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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장미산성(사적 400호), 남한강변 고구려비 부근 고구려 산성

충북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성(사적 400호)이다. 삼국시대 고구려와 신라간 분쟁이 많았던 충주 남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고구려와 신라가 세력권의 표시로 만든 충주 고구려비(국보 205호)와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6호)이 남한강을 따라 약 3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산성은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나즈막한 장미산(337.5 m)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았는데 둘레는 약 2.9 km 정도이다. 성벽은 중간 크기의 돌을 대강 다듬어 석축을 쌓았는데 높이는 5 m, 폭은 약 5 ~10 m 정도이다. 성벽 일부는 온전하게 남아있고 많은 부분은 허물어져 있지만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산성 중심부 장미산 정상에 올라서면 남한강 주변 충주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SANYO DIGITAL CAMERA충주 장미산성(사적 400호). 삼국시대 한강유역까지 진출했던 고구려가 쌓은 여러 산성 중 하나이다. 중간크기을 돌을 대충 다듬어 촘촘히 쌓은 고구려 산성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벽은 일부 훼손되기는 했지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장미산성 북쪽 계곡에 위치한 작은 사찰인 봉학사에서 산성 탐방을 시작할 수 있다. 이 곳 주변 성벽이 훼손되어 있으며 최근 성벽을 복원했다.

SANYO DIGITAL CAMERA최근 북원된 봉학사가 있는 북쪽 계곡 일대 성벽. 성벽은 높이 5 m 정도이고, 성벽 위 폭은 약 5 ~10 m 정도이다. 경사가 있는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여 적이 공략하기 상당히 어려운 구조이다. 여장 있는 후대 성벽과는 달리 목책을 올려 놓을 수 있는 공간을 성벽 위에 마련해 놓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모습.

SANYO DIGITAL CAMERA정상부 주변 온전한 모습이 남아 있는 부분. 바깥쪽은 비교적 큰 돌을 잘 다듬어 석축을 쌓았다.

SANYO DIGITAL CAMERA안쪽은 중간크기의 돌을 촘촘히 쌓아 견고한 석출을 만들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바깥쪽 석축이 훼손된 부분.

SANYO DIGITAL CAMERA성벽 윗부분은 비교적 넓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장미산 정상부 주변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 둘레 2.9 km로 상당히 큰 규모의 산성이다.

SANYO DIGITAL CAMERA장미산 정상부. 헬기장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장미산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한강 주변 충주지역. 주변지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산성을 쌓은 고구려 산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남한강변(오른쪽)에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6호)가 있는 중앙탑사적공원이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장미산성 남쪽에 위치한 충주 고구려비(국보 205 호). 고구려가 남한강 유역을 장악하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중앙탑 사적공원에 있는 탑평리 칠층석탑(국보 6호). 삼국통일 후 신라가 쌓은 석탑이다. 신라가 통일 후 이 지역을 거점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장미산성, 사적 400호,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해발 337.5 m인 장미산을 중심으로 계곡을 감싸 돌로 쌓은 산성이다. 수로 및 육로교통의 요충지이자 삼국시대에 전략적 거점이기도 한 이곳에는 백제시기의 유물이 많이 발견되고 있지만, 이와 같은 산성의 원류는 고구려 계통에 속하는 것으로 ‘중원 고구려비’와 관련하여 고구려 세력의 남하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이 성과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재주서이십팔리유고석성, 충주의 서쪽 28리에 돌로 쌓은 옛성이 있다.”라 했으며, 「대동여지도」에도 “장미산에 오래된 성터가 남아 있다.”라 기록되어 있다 현재 성벽은 다소 훼손된 상태로, 성의 크기는 높은 곳이 5 m, 폭은 5~10 m이며, 둘레는 2,940 m이다.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출처>

  1. 안내문, 충주시청, 200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금동보살입상(보물 333호), 삼국시대 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은 불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금동보살입상(보물 33호)이다. 높이 15.1 cm의 작은 불상으로 삼국시대 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머리에는 관을 쓰고 있으며, 온몸을 감싸고 있는 옷을 입고 있는 전통적인 보살상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대좌와 광배는 남아 있지 않지만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작지만 강인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평양부근 원오리에서 출토된 불상과 거의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어 6세기에 만든 고구려 불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가 북한과 만주지역에 존재했던 국가였던 관계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많은 불상이 남아 있지 않다. 고구려는 불교를 처음으로 도입한 국가로 남북조시대 북위, 동위 불상 양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생동감이 넘치는 고구려 특유의 불상양식을 만들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보살입상(보물 333호). 머리에 특이한 형태의 관을 쓰고 온몸을 감싸는 옷을 입고 있는 삼국시대 보살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평양 원오리 절터에서 출토된 소조 보살상. 이 불상과 비슷한 양식과 외형을 하고 있어 6세기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중앙박물관.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국보119호), 경남지방에서 발견된 고구려 불상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金銅延嘉七年銘如來立像, 국보119호)이다. 광배가 남아 있는 높이 16.2 cm의 작은 불상으로 광배 뒷면에 ‘연가 칠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조성경위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실제로 발견된 곳은 경남 의령이지만, 평양에 있던 동사에서 만드어 전국에 유포한 천불상 중의 하나이다. 신체의 굴곡 표현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강인한 느낌을 주고 있어 중국 북위 양식을 보이고 있다. 광배에는 소용돌이치는 듯한 불꽃무늬가 선으로 새겨져 있다.

