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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고문서(국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고문서(국보)’이다. 이 문서는 고려 공양왕 때(1390년) 함경도 화령부에서 작성한 호적문서이다. 화령부는 지금의 함경동 영흥을 말한다. 고려시대 양반의 호적은 3년에 한번씩 2부를 작성하는데 1부는 관아에서 보관하고, 나머지는 개인 보관한다. 이 문서는 태조 이성계가 보관했던 문서로 준원전(濬源殿)에 대대로 보관해 왔다. 내용은 이성계의 관직과 식봉, 동거하는 자식, 형제, 사위와 노비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호적제도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이성계 노비의 호적이 들어 있는 문서, 고려말 화령부 호적 관련 문서, 국보>

고려 공양왕2년(1390). 조선 건국 직전인 고려 공양왕2년(1390)에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 화령(지금의 영흥)에서 작성된 문서이다. 이성계의 노비 및 이성계와의 관계가 확실하지 않은 40호의 호적이 포함되어 있다. 준원전(濬源殿)에 대대로 보관되다가 일제강점기에 서울로 옮겨왔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국보)

충남 아산시 염치읍 현충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국보)이다. <난중일기>로 잘 알려진 이책은 임진왜란 (1592~1596) 때에 이순신이 친필로 작성한 일기로 현충사에 7권이 남아 있다. <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초본으로, 수군 통제에 관한 군사비책과 전황을 보고한 장계의 초안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7년 동안 왜적과 싸우면서 계속하여 쓴 것으로 당시 전황 및 군사제도 등을 알 수 있는 자료로도 가치가 높다.

OLYMPUS DIGITAL CAMERA<이충무공 난중일기, 조선 16세기, 국보의 영인본(1969년)>

<난중일기> 중에서,임진년 6월5일
아침에 출발하여 고성 당황포에 이르니, 왜선 한 척이 크가가 판옥선 같았는데, 배 위에 누각이 높았고 그 위에 적장이 앉아 있었다. 중간 배가 12척이고 작은 배가 20척이었다. 한꺼번에 쳐서 깨트리려고 비 오듯 화살을 쏘아대니,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왜장 7명의 머리를 베었고 나마지 왜병들은 육지로 내려가 달아났지만, 나머지 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우리 군사의 기세를 크게 떨쳤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0년)

임진왜란 (1592~1596) 때에 이순신이 친필로 작성한 일기로 현충사에 7권이 남아 있다. 이 일기는 <충무공전서>에 수록된 <난중일기>의 초본으로, 수군 통제에 관한 군사비책과 전황을 보고한 장계의 초안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어 임진왜란의 전황 및 당시 군사제도 등을 알 수 있는 자료로도 가칙 높다. 전시된 책은 <난중일기> 초본을 1969년에 축소 영인한 것이다. 전시된 책은 <난중일기> 초본을 1969년 충무공기념사업회에서 축소 영인한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0년)

OLYMPUS DIGITAL CAMERA<난중일기, 국보의 영인본, 여수 진남관>

서간첩은 이순신장군이 친척들에게 친필로 보낸 편지를 수집하여 만든 책이다. 크기는 세로 33 cm, 가로 44 cm로 글씨는 한문 초서로 쓰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간첩, 국보의 영인본, 여수 진남관>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2년
  3. 안내문, 여수 진남관, 2012년

 

훈민정음(訓民正音, 국보)

서울 성북구 성복동 간송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訓民正音, 국보)이다. 세종 때(1446년) 한글을 창제한 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저술한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은 ‘훈민정음’이며,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혜례본’ 또는 ‘훈민정음 원본’이하 한다. 총 33장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훈민정음 본분을, 2부는 훈민정음 혜례를, 3부는 정인지의 서문이 실려 있다. 끝에 1446년에 반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보 70호인 이 책은 간송미술간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일반에는 잘 공개하지 않고 있다. 원본은 간송미술간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일반에는 잘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복제본을 통해 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훈민정음》이 이루어지다. 어제와 예조 판서 정인지의 서문
이달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이루어졌다. 어제(御製)에,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 <생략> ~ 대체로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 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만물의 뜻을 깨달아 모든 일을 이루는 큰 지혜는 대개 오늘날에 기다리고 있을 것인져.”
하였다.  (세종실록 113권, 세종 28년 9월 29일 갑오 4번째기사 1446년 명 정통(正統) 11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OLYMPUS DIGITAL CAMERA<훈민정음을 풀이한 책, 훈민정음訓民正音, 국보70호, 세종28년(1446), 복제품,

