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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송광사 고려고문서(보물 572호)

순천 송광사 박물관에 소장.전시 중인 고려고문서(보물 572호) 2점이다. 송광사의 옛이름인 수선사의 창건연혁 등을 기록한 형지기와 수선사에 딸린 노비를 기록한 노비문서이다. 흔치 않은 고려시대 작성된 고문서이다. 종이에 붓으로 글을 쓴 문서로 당시의 문서양식과 필법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수선사형지기(순천 송광사 고려고문서), 고려, 보물 572호

수선사형지기는 사천대(고려시대 관청의 하나)의 관리가 기록한 문서로 수선사의 창건연혁 및 가람이 배치상황, 불상과 건물의 현상, 보조국사 비문, 승려수, 재산목록과 함께 제위보이 내용과 규모, 예식보시, 전답.시지.염전.산전의 규모, 노비의 수 등을 기록한 등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사찰의 규모와 건축 상황 및 재산상태 등을 규명하기에 좋은 자료로 상당한 규모의 가람을 갖추었던 수선사의 경제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특유의 관리문서형식을 함께 고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비문서와 함께 보물 제572호로 지정된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노비문서, 고려, 보물 572호

1281년 작성된 노비문서이다. 수선사의 주지였던 원오국사가 아버지인 양택춘으로 받은 노비를 당시 사찰에 봉안한 거란본 대장경을 관리할 수 있도록 관에서 인증한 문서이다. 세속인인 부친이 출가한 자식에게 노비를 상속한다는 내용이 담긴 이례적인 문서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순천 송광사 티베트문 법지(보물 1376호),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로부터 받은 문서

순천 송광사에 전해내려오는 고문서인 티베트문 법지(보물 1376호)이다. 송광사 원감국사가 원나라 세조 쿠빌리이로부터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내용은 문서 소지자에 대한 신분과 신분보장, 신분을 보장해줄 자들에 대한 명시와 협조요청, 문서발급자의 증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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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송광사 티베트문 법지(영인본)

순천 송광사 티베트문 법지(보물 1376호)
원본 사진(아랫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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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세 원감국사 충지(1226 ~ 1293)

송광사 16국사 중 제6대인 원감국사가 고려 충렬왕의 명을 받고 원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로부터 받아온 것이라 전해진다. 이 문서는 원나라 통치기에 불교계에 가장 높은 위치에 있던 재사가 고려에 발급하였던 문서로, 사권보호를 위한 일종의 특허증으로 보고 있다. 문서의 내용은 문서 소지자에 대한 신분과 신분보장, 신분을 보장해줄 사람에 대한 명시와 협조요청, 문서 발급자의 증명부분 등으로 나눠진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순천 송광사 혜심고신제서(국보 43호), 고려시대 송광사에 내려진 고문서

순천 송광사에 전해 내려오는 고문서인 혜심고신제서(국보 43호)이다. 고려중기 1216년(고종 2)에 송광사 제2세 진각국사 혜심에게 대선사의 호를 내린다는 내용이 적혀있는 고문서이다. 비단 7장을 이어만든 두루마리에 글씨를 쓴 것이다. 당시 공문서의 양식, 제도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혜심고진제서(국보 43호).

고려 고종이 송광사의 제2세 국사인 진각국사 혜심에게 대선사의 호를 내린다는 내용이다. 주로 국사의 학문과 덕망을 높이 찬양하는 내용으로 끝 부분에 관리의 수결이 있어 당시의 공문서나 명령서 양식을 알 수 있고, 고려시대의 선사.대선사제도를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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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제2세 국사인 진각국사 혜심의 영정이다. 보조국사 지눌의 제자로 당시 수선사의 교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출처>

  1.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충재박물관] 유물로 본 당시 사회상

충재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고문서와 전적들 중에는 당시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유물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안동지역 유지들의 모임인 우향계와 관련된 <우향계축>, 집안내 양자 입양과 관련된 문서인 <예조입안>, 자식들의 재산 분배 관련 문서인 <분재기> 등이 있다. 또한 과거제도를 엿 볼 수 있는 과거시험 답안지, 합격증, 합격자 명단을 비롯하여, 실록 편찬 모습의 일부를 보여주는 <연산군일기 세초지도>, 왕실의 장례 준비를 보여주는 <산릉도감 제명록> 등도 있다.