고구려가 북한과 만주지역에 존재했던 국가였던 관계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많은 불상이 남아 있지 않다. 고구려는 불교를 처음으로 도입한 국가로 남북조시대 북위, 동위 불상 양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생동감이 넘치는 고구려 특유의 불상양식을 만들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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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가칠년」이 새겨진 부처, 「延嘉七年」銘金銅佛立像, 국보 119호, 경남 의령발견, 삼국시대 고구려 539년. 화려하지는 않지만 강인한 느낌을 주는 조형미, 광배에 새겨진 불꽃무늬 등 중국 북위의 영향을 받은 6세기 고구려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광배 뒷면에 제작연대와 제작지 등이 기록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539년 고구려 낙랑(樂浪, 평양)에 위치한 동사(東寺)에서 승려 40인이 참여하여 제작.유포하려던 천 점의 불상 가운데 스물 아홉번째 불상이다. 이 불상은 경남 의령에서 발견되어 불상의 출토지와 제작지가 다른 대표적인 사례이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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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배 뒷면에 고구려에서 제작하여 배포되었다는 내용의 조성 이력이 새겨져 있다.

연가 7년인 기미년(539) 고려국의 수도 낙양(樂良, 평양)에 있던 동사의 주지스님 경(敬)과 그 제자 승연(僧連)을 비롯한 사도 40인이 함께 현겁천불(賢劫千佛)을 조성하여 유포하기로 하였는데 제 29불인 인현의불(因現義佛)로 비구 법영(法穎)이 공양한다.  <출처: 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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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편에서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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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서 본 모습

<출처>
1. 문화재청
2. 두산백과
3. 위키백과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5. 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고구려실] 고구려인의 일상생활, 무기, 불교

고구려는 오녀산성이 있는 환인성에서 성읍국가로 출발해서, 압록강 중류의 국내성, 마지막으로 대동강 유역의 평양성으로 수도를 이전했다. 고구려의 영역은 한반도북부와 만주 일대에 위치하고 있어 고구려 유물이나 유적을 오늘날 접하기 힘든 형편이다. 고구려 유적지가 많지는 않지만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진출했던 시기에 쌓은 아차산 일대 보루 고구려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고, 신라에서 가져간 고구려 물건들이 경주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부 출토되고 있다.

북방민족과 긴장관계에 있었던 고구려는 산성을 비롯하여 성곽을 쌓는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지배계층은 주로 성곽 안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지역에 있는 고구려 궁궐인 안악궁은 역사이래로 가장 규모가 컸던 궁궐건물로 보이며, 이로 미루어볼때 고구려의 생활 수준은 당대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박물관에는 많지는 않지만 고구려인의 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을 볼 수 있으며, 이들 유물들 상당수는 서울의 고구려산성이 아차산성에서 출토된 유물이라고 한다.

고구려 군사력의 바탕이 되는 무기류는 고분벽화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기병의 활과 말갖춤 등이 특징적이다. 중세가 시작되는 시기에 로마를 비롯한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등자와 활을 사용한 훈족기병의 모습이 고구려에서는 일상화된 기병의 모습이다. 개마무사로 불렸던 고구려 철갑기병은 사람과 말 모두가 철제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중장기병으로 중국 북조와 북방유목민들과 전투에서 산성과 함께 큰 위력을 발휘했다. 당시 고구려의 군사력은 동아시아에서도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바탕으로 그 세력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다.

고구려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일어나 점차 주변 지역을 아우르면서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313년 평양 지역의 낙랑군을 몰아내고, 북으로는 중국 랴오허 강에서 지린성 쑹화 강에 이르고, 남으로는 한반도 중부까지 영역을 넓혀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었다. 고구려는 고유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중국과 서역, 북방의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역동적이고 실용적인 문화를 만들어 냈다. 고구려 문화의 국제성과 선진성은 천문, 지리, 문화, 음악, 무용, 공에 등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이런 고구려 문화의 특징은 만주의 한런(桓仁), 지안(集安) 일대와 평양 등 고구려 옛 도읍지를 중심으로 남아 있는 성, 무덤, 궁궐터, 절터 그리고 여기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 꾸미개 등의 유물에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 문화는 백제, 신라, 가야와 바다 건너 왜(일본)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졌다. <출처:중앙박물관>

고구려의 성
고구려는 도성과 주요 교통로에 수백 개의 성을 축조하였다. 고구려인은 절벽과 가파른 산등성이 등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산성을 쌓아 비교적 적은 힘으로 방어력을 최대로 증대시켰다. 산성과 대비되는 평지성은 주로 도성지역에 축조되었다. 군사적, 방어적 성격이 강한 산성에 비해 평지성은 거주 기능이 뛰어나 다양한 정치적,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기에 유리하였다. 고구려의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짝을 이루도록 설계되어 평시에는 평지성에 거주하다가 전쟁이나 위급 시에는 산성으로 옮겨가 대항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나라를 세우고, 성을 쌓다.

