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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대릉원(사적) 금령총

경북 경주시 노동동에 있는 경주 대릉원 127호 무덤인 금령총(金鈴塚)이다.  1924년 일본인 우메하라가 발굴 조사 하였다. 무덤은 바닥에 돌을 깔고 그 위에 널을 만들고 돌과 흙을 쌓아서 봉분을 만든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신라 황금문화의 전성기였던 마립간 시기 중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많은 껴묻거리들이 출토되었다. 발굴,조사 이전에 봉분은 크게 훼손되었으며 바닥지름 18 m, 높이 4.5 m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껴묻거리 중에 금제 방울이 있어 ‘금령총’이라 불린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사적) 금령총>

OLYMPUS DIGITAL CAMERA<동남쪽에서 본 모습>

이 무덤에 묻힌 사람은 신라의 왕자로 추정되고 있으며, 무덤의 주인공을 묘사한 도제기마인물상에서는 사후 세계로 떠나는 쓸쓸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출토 유물로는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국보), 금관(보물), 금제방울, 유리잔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령총(金鈴塚) 방울, 금>

금령총 금관(보물)은 과 신라 금관 중에서 가장 작고 간단한 형식을 하고 있다. 가운데에 ‘山’자모영이 4단으로 연결된 세움장식이 있고 양쪽에 사슴뿔 모양 장식이 달려 있다. 관테와 가지에는 나뭇잎모양의 원판을 달아 장식했다. 관테 좌우에는 귀고리 형태의 드리개로 장식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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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령총 금관(보물)>

OLYMPUS DIGITAL CAMERA<금제 허리띠>

 도기 기마인물형 명기(明器, 국보)는 말을 타고 먼 여행을 떠나는 주인과 하인을 모습을 하고 있는데 죽은이의 영혼이 저세상으로 떠나는 모습을 잘 표현하고 이다. 두꺼운 사각형 판위에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인데 엉덩이 위에 등잔이 있고, 앞 가슴에는 물을 따를 수 있는 긴 대롱이 있고 속은 비어 있다. 신라사람들을 사후세계관, 복식, 말갖춤 등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사람의 표정 등이 잘 표현되어 있다.

국보91호01-20200212 <말탄사람토기(주인), 국보,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금령총>

국보91호03-20200212 <말탄사람 토기(하인), 국보,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금령총>

금령총에서는 등잔과 배모양 토기도 같이 출토되었다.  배는 영혼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옮기는 수단으로 여겼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저승으로 나오는 5개의 강에 있는 배와 뱃사공 카론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며, 중앙아시아 지역과의 교류 등을 통해 비슷한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통해 서역의 사후관에 영향을 받은 유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배모양 토기>

OLYMPUS DIGITAL CAMERA<등잔>

OLYMPUS DIGITAL CAMERA<잔>

OLYMPUS DIGITAL CAMERA<유리잔>

OLYMPUS DIGITAL CAMERA<부리달린 단지>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사적) 노동동 고분군>

경주-대릉원-호우총-09-20220129 <경주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 주요 무덤들>

<출처>

  1.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경주 대릉원(사적) 금관총, 일제강점기 신라 금관이 처음 발견된 곳

경북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경주 대릉원 128호 무덤인 금관총(金冠塚)이다. 1921년 경주 도심에서 주택공사를 하던 중 금관이 우연히 발견되어 신라고분의 존재를 알렸던 곳이다. 금관총은 돌무지덧널무덤으로 길이 48 m, 높이 13 m 규모로 대릉원 고분 중 중간 정도이다.  금관 및 금제관식(국보)과 금제 허리띠(국보)를 귀걸이.팔찌 등 장신구와 토기류 등 다양한 종류의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2015년에는 금관총에 대한 발굴조사가 다시 실시되어 ‘이사지왕도(尒斯智王刀)’라는 명문이 새겨진 칼집 끝 장식을 비롯한 새로운 부장품이 발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 금관총>

금관총은 일제강점기 발굴 당시부터 주택 등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봉분은 원형이 파괴되어 있었다. 지금도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금관총임을 인식하기는 쉽지 않고 단순한 공원 조경으로 보인다. 현재는 봉분의 일부만 남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금관총은 내부에 목곽을 만들고 그 안에 시신을 넣은 목관을 안치 했다. 목관은 옻칠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목관 주위에는 덩이쇠가 열을 지어 있 큰칼 등의 무기가, 안쪽에는 신발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내부에는 많은 유무들이 출토되었는데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목걸이, 금제 허리띠, 팔찌, 금반지 등으로 치장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작성한 조사보고서에 그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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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총 목관 내 출토된 유물>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 목관(棺) 내 유물 배치>

