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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박물관] 궁중음악과 무용

조선사회에서 궁중음악은 예악(禮樂)을 실천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보았다. 조선 시대 궁중음악은 조상에 제례를 올리는 종묘제례를 중심으로 한 제례음악과 조회나 연회때 연주하는 예식음악, 왕이 행차할 떄 연주하는 행차음악이 있다. 고궁박물관에는 편종,편경,특종,특경,운라, 쇠대금 등 궁중음악에 사용된 악기들을 볼 수 있다. 궁중음악에 사용된 악기는 유교사상에 근거하여 쇠, 돌, 줄, 대, 나무, 가죽, 바가지, 흙 등 만물의 기본 물질을 대표하는 8가지 재료로 만들어서 음양오행에 따라서 각 악기들을 배치한다. 음악과 더불어 춤을 추는 가무 또한 크게 중시되어 각종 의궤나 문서 등에 이와 관련된 많은 기록들이 있다. 궁중음악을 규정하는 법규에 준하는 문서로는 ‘악학궤범’을 들 수 있는데 궁중음악에 대해서 법전 수준으로 아주 세밀하게 기능과 목적, 구성 등을 기록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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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고(建鼓), 복제, 조선, 궁중음악에서 사용한 크고 화려한 북이다.

우리나라 북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정월 초하루나 동지 등 문무백관이 왕에게 하례하는 조하(朝賀)의식과 궁중잔치인 연향에 사용되었다. 전정(殿廷) 헌가에서 응고(應鼓).삭고(朔鼓)를 양편에 두고 음악을 시작할 때 삭고.응고.건고의 순서로 친다. 또 합주가 그칠 때는 건고를 세번 치고 그와 동시에 어(敔)를 세번 긁고 박(拍)을 치면 음악이 그친다. 길이가 긴 북을 가로로 놓고, 구슬을 새긴 굵은 기둥에 북통 중앙을 꿰어서 웅크린 네마리의 호랑이 모양을 한 거호(巨虎)란느 대받침에 세워져 있다. 북통 위에는 크고 작은 두 층의 네모진 뚜껑을 얹어 꽂고 푸른 휘장을 둘러치며, 네 모서리에는 용머리를 새긴 가늘고 긴 장대 모양의 용두간을 뻗치게 하였다. 용머리의 입에 구슬 달린 오색 유소를 늘어뜨리며, 정점에는 춤추듯 나는 모양을 한 해오라기가 연꽃에 선 모양이 날렵하게 조각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궁중음악
조선의 궁중음악은 유교의 예악사상에 기초하여 끊임없이 정비되고 변화되었다. 유교에서 예는 자연의 이치를 절차로 만들어 스스로 체득하게 하는 것이고, 악은 마음의 성정을 자연과 화합시키는 것으로 예와 악의 조화로 자연의 이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악은 음악과 노래와 무용을 모두 포함하는 악가무의 공연예술을 의미하며 사람을 감동시키고 풍속을 변화시키고 바르게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윤리와 도덕의식을 북돋우는 데 활용되었다. 궁중에서는 각종 의례를 행할 때마다 의례의 규모와 성격, 중요도 등에 따라 그에 맞는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같은 의례라도 시기에 따라 연주음악이 달랐다. 행사 종류에 따라 종묘.사직.문묘 등의 제례에서 연주하는 제사음악, 조회나 연회 때 연주하는 잔치.예식음악, 왕이 행차할 때 연주하는 행차음악으로 나눌 수 있다. 또 악풍의 유래에 따라 아악.당악.향악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아악과 당악은 고려 때 중국 송나라의 궁중 제사음악과 연향음악을 들여오면서 시작되었으며 이와 대비하여 우리나라 전통음악을 향악이라 하였다. 아악.당악.향악은 오랜기간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행사의 성격과 내력에 따라 고루 사용되었다. 궁중음악은 다른 나라의 음악을 수용하여 우리에 맞게 재창조하는 과정을 거쳐 더욱 풍부하고 다채로워졌다. 음악과 더불어 제례에서는 일무를, 각종 잔치에서는 정재를 추었다. 일무는 줄을 지어 추는 춤으로 군인과 궁중에 속한 남자들 중 일정한 훈련을 받은 이들이 맡았다. 조선초기에는 6줄6열의 6일무였으며 대한제국시대에는 황제국으로서 8줄 8열의 8일무를 추었다. 정재는 각종 궁중행사에서 추던 춤으로 대개 무희와 무동이 추었다. <출처:고궁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편경(編磬). 돌로 만든 악기로 온도,습도 등 환경변화에도 음정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국악기를 조율할 때 표준이 되는 악기이다. 돌은 원래 중국에서 수입했으나 조선중기부터 경기도 남양에서 그 재료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편경은 고려 1116년에 편종과 함께 들어와 궁중제례악에 사용되었다. 초기에는 재료를 중국에서 수입해서 만들었으나 조선 1425년부터 경기도 남양에서 양질의 재료를 얻었다고 전해진다. 두 개의 사각대 위에 흰 기러기 한 쌍을 앉히고 그 위에 나무틀을 세워 양편에 봉황머리를 조각하였다. 편경은 습도나 온도의 변화에도 음색과 음정이 변하지 않아 모든 국악기를 조율할 때 표준이 된다. <출처:고궁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편종(編鍾)은 궁중음악에 사용하는 대표적인 악기이다. 종의 두께에 따라 음계를 달리 하도록 만들었으며, 조선 세종때 박연이 중국 종을 개량한 것이라 한다.

편종은 고려 1116년 송나라로부터 수입되어 궁중제례악에 사용되었다. 송나라에서는 종의 크기에 따라 음계가 결정되었으나 조선에서는 박연이 크기는 같고 종의 두께 차이로 음계를 달리하도록 제작하였다. 두 개의 사각대 위에 사자 한쌍을 앉히고 그 위에 나무틀을 세워 양편에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이 틀에 16개의 종을 2단으로 나누어 매달고 뿔망치로 종 아랫면에 있는 둥근 부위를 쳐서 소리를 내었다. 12율(한 옥타브 안의 열두가지 음계)과 한 옥타브 높은 4청성의 음역을 갖는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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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特鐘)

채색과 조각으로 장식된 나무틀에 종 하나를 걸어놓은 형태의 악기이다. 종의 아랫부분 가운데에 있는 작은 원형의 돌출 부분을 뿔망치로 쳐서 연주한다. 고려시대에 송으로부터 유입되었고 조선시대에 종묘졔례악 등에 편성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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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경(特磬). 특경도 특종과 같이 큰 경 하나만 매달려 있다.

특종과 같이 한 개의 큰 경을 틀에 매단 것이다. 세종 때에는 댓돌 위에서 노랫말 없는 등가 음악을 연주하는 데 한 틀, 댓돌 아래에서 노랫말 있는 현가 음악을 연주하는 데는 아홉틀이 쓰였으나 성종 때에는 노랫말 없는 등가를 연주할 떄 황종의 특경 한 틀만이 사용되었다. 지금은 문묘와 종묘제례에서 댓돌 위에 배치하여 노랫말 없는 음악을 연주하는 데 쓰인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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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方響). 편종과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쇠로 만든 철편을 쳐서 소리를 낸다.

철향이라고도 하며 16개의 철편을 틀의 상단과 하단에 각각 8개씩 매어 놓고 뿔망치로 쳐서 소리를 낸다. 철편의 크기는 같고 두꼐가 다른데 두꺼우면 소리가 높고 얇으면 낮다. 중국 양나라때에 만들어졌다고 하며 당.송.원에서는 주로 연향악에 쓰이다가 명.청시대에는 아악에 쓰였다 하나 지금은 없어졌다. 우리나라에서는 11세기 고려 문종 때 이 악기로 당악을 연주한 이래 줄곧 당악과 고취에 편성되어 쓰였다. 음역이 노무 높고 음색이 고르지 못하고 탁하여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고 종묘제례악에 사용된다. <출처:고궁박물관>

악기의 상징성.
우리나라 악기는 천지.음양.오행의 자연 질서를 따라 조화된 자연의 음을 나타내는 것을 필수적인 조건으로 여겼다. 따라서 악기의 재료 역시 팔음이라 하여 쇠金, 돌石, 줄絲, 대竹, 나무木, 가죽革, 바가지匏, 흙土 등 만물의 기본 물질을 대표하는 여덟가지 재료로 만들었으며, 이들 팔음 재료로 만든 악기를 모두 갖추어야 완전한 음악이라 여겼다. 팔음은 여덟 가지 바람과 관련되어 악기를 불어서 천지를 아루르고 이 음악을 듣는 인간의 심성을 온화하게 하여 개인적으로는 심신을 수양하고 국가적으로는 나라의 평안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악기의 배치 역시 바가지.대나무.나무로 만든 악기는 만물이 생장하는 동쪽 방향에 놓고 쇠.돌.흙으로 만든 악기는 만물이 융축하는 서쪽 방향에 놓는다. 또 명주실은 여름에 완성되기 때문에 현악기는 여름을 상징하는 남쪽 방향에, 가죽은 겨울에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가죽으로 만든 북쪽 방향에 배치한다. 그리고 색깔을 입혀 만든 아기로서 흰 빛깔의 어는 서쪽에, 푸른 빛깔의 축은 동쪽에 놓는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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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라(雲鑼), 군악대인 취타에 많이 사용되던 악기이다. 조선후기에 주로 취타와 당악에 사용되었다. 행진할 때는 대를 왼손으로 잡고 치며 진연에서는 손잡이를 대 받침에 꽂아 놓고 친다.

구리로 만든 둥글고 납작한 동라(銅鑼) 10개를 나무틀에 매어 놓은 형태의 악기이다. 동라의 크기는 모두 같고 두께로 음정을 조절하며 두꺼울수록 높은 음이 난다. 뿔망치나 나무망치로 동라를 쳐서 연주한다. 행진할때에는 하단부의 손잡이를 들고 연주하고, 고정된 장소에서는 받침대에 세워 연주한다. 중국에서 유입되었으나 그 시기는 알 수 없다. 조선 후기 중중 연향에서 연주된 기록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어(敔).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악기이다.

어는 엎드린 호량이 모양으로 나무를 깎아 그 등에 27개의 톱니를 세운 것이다. 연주할 때는 9조각으로 갈라진 대나무 채로 먼저 호랑이 머리를 세번 치고 이어 톱니를 3번 끍어 내린다. 한국에서는 고려 1116년 중국 송나라에서 들여온 후 문묘 및 종묘제례악에서 끝남을 알리는 신호악기로 사용하였다. 흰색을 칠해서 서쪽에 배치하여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축을 푸른색으로 칠해서 동쪽에 놓는 것과 짝을 이루었다.<출처:고궁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축(柷). 축은 그 근원이 가장 오래된 악기로 유교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축은 중국 고대황제시대에 만들었다고 전하며우리나라에는 고려 1116년 송나라로부터 들여왔다. 아악과 전정헌가에 쓰였으며 등가에 쓰일 때는 따로 공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축은 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악기로 푸른색을 칠하여 동쪽에 놓고 음악의 끝남을 알리는 어는 흰색을 칠하여 서쪽에 놓는다. ‘ㅗ’모양의 막대기로 밑바닥과 좌우순서로 세번 쳤으나 오늘날에는 밑바닥만 세번 친다. 축은 어와 함께 종묘와 문묘제례악에 사용된다.<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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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고(節鼓)

절고는 음악의 마디마다 북을 쳐서 음악의 구절을 짓게 하는 북이다. 기원에 대해서는 중국 수나라에서 쓰던 것이 조선 세종 때 들어온 것이라는 설과 조선 중기에 한국에서 제작하였다는 두가지 설이 있다. 현재 문묘와 종묘제례에 쓰이며 음악 연주를 시작할 때와 끝날 때 3번씩 친다. 또 연주의 중간에서는 문묘제례악은 1소절의 끝 박에 2번씩 치고 종묘제례악에서는 대개 이 악절의 첫 박에 1번씩 친다.<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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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고(金鼓)

북의 가죽면에 ‘금고’라고 쓰여있다. 금고는 불교의식 법구의 이름으로 혼용되기도 하지만 원래는 군악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과거에는 군사활동에서 명령이나 신호를 하기 위한 장비로 주로 징과 북을 사용하였는데 징을 ‘금’, 북을 ‘고’라 하였다. ‘금은 금할 ‘금’의 뜻으로 전진이나 후퇴를금지하여 징을 치면 멈추고 ‘고’는 움직이는 신호로 북을 친면 움직였다고 한다. 이 북은 군대나 왕의 행차시 등에 사용했던 신호악기로 북통에 용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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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고(晉鼓).