OLYMPUS DIGITAL CAMERA 중국 요녕성 환인현에 위치한 오녀산성이다. 높이 200m의 절벽을 이용하고, 산세가 완만한 곳에 성벽을 쌓았다. 고구려 첫번째 수도인 졸본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전형적인 고구려 산성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글자가 새겨진 평양성 성돌(제5석) 탁본, 개인소장, 평양성은 고구려의 마지막 도성인 장안성이다. 양원왕8년(522)에 성의 축조가 시작되어 평원왕 28년(586)에 이곳으로 도성을 옮기게 된다. 이 성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자연 해자로 삼아 평양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으며, 외성, 중성, 내성, 북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이 각기 언제 축성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글자가 새겨진 성돌이 내성과 외성에서 발견되어 공사시기, 공사 책임자 등에 대한 여러가지 정보를 전해 주고 있다. 이런 평양성 성돌은 현재 6점이 알려져 있는데, 이 가운데 3점은 실물로 남아 있으며, 나머지 3점은 조선시대 고문헌을 통해서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성돌은 내성 남벽에 박혀 있던 것으로 현재 북한의 조선 중앙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5행18자로 소형 가군이 공사구간 4리를 맡았다는 내용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울 아차산과 용마산 능선을 따라서 쌓은 고구려 보루를 볼 수 있다. 고구려가 처음 산성을 쌓았던 오녀산성과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다.

고구려의 금동관
고구려 사람들은 신분에 따라 다른 모양의 관을 착용하였다. 고구려의 관인은 절풍이나 소골이라 불리는 고깔 모양의 관에 새깃 2개를 꽂고 금테나 은테를 섞어 둘렀다. 지안 일대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금동관 꾸미개는 두껍게 도금된 상태로 대개 세움 장식 가장 자리를 촘촘히 오려낸 다음 하나씩 꼬아 새의 깃털처럼 표현하고 세잎무늬 등을 맞새김해 장식하였다. 개마총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쓰고 있는 관 꾸미개의 형태가 이와 비슷하다. 이런 고구려의 관과 꾸미개는 금.은제 귀걸이와 허리띠 장식, 금동신발 등과 함께 고대 국가 지배 계층의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귀걸이, 금,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능동, 깃털모양 관꾸미개, 금동,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불꽃 맞새김무늬관, 금동,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평양시 대성구역, 복제

OLYMPUS DIGITAL CAMERA산모양 관꾸미개, 금동,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못신, 금동,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고구려의 금동신발은 바닥에 박힌 못의 개수가 많고, 바닥판만 금속으로 만든 점이 특징이다. 지안 삼실총과 통구 12호분의 벽화에 이러한 신발을 신고 있는 고구려 무사가 묘사되어 있다. 이 신발은 바닥판만이 남아 있는데, 사각추 형태의 금동못 40여개가 촘촘히 박혀 있다. 바닥판 가장자리에 작은 구멍이 짝을 이루어 뚫려 있는 점으로 보아, 신발의 위쪽은 가죽이나 천으로 만들어 연결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신발은 실제 사용된 것이라기보다는 의례용이나 껴묻거리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고구려의 무기
고구려 군사력의 주요한 바탕은 우수한 제철 기술로 만든 강력한 무기에 있었다. 무기는 공격형 무기와 방어용 무기로 크게 나우어진다. 공격용 무기는 활, 창, 쇠뇌, 칼, 도끼 등이 있고, 방어용 무기는 갑옷과 투구, 방패가 대표적이다. 고구려의 활은 길이가 짧은 단궁으로 성능이 우수해서 당시 이미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으며, 고구려에서 활쏘기는 기본 무술 종목 중의 하나였다. 고구려의 갑옷은 작은 철판에 구멍을 뚫어 가죽끈으로 연결한 비늘갑옷이 주로 사용되었다. 투구는 다양한 형태로 벽화에 묘사되고 있지만, 실제 출토된 것들은 소수이디. 철제 무기들을 분석한 결과 오늘날의 강철과 같이 단단한 것으로 밝혀졌다.

OLYMPUS DIGITAL CAMERA영토확장, 대륙을 향하다.

고구려의 철갑기병
고구려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동시에 중국의 혼란기를 이용한 대외 정복활동으로 넓은 영토를 개척하고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고구려의 군대는 육군과 수군으로 구성되며, 육군은 기병과 보병으로 이루어졌다. 기병은 중장기병과 경기병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을 적절히 배치해 효과적으로 전투를 수행하였다. 기병 중 사람과 말 모두가 철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중장기병은 고구려 군사력의 가장 핵심적 존재였다. 동천왕대에 이미 ‘철기 5천’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로 기마전술에 의한 전투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개마무사로도 불리는 이들은 안악3호분과 덕홍리 무덤의 벽화 등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비늘갑옷,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비늘갑옷은 가야에서 볼 수 있었던 철기시대 판금갑옷에 비해서 활동이 자유로워서 기마병들에게 적당한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갑옷의 형태가 아닌가 생각된다.