OLYMPUS DIGITAL CAMERA<일제강점기에서 작성된 보고서 자료>

금관총 금관은 신라 금관 중 가장 먼저 발견된 유물이다. 가운데에 ‘出’자(또는 나뭇가지 모양)과 양쪽에 사슴뿔모양의 장식이 있는 전형적인 신라금관이다. 장식의 앞면에는 133개의 달개와 57개의 곱은옥이 달려 있다. 세움 장식의 가장자리에는 한 주의 연속 점무늬, 관테에는 파도무늬가 새겨져 있다. 사슴뿔과 나무가지를 형상화한 시베리아 샤먼의 관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 금관(국보)>

가슴걸이는 금관과 같이 출토되고 있는데 구슬로 가슴부분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슴걸이>

금관총 금제 허리띠(국보)는 금관과 하나의 세트를 구성하고 있는 유물이다. 원래 천이나 가죽에 덧대었던 것인데 금속제 장식만 남아 있으며, 드리개는 허리띠에 늘어뜨린 장식품을 말한다. 허리띠는 길이 109 cm로 39개의 순금제 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드리개는 17개로 옥(玉)같은 장식품과 칼, 향낭, 물고기 등을 표현하고 있다. 드리개는 유목민들이 이동할 때 허리띠에 매고 다녔던 생활도구들을 표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 금제 허리띠(국보)>

OLYMPUS DIGITAL CAMERA<굵은고리 귀걸이, 금>

OLYMPUS DIGITAL CAMERA<팔찌, 금>

OLYMPUS DIGITAL CAMERA<팔찌와 반지, 금>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신발>

OLYMPUS DIGITAL CAMERA<곱은옥>

머리 윗쪽에 부장품 상자 속에는 각종 그릇, 장식품, 말갖춤, 무기 등이 껴묻거리로 묻어두고 있다. 중요 출토유물로는 새모양 관꾸미개와 관모(국보), 초두, ‘尒斯智王(이사지왕)’ 글자가 새겨진 큰칼, 유리잔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부장품 상자 속에서 출토된 유물>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들었으며 모자 위로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관모는 얇은 금판을 오려서 만든 세모꼴 모자로 위에 두 갈래로 된 긴 새날개 모양 장식을 꽂아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 관모(국보)>

금제관식(국보)은 관모 위에 꽂아서 사용한 새날개 모양 장식이다. 이 장식은 삼국시대 신앙을 반영한 것으로 샤머니즘과 관련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의 화려한 황금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금제관식(국보)>

OLYMPUS DIGITAL CAMERA<고리자루큰칼>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금관총 출토 유물을 정리하던 중 고리자루 큰칼의 칼집 끝에서 날카로운 도구로 새겨 쓴 글자를 확인하였다. 판독결과 ‘尒斯智王(이사지왕)’이라는 글자였다. 또 칼 손잡이 부근에서 ‘尒(이)’자와 이사지왕이 새겨진 칼집 끝 뒷면에서도 ‘十(십)’자가 드러났다. 금관총의 또 다른 칼에서도 ‘八’, ‘十’, ‘尒’라는 글자가 추가로 발견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리자루칼에 글자가 새겨진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초두(鐎斗), 청동>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뿔잔>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신발>

OLYMPUS DIGITAL CAMERA<청동제 방울>

OLYMPUS DIGITAL CAMERA<투구 복발, 방울, 팔가리개 비갑(臂甲)>

OLYMPUS DIGITAL CAMERA<금제 장식구, 금동제 장식구>

OLYMPUS DIGITAL CAMERA<솟을장식, 말띠꾸미개>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 고배, 금동제 합, 유리제 용기, 금제 완>

OLYMPUS DIGITAL CAMERA<가는 고리귀걸이, 금>

OLYMPUS DIGITAL CAMERA<유리잔>

OLYMPUS DIGITAL CAMERA<장군>

네귀달린 청동항아리는 고구려에서 보내온 것을 추정되는 유물로 무덤 주인이 고구려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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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귀달린 항아리, 청동>