SANYO DIGITAL CAMERA우향계축, 보물 896호,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방자치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안동지역 유력 가문들의 모인임 우향계 관련 문서이다. 서거정이 직접 쓴 시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 13명 계원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성종 9년 1478년에 시작된 이 모임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대표적인 모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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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향계축, 보물 896화. 이런 형태의 계모임은 순수성이 있기는 하지만 고위관료 출신들이 낙향하여 지방행정에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게 흘러가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연유로해서 조선시대에는 유향소가 폐지와 설립이 반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향계축>을 통해 본 500년전의 지방 자치조직
조선은 고려와는 달리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였다. 이러한 시기, 지방수령에 대해 보좌하기도 하고 견제하기도 했던 자치조직이 유향소였다. 그러나 유향소의 성격자체가 중앙집권적 형태에 반하는 성격이 있는 등의 이유로 인해 중앙에서 폐지와 설치를 거듭하게 된다. 안동의 대표적 유가의 모임인 우향계는 유향소가 폐지된 성종9년(1478년)에 시작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서깊은 모임이다. 우향계는 자치적으로 향촌을 교화하고 상부상조했던 모임으로, 퇴임 관료와 같이 경륜있는 인물이 주축이었으므로, 중앙에서 임명된 관리라도 이들의 의견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유향소가 폐지되었을 때도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오늘날의 지방의회와도 유사한 기능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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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세초지도, 보물 901호, 실록을 편찬한 후 세초를 씻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서울 평창동 세검정에서 주로 세초를 했다고 한다. 하부에 성희안 등 연산군일기에 참여한 관원 67인의 좌목이 있다. 그림으로서의 가치보다는 당시 정치.사회상을 보여주는 문서로서의 가치가 큰 그림이다.

「연산군일기세초지도」를 통해본 객관적인 서술의 역사서 편찬의 노력
『조선왕조실록』은 이미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은 훌륭한 역사서이다. 특히, 이 『조선왕조실록』은 그 기술에 있어 공정을 기하고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편찬과정에서 공정을 기하기 위하여, 사관의 필적이 남겨진 초고를 물에 씻는 등의 방법으로 없애버려 추후 해당자에 대한 상벌을 주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반정으로 인해 왕이 아닌 군으로 강등된 군주의 시대역사 또한 『00일기』라고 하여 똑깥이 출판했다는 점은 당시 사회적 기강과 역사적 책임이 엄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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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조 입안, 보물 901호, 권씨집안의 양자 입양과 관련된 문서로 양자입양은 예조에 신고한 문서이다. 가족관계를 정부에서 인정하는 문서이며, 우리나라에 여러점이 남아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고산 윤선도가 양자로 입양된 것을 증명하는 예조입안이 유명하다.

SANYO DIGITAL CAMERA분재기, 조선 숙종때 만들어진 분재기로 자녀들의 재산상속을 정한 문서이다. 조선시대 재산상속은 조선중기까지는 자녀간 균등분배가 법전에서 규정하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장자상속으로 변했다. 이로 인해 토지가 특정인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현상이 조선후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분재기>를 통해 본 균등한 재산상속 형태
조선의 <경국대전>은 상속시, 남녀차별이 없는 철저한 평등상속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상속관행을 알 수 있는 문서가 바로 <분재기>이다. 이 분재기는 종류에 따라 <허여문기>, <화회문기>, <별급문기> 등으로 나누어진다. <허여문기>는 조상 전래의 유산이나 재주 부부의 재산을 한 묶음으로 일시에 자녀 모두에게 일정한 수량으로 나누어 준 것을 기록한 문서인데 여기에서는 자녀균분제가 원칙으로 적용되었다. <하회문기>는 부모가 재산을 나누어주기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경우에 보통 부모의 3년 상을 마친 후 나이가 어리거나 이미 사망한 경우는 적게 분배되거나 제외되는 경우도 있었다. <별급문기>는 조부모, 부모, 외조부모, 처부모 등이 내외 혈손에게 재산을 일부 나누어 준 것을 기록한 문서이다. 이 경우는 앞의 두 경우와는 달리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호구단자, 보물 901호, 숙종 16년(1690). 호적 작성을 위해 호주가 기록하여 관에 제출하던 문서이다. 오늘날의 주민등록등본에 해당하는 준호구와 동일한 내용의 효력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호패, 조선시대, 16세 상이 남성이 소지했던 신분증.