OLYMPUS DIGITAL CAMERA도끼,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1,2보루, 마름쇠,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2보루. 마름쇠는 기마병에 대응하기 위해서 성곽주변에 뿌려 놓는 것으로 북방민족의 기병에 적절히 대응해온 고구려의 전술적 능력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투겁창과 물미,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보루. 보병들이 사용했던 무기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화살촉, 쇠뇌촉, 철, 삼국시대(고굴) 5~7세기, 서울 구의동 보루, 경기도 연천 무등리 2보루. 쇠뇌는 고구려를 비롯하여 동아시아에서 기병을 상대하기 위해 사용한 강력한 무기이다.

고구려의 말갖춤
말갖춤에는 말을 부리기 위한 재갈과 고삐, 말 위에서 몸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안장과 발걸이, 말을 장식하기 위한 말방울, 말띠드리개, 말띠꾸미개 등이 있다. 말을 길들여 타는 데에 가장 먼저 고안된 도구는 고삐일 것이나,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재갈은 말의 입안에 단단한 물질을 넣고 이를 당겨 말의 혀를 자극하는 통제수단이다. 이 가운데 금속제 재갈과 견고한 재질의 안장, 발걸이를 사용하면서 기병의 전투력이 크게 강화될 수 있었다. 고구려의 말갖춤은 무덤과 산성, 보루 등에서 출토된 유물과 무덤 벽화를 통해 그 모습이 전해지며, 고대 동아시아의 말갖춤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재갈과 발걸이,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4보루, 복제. 등자라고 불리는 발걸이는 전쟁과 무기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무기로 훈족으로 대표되는 중앙아시아 유목민 기병을 상징하는 말갖춤이라고 볼 수 있으며, 고구려 기병은 이들과 비슷한 시기에 등자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등자를 사용하면서 말을 타고 활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됨으로써 전쟁의 방식을 크게 바꾸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방울,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보루, 말갖춤,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수락산 보루

고구려의 남진
고구려는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해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다. 임진강 유역과 양주 분지 일원, 한강 하류역, 금강 유역에서는 고구려의 남진을 보여 주는 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해 고구려군이 축조한 소규모 성곽으로 군사적 성격이 강하다. 특히, 아차산과 용마산 일대 보루들에서는 온돌 시설이 있는 건물지와 저수시설, 간이 대장간, 방앗간 시설 등이 다양한 유물과 함께 발견되고 있다. 이들을 통해 고구려의 군사조직과 생활상, 한강유역 지배 방식 등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1979년에 발견된 중원 고구려비 역시 5세기 고구려의 남진을 이해하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자료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진, 아리수를 넘다.

OLYMPUS DIGITAL CAMERA‘호우壺杅’ 글자가 있는 청동 그릇, 삼국시대(고구려) 415년, 경북 경주 호우총,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고구려 청동 그릇이다. 바닥에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글자체의 글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의 장례를 치른 다음해(415)이다. 따라서, 대왕을 장사지낸 1년 뒤에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이 그릇을 신라 사신이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자庚子’ 글자가 새겨진 접시,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보루, 연꽃무늬 수막새,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1보루

OLYMPUS DIGITAL CAMERA보습,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구의동 보루, 2.도끼,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충북 청원 남성골

OLYMPUS DIGITAL CAMERA3. 삽날,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4. 호미,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보루. 서울 아차산성과 그 부근에서 출토된 철제 농기구를 비롯한 유물들은 당시 고구려군의 주둔 방식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아차산성에 주둔한 고구려군의 주위에 둔전을 개발하여 자급자족 형태로 군사들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삼국시대 조조가 운영했던 군사주둔 방식이다.

고구려의 불교
고구려의 불교는 소수림왕 2년(372)에 중국 전진왕이 사신과 순도스님을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면서 전해졌다. 그리하여 고구려에서는 일찍부터 왕실과 국가의 후원을 받으며 사찰이 건립되고 불상이 조성되었다. 절터로는 청암리사지, 상오리사지, 원오리사지, 정릉사지 등이 조사되었다. 청암리 사지는 문자왕7년(498) 조성된 금강사지로 비정되며, 상오리사지, 정릉사지와 함께 일탑삼금당 가람배치 형식을 가지고 있다. 정릉사지는 ‘사寺’, ‘정릉定陵’ 등의 명문이 있어 전 동명왕릉과 관련된 능사로 보고 있다. 불상은 고운 점토로 빚거나 금동을 주조해 만든 것들이 전해지는데, ‘연가7년(539)이 새겨진 불상’은 명문이 있는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고구려 불상은 중국 남북조시대 불상의 영향을 받아 얼굴이 길고 옷자락이 몸 양 옆으로 힘차게 퍼진 특징을 보여준다. 그 밖에, 고구려인들의 불교적 세계관은 무덤 벽화 안에서도 자주 표현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수없이 많은 부처, 무수한 깨달음을 구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영강7년’이 새겨진 광배, 복제, 불상의 신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불상의 뒤에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광배다. 연꽃과 넝쿨무늬로 장식하였고, 전면에 꽃무늬를 새겼다. 광배 뒷면에 ‘영강 7년’ 시작되는 7행 58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영강’은 고구려 양원양 때의 연호로 551년에 해당한다. 명문 내용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미륵 법회에 참석하여 깨달음을 얻고자 미륵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이 광배의 본존이 미륵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연가7년’이 새겨진 부처, 1963년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고구려 불상이다. 광배 뒷면에는 연가7년(539)에 현재의 평양 지역인 낙강 동사라는 절에서 천불신앙을 유포하고자 이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4줄47자에 걸쳐 새겨져 있다. ‘연가’는 고구려 독자의 연호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흙으로 만든 부처와 보살, 1937년 평안남도 원오리 옛 절터에서 흙으로 만든 많은 소조불이 출토되었다. 이 불상들은 가부좌로 앉아 배 부분에 손을 깍지 낀 선정인 자세의 부처와 시무외 여원인의 손모양을 한 보살입상들이다. 6세기 중엽 이후에 만들어진 출토지가 분명한 고구려 불상이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상은 서역에서 많이 만들어졌던 불상형태이다. 불교를 처음 받아들인 고구려에서는 서역의 영향을 받은 불상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머리만 남아 있는 소조불상

