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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목면시배 유지(사적), 문익점이 처음 목화를 재배한 곳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있는 목면시배 유지(사적)이다. 고려 공민왕 때(1363년) 중국 원나라를 사신으로 방문했던 문익점이 목화 씨앗을 붓통에 넣어 가지고 돌아온 후 장인 정천익과 함께 목화를 처음 재배한 곳이다. 문익점이 태어난 이곳 마을에는 목화를 처음 심었다고 알려진 백여평 밭에는 지금도 그의 업적을 기려 목화를 재배해 오고 있다. 유적지에는 문익점을 기리는 부민각이라는 건물과 그의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가 남아 있다.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1-20220222<산청 목면시배 유지(사적)>

목화를 재배했던 밭 옆에는 그를 기리기 위해 세운 재실처럼 보이는 ‘부민각’이라는 현판이 있는 한옥이 있으며 대청마루에는 그의 초상화를 볼 수 있다.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7-20220222<부민각>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8-20220222<부민각에 모셔진 초상화>

부민각과 목화밭 사에는 ‘문익점 효자비’를 볼 수 있다. 문익점은 모친이 돌아가신 후 묘곁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는데 당시 이곳을 침범했던 왜적이 그의 효성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이후 조정에 알려져 고려 우왕 때(1383) 그에게 표창을 내리고 마을을 ‘효자리’라 이름하도록 하였다.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9-20220222<효자비 비각>

유적지에는 이곳이 목면시배 유지임을 알려주는 2기의 비석과 그의 업적을 알려주는 기념관이 있다.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4-20220222<유적지 출입문>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5-20220222<2기의 비석>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2-20220222<전시관>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03-20220222<전시관 내부>

산청 목면시배 유지, 사적
이곳은 고려말기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다. 문익점은 공민왕 12년(1363)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면화 씨앗을 구해왔다. 그 뒤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과 함께 면화재배에 성공하였다. 면화로부터 얻어지는 포근한 솜과 질긴 무명은 옷감을 향상시켜 백성들의 의생활에 혁명적인 공헌을 하게 되었다.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출처>

  1. 안내문, 산청군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보물)

경주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효자 손시양 정려비(보물)이다. 고려중기 명종 때(1182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유교적 사회체제를 보여주는 정려비 중에서도 상당히 오래된 유물이다. 당시 동경유수가 손시양의 효행을 국왕께 보고하여 마을 정문에 정려비를 세우게 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보물)>

비석은 글자가 새겨진 비몸만 있고 받침돌과 머릿돌은 없다. 사각기둥형태의 화강석 돌기둥 앞면에는 ‘효자리(孝子里)’라고 크게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손시양의 효행내용과 비석을 세운 경위를 글자로 새겨놓았다. 비문은 당시 동경유수였던 채정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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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리(孝子里)’라는 큰 글씨가 새겨진 앞면>

경주황남리효자손시양정려비
<효행 내력과 비를 세운 경위를 적은 뒷면>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이 세워진 황남동 마을>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골목길>

경주 황남동 효자 손시양 정려비 (孝子孫時揚族間磚, 보물), 경북 경주시 황남동 240-3번지
정려비란 충신이나 효자, 열녀 등을 기리고자 그들이 살았던 고을에 세운 비를 말한다. 이 비는 고려 명종 12년 (1182)에 세워진 정려비이다. 화강암을 네모기둥 모양으로 치석한 것인데, 비몸만 있을 뿐 아래의 받침돌과 위의 머릿돌은 없다. 앞면에는 효자리(孝子里)라 쓰고, 뒷면에는 5행 130자로 손시양(孫時揚)의 효행 내용과 비를 세운 경위가 기록되어 있다. 손시양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돌아 가시자 3년씩 초막을 짓고 묘소를 지킴으로써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이 사실을 동경유수(東京留守)가 국가에 보고하자, 왕이 그 효행을 기쁘게 여겨 정문(雄門)을 만들어 주고 포상하였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일반적인 비의 형식과 달리 네모기둥 모양으로, 고려시대에 불교와 관련되지 않은 비문으로서 희귀한 자료이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4. 위키백과, 2021년

경주 남고루(사적), 고려시대에 쌓은 토루

경주에 있는 성벽으로 추정되는 유적인 남고루(南古壘)이다. 경주 대릉원 남쪽 입구에서 황오동 구분굴을 둘러싸면서 북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일제강점기 경주역을 중심으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대부분 없어지고 북천 부근 성동동 전랑지(사적 88호) 부근 성동동 24번지 부근에만 그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1936년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밑넓이 9.5m, 외벽높이 3.5m, 내벽높이 2m로 확인되었다. <고려사> 등에 경주 읍성을 축성했다는 기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경주 왕성이었던 반월성(半月城) 방어와 연계되지 않은 점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남고루(사적)>

OLYMPUS DIGITAL CAMERA<남고루 안내표지판과 비석이 있는 부분>

경주 남고루 사적17호 11-20210626
<성동동 24번지 수목제거 후 투루가 노출된 상태>

OLYMPUS DIGITAL CAMERA<경작지에서 볼 수 있는 토루를 쌓았던 큰 돌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정비계획을 알려주는 현수막>

OLYMPUS DIGITAL CAMERA<경작지로 사용되고 있는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남고루 석축을 따라 이어지는 길>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OLYMPUS DIGITAL CAMERA<남고루 북쪽을 흐르는 경주 북천(알천)>

경주 남고루(慶州 南古壘), 사적 17호
원래 남고루는 대릉원 입구에서 북동쪽으로 황오동 고분군을 감싸면서 북천(北川)까지 이르렀으나, 지금은 황오동 일대에서만 남북으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흙과 돌을 섞어 쌓은 담장같은 이 터는 언제 무엇을 하려고 만든 것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고려사>에는 고려 현종(顯宗) 3년(1012)에 전라·충청·경상 3도의 군졸을 동원하여 경주 북쪽에 돌로 제방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 남고루는 그 때 만들어져 북천의 범람을 막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청양 읍내리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충남 청양군 청양읍 읍내리에 있는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이다. 본존불과 좌.우 협시불이 각각 광배와 대좌를 두고 있는 형태의 삼존불상이다. 높이 3.1 m 본존불은 당당한 체구의 불상으로 전반적으로 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높이 2.2 m 정도의 좌.우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비슷한 얼굴 형태를 하고 있지만 크기가 작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고 있다.