‘악학궤범’에 따르면 진고는 가죽의 지름이 3척5촌3푼, 북통의 길이가 5척이나 되는 매우 큰 북으로 절고와 짝을 이룬다. 절고는 등가에 사용되는 데 반하여 진고는 현가에만 쓰인다. 현가악의 시작과 끝네 쓰며 절과 같이 음악의 매 구절마다 친다. 4개의 기둥에 가름대를 설치한 나무틀 위에 올려 놓는다.<출처:고궁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금은입사 쇠대금. 쇠대금. 쇠대금. 대금은 가로로 부는 악기로, 바람을 불어 넣는 취구, 떨림 소리를 내는 청공, 소리높낮이를 주는 6개의 지공 그리고 높은 음을 조절하는 칠성공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나각(螺角). 소라껍데기로 만든 악기로서 고려 의종 때 썼다는 기록이 보인다. 현재 태평소.징 등과 함께 대취타에 편성되고 있다.

악학궤범의 편찬
유교의 예약사상에 기초하여 교화정치를 표방한 조선 왕조는 ‘국조오례의’라는 예전, ‘경국대전’이라는 법전과 함께 ‘악학궤범’이라는 악전을 완성함으로써 유교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악학궤범’의 편찬은 세종대부터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수행된 국가의 통치 틀을 구축하는 최종적 완결을 의미하는 셈이다. ‘악학궤범’은 음악을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경우를 담은 ‘표준화된 교범’이면서 동시에 과거에 시행하였던 악제까지도 수록, 보존하는 기록적 성격까지 지닌다.’ 후대에 악재와 악기가 없어진 경우에도 이 책만 있으면 원래대로 재현할 수 있도록 내용을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고 있는데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 악기가 모두 불타버리고 악재가 훼손된 후 악학궤범에 의하여 열무와 종묘재례악을 원상으로 복구하였다. ‘악학궤범’은 성종 때 완성된 후 1610년, 1655년, 1743년에 다시 발간되었다. 현재 임진왜란 이전 판본이 일본에 소장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책은 1610년 태백산본으로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 악학궤범(樂學軌範, 복제). 1493년 왕명에 따라 성현 등이 펴낸 음악서로 궁중음악의 이론 및 제도, 법식 등을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궁중의 공연예술, 정재(呈才)
궁중에서는 왕.왕비.대비의 생일, 세자의 탄생과 책봉, 외국 사신의 영접 등 다양한 계기로 크고 작은 잔치가 거행되었다. 이때마다 빠지지 않고 공연된 것이 정재이다. 정재는 ‘재주를 바친다’는 뜻으로 음악과 노래와 춤이 어우러진 종합 공연 예술이다. 정재는 대체로 기존의 전해오는 선율에다가 새로운 노랫말과 춤을 얹는 방법으로 창작되었으며, 국왕의 장수를 기원하거나 조선왕조이 번영을 송축하는 내용이 많다. <헌선도(獻仙桃)는 한개만 먹어도 천년을 넘게 살 수 있다는 복숭아를 국왕께 올리는 내용이며, <봉래의(鳳來儀)>는 조선왕조의 개국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의 가사에 맞처 춤을 추고 노래한다. 민간에서 유행하던 연희를 궁중잔치에 활용하기도 하였는데, <선유락>이나 <검기무(劍器舞)> 등이 대표적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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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금척(夢金尺), 《신축진찬도병풍》 제8폭, 1901년

조선 태조가 임금이 되기전 꿈에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神人)으로부터 금척(金尺)을 받았다는 내용을 표현한 정재로서, 태조를 칭송하고 조선 건국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정도전이 노랫말을 짓고 1393년에 처음 악곡이 연주되었으며 정재는 세종 대에 시작된 것으로 확인된다. 금척을 포함하여 죽간자(竹竿子)와 족자(簇子), 황개(黃蓋) 등을 받든 무원(舞員)과 좌혐무(左挾舞) 및 우협무(右挾舞)를 담당한 무원, 그리고 봉황이 그려진 부채 등 여러가지 의물(儀物)을 든 무원들이 배치되는데, 조선후기에는 의물을 받든 무원이 나타나지 않는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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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락(船遊樂), 《신축진찬도병풍》 제7폭, 1901년

화려하게 장식된 배를 가운데 놓고 무원들이 둥글게 둘러 서서 추는 춤이다. 배에 앉아 있는 동기(童妓) 2인, 무용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집사기(執事妓) 2인, 채선 주변에 둘러서서 닻줄을 끌어 배를 움직이는 내무(內舞), 내무의 바깥에서 큰 원을 그리며 춤추는 외무(外舞)로 구성된다. 선유락이 궁중 정재로 등장한것은 조선후기 정조 때이며, 순조 때부터 조선 중기 문인 윤선도의 <어부사(漁父詞>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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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장(壽延長), 《신축진찬도병풍》 제7폭, 1901년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추는 춤으로 고려시대부터 전해져 오는 정재이다. 죽간자(竹竿子)를 받든 2인의 무원이 춤을 추는 8인의 무원을 인도한다. 8인의 무원은 4인씩 2대로 나뉘어 북향하여 추다가, 2인씩 4대로 나뉘어 춤추는 등 대열을 바꾸어 가며 춘다. <출처: 고궁박물관>

궁중 무용의 절차와 배치, 정재무법(呈才舞法), 조선후기
정재는 궁중의 경사스런 잔치에 추던 춤이다. 내용 중에는 39종목 정재의 방법, 배열도와 무동의 이름까지 자세히 적혀 있다. 효명세자가 창작한 정재가 대거 수록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만수무(萬壽舞), 선도(仙桃)를 바치며 추는 춤으로, 조선 순조 대에 창작된 정재이다. 효명세자가 노랫말을 지었다. 궁중 정재의 하나인 헌선도와 춤의 내용이 같다.

OLYMPUS DIGITAL CAMERA침향춘(沈香春), 침향화병의 모란꽃을 취하며 추는 춤으로, 조선 순조때 창작되었다. 침향춘이라는 제목은 봄 향기를 만끽한다는 의미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제수창(帝壽昌), 임금이 덕이 높아 상제께서 장수로 보답하여 창성하게 한다는 내용의 구호를 가진 정재로, 조선 순조 대에 창작되었다. 효명세자가 노랫말을 지었다. 수연장, 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추는 춤으로, 고려시대부터 전해져 온다. <출처: 고궁박물관>

이왕직 아악부의 설립과 활동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왕실과 관련된 업무를 수행하는 ‘이왕직(李王職)’이라는 부서를 설치하였다. 이왕직의 ‘아악대(雅樂隊)’ 또는 ‘아악부(雅樂部)’가 음악을 관장했는데, 이왕직 아악부의 역할을 크게 두가지였다. 하나는 조선왕실관 관련된 의전과 연향, 제례 등에서 음악과 무용을 담당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악인을 양성하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몰락과 함께 사직.원구.선농 등의 제례가 폐지되고 규모도 축소되면서 궁중음악은 심각한 전승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궁중음악의 전승을 위해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를 설립하고 현대식 궁중음악의 전승 교육을 시작하였다. 또한 각종 음악 서적을 출판하고, 서구식 악보인 오선보로 악보를 만들고, 빅터레코드사에서 궁중음악 음반도 제작하였다. 그리고 방송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궁중음악을 공개하고 나아가 정기적으로 공개 연주회를 여는 등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려 노력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대조전 앞 순정효황후 생일잔치 모습, 1924년 경

대조선 앞에서 열린 순종비 순정효황후의 31세 생일잔치 사진이다. 대조전 앞쪽으로 상궁들이 서 있고 월대 위에는 음악에 맞추어 포구락(抛毬樂)을 연행하고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문묘제례악 연주 모습을 담은 엽서, 20세초

이왕직 아악부 악공들이 문묘제례악에서 연주하고 있다. 문묘제례는 공자의 신위를 모신 사당에서 지내는 제사를 말하며, 석전제(釋奠祭)라고도 한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궁중음악을 녹음한 레코드판, 아악정수(雅樂精粹), 1928년

이왕직 아악부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빅터레코드사에서 궁중 음악과 정악 등의 음악을 모두 13장의 SP음반으로 발매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고궁박물관] 왕실의 행차, 가마와 의장

왕실의 행차는 국왕이 주로 궁궐밖으로 나가는 경우를 말하는데 종묘나 선농단 등에 제례를 올릴때나 왕릉을 참배할 때가 대부분이다. 왕실의 행차는 목적과 의장의 수량에 따라 크게 대가노부.법가누부.소가노부의 3종류가 있다. 국왕이 행차하는 어가행렬은 국왕이 탄 가마를 중심으로 수많은 군병이 호위를 하고 문무백관들이 따르게 하여 국왕의 위엄을 드높이고 민간에 왕실의 모습을 보여주는 기회를 갖게 한다.

고궁박물관에는 국왕의 행차에 쓰였던 왕실의 가마와 의장행렬에 사용된 각종 깃발과 상징물 등이 전시하고 있다. 조선왕조가 남겨 놓은 의궤 중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현릉원참배하고 수원화성을 머물렀던 내용을 기록한 『화성행행도병』는 당시 국왕의 행차 내용을 화려하고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행차에 사용되었던 의장들은 군대의 행렬에 사용되었던 각종 깃발들과 도끼, 칼, 창 등 각종 무기류들과 악기류, 부채 등 실용적인 것들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임금의 가마(輦), 조선, 왕이 가장 많이 사용했던 형태의 가마이다. 사림이 메고 이동하는 가마로 가까운 거리나 궁궐내에서 행차할 때 사용하는 가마이다. 근정전 앞에 볼 수 있는 답도는 이 가마가 지나가는 길이다.