고구려인의 일상
고구려의 성 내부에는 여러 건물과 정비된 도로 등 다양한 시설이 있었다. 귀족의 집은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지며, 마구간, 차고, 부엌, 다락창고, 방앗간, 고깃간 등의 부속시설과 잘 꾸며진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 건물은 기와로 지붕을 덮었고 난방 시설로는 부분 온돌을 설치하였으며, 일상생활에서 평상이나 좌상을 사용하였는데 방안에서 신발을 벗는 습관이 있었다.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었고, 가루로 내어 시루어 쪄 먹었으며 아래층에 기둥만 있고 본체가 위에 있는 고상식 구조의 다락창고에 곡식을 보관하였다. 부엌에서 조리한 음식을 소반에 받쳐 들고 안채나 사랑채로 가서 상차림하였는데, 주인과 손님의 상을 따로 차렸다.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를 탔다. 일반적으로 마차는 남자용, 우차는 부인용이나, 귀족 남자들도 외출할 때 우차를 많이 이용하였다. 바퀴살이 있는 개량된 수레바퀴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질 좋은 철기를 생산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세발 뚜껑단지,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항아리,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구의동 보루

OLYMPUS DIGITAL CAMERA집게,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보루, 수레 굴대 부속,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아차산 홍련봉 2보루

OLYMPUS DIGITAL CAMERA집모양 토기,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평양구역

OLYMPUS DIGITAL CAMERA부뚜막, 철,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평북 운산 용호동 무덤.  실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무덤주인의 사후 세계를 위해서 만들어 부장품으로 묻은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시루와 솥,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서울 구의동 보루. 서울 아차산성 부근에 주둔했던 사람들이 사용했던 생활용구로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네 귀 달린 항아리, 청동, 삼국시대(고구려) 5세기, 경북 경주 금관총.  당시 신라와의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중앙박물관 고구려실] 고구려의 무덤과 강서대묘 사신도

만주일대 고대국가였던 부여에서 남하한 주몽이 건국한 고구려는 주변지역을 장악하면서 삼국가운데 가장 먼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고구려는 환인성 오녀산성에서 출발하였으며, 압록강 중류지역 지안에 위치한 국내성을 근거지로 크게 강성해 졌다. 이후 대동강 일대에 낙랑군을 몰아내고 한강유역까지 진출하면서 남북조시대 중국에 맞서는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등장하였다. 고구려 유적지는 압록강 일대 요령성 환인현과 길림성 집안시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평양성 일대에도 강서대묘를 비롯하여 다양한 벽화가 그려진 고분들이 널리 분포되어 있다.

고구려의 무덤은 돌무지무덤과 훍무지무덤이 있다. 돌무지무덤은 돌을 깔고 주검을 안치한 후 다시 돌을 덮는 방식으로 압록강 중류 지안시 일대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흙무지무덤은 지하, 반지하, 지상에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는 방식이다. 흙무지무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마지막 수도였던 강서대묘를 비롯하여 평양성 일대 고분들이 잘 알려져 있다. 특히 돌방에는 생활풍속, 장식무늬, 사신도 등 다양한 주제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벽화들이 남아 있어 당시 고구려사람들의 생활모습, 정신세계 등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중국 한대 석실고분과 유사한 부분이 많은데, 중국 산동성박물관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비슷한 한대 석실고분 벽화들을 찾아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 1층 고고관에서는 고구려 벽화인 강서대묘 사신도를 전시하고 있다. 이 사신도는 1930년대에 벽화를 보고 모사한 그림으로 실제에 가까운 모습이다. 강서대묘는 북한 평안도 남포시 강서구역에 있는 고구려 고분으로 1900년대 초에 그 존재가 널리 알려졌다. 내부는 대형 화강암 판석을 수직으로 쌓아 만든 널방 벽체와 천정으로 이루저여 있으며 특별한 장식이 없이 사방이 벽화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기운생동하는 사신도와 유려하고 다채롭게 표현된 천장 그림들은 고구려 무덤벽화의 절정기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북벽의 현무가 연출하는 긴장감 있는 화면 구성과 회화적 완성도는 조사보고 당시부터 국내외의 이목을 끌었으며,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 벽화를 모사했다고 하며, 중앙박물관에 전시된 벽화도 이 당시에 모사한 그림 중에 하나이다. 일제강점기에 중앙박물관에서 공식으로 모사한 그림으로 생각되며 그 수준 또한 상당히 높아 보인다.