SANYO DIGITAL CAMERA복숭아 모양 은술잔, 조선시대. 은을 재료로 만들어진 복숭아 모양의 술잔. 2개 한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과거 닭실마을에서 전통혼례식에 사용되었던 물품이다.

SANYO DIGITAL CAMERA호패를 걸었던 고리와 호패.

SANYO DIGITAL CAMERA의관 혁대.

SANYO DIGITAL CAMERA서적을 발간했던 목판.

SANYO DIGITAL CAMERA충재 권벌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충재박물관.

<출처>

  1.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2. 문화재청, 2010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충재박물관] 충재 권벌의 생애 – 충재일기(보물261호), 권벌 종가 고문서(보물901호) 외

충재 권벌 종가에는 그가 생전에 남긴 많은 문서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충재일기(보물 216호)는  그가 승정원 등 중앙관직에 재직할 때 쓴 일기로 임진왜란 이전 역사를 확인해 줄 수 있는 기록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종가에서 소장한 고문서(보물 901호), 전적(보물 896호)에서는 그의 생애를 살펴볼 수 있는 각종 문서들로 과거시험지, 과거합격자 명단, 합격증, 각종 사령장 등이 포함되어 있다. 종가에는 전국 여러 종가들 중에서도 많은 고문서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박물관에 이를 잘 정리하여 공개하고 있어, 후손들이나 방문객들에게 그의 삶을 잘 살펴볼 수 있게 하고 있다.

충재 권벌은 중종 2년 문과에 급제한 이래로 사관을 비롯하여 중앙과 지방의 주요 요직을 거쳤으며 기묘사화에 화를 입기도 했으며 을사사화 때 유배되어 평안도 삭주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중기 사림의 등장시기를 대표하는 문신 중의 한명으로 후대에 많은 존경을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봉화 삼계서원에 모셔졌다.

SANYO DIGITAL CAMERA충재일기, 보물 261호, 중종 2년(1507) ~중종 13년(1518). 충재 권벌이 예문관, 승정원 등의 관직에 있을 때 쓴 자필일기이다. 임진왜란 이전에 쓴 승정원 일기등 주요 문서가 소실되어,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은 중종조의 학자이며 관료인 충재 권벌(1478∼1548)이 직접 손으로 쓴 일기이다. 권벌은 중종 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로 지내다가 기묘사화로 인해 파면당하기도 했다. 후에 다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목숨을 다하였다. 일기의 내용은 권벌의 문집인『충재집』에도 실려있으며,『중종실록』을 편찬할 때에도 기초자료의 하나로 채택되었다. 이와같이 당시 관료로서 생활의 실태와 중앙정부의 일상행사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에는『승정원일기』가 남아있어 그 상세한 기록이 있으나, 선조 이전의 것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져 유희춘의『미암일기』, 이이의『석담일기』와 함께 귀중한 사료가 된다. 더구나 뛰어난 권벌의 필체와 문장만으로도 매우 소중히 여겨지는 기록이다. (문화재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충재일기, 보물 896호, 중종 9년(1514) ~ 중종 10년(1515). 충재 권벌이 영천군수로 재직할 때 쓴 쓴 자필일기로 개인 생활과 지방관직으로 근무할 때의 사회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충재일기, 관직에 근물할 때나 재야에 있을 때 쓴 것으로, 그 높은 중요도로 인해 실록편찬시 참고되었던 것들이다.