조선시대 왕이 행차 시에 탔던 가마이다. 지붕이 있는 형태의 가마라고하여 유옥교라고 표기되었다. 위로 볼록하게 솟은 지붕 위에는 둥근 보주를 올리고, 네 귀퉁이 봉황머리 장식에는 고리를 달아 유소를 길게 내려 뜨렸다. 주칠을 한 사각의 몸체는 곳곳에 금니로 문양을 장식하였는데, 네 모서리에 용을 그린 둥근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에 각기둥을 둔 후 아랫부분에 난간을 돌렸다. 난간 부분에는 백택, 기린 등 상상의 동물들을 그려 넣어 화려함을 더했다. 몸체 상단의 네 면에는 주렴을 드리운 검은 휘장을 달아서 차양처럼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좌우 가마채는 두 개씩 조립해서 연결한 것으로 총 길이는 6m 가량 되며 앞뒤로 8명씩, 총 16명이 어깨에 메고 이동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왕실의 행차
조선왕실의 중요한 이동 수단이었던 가마는 크게 연(輦)과 여(輿)로 나뉘는데, 연은 지붕과 벽체가 있는 가마로 국가 의례의 거행을 위해 궐 밖으로 행차할 때 사용하였는데 타는 사람에 따라 문양과 장식 등에 차등을 두어 만들었다. 여는 궐 안팎의 차단된 공간 안에서 이동할 때 이용한 지붕과 벽체가 없는 가마로, 도성 밖 먼 길을 가야할 때에는 말을 메우는 가교(駕轎)를 사용했다. 한편 공주와 옹주를 비롯한 왕실 여성들은 덩[덕응(德應)]이라는 가마도 탔다. 왕과 왕비, 왕세자가 타는 가마로 말이 끌거나 사람이 메었고, 여는 주로 사람이 메는 가마로 보통 사람들도 탈 수 있는 가마였다. 왕실의 가마는 주로 국가 의례를 거행하기 위해 왕실 가족이 궐밖으로 행차할 때 사용하였다. 사람이 타는 가마 외에도 향정자(香亭子).채여(彩輿) 등 의물(儀物)을 운송하는 작은 가마도 있었다. 어가행렬은 목적과 의장의 수량에 따라 형식이 나뉘다. 중국의 조칙을 맞이하거나 종묘에 제사 드릴 때에는 대가노부(大駕鹵簿)를, 문소전(文昭殿) 등에 제사를 드리거나 군사를 검열할 때에는 법가노부(法駕鹵簿)를 사용했다. 소가노부(小駕鹵簿)는 능 참배 등 교외로 나아갈 때 사용하는 간단한 행렬이었다. 어가 행렬에 사용하는 의장은 크게 깃발 종류인 의장기와 그 외 여러가지 의장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의장들은 왕의 존재를 다른 이들과 차별화하고 행렬을 부각함으로써 조선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었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봉황가마

봉황문양으로 전체를 화려하게 장식한 가마이다. 지붕 및 출입문을 비롯한 가마의 네 측면을 봉황으로 장식하였고, 길이를 짧게 한 붉은 색 휘장에도 봉황을 금박하였다. 지붕은 두 단을 지어 올렸고 삼각의 단 위에는 여덟마리의 봉황을 두르고 비녀못을 끼운 보주를 올였다. 지붕의 각 면에는 구름문양을 그렸으며 네 모서리의 봉황 장식에 유소를 길게 드리웠다. 몸체는 방과 출입구 두 부분으로 나뉘며 앞면과 측면에 난 창문은 들어열개식으로 하고, 출입문은 양쪽으로 여닫게 되어 있다. 가마채는 별도의 고리를 만들어 고정하여 매도록 하였으며 끝 부분은 봉황머리로 장식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먼거리를 이동할 때 사용하는 말이 끄는 가교이다. 그 모습을 정조대왕 행차 그림에서 볼 수 있다. 앞뒤로 말의 안장에 걸쳐서 사용한다.

가교(駕轎)는 가마채를 말의 안장에 연결하여 두 마리의 말이 앞뒤에서 끌고가는 가마이다. 임금이나 왕실 웃어른의 장거리 행차 때 이용하였으며, 정조임금이 화성행차 시에 사용했던 경가교가 이것과 같은 형태였다. 주칠을 한 몸체는 여러 구획으로 나뉘어 꽃, 명찰, 바퀴, 칠부, 수자문 등 갖가지 문양으로 양각되었으며, 양 측면 아랫단은 등나무 자라로 표면을 장식하였다. 창은 겹창으로 만들었으며 미닫이형의 안장은 박쥐와 넝쿨 문장을 투각하였고 지붕에서부터 검은 비단 휘장을 내려 창문을 가렸다. 사각지붕은 곡선으로 나지막하게 솟았으며 정상에는 납작한 모양의 금색 모주로 마무리 하였다. 가마채는 별도의 고리를 마들어 고정하였고 끝부분은 용머리로 장식하였다. <출처: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여(藍輿), 조선. 고위 관리들이 사용했던 가마로 국왕도 간단한 행차때에는 사용했다. 사극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가마이다.

등받이와 팔걸이가 있는 의자를 가마채에 부착하여 만든 것이다. 고위 관료나 늙은 재상이 탔고 간편한 행차 때 국왕도 탔다. 왕실에서 쓸 경우 여(輿)라 하였으며 봉황문 등으로 장식하였다. 세워둘 때에는 받침대 위에 올려 놓았는데 이 받침대는 당시의 것 그대로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초헌(軺軒), 조선. 바퀴가 달린 높은 가마이다. 자리가 높아 권위적으로 보이는 형태이다.

사람이 끄는 외바퀴의 높은 탈 것이다. 세종 때 처음 만들어진 조선 고유의 것이다. 2품 이상의 관원이 탔으나 앉는 자리가 높게 올라가 있어 권위의 상징이었으므로 왕자와 부마도 타고 다녔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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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당 평생도 중 병조판서 행차부분, 조선. 고위관료로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가마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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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행도병 중 환어행렬도 부분, 조선, 정조가 사도세자 묘소인 현륭원에 행차했을 때 거행된 8가지 주요 행사장면을 그린 <화성행행도> 중 <환어행렬도>이다.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시행행궁에 잠시 들러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으로 조선시대 국왕의 행차모습을 화려하고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다.

1795년(정조 19) 정조가 어머니 혜궁궁 홍씨와 함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행했을 때 거행된 8가지 주요 행사장면을 그린 <화성행행도> 중 <환어행렬도>는 화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숙박을 위해 시흥행궁으로 들어가는 어가행렬을 묘사한 것이다. <환어행렬도>의 중간부분에는 ‘둑(纛)’과 ‘교룡기(交龍旗)’를 필두로 한 국왕의 행렬, 정조의 어마(御馬)와 혜경궁의 가교(駕轎) 및 이를 3중으로 호위하고 있는 군병이 묘사되어 있다. 호위군병 등 6,200여명에 달하는 인원과 1,400여 필의 말이 동원된 행렬의 장대함이 한 눈에 느껴질 정도로 탁월한 구성력을 보여준다. <출처:고궁박물관>

어가행렬의 구성

  • 도가(導駕), 어가행렬의 가장 앞에 서는 시위인원으로 왕의 거동을 준비한 관부의 책임자들로 구성된다. 당부관원, 한성판윤, 예조판서, 호조판서, 대사헌, 병조판서의 순서로 등장한다.
  • 선상군병(先廂軍兵), 국왕 행렬의 전체 호위를 맡는 군사들로 투구와 갑옷을 입고 검을 갖춘 군장차림을 하였다. 행렬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후상군병과 짝을 이루어 배열하였다.
  • 가전시위(駕前侍衛),어가 앞부분의 시위를 담당하였다. 둑과 교룡기를 내세우 국왕의 전체 행렬에 대한 통솔권을 상징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어가행렬 앞부분으로 행사를 주관하는 관원들로 구성된 도가, 둑과 교륭기를 내세우는 가전시위, 그리고 행렬호위를 맡은 군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앞쪽에 말이 끄는 가마인 가교가 있는데 아마도 정조를 위한 예비 가마로 보인다. 정조는 말을 타고 있다.

  • 의장(儀仗), 왕의 상징물로 어가 행렬에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배치하였다. 의장기와 의장물로 구성되는데 모시는 주인공의 위상에 따라 가짓수를 달리 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교룡기 뒷편으로는 취타대를 비롯하여 각종 왕의 상징물을 들고 있는 의장이 배치되어 있다. 왕실행차에 중요한 요소인 각종 의장물들의 실제 모습을 잘 보여 주는 그림이다.

  • 어연(御輦).어연시위(御輦侍衛), 왕의 가마가 등장하고, 이어 상의원, 내의원 등 왕을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들과 군사들로 이루어진 시위대이다. 어연시위의 마지막에 행렬의 총괄 부서인 병조의 표기가 등장하여 침범할 수 없는 왕의 영역을 표시한다.
  • 가후각차비(駕後各差備).수가백관(隨駕百官), 승지, 사관과 같은 왕의 측근 신하들과 어가를 따르는 종친과 문무백관들로 행렬의 뒷부분에서 왕의 가마를 수행하였다.
  • 후상군병(後廂軍兵), 앞부분의 선상군병과 함께 어가행렬의 전체 호위를 담당했던 군사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어가 행령의 중심이 되는 장면으로 정조대왕이 행렬 중앙에서 말을 타고 있으며, 그 뒤로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탄 가마가 보인다. 행렬 뒷편으로는 왕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과 군사로 이루어진 어연시위가 보인다.  뒷편으로 신하들고 후상군병들이 따르고 있다.

어가행렬의 의장
어가 행렬에 사용되는 의장에는 행차용 노부의장과 군사지휘용 형명(形名)이 있다. 의장기를 그림의 내용에 따라 분류하면 왕권을 상징하는 용을 그린 기, 사신을 그린 기, 상상의 동물을 그린 기, 팔괘 등 우주의 생성원리를 표현한 기, 해.달.별.봉우리 등 영원한 자연물을 그린 기, 문자를 쓴 기 등으로 나뉜다. 의장물에는 권력을 상징함과 동시에 군사적 성격도 갖춘 도끼.칼.창 등과 같은 것들이 있으며 그늘을 만들어 주는 등 실용적 성격을 가진 개(蓋).산(傘).부채(扇) 등이 있다. 이 외에도 어가행렬을 청각적으로 빛내 주는 나팔.북.각 등 고취악기들과 의자.먼지털이.침그릇.세숫대야.향합.향로 등 일상 용품에 속하는 것들도 있다. <출처: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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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룡깃발(交龍旗). 국왕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형깃발이다.

국왕의 지휘권을 상징하는 의장기로 용기(龍旗).용대기(龍大旗),황룡대기(黃龍大旗)라고도 한다. 어가행렬시 주로 선두 호위군사와 국왕의장 사이에 위치하여 국왕이 전체 행렬을 움직이고 통솔함을 보여준다. 3m에 이르는 이 깃발은 왼편의 <화성행행도병> 중 <환어행렬도>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행렬시 군복을 입은 장교가 말을 탄 채 받쳐 들고 4명의 군사가 깃대에 잡아맨 끈을 사방에서 한 가닥씩 잡아 당기게 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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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깃발(黃龍旗), 대한제국, 국왕이 군대를 친열할 때 각 영에 그 명령을 전달하는데 쓰인 기이다. 독(纛), 교룡기와 함께 왕의 거동 때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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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깃발(靑龍旗), 조선

대가노부.법가노부에 쓰이는 의장기이다. 군기로서는 대오방기의 하나로 좌영(左營)이나 좌위(左衛)를 지휘하였다. 푸른 바탕에 청룡과 오색의 구름 문양을 그렸고 가장자리에는 불꽃을 상징하는 붉은 테두리를 붙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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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깃발(白虎旗), 조선

대오방기의 하나로 진영의 오른편에 세워 우영(右營), 우위(右衛)를 지휘하는데 쓰였다. 흰 사각 바탕에 적색 날개를 달고 나는 백호와 청.적.황.백 네가지 색깔의 구름을 그렸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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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작깃발(朱雀旗), 조선

군기의 한가지로 대오방기에 속하며 의장기로 대가노부, 법가노부에도 쓰였다. 군대에서 주작기는 진영 중 남쪽, 즉 전영(前營)을 지키는 깃발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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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무깃발(玄武旗)

군기의 한가지로 대오방기에 속하며 후영(後營)이나 후위(後衛)를 지휘하는 데 쓰였다. 대가노부와 법가노부에서는 의장기로 쓰였다. 뱀이 휘감고 있는 거북을 그렸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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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깃발, 조선, 상서스러운 동물 중 하나인 뿔이 셋 달린 사슴을 그렸다. 국왕의 권위를 나타내는 깃발이다.