고구려의 무덤
고구려 무덤은 돌무지무덤과 흙무지무덤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돌무지무덤은 압록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는 고구려 전기 무덤 형식이다. 지상에 돌을 깔고 그 위에 주검을 안치한 후 다시 돌을 덮어 만들었으며, 무기단식에서 기단식, 계단식으로 변천하였다. 지안의 장군총, 태왕릉, 천추총 등은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가장 발전된 단계를 보여 주는 예이다. 흙무지무덤은 지하, 반지하, 지상에 널길이 있는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형식으로 돌방의 수, 천장의 짜임, 널길의 위치 등에서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벽화를 그린 돌방무덤이 발전하였다. 벽화무덤은 고구려의 옛 도읍 일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생활풍속, 장식무늬, 사신도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고구려 무덤, 삶과 죽음의 경계

말탄사람이 그려진 벽화편
1913년 평안남도 남포시의 쌍영총을 조사할 때 수습된 벽화조각으로 널길벽 인물 행렬도의 일부다.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의 모습에서 당시 고구려인의 옷치장과 말갖춤 등을 엿볼 수 있다. 이 인물은 ‘절풍’이라 불리는 고구려 특유의 모자에 새 깃 두개를 꽂아 장식한 ‘조우관’을 쓰고 있다. 재갈과 고삐를 이용해 달리는 말을 부리며, 말 위에서 몸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안장과 발걸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말띠드리개나 말띠꾸미개 등으로 말을 장시하고 허리에는 화살통을 차고 있다. 고구려 무덤 벽화 사냥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이런 모습을 통해 활쏘기에 능했던 고구려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말탄 사람이 그려진 벽화편, 삼국시대(고구려), 5세기, 평남 남포 쌍영총, 복제품, 남 남포 쌍영총에 출토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고구려 벽화 실물을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벽화편이다. 말을 타고 있는 고구려 무사를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림의 표현 수법이 상당히 세밀하면서도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구려 복식 및 무기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는 그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반원막새,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평양지역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수막새,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짐승얼굴무늬 수막새,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OLYMPUS DIGITAL CAMERA글자가 새겨진 벽돌, 지린성 지안의 태왕릉과 천추총에서 출토된 벽돌이다. 이 무덤들은 대형 계단식돌무지무덤으로, 무덤 위쪽에 기와를 이은 건물을 세웠거나, 무덤을 지키는 사람과 관련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벽돌은 무너진 돌무지 속에 기와와 함께 섞여 있었으며, 한쪽 면에는 무덤이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기원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고구려의 금동관
고구려사람들은 신분에 따라 다른 모양의 관을 착용하였다. 고구려의 관인은 절풍이나 소골이라 불리는 고깔모양의 관에 새 깃 2개를 꽂고 금테나 은테를 섞어 둘렀다. 지안 일대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금동관 꾸미개는 두껍게 도금된 상태로 대개가 세움 장식 가장 자리를 촘촘히 오려낸 다음 하나씩 꼬아 새의 깃털처럼 표현하고 세잎무늬 등을 맞새김해 장식하였다. 개마총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쓰고 있는 관 꾸미개의 형태가 이와 비슷하다. 이런 고구려의 관과 꾸미개는 금.은제 귀걸이와 허리띠장식,금동신발 등과 함께 고대국가 지배계층의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맞새김무늬 꾸미개, 금동,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평양 진파리 무덤, 복제. 평양 진파리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으로 만든 꾸미개로 여기에 표현된 맞새김 무늬는 생동감이 넘치는 고구려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고구려를 상징하는 삼족오를 이 금동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봉황모양 꾸미개, 금동, 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평북 운산 용호동 무덤

요녕성과 길림성 일대 고구려 유적
중국 요녕성 환인현과 길림성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도성과 무덤, 비석 등이 고구려의 대표적 문화유적으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고구려의 첫번째 도읍인 환인의 오녀산성과 두번째 도성인 집안의 국내성, 환도산성 등이 이에 포함되었다. 또한, 왕릉이나 귀족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집안 일대의 돌무지무덤과 돌방 벽화무덤 39기도 광개토대왕릉비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장군총과 태왕릉을 비롯해 각저총, 무용총, 모두루총, 오회분, 장천 1호 무덤 등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무덤들이다. <출처:중앙박물관>

평양 일대의 고구려 유적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 평양 일대에는 여러 성격의 고구려 유적들이 분포하는데, 그 중 평양시와 남포시, 황해남도 안악 일대에 분포하는 고구려 무덤 63기가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동명왕릉과 진파리 무덤군 15기, 호남리 사신총과 주변 무덤 34기, 덕화리 무덤 3기, 강서 삼묘, 덕흥리 무덤, 약수리 무덤, 수산리 무덤, 용강대총, 쌍영총, 안악 무덤 3기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들 중에서도 벽화무덤은 정교하게 축조된 돌방 내부에 다양한 생활모습과 사상을 세련된 필치로 그려내어 고구려 문화의 정수를 보여 주는 대표적 유적이라 할 만하다. <출처:중앙박물관>