OLYMPUS DIGITAL CAMERA<청동완>

OLYMPUS DIGITAL CAMERA<뚜껑접시, 토제>

OLYMPUS DIGITAL CAMERA<짧은목 항아리, 토제>

금관총의 발견과 신라 고분 조사
우리나라에서 근대 고고학 조사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인 연구자는 신라 고분을 여러 번 조사하였으나 돌무지덧널무덤의 복잡한 구조를 이해하지 못해 제대로 조사하지 못했다. 그들은 공사도중 우연히 발견된 금관총으로 인해 신라고분에는 화려한 유물이 묻혀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연속해서 금령총(1924), 식리총(1924), 서봉총(1926) 등을 발굴하였다. 이러한 조사와 연구는 조선총독부가 주관하였고 일본인이 담당했다. 당시 금관총의 조사와 연구는 교토제국대학 하마다 고사쿠 교수가 주도하고 우메하라 스에지, 고이즈미 아키오, 사와 슌이치 등이 참여했다. 현재 일본 교토대학에 보관중인 보고서 원고와 사진 자료는 당시 금관총에 대한 관심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14년)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 발굴 보고서, 일본 교토대학교, 1924년, 1927년>

OLYMPUS DIGITAL CAMERA<발굴당시 금관총 금관 사진>

OLYMPUS DIGITAL CAMERA<발굴당시 금관총>

봉황대에서 금관총을 바라보다’, 일제강점기(1924년)에 일본이 그린 금관총과 주변 풍경이다. 금관총이 위치한 노서동 일대는 경주 도심 주택가로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일제강점기 금관총을 그린 그림>

금관총은 5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신라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 9월에 가옥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고분이 노출되어 긴급하게 수습 조사가 이루어졌다. 수습 조사 결과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화려한 금관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출토되어 ‘금관총’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2015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하여 정식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이사지왕도(尒斯智王刀)’라는 명문이 새겨진 칼집 끝 장식을 비롯한 새로운 부장품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지상식 돌무지덧널무덤의 축조과정을 알 수 있는 무덤구조가 새롭게 확인되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20년)

OLYMPUS DIGITAL CAMERA<금관총이 있는 경주 노서동 고분군>

경주-대릉원-호우총-09-20220129<경주 노동동, 노서동 고분군 주요 무덤들>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5. 안내문, 경주박물관 특별전, 2015년

 

경주 대릉원(사적) 서봉총

경북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경주 대릉원 129호 무덤인 서봉총(瑞鳳塚)이다. 일제는 1926년 발굴.조사를 하면서, 당시 방한했던 고고학에 조예가 깊었던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를 참관하였다. 고분의 이름도 스웨덴을 의미하는 서(瑞)자와 봉황대를 의미하는 봉(鳳)자를 합쳐서 서봉총이라 불렀다. 서봉총에는 금관을 비롯하여 각종 청동제 그릇과 금.은 장신구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봉분의 조성형식 또한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 형식을 취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 서봉총>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서봉총 금관(瑞鳳塚金冠, 보물)은 높이 30.7 cm, 지름 18.4 cm, 드리개 길이 24.7 cm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스웨덴 구스타프 국왕을 황태자 시절에 초빙하여 같이 발굴한 유물이다. 넓은 관 테 위에 5개의 사슴뿔모양의 가지를 세워 올린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형태를 하고 있다.  천마총, 금관총,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관에 비해서는 금세공기술이 약간 떨어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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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총 금관(보물)>

OLYMPUS DIGITAL CAMERA<금제 바리, 5세기, 서봉총>

OLYMPUS DIGITAL CAMERA<금귀걸이, 5세기, 서봉총>

OLYMPUS DIGITAL CAMERA<보석장신구, 5세기, 서봉총>

OLYMPUS DIGITAL CAMERA<유리팔찌, 5세기, 서봉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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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잔, 5세기, 서봉총>

192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발굴한 서봉총의 출토품입니다. 이 무덤에서는 금관과 금제 허리띠를 비롯한 여러 문화재가 출토되었습니다. 발굴당시 스웨덴의 구스타브 황태자가 발굴을 참관하였습니다. 출토된 금관에 세 마리의 봉황이 장식된 점에 착안, 무덤 이름을 서전의 ‘서’자와 봉황의 ‘봉’자를 따서 ‘서봉총’으로 지었습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특별전, 2015년)

서봉총은 발굴.조사 후 봉분을 복원하지 않아 그 터만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서봉총에는 발굴을 참관했던 구스타프 황태자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있다. 구스타프황태자는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 했기 때문에 해방 이후에서 양국 친선을 강조하는 측면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사적) 노서동 고분군>

OLYMPUS DIGITAL CAMERA<서봉총 발굴 이야기 1>

OLYMPUS DIGITAL CAMERA<서봉총 발굴 이야기 2>

OLYMPUS DIGITAL CAMERA<서봉총 발굴 이야기 3>

OLYMPUS DIGITAL CAMERA<서봉총 발굴 이야기 4>

경주 대릉원 호우총 09-20220129<경주 노서동, 노동동 일대 주요 고분들>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5. 안내문, 경주박물관 특별전, 2015년