조선시대 임금이 거동할 때 군중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 사용한 의장기의 하나로 대가노부.법가노부, 소가노부 등에 사용하였다. 백색 바탕의 사각 깃발로 머리에 세 개의 뿔이 달린 말 모양과 그 들 주위로 청.적.황.백의 네 가지 색채의 구름 문양을 그렸다. 뿔이 셋 달린 삼각은 ‘선왕의 법도를 이루면 나타난다’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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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택깃발, 조선, 상서스런 동물 중 하나인 백택이 그려진 깃발이다.

조선시대 임금이 궁중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 사용한 의장기의 하나로 대가노부, 법가노부에 사용되었다. 백택은 유덕한 군왕의 치세기에 나타난다는 상상의 동물로 용머리에 푸른 머리털을 지녔고 네발로 달린다고 하며, 말을 할 줄 알고 만물을 통달하여 덕이 깊다고 여겼다. <출처: 고궃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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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깃발, 조선, 대표적인 상스러운 동물이 봉황이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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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부채와 붉은꽃부채, 조선

쌍룡부채(雙龍團扇), 원형 부채모양 의장물로 종이로 초배첩한 후 붉은 명주로 다시 배접하였다. 앞뒷면에 청룡과 황룡 두 마리를 내려오는 모습과 오르는 모습을 다양한 색상과 안료로 그렸고, 금분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한 흔적이 남아 있다. 붉은꽃 부채(紅花團扇), 둥근 부채 모양의 의장물이다. 종이로 초배접하고 붉은 명주로배접하여 가장자리에 꽃송이를 돌린 후, 두개의 동심원을 그리고 내부에 좌우로 꽃넝쿨을 그렸다. 꽃을 그린 둥근 부채는 고대 중국에서 천자가 수레에 꽃을 그린 흥화단선을 사용한 데서 유래하는데 차츰 그림을 자수로 대체한 홍단선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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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부채와 꿩깃부채, 조선

봉황부채(鳳扇), 방형의 부채모양 의장물이다. 종이로 초배접한 후 붉은 명주로 배접하고 그 위에 날아 오르는 봉황을 좌우에 그렸다. 명주로 드림을 드리웠다. 꿩깃부채(雉尾扇), 윗부분을 둥글린 아치형의 부채모양 의장물이다. 종이로 초배접한 후 붉은색 명주로 다시 배접하고 가장자리에 꿩의 고리를 그린 다음 그 안에 두 마리의 꿩과 꽃을 그렸다. 뒷면은 본래 파란색 명주 바탕에 모란을 그렸으나 모두 바래서 바탕탯이나 안료색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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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장도(金粧刀).은장도(銀粧刀), 조선

금장도와 은장도는 나무로 만든 칼을 금색과 은색으로 칠하거나 단청하고 각종 길상문을 그려 화려하게 장식한 의장물이다. 손잡이에 구름 문양을 새기고 유소를 달아 장식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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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월부(金鉞斧).은월부(銀鉞斧), 조선

금월부는 용이 도끼를 물고 있는 나무 조각을 금칠하여 봉에 꿰어 만든 의장물로, 용이 박쥐 문양으로 장식된 여러 개의 날을 세운 원통을 물고 있는 형태도 있다. 같은 형태에 은칠을 한 은월부와 함께 사용한다. 월(鉞)은 날이 한쪽에만 있는 큰 도끼이고 부는 작은 도끼이다. 특히 월은 천자가 장군을 임명할 때 수여하는 의물로서 전권을 넘겨준다는 상징적 의미로 쓰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각 깃발(角旗), 조선

군대에서 진의 네 각에 세워 군사를 정렬시키고 진영을 이루는 데 쓰인 기이다. 문양을 그리지 않고 두 가지 바탕색으로만 만들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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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 꼬리 깃발(豹尾旗), 대한제국, 군대에서 출입을 통제하는 데 쓰던 기이다. 표범의 꼬리를 앞뒷면에 그려 길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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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흑 고초 깃발(白.黑高招旗), 조선

군영에서 방위에 따라 다섯 곳에 하나씩 세워 길을 가르거나 합치는 신호로 사용했던 깃볼로 고조기(高照旗)라고도 부른다. 동서남북과 중앙 다섯 방위에 푸른색.흰색.붉은색.검은색.노란색 고초기를 달았다. 기면에는 팔괘를 그려 넣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고깃발과 영 깃발

금고깃발, 명령을 전달하는 신호로 북이나 징을 치던 취타대를 인도하는데 사용된 군기이다. 황색바탕에 검정색으로 ‘금고’ 두 자르 붙였으며 붉은색 비단으로 가장자리를 둘렀다. 영 깃발, 장수의 명령을 전달하는데 쓰던 군기이다. 가장자리가 없는 푸른 색 바탕에 붉은 색으로 ‘령 令’자를 붙였다. ‘영기’와 더불어 영전, 영표 중 한가지를 소유하여야 비로소 명령을 전달받았으며, 영내에 출입하도록 허락하였다. 만약 없으면 비록 장수가 온다 하더라도 명령을 따르지 않으며 영내에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좌독기와 좌독기드림

좌독기, 조선시대 사용된 군기로 행진할 때는 주장의 뒤에, 멈추었을 땐 장대 앞 왼편에 세웠다. 사각형의 검은 바탕에 흰색과 붉은 색 비단을 덧대어 정중앙의 태극을 중심으로 팔괘와 낙서를 표현하였다. 동.서.남.북.중앙의 오방에 해당하는 다섯가지 색의 드림을 함께 달아 사용하였다. 낙서는 중국 하나라의 우왕이 홍수를 다스릴때에, 낙수강에서 나온 거북의 등에 쓰여 있었다는 마흔 다섯개의 점으로 된 아홉개의 무늬를 일컫는다. 좌독기드림, 좌독기와 함께 달았던 기 드림이다. 기 드림은 동서남북과 중앙을 상징하도록 다섯 가지 색으로 만들었는데, 붉은 바탕의 드림은 남방을 상징하는 것이다. 기면에는 일곱 개의 원 안에 28수 중 남방의 별 자리인 정, 귀, 유, 성, 장, 익, 진을 상징하는 들개.양.노루.사슴.말.뱀.지렁이를 그려 넣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기성도병 중 평안감사 선유 부분. 서울역사박물관에 소장된 <기성도병> 가운데 평안감사가 대동강에서 선유하고 있는 장면이다. 평안감사가 탄 정자선 뒤로 좌독기와 다섯가지 색의 드림이 휘날리고 있다.

 

 

 

[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왕릉] 왕릉을 정하다.

조선왕릉의 구조는 크게 진입, 제향, 능침공간으로 나눌 수 있다. 왕릉의 공간배치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와 고려 왕릉에서 볼 수 있는 공간 배치를 계승하고 있지만 원나라 때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제향공간의 기능이 크게 중요시되는 조선 왕릉의 독자적인 모습을 갖춘다. 조선초기에선 석실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둘레석 등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세조대 이후 석실대신 회격을 사용하고, 신도비를 세우지 않는 등 간소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진입공간은 제사를 준비하고 왕릉을 관리하는 관리들이 머무는 재실, 바깥세상과 격리해하고 성역임을 알려주는 금천교와 홍살문, 왕위 절을 하는 배위 등이 있다. 제향공간은 왕릉에 제사를 올리는 공간으로 높은 월대 위해 ‘ㅈ’자형으로 건물을 올려놓은 정자각을 중심으로 홍살문과 정자각을 연결하는 참도,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수라간과 수복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자가 옆쪽에는 왕릉이 주인을 설병하는 비석이 모셔진 비각이 있다. 능침공간은 경사가 완만은 언덕에 조성된 봉분과 주위 영역을 말한다. 조선왕릉은 통일신라 왕릉에 비해 비교적 간소하면서도 단정하게 조성되어 있다. 조선왕릉에는 전대 왕릉에는 볼 수 있는 곡장이라는 담장으로 돌러싸여 있다. 봉분 주위에는 왕릉을 수호하는 상서러운 동물인 석호, 석양이 놓여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망주석, 난간석, 장명등 등의 석물이 놓여 있며, 그 앞쪽에 문인석, 문인석, 석마가 왕을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왕릉, 정하다
조선왕릉은 고려왕릉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나 조선 초기에 왕릉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독자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조선왕릉의 공간은 크게 진입과 제향, 능침영역으로 바뉜다. 재실이 있는 진입공간은 제례와 참배를 준비하기 위한 속세의 영역이다. 왕의 혼과 참배자가 만나는 제향공간은 정자각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그 뒤로는 봉분을 중심으로 한 능침 공간이 자리한다. 봉분은 매장 형태에 따라 단릉, 쌍릉, 동원이강릉 등 다양한 형식으로 조성되었다. 조선왕릉의 내부는 초기에는 석실 형태였으나 세조 광릉이후로는 회격(灰檄)구조로 조성되었으며, 의복과 명기 등 부장품도 함께 매장되었다. 조선왕릉은 『국조오례의』 등에 규정된 엄격한 예법에 따라 조성되어 큰 변화 없는 공간 구성과 상설 체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지형적 특성과 당대의 시대적 상황 다양한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면서 예외적인 요소들이 결합된 왕릉도 조성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위치한 건원릉. 조선을 건국한 이후 처음으로 조성된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은 풍수지리설을 반영하여 조성한 단릉으로 봉분, 정자각, 신도비 등으로 구성된 조성왕릉의 표준이 되었던 왕릉이라 할 수 있다

조선왕릉의 역사
능(陵)은 커다란 언덕처럼 무덤을 조성한데서 유래한 명칭으로 한나라 때 황제의 무덤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왕의 무덤을 능으로 부르며 왕실의 규범에 따라 조성하였다. 조선왕릉은 고려왕릉의 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조성되었다. 대조비 신의왕후의 제릉(1391년)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으나 태종의 즉위 이후 왕릉의 격식에 맞게 다시 조성된 왕릉으로서 조선 초기 능제를 잘 보여준다. 제릉의 왕릉 제도는 태조의 능인 건원릉(1408년)으로 이어졌다. 건원릉은 고려왕릉의 기본 구조를 바타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조형요소를 도입하였고, 이는 조선초기 왕릉 제도를 확립하는 모범이 되었다. 세종 대 와릉에 홍살문과 제기고 등이 배치되어 유교적 제례의식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으며, 조선왕릉의 석물 상설이 완성되었다. 이후 조성된 왕릉은 세조 대에 석실로 조성되던 능실을 회격으로 교체하고,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은 변화 외에 조선 초기에 완성된 큰 틀을 벗어 나지 않고 유지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국대전, 조선시대 통체체제의 바탕인 기본 법전으로, 계급에 따른 묘소의 조성원칙이 명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묘전궁릉원단묘지, 1936년

조선 왕실의 종묘와 주요 사당, 왕릉, 능원, 태실, 묘에 대한 기록으로 이왕직 예식과에서 간행되었다. 왕릉에 대한 기록은 47건. 원(園), 단(壇),묘(墓)는 13건이 수록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왕릉의 건축물
조선왕릉은 국왕이 선왕에 대한 효를 보임으로써 혈통의 정통성을 보여주는 장소였기 때문에 유교적 의례를 준비하고 시행하기 위한 건축물이 다수 건설되었다. 제례를 시행하는 공간에는 제사를 모시는 건물인 정자각, 선왕의 업적이나 이름을 새긴 비석을 보호하는 건물인 비각, 제향 시 음식을 임시로 보관하는 공간인 수라간, 능지기가 사용하는 건물인 수복방 등이 세워져 제례와 왕릉의 관리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제례에 사용되는 기물을 상시 보관하거나 왕릉을 수호하는 관리가 거주하기 위한 건축물인 재실은 홍살문 뒤쪽에 세워 사용하였다. 조선왕릉의 건축물들은 왕릉마다 큰 차이 없이 일정한 규모와 양식에 따라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간혹 독자적인 양식과 규모의 건축물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유교적 제례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재실의 규모가 점차 확장되는 양상을 보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철인왕후예릉산릉도감의궤, 1880년, 보물 1901-3호