강서대묘
강서대묘는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에 있다. 삼묘리에는 3개의 흙무지돌방무덤이 삼각형을 이루며 자리하고 있는데, 제일 남쪽의 가장 큰 무덤이 강서대묘이다. 1900년대 초반부터 벽화무덤이라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져 외부인들의 무덤 안 출입이 계속되었으나 1912년에야 본격적인 내부 조사가 이루어졌다. 무덤의 방향은 남향이며 무덤칸은 지상에 축조되었다.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으로, 잘 다듬어진 대형 화강암으로 무덤칸의 벽과 천장고임을 축조하였다. 대형 화강암 판석을 수직으로 쌓아 만든 널방 벽체가 서로 만나는 곳의 상부는 끝부분을 각이 지게 깎아 내어 처음부터 약간 좁혀진 상태로 천장을 고일 수 있게 하였다. 널방의 천장구조는 평행삼각고임이다. 무덤 안의 돌 벽면에 직접 벽화를 그렸다. 벽화의 중심 주제는 사신이다. 아무런 배경 장식이 없는 널방 벽면에 사신을 가득 차게 그려 넣었다. 특히 기운생동하는 사신도와 유려하고 다채롭게 표현된 천장 그림들은 고구려 무덤 벽화의 절정기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북벽의 현무가 연출하는 긴장감 있는 화면 구성과 회화적 완성도는 조사보고 당시부터 국내외의 이목을 끌었다. 그뿐 아니라 천장고임에는 연꽃, 비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 기린, 봉황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상서로운 존재들, 넝쿨무늬, 산악 등을 그려 넣어 신선 사상과 불교적 내세를 표현하였다. 또한 천장석 중앙에는 왕의 표지로도 이해되는 황룡을 그려 넣었다. 이러한 벽화들에 대한 모사 작업이 1912년과 1930년 무렵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전형적인 외방무덤 구조, 사신을 중심 주제로 삼은 벽화구성, 최고조에 이른 사신묘사 기법 등으로 보아 무덤의 축조와 벽화 제작 시점은 6세기 말일 가능성이 높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고구려 무덤 벽화 모사도, 강서대묘에서 발견된 벽화를 1930년대에 모사한 그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천장 고임, 널방투시도.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석실고분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고구려의 사신
청룡.백호.주작.현무로 이루어진 사신은 대표적인 상상 속 신수이다. 사신은 동서남북의 네 방향, 봄.여름.가을.겨울의 네 계절, 하늘 사방의 28별자리와 관련있는 존재이며 벽사와 음양조화를 뜻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이다. 본격적으로 사신이 표현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한대부터인데 시기별.지역별로 인식과 표현기법에서 변화와 발전을 계속하였으며, 우라나라에서는 고구려 무덤벽화에 가장 먼저 나타난다.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 사신은 해와 달, 별자리, 상서로운 동물, 연꽃 등과 함께 내세를 이루는 한 요소로 무덤칸 천장에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5세기까지는 표현과 배치가 정형화되지 않아 기이하고 어색한 모습을 띠는 경우가 많고 쌍을 이뤄 나타나거나 일부가 생략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특성은 점차 사신에 대한 인식이 체계화되면서 신령스러운 동물 특유의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해 나가게 된다. 그리하여 6세기 이후에는 벽화에서 그 비중이 점차 높아져 무덤칸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사실상 유일한 주제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로부터 단지 내세를 구성하는 하나의 일원으로서가 아니라 독자적 존재이면서 무덤의 수호자로 격상된 사신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청룡
널방 동벽 청룡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청룡은 널방 입구인 남쪽을 향해 왼쪽 앞발을 크게 내저으며 하강하는 모습이다. 커다란 S자 모양의 가느다란 목과 굵은 몸통, 계단꼴을 이루면서도 유연하게 뻗어 나간 꼬리, 적절하게 내딛고 뒤로 뻗은 네 다리가 서로 어우러져 청룡의 자태를 자연스러우면서도 힘있게 만들어준다. 화려하면서도 치밀한 몸체의 묘사와 채식이 돋보인다. 청룡은 사신 중 동쪽의 수호자이며 일찍이 백호와 함께 벽사의 기운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다. 청룡과 백화에 대한 옛 사람들의 인식은 중국 신석기시대 무덤에서 발견된 시신 좌우의 용과 호랑이 형상 조개껍질 더미에서 처음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이들이 약 6천년 전부터 죽은 이의 삶터를 지키는 존재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청룡의 머리 뒤쪽에 대형 철못의 흔적으로 보이는 검은색 방형 점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철녹을 표현한 듯한 붉은 선이 있다. 이러한 검은 점이 널방 네벽의 비슷한 위치에서 확인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룡, 강서대묘, 6세기말, 남포시 강서구역, 복제. 흔히 좌청룡이하고 하는 동쪽과 봄을 상징하는 상스러운 동물로 출입문인 남쪽문을 향하여 불을 뿜고 있는 모습이다. 백호와 함께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대표적 상징으로 지금까지도 풍수에서 좌청룡.우백호의 기운의 지세를 추구하고 있다.