조선시대의 가장 획기적인 발명은 한글이었다. 표의문자인 한자대신 우리말을 소리대로 표현할 수 있는 우리 글자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세종대 집현전을 중심으로 언어와 문자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세종25년(1443)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이어 3년 뒤에는 이를 해설한 책 <훈민정음 해례본 訓民正音 解例本>을 반포하였다. 훈민정음 초성의 기본자음인 ‘ㄱ,ㄴ,ㅅ,ㅁ,ㅇ’은 ‘혀,치아,입술,목구멍’ 등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 떠 만들었고, 중성인 ‘·,ㅡ,ㅣ’는 각각 ‘하늘과 땅, 사람’ 삼재三才의 모양을 본 떠서 만든 세 글자를 기본으로 하였다. 초성과 중성 모두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하여 글자를 만들어, 음양오행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훈민정음은 그 원리와 조직이 과학적이고 어떤 소리든 원형에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점이 특징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세종28년(1446) 백성에게 반포한 책이다. 세종이 지은 서문에 이어, 해석과 쓰임법인 용례用例, 정인지鄭麟趾(1396~1478)의 해례解例 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책 이름은 ‘훈민정음’이며, 해석과 용례가 함께 있는 것이 특징이므로 보통 ‘해례본’이라고 부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3. 조선왕조실록,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진충귀 개국원종공신 녹권(보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진충귀 개국원종공신 녹권(보물)이다. 조선 태조 때(1395년) 의주목사를 지낸 진충귀에게 발급한 공신 녹권이다.  적혀있는 공신의 수는 106명이며, 끝에는 녹권을 발급하는데 관련된 임원 15명의 직위와 이름이 적혀 있다.

진충귀 녹권(보물) 20210512_01<진충귀개국원종공신녹권, 보물, 조선 1395년(태조 4), 종이에 먹>

진충귀 녹권(보물) 20210512_02<앞부분>

공신을 인정하는 증서
이 녹권은 의주목사를 지낸 진충귀에게 발급한 것으로 가로 634cm에 이른다. 진충귀에게 논밭과 노비를 하사하고 그의 부모와 처에게 작위를 내리며, 자손에게는 과거를 보지 않고 벼슬에 오를 수 있게 해주고, 비를 세워 공로를 기록하는 등의 예우를 확인할 수 있다. 책의 끝머리에는 공신도감, 이조 등 녹권을 발급하는데 관련된 임원 15명의 직위와 이름이 적혀 있고, 10명의 이름 밑에 수결(서명)이 있다. 공신에게는 각각 밭 30결, 노비 3명을 상으로 주고, 부모와 처에게도 작위를 내리도록 하며, 그 자손들에게는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벼슬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교시를 내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2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순천 송광사 고려고문서(보물)

순천 송광사 박물관에 소장.전시 중인 고려고문서(보물) 2점이다. 송광사의 옛이름인 수선사의 창건연혁 등을 기록한 형지기와 수선사에 딸린 노비를 기록한 노비문서이다. 흔치 않은 고려시대 작성된 고문서이다. 종이에 붓으로 글을 쓴 문서로 당시의 문서양식과 필법 등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수선사형지기(순천 송광사 고려고문서), 고려, 보물

수선사형지기는 사천대(고려시대 관청의 하나)의 관리가 기록한 문서로 수선사의 창건연혁 및 가람이 배치상황, 불상과 건물의 현상, 보조국사 비문, 승려수, 재산목록과 함께 제위보이 내용과 규모, 예식보시, 전답.시지.염전.산전의 규모, 노비의 수 등을 기록한 등본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사찰의 규모와 건축 상황 및 재산상태 등을 규명하기에 좋은 자료로 상당한 규모의 가람을 갖추었던 수선사의 경제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특유의 관리문서형식을 함께 고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비문서와 함께 보물 제572호로 지정된 귀중한 자료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OLYMPUS DIGITAL CAMERA노비문서, 고려, 보물 572호

1281년 작성된 노비문서이다. 수선사의 주지였던 원오국사가 아버지인 양택춘으로 받은 노비를 당시 사찰에 봉안한 거란본 대장경을 관리할 수 있도록 관에서 인증한 문서이다. 세속인인 부친이 출가한 자식에게 노비를 상속한다는 내용이 담긴 이례적인 문서이다.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출처>

  1. 안내문, 송광사박물관, 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