철종비 철인왕후의 능인 예릉의 조성 과정을 기록한 의궤로 산릉도감에서 간행하였다. 왕릉의 정자각.재실.옹가.수도각 등 주요 건축물에 대한 도설과 내용이 실려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태조 건원릉 표석 탁본, 표석건립 1900년, 탁본제작, 1970년대

고종이 건원릉 신도비 옆에 세운 표석의 비문을 탁본한 것이다. 1900년 태조를 고황제로 추존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전면과 표셕 뒷면에 새긴 글은 고종의 친필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홍살문(여주 영릉). 능역의 향어로(香御路)가 시작되는 곳에 설치되어 있으며, 신성구역임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놓은 구조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자각(여주 영릉), 평면의 형태가 ‘丁’자와 닮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과 정면 1칸, 측면 2칸의 배전(拜殿)이 월대 위에 구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비각(여주 영릉), 승하한 왕과 왕비의 시호와 왕릉명을 기록한 비를 보호하는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수라간(여주 영릉), 제향시 음식을 임시 보관하는 건물로 사용한 곳이며, 내부에는 탁자 및 화로와 제기들이 진설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수복방(守僕房, 여주 영릉), 수직방이라고도 부르며, 능을 지키고 관리하는 수복이 사용하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재실(여주 영릉), 평소에는 왕릉을 관리하는 능참봉이 거주하는 곳으로, 제례를 행할 때에는 제례 준비를 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릉의 향대청에 걸었던 현판, 1756년

영조가 1756년 가을에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의 능인 명릉을 참배했던 일을 돌아보며 느낀 감회를 적은 시를 새겨 명릉 재실의 향대청에 걸었던 현판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홍릉의 재실에 걸었던 현판, 1758년

영조비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 재실에 걸었던 현판이다. 영조가 홍릉에 처음으로 거동하여 느낀 감회를 적은 글로 1758년에 정휘량의 글씨로 새긴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왕릉의 구조
초기 조선왕릉의 내부는 이전 왕릉의 조성 방식에 따라 돌로 방을 만들고 그 안에 관을 안치하는 형태인 석실 구조로 만들었다. 석실은 사후 관리가 용이한 반면 대형 석재를 구조에 맞게 제작하여 설치해야 했기 때문에 공정에 많은 기간과 인력이 소모되는 것이 단점이었다. 예종 대에 이르러 세조의 광릉을 조성하면서 유언에 따라 처음으로 회격구조를 도입하였고, 이는 후대 왕릉에도 지속적으로 적용되어 대부분의 조선왕릉은 회격구조로 조성되었다. 회격 구조는 왕의 관을 이르는 내재궁(內齋宮)을 덮는 외재궁(外齋宮)을 만들고, 그 위를 석회 혼합물인 삼물로 덮어 굳힌 후 그 옆에 다신 구덩이를 파서 관을 넣고 다시 삼물로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회격 구조는 석실 구조에 비해 인력의 소모가 덜하고 도굴의 위험성이 적은 것이 장점이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릉의 단면도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실 재궁, 20세기 전반

국장시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용도로 사용하는 관으로, 왕의 관을 재궁(齋宮)이라고 한다. 재궁은 왕의 즉위 시에 제작하여 해마다 옻칠을 더해 사용하였는데, 이 재궁은 여분으로 만들어 보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왕릉의 석물
조선왕릉의 능침 공간에는 여러 석물이 배치되어 왕릉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내었다. 봉분 주변에 각종 석물을 배치하는 것은 신라시대부터 시작되어 이어진 전통으로, 조선왕릉의 석물 제도는 고려 왕릉의 전통을 계승하여 완성되었다. 조선왕릉의 석물은 호랑이.양.말의 모습을 조각산 석수(石獸), 문인과 무인의 모습을 조각한 석인(石人), 사후 세계를 밝히기 위한 장명등(長明燈), 봉분 앞의 양쪽에 세우는 돌기둥인 망주석(望柱石) 등이 있다. 석물의 종류와 위치, 개수 등은 조선 초에 제도가 정착된 이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으나 크기와 양식은 각 왕릉의 성격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조 장릉이 석물 배치. 1) 문석인, 2) 무석인), 3) 석마, 4) 장명등, 5) 석양, 6) 석호, 7) 혼유석, 8) 망주석

OLYMPUS DIGITAL CAMERA여주 영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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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인(여주 영릉), 장명등 좌우에 위치한 공보차림의 문관의 형상을 한 석물이다. 왕명에 복종한다는 의미로 양손으로 홀을 쥐고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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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석인, 문석인 아랫단에 위치한 무관의 형상을 한 석물이다. 왕을 호위하는 의미로 갑옷을 입고 장검을 짚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석마, 문석인과 무석인 옆에 배치되어 있는 말모양의 석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장명등과 석상(여주 영릉), 장명등은 능침의 앞에 위치하는 석물이다. 명당을 오랫동안 밝힌다는 의미로 왕조의 영원성을 의미한다. 형태는 팔각 및 사각형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석상(石床, 혼유석魂遊石)은 봉분이 정면에 놓이며 혼이 나와 머물며 노니는 돌이란 의미이다. 족석(足石,고석鼓石), 그 아래에는 4~5개의 북모양의 석물인 고석이 받치고 있으며, 잡귀를 쫓는 귀면이 조각되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석양(石羊, 선릉), 봉분을 중심으로 석호와 함께 4쌍이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양은 죽은 이의 명복믈 빌며 악귀를 쫓기 위해 설치하였다. 석호(石虎, 선릉), 석호는 왕릉을 수호하는 의미로 해석되며, 석양과 함께 능침 밖을 지켜보는 형태로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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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주석(望柱石), 한쌍으로 이루어진 석물로 다람쥐 모양의 세호(細虎)가 조각되어 있는데 한쪽은 올라가고 다른 한쪽은 내려가는 형상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조 구릉지 명기, 1800년, 1) 앵(罌), 4) 주준(酒樽),

정조가 승하하고 처음에 묻혔던 구릉지에서 출토된 부장품이다. 2011년 발굴을 통해 융.건릉 동남쪽에 위치한 구릉지에서 백자 명기, 칠기함과 같은 왕실 부장품이 다수 출토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5) 주병(酒餠), 6) 잔(盞), 7), 작(爵), 8) 보(盙), 9) 궤(簋), 10) 반발(飯鉢), 11) 시접(匙楪), 12) 향로(香爐),

OLYMPUS DIGITAL CAMERA2) 정(鼎), 3) 부(釜), 13) 종(鐘), 14) 경(磬), 15)훈(壎), 16) 주칠합(朱漆盒), 17) 증옥(贈玉)

OLYMPUS DIGITAL CAMERA정조국장도감의궤, 1800년, 보물 1901-1호.

조선 22대 왕 정조의 국장 절차를 기록한 의궤로 왕릉의 부장품에 관한 내용이 자세하게 실려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대한제국의 황제릉, 홍릉과 유릉
고종은 1897년(광무1)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한 후 자신과 명성황후의 능을 황제릉으로 새롭게 조성할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 그리고 순종과 순명황후.순정황후의 유릉은 조선왕릉과는 다르게 황제릉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홍릉과 유릉은 배위(拜位)의 위치, 석물의 종류와 위치, 주요 건축물의 형태와 명칭이 기존의 왕릉과 달라졌다. 능역 주변을 담장으로 두르고 일자형의 침전을 세우는 등 황제릉의 격식을 갖추려는 노력이 반영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황제릉으로 조성한 고종과 명성황후의 홍릉. 기존의 왕릉과는 달리 정자각 대신 ‘-’자형을 지어진 침전을 두고 있으며, 그 앞에 다양한 종류의 석물들이 도열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명성황후홍릉산릉도감의궤, 1898년, 보물 1901-3호

고종비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의 조성 절차를 기록한 산릉도감의궤이다. 각종 도구와 건물의 평면도, 석물 등의 채색 도설에서 황제국으로서의 변모를 살펴볼 수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명성황후빈전혼전도감의궤, 1898년, 보물 1901-3호

고종비 명성황후 국장 당시의 빈전과 혼전에 관한 내용을 의궤이다. 각종 제구와 물품 등의 채색도설에서 황제국으로서의 변모를 살펴볼 수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유릉 천봉 만장, 1926년

순종비 순명황후의 만장으로, 수백명의 관료들이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쓴 것을 엮은 것이다. 본래 유강원에 묻혔던 순명황후를 순종 승하 후 유릉에 합장하면서 제작한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왕실 가족의 무덤, 원과 묘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였고, 왕세자 또는 왕세손과 그 배우자, 왕의 생부와 생모의 무덤을 원(園), 왕자와 공주.옹주.일반 후궁 및 폐위된 왕들의 무덤을 묘(墓)라고 불렀다. 영조는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를 소령원으로 추승하고 손자인 의소세손의 묘를 의령원으로 봉함으로써 조선왕실의 능.원.묘제도를 정립하였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는 즉위 후 아버지 장조(사도세자)의 묘를 두 차례에 걸쳐 영우원.현륭원으로 추승함으로써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파주 소령원. 영조가 생모 숙빈 최씨의 묘를 소령원으로 추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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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령원도, 1753년 경, 보물 1535호, 복제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묘소인 소령원을 그린 지도이다. 화면의 중앙에는 묘소를 배치하고 있으며 좌측에는 제청, 우측에는 비각, 아래에는 전답을 묘사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문효세자 효장원 부장품, 1786년 경.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인 문효세자의 묘소인 효창원 부장품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궁원의, 18세기 후반

사도세자의 신주를 모신 경모궁과 영우원에 관한 의식과 절차를 수록한 책으로, 2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1책에는 궁원의도설을, 2책에는 전례에 관한 절차를 담았다. <출처: 고궁박물관>

능.원.묘를 모두 가진 사도세자
영조의 아들이자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사도세자)는 1762년(영조 38) 영조의 명에 의해 뒤주에 갇혀 세상을 떠났다. 사도세자는 폐세자되었다가 사망 이후 다시 왕세자의 신분을 회복하였으며 대한제국기에 황제로 추존되면서 신분의 격하와 회복, 추승 과정 중에 무덤으로 능, 원, 묘를 모두 가지게 되었다. 영조는 사도세자의 장례를 치르면서 그의 지위를 회복시키고 현 동대문구 배봉산 자락에 묘소를 조성하였으며 이름을 수은묘라 하였다. 수은묘는 영조의 명에 따라 간소하게 만들어졌으나 1776년 정조가 즉위한 이후 개건되면서 3배의 규모로 확장되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에게 장헌세자의 존호를 올리고 묘를 원으로 올려 영우원이라 하였으며, 1789년(정조 13)에는 영우원을 현재의 화성으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하였다. 현륭원은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에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사도세자 융릉. 정조대에 현륭원으로 추승되었다가 대한제국 선포 이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사도세자 묘지, 1762년

영조가 아들인 사도세자를 위해 직접 지은 묘지이다. 사도세자의 탄생, 어머니, 세자시절, 죽음, 장례, 장지, 혼인, 자손 등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왕릉] 왕릉을 세우다.