 

경주 대릉원(사적) 호우총

경북 경주시 노서동에 있는 삼국시대 무덤인 호우총(壺杅塚)이다. 경주 대릉원(사적)에 있는 많은 무덤 중 140호분으로 ‘호우(壺杅)’라는 글씨가 돋을 새김되어 있는 청동그릇(보물)이 출토되어 호우총이라 불린다. 1946년 국립박물관이 해방 후 처음으로 은령총과 함께 발굴하였다. 전형적인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으로 옆에 있던 은령총과 함께 쌍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당시에는 봉분은 없고 주택이 있었으며 현재는 주위보다 약 2 m 높은 대지만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 140호분, 호우총, 은령총>

청동 그릇은 고구려 광개토대왕 사후(415년) 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무덤주인이 소장하고 있다가 죽은 후 6세기 초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릉원 일대 무덤의 조성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무덤이다. 출토유물로는 청동그릇(보물), 환두대도,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 도깨비얼굴을 하고 있는 화살통 등이 있다. 무덤의 규모나 출토유물로 볼 때 무덤주인은 최고위급보다 한단계 낮은 신라왕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호우총 출토 청동 ‘광개토대왕’명 호우(보물)>

바닥에는 글자가 4행 4자씩 총 16자(乙卯年國罡(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가 새겨져 있다. 이 글자를 통해 고구려에서 만든 그릇이 신라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뚜껑>

OLYMPUS DIGITAL CAMERA<용문고리자루칼, 신라. 경주 호우총>

환은 대부분 멸실되었으며 환 내붕 용두가 잘 남아 있다. 용두는 청동으로 부조하고 도금하였는데, 별도로 제작하여 환 안쪽에 부착하였다. 금동판으로 제작된 초구금구에 용문이 부착되어 있고, 도신의 단면에 용이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습을 상감하였다. 용은 금사로, 물고기는 은사로 상감한 것이 특징이다. (안내문, 공주박물관 특별전,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화살집, 삼국시대(신라) 6세기, 경주 호우총, 복원>

화살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손쉽게 사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중국의 고서인 『주례』에 귀신을 몰아내는 방상시(方相氏) 모습의 가면으로 알려졌으나 화살집 장식으로 새롭게 알려졌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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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제드리개, 삼국시대(신라) , 호우총>

OLYMPUS DIGITAL CAMERA<귀걸이, 삼국시대(신라), 호우총>

OLYMPUS DIGITAL CAMERA <그릇, 청동, 삼국시대(신라) 6세기>

호우총
호우총은 신라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으로, 해방 직후인 1946년 3월에 우리나라 고고학자가 발굴한 최초의 고분이다. 호우총이라는 명칭은 고구려의 청동 그릇이 출토되어 붙여졌다. 청동 그릇에는 16자의 명문과 ‘정(井)’자가 돋을 새김되어 있다. 명문은 ‘을묘년(415년)에 광개토왕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호우’로 광개토대왕을 장사지낸 1년 뒤 이를 기념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되어 고구려와 신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 주고 있다. 무덤은 함께 출토된 유물의 형식으로 보아 6세기 전반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청동 그릇은 만들어진 지 약 백년이 지난 어느 시점에 비로소 무덤속에 부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20년)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사적) 노서동 고분군>

경주 대릉원 호우총 09-20220129<경주 대릉원 노서동, 노동동 고분군 주요 무덤>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20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5. 안내문, 공주박물관 특별전, 2016년

 

 

경주 통일신라 김인문과 김양의 무덤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김인문과 김양의 무덤이다. 태종무열왕릉(사적)과 서악동 고분군(사적)이 있는 경주 선도산 남쪽 능선 아래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앞쪽에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의 무덤이 뒷편에 통일신라 후기 대각간을 지낸 김양의 무덤이 있다.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형태로 봉분의 크기는 왕릉보다 약간 작은 규모이다. 통일신라 귀족의 무덤중에서 주인이 알려져 있는 많지 않은 무덤 중 하나이다. 김인문 무덤 앞에는 묘비를 세웠던 거북받침돌(보물)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태종무열왕릉(사적) 아래에 있는 2기의 무덤>