현무
널방 북벽 현무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현무는 뱀이 거북을 감은 형상으로 거북이와 뱀이 마주 보면서 서쪽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다. 마주보는 위치에서 비스듬히 허공을 쳐다 보는 거북과 뱀의 크게 벌린 아가리에서는 불꽃같은 기운이 뿜어 나온다. 거북이 자아낸 운동감과 뱀이 이루어낸 탄력성이 잘 어우러져 역동적인 현무를 만들고 있다. 북방의 수호자인 현무는 주작과 함께 음양의 기운을 순조롭게 조절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현무의 개념은 중국 한나라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뱀과 거북이 한 몸을 이룬 전형적인 모습은 한나라 때에 처음 등장하지만 이후에도 거북만으로 표현된 경우가 적지 않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현무, 강서대묘, 6세기말, 남포시 강서구역, 복제. 강서대묘의 사신도를 비롯하여 고구려 벽화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를 통털어서 가장 대표적인 벽화라 할 수 있다. 서방세계에서 사자가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을 묘사한 동물투쟁도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으며, 서역과의 문화적 교류의 한단편으로도 많이 소개되는 벽화이다.  이 그림은 뱀이 거북을 감은 형상으로 두 동물의 투쟁모습을 생생하고 기운이 살아 넘치는 역동적인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강서대묘 벽화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한 그림으로 고구려벽화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회화로서도 상당히 우수하고 잘 그려진 그림으로 평가받고 있는 벽화이다.

주작
널방 남벽 주작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암수 주작은 널방 입구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모습이다. 널방 입구 주변은 넝쿨무늬로 장식하였다. 부릅 뜬 눈, S자꼴을 이룬 목과 몸통, 원형에 가깝게 활짝 편 날개와 반원꼴로 크고 힘있게 말려 올라간 세 갈래 꼬리깃 등이 주작을 거세고 힘있는 존재로 보이게 한다. 두 주작 모두가 화려한 인동 앞에 싸인 연봉오리를 부리에 한 줄기씩 물고 있다. 주작의 다리 아래쪽에는 봉우리 여러개가 서로 연결되어 산맥을 이룬 산이 그려져 있다. 주작은 사신 중 남쪽을 수호하며 현무와 함께 음양의 조화를 관장하는 존재이다. 고구려 무덤벽화에서 주작은 가슴을 앞으로 내밀고 두 날개를 활짝 편채 마주 서 있는 한 쌍으로 등장한다. 머리에 깃털관이 있고 부리는 닭의 모습이며 날개와 꼬리깃이 몸에 비해 과장되게 표현되었다. 벽화속에 등장하는 주작의 모습은 닭의 형상에 가깝게 그려진 예도 있지만 대체로 고대 중국에서 깃털 달린 동물 중 으뜸이라 칭했던 봉황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주작, 강서대묘, 6세기말, 남포시 강서구역, 1930년경 모사, 복제. 닭의 부리에 날개와 꼬리깃이 과장되게 표현되어 있는 동물로 중국의 봉황, 서양에서 말하는 불사조인 피닉스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상서러운 동물이다.

백호
널방 서벽 백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서쪽을 관장하는 백호는 청룡과 짝을 이루어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수호신으로 인식되어 왔다. 동벽의 청룡과 마찬가지로 남쪽 널방 입구를 향해 포효하며 내딛는 모습의 백호는 매우 환상적으로 표현되었다. 기본 자세와 태도는 맞은 편 청룡과 거의 같다. 다만 역S자꼴을 이루며 목에서 몸통으로 이어지는 선이 보다 가파르고 세밀한 세부 묘사를 생략한 몸통 표현, 상대적으로 가늘어 보이는 네 다리의 묘사 등이 백호 나름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점이 다르다. 넓은 혀를 내민 백호에는 줄무늬의 호피무늬를 부분적으로 그려 넣었을 뿐, 붉은 색으로 엷게 채색한 몸에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다. 앞발을 크게 내민 대각선 구도가 속도감과 운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백호, 강서대묘, 6세기말, 남포시 강서구역, 1930년경 모사, 복제.  일반적으로 많이 볼 수 있는 호랑이의 모습과는 다르게 용이나 상서스러운 동물처럼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서쪽편 청룡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입구인 남쪽을 향해 포효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장군총을 비롯하여 초기 고구려 고분의 양식이었던 돌무지무덤 형식이 남아 있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백제 적석총.

SANYO DIGITAL CAMERA고구려 석실고분의 영향이 남아 있는 죽령 남쪽 영주 순흥읍내리벽화고분. 고구려 고분에서 볼 수 있는 벽화가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국 산동성박물관에는 한나라때 석실고분들에서 출토된 유물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고분벽화를 비롯하여 석실고분형태 등에서 고구려 석실고분들과 비슷한 점이 많아 보인다. 고구려 석실고분이 당시 교류가 많았던 한나라와 북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산동성 지역에서 출토된 석실고분 석재들. <출처:산동성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석실고분에 그려진 벽화들. 고구려 벽화와 비슷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석실고분 출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