조선왕릉은 조선의 영대 왕과 왕비, 추존왕의 무덤을 말하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선존 목조의 덕릉부터 마지막 순종의 유릉까지를 말한다. 또한 왕세자, 왕세자빈,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은 원(園)이라 부른다. 우리나라 왕릉은 삼국이 통일되던 시기에 조성된 신라 태종무열왕의 무덤에서 당나라에 영향을 받아 정형화된 왕릉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통일신라의 왕릉 제도는 고려를 거쳐 조선왕릉에서 전해졌다. 조선왕릉은 모두 완전히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왕자와 공주, 후궁들의 무덤까지 함께 보존되어 있으며, 왕릉 조성에 대한 제도와 규정 등이 국조오례의나 경국대전 등에 기록되어 있으며 조선과정과 관리 내역 또한 의궤나 능지 등 다양한 문서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조선왕릉은 유교적인 세계관과 장례전통, 풍수지리사상 등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왕릉 조성에 관한 의식과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는 점 등을 고려하여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2016년 여름 “조선왕릉, 왕실의 영혼을 담다” 제목의 특별전이 열렸다. 전시는 조선왕릉이 가지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 조선왕실의 장례의식과 왕릉의 조성절차, 왕릉을 지키고 관리하는 일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 있다. 조선왕릉은 서울 도심부터 근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곳에 자리하고 있어 손쉽게 접근하기 좋은 공간이며, 일정부분 왕릉에 대한 지식들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다시 한번 조선의 왕릉제도에 대해서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의 전시회였다.

세계유산, 조선왕릉
2009년 6월 30일,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조선의 27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 왕과 왕비의 42기 왕릉 중 북한에 있는 신의왕후 제릉과 정종 후릉을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것은 현재 대한민국에 소재한 조선 역대 왕릉 40기가 모두 남아 전해진 완전성과 조선왕실의 자연관과 세계관을 담고 있는 차별화된 진정성, 그리고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서 지녀야 할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조선왕릉이 대한민국의 문화재보호법 등 실정법에 따라 효율적으로 통합 관리되고 있다는 점도 높이 평가받았다.

OLYMPUS DIGITAL CAMERA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목릉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릉의 영원한 수호자, 문석인과 무석인 조선왕릉의 봉분 앞에는 문신과 무신의 모습을 한 석인이 영면한 왕과 왕비의 영혼을 지키고 있다.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석인은 왕릉의 가장 대표적인 석물로서, 왕과 왕비의 왕릉에는 문.무석인 각 1쌍씩 세워졌으나 사후에 추승된 경우에는 문석인만 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문석인과 무석인은 시대에 따라 크기와 양식이 변화하였다. 조선초기부터 15세기 후반까지의 석인상은 대체로 2m 50cm 정도의 크기에 다양한 표현 방식이 시도되었고, 16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석인상의 크기는 3m이상으로 거대해지면서 얼굴의 크기가 커지고 전체적인 표현방식이 단순해졌다. 18세기 이후에는 석인상의 크기가 다시 작아지면서 표현방식에 사실성이 추구되었는데, 이는 당대의 사회와 왕실의 변화상을 반영하고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릉의 위치. 조선 왕릉은 대부분 한양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왕릉의 위치는 풍수지리를 고려했지만 당대의 정치적 상황 등이 반영된 부분이 많다.

조선왕릉, 왕실의 영혼을 담다
조선왕릉은 조선의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한다. 유교적 통치 이념속에서 절대적 권위와 위엄을 지닌 신성한 존재였던 왕과 왕비가 사후에 묻히는 왕릉은 생전에 거처하던 궁궐과 마찬가지로 성역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왕릉 위치의 선정부터 건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절차는 국가의 예법에 따라 신중하고 엄격하게 진행되었으며, 완성된 이후에는 왕과 왕비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왕실 의례의 장소로서 철저하게 관리되었다. 조선왕릉은 500년 역사의 건축, 조경, 조각, 제도, 의례 등 유.무형의 요소가 이루어져 있는 공간이다. 또한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왕릉이 대부분 온전히 남아 있어 역사적 변천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데, 이러한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힘들다. 2009년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이같은 역사.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의 왕실문화와 통치철학, 국가이념의 결정체인 조선왕릉을 다양한 유물과 자료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왕실의 영혼을 담은 채 500년 역사를 지켜 온 조선왕릉의 가치가 이번 기회를 통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의 왕릉 건설은 왕은 죽은 후 장례절차와 함께 시작된다. 조선시대 국장절차는 왕이 죽은후 발인까지는 5~7개월 정도가 소요되었으며, 왕릉의 조성 또한 그 기간에 진행된다. 왕릉의 조성은 풍수지리, 관리의 용이성, 정치적인 상황과 국왕에 대한 평가 등이 반영되어 그 입지가 정해진다. 업적이 뛰어나거나 정상적으로 세자에 왕위가 계승되는 경우 등은 선왕의 의지 등이 반영되어 왕릉의 입지가 선정된다. 하지만, 국왕의 권위나 업적이 높게 평가받지 못한 경우는 왕릉조성에 용이한 선왕의 능역 부근에 왕릉이 조성되기도 한다.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던 태종, 세조, 효종, 숙종, 정조 등은 은 독자적인 능역을 형성하거나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 곳에 왕릉이 조성된다. 임진왜란 당사자인 선조의 경우 동구릉에, 병자호란 당사자인 인조는 파주에, 숙종의 능역 부근에 본인 자리를 마련해 두었던 영조도 동구릉에 자리를 잡고 있다.

조선왕릉, 세우다.
왕릉의 건설은 왕과 왕비의 장례인 국장 절차와 함께 시작되었다. 조선왕조의 국장은 최고의 예를 갖추어 치러졌으며, 각종 의례를 준비하는 임시 관청인 도감(都監)이 설치되어 관련 업무를 담당하였다. 왕과 왕비의 승하에서 발인까지는 5~7개월 정도가 걸렸으며, 이 기간 동안 왕릉의 위치 선정부터 능침과 부대시설, 석조물의 조성이 진행되었다. 왕릉의 자리는 풍수지리에 따른 길지이면서 향후 관리 및 의례 시행 등을 고려하여 도성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정하였다. 왕릉의 자리가 정해지면 즉시 왕릉의 건설 절차가 시작되었으며, 이 과정이 외부에 보이지 않도록 임시 시설물을 설치하여 엄숙하게 진행하였다. 모든 공사가 끝난 뒤 국장 절차에 따라 왕과 왕비의 관이 안치된 왕릉은 의례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이를 위해 주변의 숲까지 공간의 성격에 맞추어 조성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왕릉의 시작, 국장
조선왕조에서 왕과 왕비의 장례 절차는 국장이라 하였으며, 왕릉은 국장의 절차와 함께 만들어졌다. 나라의 가장 큰 슬픔인 국장은 민간의 장례의식에 비해 장중하고 복잡했으며, 왕실의 각종 의례 중 소요기간이 가장 길었다. 왕과 왕비가 승하하면 장례준비를 위한 임시 관청이 도감이 설치되어 관련 절차를 진행하였는데, 국장도감(國葬都監)은 관(재궁梓宮)을 왕릉에 모시는 일을, 빈전도감(殯殿都監)은 시신을 수습하여 빈소를 차리고 염습(殮襲)과 상복을 준비하는 일을, 산릉도감(山陵都監)은 능을 조성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 장례를 치른 후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는 혼전을 담당하는 혼전도감(魂殿都監)이 별도로 설치되기도 하였는데, 많은 경우 빈전도감이 혼전의 업무까지 담당하여 ‘빈전혼전도감’으로 불렸다. 국강은 왕과 왕비가 승하한 후 발인을 거쳐 재궁을 왕릉에 안치하고, 신주를 종묘에 모시면 끝났는데, 이 과정에 약 27개월 가량 걸렸으며 대략 70단계에 달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왕조의 국장 절차,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1758년』의 주요 국장절차 사진으로 본 조선의 국장

OLYMPUS DIGITAL CAMERA덕수궁 국장 화첩, 1919년.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고중의 국장 모습이다. 사진으로 조선시대 국장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1919년에 있었던 고종의 국장 장면을 흑백 사진으로 촬영하여 경성일보사에서 발간한 사진첩이다. 사진첩에는 국장에 관련된 사진들이 차례로 나열되어 있다. 사진첩의 이름에 붙은 ‘덕수궁’은 덕수궁에 기거하던 고종을 지칭하는 말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순종 국장 기념 사진첩, 1926년. 조선의 마지막 국장이라 할 수 있는 순종의 국장 사진이다.

1926년에 있었던 순종의 국장을 촬영하여 경성사진통신사에서 발행한 사진첩이다. 국장의 준비과정부터 영결식까지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국조오례의, 1475년. 성종때 제도화된 국장의 절차이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기본 의례를 길례, 가례,빈례,군례,흉례로 구분하여 전체 5권 2책으로 정리한 책이다. 국장에 대한 내용은 흉례에 속해 있으며 권7 59개조, 권8에 32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국조상례보편, 1758년. 조선후기 국장 절차를 제도화한 내용이다.

국가의 기본 예식을 정리한 『국조오례의』 중에서 상례 부분만을 따로 수정.증보한 책이다. 홍계희가 왕명에 의해 1758년(영조 34)에 간행하였으며, 이후 조선 후기 국가 상례의 준칙이 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철종국장도감의궤, 1865년, 보물 제1901-3호 철종의 국장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국장도감의궤이다.

국장의 진행 과정과 각 관청 간의 연계와 재정의 출납, 인력의 동원과 사용한 제기 및 의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철종빈전혼전도감의궤, 1865년, 보물 1901-3호

철종의 국상 중 발인 전까지 관을 모시는 빈전과 부묘 전까지 신위를 모시는 혼전에 관한 업무를 맡아보는 임시기관인 빈전혼전도감에서 준비하고 거행한 사실들을 기록한 의궤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철종예릉산릉도감의궤, 1865년, 보물 1901-3호

철종의 예릉 조성 과정을 기록한 산릉도감의궤이다. 전체 공사의 과정을 기록한 도청의궤와 실무를 담당한 각 부서의 역할이 기록된 각소의궤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순종황제애책문, 1926년경

순종황제의 승하를 애도하는 글로 민영휘가 지었다. 왕과 왕비가 승하하면 슬픔을 나타내는 글을 지어 올렸는데, 이 애책문에는 지존을 잃은 슬픔과 함께 살아 계실 때의 행적을 적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순종황제인산만장, 1926년경

순종황제의 장례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적은 만장을 모아 놓은 것이다. 만장은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글로 만사라고도 한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종옥책, 1545년

1545년(명종 즉윈년)에 승하한 인종에게 금보와 함께 제작하여 올린 옥책이다. 옥책은 8폭으로 되어 있으며, 48행에 걸쳐 인종의 덕을 기리며 묘호와 시호를 올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소병풍, 조선 빈전과 산릉 수도각,

혼전 어재실에 배치하였던 6폭 소병풍으로, 바탕면에 종이나 저포, 비단만을 바르고 그림이나 글씨로 꾸미지 않았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종금보, 1545년

1545년(명종 즉위년)에 만들어진 인종의 어보이다. 이 어보는 인종이 승하한 후 ‘인종’이라는 묘호와 ‘헌문의무 장숙흠효’라는 시호를 올리면서 만든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왕릉의 조성
조선왕릉의 조성은 국상 직후부터 임시기관인 산릉도감이 담당하여 약 5~7개월 동안 최대 15,0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하는 대공사였다.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 가장 먼저 명당을 찾아 왕릉의 자리를 찾았는데, 보통 풍수적 길지라고 할 수 있는 배산임수의 입지를 갖추었고 산이나 지형지물로 주변의 다른 시설물과 격리되고 도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를 정하였다. 그리고 같은 구역 내의 왕릉이나 바로 이전에 만들어진 왕릉 중 한 곳을 선례로 삼아 규모와 정자각의 체제, 석물의 크기 등을 맞추어 왕릉을 조성하였다. 왕릉의 조성은 석물을 제작하는 일에서부터 흙을 다지고 풀을 뽑는 일, 정자각 등의 건물을 만드는 일까지 다양했기 때문에 산릉도감은 기능과 역할에 따라 작업장을 나누어 여러 기구를 개설하여 업무를 분담하였다. 왕릉 공사에 필요한 각 관청에는 많은 수의 장인들이 동원되었다. 장인들은 17세기 초부터 백성들에게 의무를 지워 부역의 형태로 조달하였으나, 이후에는 인력을 모집하여 고용하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명릉도>, 1757년 이후.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왕릉을 그린 산릉도이다.