충재선생과 사화
충재선생은 관직에 재직하면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라는 두번의 큰 사화를 겪게된다. 두번의 사화시기 충재선생은 결코 특정세력에 얽매이거나 이익을 위해 의를 버리지 않았으며, 올바른 시각으로 정국을 바로 잡고자 하였다. 기묘사화 때는 신진사림과 훈구세력간의 충돌을 중재하려다 사화에 휘말리게 되었고, 을사사화 때는 소윤일파의 불순한 전횡에 대해 비판하고,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대신들을 구명하기 위해 애쓰다 다시 화를 입게 된 것이다. 을사사화로 인해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나, 그 의로운 행동은 세상의 추앙을 받았으며, 마침내 올바른 재평가와 함께 복권 및 증직이 연이어지게 되었다.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SANYO DIGITAL CAMERA정덕2년 3월 문무잡과 방목, 보물 896호, 중종2년(1507). 문과.무과.잡과 세 개과의 합격자 명단을 적은 것이다. 을해자본으로 인쇄된 서적 중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판본이라 한다.

SANYO DIGITAL CAMERA시권, 보물 901호, 당시 충재선생이 과거시험에 제출했던 답안지라고 하며, 당시에는 과거응시자에게 답안지를 돌려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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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패, 보물 901호, 중종 2년(1507), 과거의 최종합격자에게 내어주던 증서, 충재선생이 조선 중종 2년 별시문과에 병과 제이등으로 합격한 하사받음.

SANYO DIGITAL CAMERA교지, 보물 901호,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주던 사행문서.충재선생 관직 이동시 받은 사령장이다.

SANYO DIGITAL CAMERA 교지, 보물 901호,

SANYO DIGITAL CAMERA유서, 보믈 901호, 중종33년(1538), 관찰사, 절도사 등의 부임시, 징병할 수 있는 밀부를 내리는 국왕의 명령서, 중종이 경상감사인 충재선생에게 특권을 부여하면서 내린 유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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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 보물 901호, 중종 34년(1539). 승정원을 통해 발급된 왕의 명령서이다. 중종34년 충재 권벌이 개종계주청사(사신)로 명나라를 방문할 때 받은 유지이다.

SANYO DIGITAL CAMERA광국원종공신녹권, 보물 896호, 선조 24년(1591). 나라에서 공신으로 인정한다는 증서. 선조 24년(1591) 국가에 이바지한 공으로 인해 충재선생에게 내린 녹권. 충재선생 사후 43년만의 일이다.

SANYO DIGITAL CAMERA교지, 보물 901호, 선조 24년(1591), 그의 사후 선조때 영의정에 추증한다는 왕의 명령서인 교지이다.

SANYO DIGITAL CAMERA교지, 보물901호, 선조 1년(1568). 그의 사후 부인인 최씨에게 남편의 직에 따라 정경부인으로 증직하는 교지이다.

충재 권벌선생의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중허, 호는 추쟁.환정, 시호는 충정이다. 연산군2년(1476)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2년(1507)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과 삼사 및 승정원과 각 조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쳤다. 고위 관직에 재직할 때는 대의를 위해서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의 화를 연이어 입었다. 특히 을사사화 때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홀로 충순당의 문정왕후에게 나아가 윤원형을 위시한 소윤 일파의 전횡과 무고하게 화를 입은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의 삼대신을 구하는 논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당시 올린 ‘충순당입대계사’와 ‘논구삼신계’는 그 내용이 너무도 충직하여 후세에 두고두고 회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별세하였다. 선조 때 억울함이 풀어져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봉화의 삼계서원에 모셔져 있다.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출처>

  1. 안내문, 충재박물관, 2010년
  2. 문화재청, 2010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