 등 삼한시대를 대표하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신라가 건국한 기원전 57년부터 기원후 300년에 이르는 약 350년 동안 사람들이 죽으면 널무덤이나 덧널무덤에 묻혔습니다. 널무덤은 구덩이 안에 나무로 만든 널을 넣은 뒤 흙을 덮은 것으로 오늘날의 무덤과 비슷합니다. 한국식동검, 와질토기, 철기 등을 주검과 함께 넣었습니다. 널무덤에 뒤이어 나타나는 덧널무덤은 구덩이 안에 따로 나무덧널을 만들고 그 속에 널과 부장품을 넣어 묻은 무덤입니다. 이중으로 주검을 보호하는 셈입니다. 덧널무덤은 2세기 중엽 무렵부터 나타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사라리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검(1~2세기,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검(1~2세기, 경주박물관)>

경주지역에서의 한국식 동검문화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철과 청동으로 만든 유물이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쇠칼(1~2세기, 경주박물관)>

청동검과 비슷한 형태로 한국형 동검 양식을 유지하고 있는 쇠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허리띠고리(1~2세기, 중앙박물관)>

사라리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삼한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비슷한 시기 중국 한나라에서도 많이 출토되고 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호랑이모양 띠고리(1~2세기,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동띠고리(1~2세기,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8′자 모양 띠고리(1~2세기,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동팔찌(1~2세기,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거울(1~2세기,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동단추(1~2세기,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동반지, 청동팔찌(1~2세기,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유리목걸이(1~2세기,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유리목걸이(1~2세기,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유리목걸이(1~2세기,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오리모양토기. (1~2세기, 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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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모양토기(경주 사라리, 경주박물관)>

집모양토기에서 당시 사람들이 주거양식을 엿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투구(4세기, 경주박물관)>

1995년 경주 사라리 5호 덧널무덤에서 출토된 투구. 투구는 볼 가리개와 이마를 보호하는 쇠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머리 위쪽을 보호하는 복발이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경주 서쪽 건천읍 지역으로 경주의 박씨세력이 이주한 4~5세기 이후에도 사라리 지역 지배계층은 유력세력으로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판갑옷(4세기,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말머리 가리개(5세기, 경주 사라리, 경주박물관)>

5세기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말머리 가리개이다. 고구려 철기병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말머리가리개
경주 사라리 65호 덧널무덤에서 1995년 출토되었습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말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여러 장의 철판을 조립하여 만들었습니다. 말머리의 앞을 덮는 얼굴덮개와 볼 쪽에 매달리는 볼가리개, 그리고 뒤쪽에 경사지게 새워 귀 가리개 역할을 하는 챙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철판 두 장을 이어붙인 얼굴덮개는 고구려계통의 말머리가리개에서 보이는 것으로 양국의 관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사라리 남쪽 건천읍 지역에 남아 있는 금척리 고분군(사적)>

4~5세기 이 지역으로 이주한 박씨세력들의 무덤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주 사라리유적
경상북도 경주시 사라리의 낮은 구릉에서 많은 삼한.삼국시대 무덤이 조사되었다. 특히 130호 무덤은 삼한시기의 널무덤 가운데 가장 독보적이다. 130호 무덤은 길이 325cm, 너비 225cm, 깊이 90cm로 다른 널무덤에 비해 뚜렷하게 크다. 부장갱을 갖추고 있으며 묻힌 이의 지위를 알 수 있는 껴묻거리도 많이 출토되었다. 널안에서는 목걸이.청동팔찌.호랑이모양 띠고리와 함께 청동거울.청동검과 칼집 등이 나왔다. 널 바닥에는 촘촘히 쇠도끼를 깔았다. 널 밖에는 칠기, 철기, 청동기, 와질토기 등을 껴묻었다. 사라리 130호 무덤은 널무덤의 마지막 형태로 덧널무덤으로 발전해 가는 과도기인 2세기초에 만들어졌으며, 이 일대를 다스린 지배자의 무덤으로 판단된다. (안내문,경주박물관,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