최고의 명당을 찾아서
왕릉의 자리는 미리 정해놓은 후보지들을 예조에 소속된 관상감의 지관들을 중심으로 풍수에 밝은 조정의 대신들이 함께 한양 주변 백 리 안팎의 여러 곳을 살펴보고 정하였다. 이를 ‘간심(看審)’이라 하며, 왕릉의 자리는 세번의 간심으로 결정하였다. 첫번째 간심에서는 10여곳 이상을 둘러본 다음 산도를 그려 검토한 후, 그 중 두세곳으로 의견이 모아지면 다시 간심을 하여 한 곳을 결정하고 다시 그곳을 세 번째 간심한 다음 확정하였다. 왕릉으 자리는 풍수지리에 따라 왕실과 국가를 번영시킬 수 있는 길지인 동시에 주변의 다른 시설물과 격리된 곳이면서 도성과 멀지 않아 후대 왕이 의례를 위해 이동하는 것이 어렵지 않아야 했다. 이러한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장소로 왕릉지를 정하였기 때문에 이전 왕릉의 근처에 새로운 능을 조성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그 결과 현재의 구리시(동구릉), 고양시(서오릉, 서삼릉), 파주시(파주 삼릉) 등에 여러 능이 가까이 모여 조성된 왕릉군이 생겨나기도 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북도각릉전도형>, 1808년 이후

함경도에 소재한 태조 4대조 능과 태조와 관련된 사적지를 그린 그림으로 산릉도 6폭, 사적지 그림 6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록된 산릉도는 6폭 모두 풍수도 형식으로 그려졌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경이물훼》중 <태조망우령가행도>, 19세기

태조가 망우령에서 자신의 능지를 살피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태조가 남재의 예비 장지터를 자신의 능지로 정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것으로, 의령 남씨 집안에 전래된 왕실 행사도를 모사한 화첩의 일부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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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중 <경기부충청도>, 18세기

1책 8장의 필사본 지도 중 경기도와 충청도를 한데 묶어 제작한 제1창 <경기부충청도>이다. 당시 조성된 왕릉의 위치가 상세히 표시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조선왕릉을 만든 사람들
조선왕릉을 만드는 업무는 산릉도감이 전담하였으며, 산릉도감은 총호사 1명, 제조 3~4명, 도청 2명 등 25명 내외의 관리로 구성되었다. 산릉도감은 토목과 건축공사, 각종 석물의 제작과 설치, 매장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기능별로 9개의 부서를 만들었다. 이중에서도 왕릉의 임시건물과 기계류 제작을 담당했던 삼물소, 정자각 등의 공사를 담당했던 조성소, 석물 제작을 담당했던 부석소에 가장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다. 조선왕릉의 공사에 필요한 장인들 중 조각 등 고급기술이 필요한 업무를 맡은 장인의 경우에는 전문성을 인정받아 많은 공사에 투입되었으며, 직업을 세습하기도 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광재 현판,

세조와 정희왕후의 왕릉인 광릉 재실에 걸려 있던 현판으로 보인다. 흑색 바탕에 음각으로 새겨 분칠을 하여 글씨를 표현하였으며, 판의 가장자리를 깎아서 테두리 장식 효과를 냈으며 뒷면 또한 음각을 하여 장식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 1800년, 보물 1901-1호

1800년 7월부터 11월 사이에 진행된 정조의 건릉 조성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공사를 진행하는 과정과 특이사항에 대한 보고 문건과 전교, 세부 물품 내역서와 공정과정 등이 포함되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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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릉도감 계회도, 1575년, 보물 901호

1575년(선조8)에 제작된 명종비 인순왕후 장례 당시 산릉도감관원의 계회도로, 권벌의 아들 동보가 당시 도감 계원으로 받아서 그의 자손에게 전례한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신정왕후수릉산릉도감의궤, 1892년, 보물 1901-3호

1890년 4월 17일 승하한 익종비 신정왕후를 수릉에 합장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1890년 5월 13일 산릉 공사를 시작하여 9월5일 안릉전을 행할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동구릉.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능인 건원릉 주변에는 많은 왕릉이 자리잡았다.

왕릉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풍수지리 등을 고려해야 하며, 많은 땅이 능역에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새로운 능역을 조성하기는 힘들었다. 왕권이 강력했던 왕이 아닌 경우는 대부분 정치적, 경제적 이유 등으로 기존 능역에 왕릉이 자리 잡았다. 봉분의 형태에 따른 조선왕릉의 형식. 왕릉은 봉분을 조성하는 형태에 따라 한사람이 매장된 하나의 봉분을 단독으로 배치한 단릉(單陵),  봉분 두 개가 나란히 배치된 쌍릉(雙陵), 두사람 이상을 하나의 봉분에 매장한 합장릉(合葬陵), 봉분이 각자 다른 언덕에 배치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봉분 두 개가 같은 언덕에 상하로 배치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봉분 세 개가 나란히 배치된 삼연릉(三連陵)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태조의 건원릉.  한사람이 매장된 하나의 봉분을 단독으로 배치한 단릉(單陵)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태종의 헌릉, 봉분 두 개가 나란히 배치된 쌍릉(雙陵)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세종의 영릉, 두사람 이상을 하나의 봉분에 매장한 합장릉(合葬陵)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세조의 광릉. 봉분이 각자 다른 언덕에 배치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가운데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효종의 영릉. 봉분 두 개가 같은 언덕에 상하로 배치된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이다.

SANYO DIGITAL CAMERA헌종의 경릉. 봉분 세 개가 나란히 배치된 삼연릉(三連陵)이다.

<출처>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고궁박물관
5. 위키백과

 

[고궁박물관 특별전,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또 한분의 왕, 어진

어진(御眞)은 국왕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로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로 국가적으로 소중하게 다루어졌다. 어진을 제작할 때는 도감을 설치하거나 담당관리를 임명하여 전체적인 일을 주관하도록 했으며, 당대 최고의 문인화가나 궁중화원들이 어진의 제작에 참여하였다. 어진은 당대 미술 중 인물화를 대표하는 걸작이라할 수 있으며, 선원전이나 영희전 같은 진전에 모셔져 특별히 관리되었다.

하지만 전쟁이나 화재 등을 피하지 못하고 실제로 남아 있는 역대 국왕의 어진은 많지 않은 편이며, 남아 있는 어진 또한 대부분 구한말에 제작된 것들이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대표적인 어진으로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 서울 창덕궁에 보관되었던 영조. 철종, 익종의 어진과 영조의 연잉군 시절 초상화 등이 남아 있다. 일반 사대부가문에서 소중히 보관했던 초상화보다 많이 남아 있지 못한 형편이다.

조선의 국왕과 어진
조선의 국왕은 하늘의 명을 받아 왕위에 오른 최고의 존재로 인식되었다. 이처럼 최고의 지위에 있는 왕의 모습을 형상화한 어진은 살아 있는 왕과 다름없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던 어진은 그것이 제작되고 봉안되는 각각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른 특별한 의미와 역할이 부여되었다. 어진은 현실 속의 국왕 자신을 대신해 돌아가신 부모님 곁을 지키는 분신으로서의 의미를 갖기도 했다. 영조와 정조는 친부모의 사당이나 묘소에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게 했는데 이는 부모님께 효를 다하고자 하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또한 어진은 살아 있는 권력자의 권위와 힘을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더욱 확고하게 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정조는 어진 봉심의례를 정하고 신하들이 이를 따르게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어진을 권력강화에 활용했으며, 고종은 역대 국왕들의 어진, 그 중에서도 태조 어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한 자신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다. 수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도 어진 제작과 진전 운영의 전통이 꾸준히 지속된 점은 조선의 국왕들에게 어진과 진전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며, 어진이 일반적인 초상화와는 다른 의미의 상징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출처: 고궁박물관>

또 한분의 왕, 어진
어진은 또 한 분의 국왕과 같은 존재였다. 어진을 옮길 때 가마를 사용하고 의장을 갖추는 등 살아 계신 왕과 다름없이 예우하였으며, 진전과 어진이 화재 등으로 없어졌을 때에는 왕과 백관, 왕실 여성들이 소복을 입고 곡을 하는 등 애도하며 진전이 있던 곳에서 위안제를 지내게 했다. 광해군과 숙종이 전란으로 소실된 진전을 재건하고 태조 어진을 봉안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나, 자신의 어진을 신하들이 정기적으로 예를 갖추어 살피도록 한 정조의 조치는 어진이 국왕 자신과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 상징물이기도 했음을 알게 해 준다. 1930년대 기록에 의하면, 창덕궁 신선원전에는 이 무렵 새로 모사된 2본의 어진을 포함해 모두 48본의 어진이 보관되어 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어진 전체가 부산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이며, 피난지에 일어난 화재로 인해 대다수가 소실되고 지금은 극히 일부의 어진만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남아 있다. 비록 소수이고 그나마 상당 부분 소실되어 제 모습을 알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남아 있는 어진과 관련 기록을 통해 조선 왕실의 어진 제작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영흥 준원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1913년 촬영)

OLYMPUS DIGITAL CAMERA태조 어진 모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 조선 1838년,

1837년(헌종 3) 9월 함경도 영흥 준원전에 도둑이 들어 어진이 심하게 훼손되자, 준원전에 있던 다른 태조 어진을 범본을 새로 어진을 제작하여 봉안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한양에서 영흥까지의 봉안행렬을 그린 반차도가 실려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태조와 원종 어진 모사를 기념하는 시를 새긴 현판, 조선 1872년

영희전의 태조 어진과 원종 어진,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새로 제작한 일을 기념하여 고종과 37명의 신료들이 읊은 시를 새긴 현판이다. 이때 태조 어진은 영희전 봉안본을 바탕으로 2본을 모사하여 각각 영희전 제1실과 경기전에 봉안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영정을 이모하여 우리나라 사람들 칭송하는데
친히 제사를 지내니 때는 천중절이라네
재계하러 하룻밤 이문원에 묵으며
신류들을 불러보고 함께 역사를 강론하네
- 고종 어제 -

우리나라도 오래된 나라로 새로운 천명을 받았는데
영정이 단정하게 전각에 임하였네
후세 임금 탄생하여 전대 임금의 법을 계승하니
하늘의 상서로운 구름 빛깔은 예나 지금이나 같네
- 원임 직제학 신 이유원 -

OLYMPUS DIGITAL CAMERA태조.원종 어진이모도감도청의궤, 조선 1872년,

영희전과 경기전의 태조 어진 및 영희전의 원종(1580~1619년, 1627년 추존) 어진이 오래되어 희미해지자 1872년(고종 9) 어진을 새로 제작하여 봉안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태조 어진은 영희전본을 바탕으로 2본을 제작하여 각각 영희전과 경기전에 봉안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태조 어진 모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 대한제국 1900년,

경운궁 선원전에 봉안하기 위해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범본으로 태조 어진을 모사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그러나 1900년에 제작된 태조 어진은 화재로 소실되고 다시 새로운 어진이 제작되어 선원전에 봉안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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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어진, 조선천, 채용신 등, 대한제국 1900년,

경운궁(덕수궁) 선원전에 봉안하기 위해 1900년에 제작된 태조 어진이다. 얼굴을 포함한 절반가량이 소실된 상태이다. 당초 준원전의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경운궁 선원전에 봉안하였으나 화재로 봉안되었던 어진이 모두 소실되어, 선원전을 새로 짓고 태조 등 일곱 임금의 어진을 다시 모사하였다. 이 어진 속의 태조는 경기전의 태조 어진과 달리 홍색 곤룡포를 입고 있으나 자세와 용상 및 채전이 형태는 경기전본과 거의 동일하다. 태조의 장년기 모습일 것으로 추정된다. 화면 우측 상단 가장자리에 ‘태조고황제어진 광무사년경자 어모’라는 표제가 적힌 붉은 비단이 붙어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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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어진, 복제, 조중묵, 박기준 등, 조선 1872년. 전주 경기전에 봉안된 태조 어진이다. 국왕을 그린 어진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태조 어진 중 얼굴 부분.