청양 읍내리 석조여래삼존입상 보물 197호 01-20210414<청양 읍내리 석조여래삼존입상(보물)>

청양 읍내리 석조여래삼존입상 보물 197호 04-20210414
<본존불>

청양 읍내리 석조여래삼존입상 보물 197호 03-20210414
<좌 협시불>

청양 읍내리 석조여래삼존입상 보물 197호 05-20210414
<우 협시불>

삼층석탑과 함께 원래 읍내리 도심 절터에 있던 것을 옛 우산성 남쪽 도심공원으로 옮겨 놓았다.

청양 읍내리 석조여래삼존입상 보물 197호 02-20210414<삼층석탑과 석조여래삼존입상>

청양 읍내리 석조여래삼존입상, 보물 197호,
청양 읍내리 석조여래삼존입상은 고려시대 불상 양식에 따라 만들어진 불상이다. 석조여래삼존입상은 돌로 만든 부처가 가운데 있고 좌우로 부처나 보살이 서 있는 형태를 뜻한다. 본래 읍내리 1구에 있었으나 1961년 용암사로 옮겨왔고, 1981년에 보호각을 짓고 모셨다. 가운데 있는 본존불과 좌우에 있는 협시불은 각각 머리 뒤의 후광을 표현한 광배와 네모난 대좌가 따로 있다. 본존불의 얼굴은 마모되어 윤곽만 남아 있지만 소박한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다. 귀는 턱까지 내려 왔으며 목에는 수행의 단계를 상징하는 삼도(三道)가 표현되어 있다. 대좌는 앞면에 3개, 옆면에 2개씩 코끼리의 눈을 닳은 안상(眼象)을 새겼는데 이는 고려시대의 방식으로 보인다. 좌우 협시물의 조각 방식은 거의 같고, 몸을 약간 틀어 본존불 쪽을 향하고 있다. 왼쪽의 협시불은 섬세한 옷자락 사이로 목걸이 장식이 보이고, 옷자락은 3가닥씩 T자형으로 늘어져 있다. 오른쪽의 협시불은 왼손이 무릎까지 내려와 있다. (안내문, 청양군청, 2021년)

<출처>

  1. 안내문, 청양군청,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청양 서정리 구층석탑(보물), 고려초기 석탑

충남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에 옛 절터에 남아 있는 구층석탑(보물)이다. 높이 약 6 m로 2층 기단 위에 9층 탑신을 올려 놓고 있다. 아래층 기단에는 안상을 새겼으며, 윗층 기단은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기는 것 외 특별한 장식은 없다. 1층 탑신은 높게 만들었으며 2층부터는 낮은 높이를 하고 있다.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적인 조각수법은 평이하고 탑신이 높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은 부족해 보인다.

청양 서정리 9층석탑 보물 18호 01-20210414<청양 서정리 구층 석탑(보물)>

청양 서정리 9층석탑 보물 18호 03-20210414<기단부>

몸돌과 지붕돌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지붕돌은 완만하게 작아지는 비율을 가졌다.  1층 지붕돌 받침은 5단이며, 나머지 지붕돌 받침은 3단으로 되어 있다.

청양 서정리 9층석탑 보물 18호 04-20210414<1층 탑신>

청양 서정리 9층석탑 보물 18호 05-20210414<윗층 탑신>

청양 서정리 9층석탑 보물 18호 11-20210414
<서쪽에서 본 모습>

청양 서정리 9층석탑 보물 18호 12-20210414
<북쪽에서 본 모습>

청양 서정리 9층석탑 보물 18호 13-20210414
<동쪽에서 본 모습>

석탑이 세워진 곳에는 백곡사(白谷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청양에서 공주와 부여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 평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옛  정산현(定山縣) 읍치가 있었던 곳이다. 석탑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주요 교통로에 자라잡고 있었던 고려시대 사찰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청양 서정리 9층석탑 보물 18호 02-20210414<석탑이 남아 있는 절터>

청양 서정리 9층석탑, 보물 18호, 고려초기
고려 초기에 세워진 9층 석탑이다. 부근에 백곡사(白谷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탑 이외에 절이 있었다는 흔적은 현재 찾을 수 없다. 탑은 사각형의 2층 기단 위에 세웠는데 아래 기단의 네 면에는 2개씩의 안상(眼象) 조각이 있고, 위의 기단에는 모서리 기둥과 버팀목을 새겼다.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의 돌을 사용하였으며 지붕돌은 완만하게 작아지는 비율을 가졌고 끝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남아 있다. 1층의 지붕돌 받침은 5단이지만 2층 이상은 3단으로 되어 있으며, 상륜부는 모두 사라졌다. 전체적으로 지붕돌이 얇으며 층수가 9층이라는 점에서 안정감이 떨어지지만,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고 상하의 비례가 아릅답게 조성되는 등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의 석탑 양식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청양군청, 2021년)

<출처>

  1. 안내문, 청양군청,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