1872년(고종 9) 영희전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전주 경기전에 봉안한 어진이다. 청색 곤룡포를 입고 두손을 소매 속에 모은 정면전신상으로 바닥에는 화려한 채전이 깔려있다. 화면 우측 상단에는 ‘태조대왕어용 소자사복지구년임신 이모’, ‘태조고황제어진’이라는 표제가 적힌 비단이 붙어 있다. 앞쪽의 표제는 1872년 제작 당시에 붙인 것이고, 뒤쪽의 붉은 비단에 적힌 표제는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 태조를 황제로 추존한 뒤 1900년에 새로 써서 붙인 것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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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 어진, 김은호, 1936년, 일제강점기에 많은 초상화 작품을 남겼던 김은호의 작품이다.

이당 김은호가 그린 추존임금 원종의 어진이다. 화면의 오른쪽이 소실되었으나 얼굴과 복식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왕자군만 사용할 수 있었던 백택 흉배가 달린 흑단령에 사모를 쓰고 교의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원종은 선조의 아들이자 인조의 생부로, 1623년 인조가 반정으로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으로 추존되었고 1632년 다시 왕으로 추존되었다. 원종이라는 묘호가 올려졌다. 원종의 어진은 1872년에 이모된 뒤 1935년에 다시 모사되어 이듬해에 완료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숙종대의 어진제작과 봉안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한 수단의 하나로서 전란으로 흐트러진 진전제도를 재정비하고 어진을 제작하는 데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1688년 경기전의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한양 남별전에 봉안함으로써 창업주의 어진을 도읍과 지방에 봉안하는 체제를 회복시켰으며, 남별전에 영희전이라는 정식 이름을 부여했다. 또한 재위 중에 어진을 그리던 전통을 부활시켜, 1635년 자신의 어진을 개인적으로 제작하여 강화도와 궁궐에 보관하게 했다. 이때 숙종은 조선 전기 경복궁 선원전의 예에 따라 궁궐 내의 어진 보관처를 선원전이라 하였다. 숙종의 재위 40년을 맞은 1713년에는 전담 기구인 어용도사도감을 설치하고 각 단계별로 신하들과 상의하고 점검하며 어진을 제작했다. 그리고 국왕의 초상화를 가리키는 용어로 ‘어진(御眞)’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정하였다. 생존 시에 여러 차레 자신의 어진을 제작해 궁궐 내외의 장소에 봉안하는 전통은 숙종 대에 확립되어 영조와 정조 등 후대 왕들에 의해 계승되고 고종대까지 계속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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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잉군 초상, 조선 1714년, 보물 1491호, 젊은 시절 영조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

영조가 왕세제로 책봉되기 전인 21세 때 숙종의 명에 따라 제작된 초상화이다. 왕자군만 사용할 수 있었던 백택흉배가 부착된 녹포단령에 사모를 쓰고 호피가 깔린 교의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일반 공신상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화면 오른쪽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얼굴과 몸이 상당 부분 보전되어 있다. 화면 왼쪽 상단에 “처음에 연잉군에 책봉되었고, 호는 양성헌이다”라고 적혀있어 임금이 되기 전 연잉군 시절의 도사본임을 알 수 있다. 잠저였던 창의궁 장보각에 모셨다가 경희궁 태령전을 거쳐 1778년(정조 2)에 창덕궁 선원전으로 옮겨 모셨다. <출처: 고궁박물관>

영조.정조 대의 어진 제작과 봉안
영조와 정조는 숙종 대에 마련된 진전 운영과 어진 제작의 전통을 적극적으로 계승하여 더욱 활성화시켰다. 1735년 영조는 영희전의 세조 어진을 새로 모사하게 했으며 1748년에는 영희전을 증축하고 숙종 어진을 모사하여 영희전 제4실과 선원전에 봉안했다. 영조는 재위 기간 동안 대략 10년 주기로 자신의 어진을 제작했다. 그의 초상화는 연잉군 시절에도 그려졌으며 왕으로 즉위한 이후 총 6회에 걸쳐 어진을 도사하여 생시에 제작된 어진에 다른 국왕에 비해 현저하게 많았다. 영조의 어진은 연잉군 시절의 거처인 창의궁과 경희궁,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궁 등 궁궐 내외의 전각에 봉안되었다. 19세기 말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총 12본의 영조 어진이 궁궐 내외에 봉안되어 있었다. 정조는 영조 대의 전례를 따라 재위 기간 중 대략 10년 주기로 세 차례 어진을 도사했다. 정조의 어진은 규장각 주합루, 그리고 부친인 사도세자의 사당과 묘소에 봉안되었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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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어진, 채용신, 조석진 등, 1900년, 보물 932호, 태조 어진과 함께 가장 익숙한 왕의 초상화이다.

1744년(영조 20) 장경주 등이 도사한 육상궁 냉천정의 영조 어진을 채용신과 조석진 등이 1900년에 이모하여 제작한 어진이다. 1900년 경운궁 선원전의 화재로 어진들이 모두 소실된 후 다시 제작된 7조(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 헌종)의 어진 가운데 하나로 화면 우측에 “영조대왕 어진 광무사년경자 이모”라는 표제가 있다. 수염이 희끗한 51세때의 모습을 그린 반신상으로, 익선관을 쓰고 홍룡포를 착용하였으며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연잉군 초상 중 얼굴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영조 어진 중 얼굴부분.  나이가 들면서 변화된 모습을 보이지만 얼굴의 특징은 거의 비슷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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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조(익종) 어진, 1826년,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어진이다.

순조의 아들인 문조(1809~1830년)의 어진이다.문조는 1812년 왕세자(효명세자)에 책봉되었으며 대리청정을 하는 도중 183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한 뒤 익종으로 추존되었다. 화면 우측 상단에 “익종 돈문현무 인의효명 대왕 십팔세 어진”이라 묵서되어 있어 18세이던 1826년(순조 26)에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묵서 옆의 “문조익황제어진”이라는 표제는 대한제국기에 문조를 황제로 추존한 뒤에 첨부된 것이다. 면복을 착용하고 교의에 앉아 있는 전신상으로 왼쪽 옆얼굴이 약간 보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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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어진, 이한철, 조중묵 등, 조선 1861년, 보물 1492호,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권위가 낮았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철종이 군복을 입고 있는 어진을 남겼다는 것이 특이하다.

철종의 31세어진으로 군복을 입고 교의에 앉아 있는 모습의 전신상이다. 『어진도사사실』과 『철종실록』에 따르면 1852년과 1861년에 철종 어진이 각2본씩 도사되었으며 이 어진은 1861년(철종12) 강사포본과 함께 제작된 군복본이다. 이한철과 조중묵이 주관화사로 참여했다. 어진 우측 상단에는철종 친필로 “내 나이 31세 초상”이라고 적혀 있다. 그 옆에 “철종 희륜정극 수덕순성 문현무성 헌인영효대왕”이라는 표제는 철정 연간 이후에 적힌 묘호와 존호이다. <출처: 고궁박물관>

고종 대의 어진 제작과 봉안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한 시기에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태조 관련 유적을 정비하며, 어진 제작과 진전 건립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아관파천 이후 1897년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은 선원전을 새로 지어 경복궁 선원전의 어진들을 옮겨 봉안했다. 기존의 선원전에는 태조 어진이 봉안되어 있지 않았는데, 1900년 태조 어진을 모사하여 경운궁 선원전에 봉안했다. 그러나 화재로 인해 선원전과 어진이 모두 소실되자, 즉시 선원전을 중건하고 태조.숙종.영조.정조.순조.문조(익종).헌종 7조의 어진을 다시 제작하여 1901년에 봉안을 완료했다. 또한 그 과정에서 태조 어진을 1본 더 모사하여 새로 중건한 개성의 목청전에 봉안했다. 고종 자신의 어진은 공식적으로 두 차례 제작했는데, 1872년에는 면복본을 포함하여 5본을 제작했고 1902년에는 고종 어진 5본과 황태자(순종) 예진 6본을 제작했다. <출처: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1902년 무렵의 고종과 순종 사진

OLYMPUS DIGITAL CAMERA고종 어진과 순종 예진 도사 과정을 기록한 의궤,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1901년 9월부터 1902년 9월까지 진행되었던 고종 51세 어진과 황태자 29세 예진 제작 및 봉안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주관화사로 조석진과 안중식이 참여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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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어진, 1902년 즉위 40주년을 맞아 그린 어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얼굴부분, 20세기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사진처럼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표현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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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예진, 고종 즉위 40주년을 맞아 어진을 제작할 때 같이 그린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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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초상 사진, 이와타 카나에, 1909년경,

육군대장복 차림의 순종 초상 사진이다. 일제 통감부 시기 황실 어용사진사 역할을 했던 이와타 카나에가 촬영한 것으로 촬영시기는 1909년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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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어진, 김은호, 1928년,

순종이 승하한 뒤인 1928년에 이당 김은호가 제작한 어진이다. 익선관에 황색 곤룡포를 착용하고 교의에 앉아 있는 모습의 전신상이다. 김은호는 초상화를 그릴 때 전통적인 초상화법 대신 사진을 보고 얼굴의 윤곽과 음영을 파악하여 부드럽게 그리는 사진영상식 수법을 주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928년의 순종 어진 역시 같은 방식으로 제작하였다. 순종은 1874년 2월 고종과 명성황후의 두번째 아들로 태어나 1907년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으나 1910년 국권을 빼았긴 뒤 이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다 1926년 4월25일에 승하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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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 어진 복원모사도, 2014년,

1928년에 김은호가 그린 순종황제 어진의 소실된 복원하여 제작한 모사도이다. 유물에 남아있는 부분을 토대로 소실된 부분에 대한 디지털 복원 작업을 더해 초본을 제작하였다. 얼굴의 소실된 부분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순종 어진 초본>과 1916년 김은호가 그린 순종 어진의 흑백사진을 활용하여 복원하였고, 곤룡포의 용보는 세종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황룡포의 오조룡보를 참고하였다. 유물 자체에 대한 상태조사 결과에 더해 관련 문헌자료를 검토하여 원본과 최대한 가깝게 채색하고 장황하여 마무리하였다. <출처: 고궁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