김인문(金仁問, 629~694)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이다. 젊은 시절부터 당나라에서 머물렀으며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략할 때 참전했다. 삼국통일 후 나당 전쟁시 당나라에 신라왕으로 옹립하려 했던 인물이다. 당나라 장안에 죽은 후 시신을 운구하여 현재의 위치에 묻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던 비석은 거북받침돌만 무덤앞에 남아 있고, 글자가 새겨진 비석의 일부는 인근 서악서원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경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김인문 무덤>

김인문이 당에서 죽다 ( 694년 (음) ), 김인문(金仁問)이 당나라에서 죽었는데, 나이가 66세였다. (삼국사기 권 제8 신라본기 제8 효소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당에서 죽다 ( 694년 04월29일(음) ), 연재(延載) 원년(694, 효소왕 3) 4월 29일 병으로 누워 당나라 서울에서 죽으니, 향년이 66세였다. 부음을 듣고 황제가 매우 슬퍼하며 수의를 주고 관등을 더하였다. 조산대부(朝散大夫) 행사례시(行司禮寺) 대의서령(大醫署令) 육원경(陸元景)과 판관(判官) 조산랑(朝散郞) 직사례시(直司禮寺) 모(某) 등에게 명령하여 영구(靈柩)를 호송하게 하였다.

태대각간에 추증되고 서원에 묻히다 ( 695년 10월27일(음) ), 효소대왕(孝昭大王)은 [인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추증하였다. 담당 관서에 명을 내려 연재(延載) 2년(695, 효소왕 4) 10월 27일에 서울 서쪽 언덕(西原)에 묻었다. (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 김인문,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거북받침돌이 있는 비각>

통일신라 7세에 만들어진 석비 거북받침돌로 태종무열왕릉비(국보)와 당(唐)의 영향을 받은 초기 석비의 형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조각수법이나 형태 등에서 태종무열왕릉비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으로 사실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이 세워졌던 거북받침돌(보물)>

비몸은 인근 서악서원에서 1931년에 발견되었다. 한쪽면에만 약 400여자의 글씨를 새겨놓고 있는데, 그이 업적에 대한 기록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 <김인문묘 비, 경주 서악동 출토, 695년>

김인문 묘(金仁問 墓), 경북 경주시 서악동 1006-1
무열왕릉(武烈王陵) 동쪽 평지에 위치하고 있는 이 무덤에는 김인문(金仁問, 629~694)이 안치되어 있다. 김인문은 신라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文武王)의 친동생으로, 23세에 당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돌아와, 무열왕을 도와 김유신(金履信)장군과 함께 삼국을 통일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당(唐)나라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효소왕(孝昭王) 때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관직을 추증하고 서라벌의 서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1931년 서악서원(西岳書院)에서 김인문의 비석 조각을 발견하여 이곳이 그의 무덤임을 확인하였다. 무덤 밑둘레 82m, 지름 29.9m, 높이 6.5m로 겉모양은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형태이며, 부근에 비석을 세웠던 거북모양 받침돌이 있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김양은 신무왕을 도와 민애왕의 뒤를 잇게 하였으며, 문성왕을 받들었다. 그뒤 헌안왕이 무열왕릉 곁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고 한다. 장보고와 함께 신무왕의 정변을 주도한 인물로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무열왕릉 옆에 묻은 것으로 보인다. 문성왕릉도 이곳에 위치하고 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김양의 무덤>

김양이 철야현에서 왕의 군대와 싸워 이기다 ( 838년 12월(음) )
〔원년(838)〕 겨울 12월에 김양(金陽)이 평동장군(平東將軍)이 되어, 염장(閻長)·장변(張弁)·정년(鄭年)·낙금(駱金)·장건영(張建榮)·이순행(李順行)과 함께 군대를 통솔하여, 무주(武州)8 철야현(鐵治縣)에 이르렀다. 왕이 대감(大監) 김민주(金敏周)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가 맞서 싸우게 하였다. 〔김양이〕 낙금과 이순행을 보내 〔기〕마군(馬軍) 3,000기로 돌격하게 하니, 〔적군을〕 거의 다 살상(殺傷)하였다.(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 민애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민애왕이 죽다 ( 839년 윤01월(음) )
2년(839) 봄 윤정월에 〔김양의 군대가〕 밤낮으로 행군하여, 19일에 달벌(達伐)의 언덕에 이르렀다. 왕이 〔김양의〕 군대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찬(伊湌) 대흔(大昕)과 대아찬(大阿湌) 윤린(允璘), 의훈(嶷勛) 등에게 명하여 병사들을 거느리고 막게 하였다. 또 일전을 벌여 〔김양이〕 크게 이겼는데, 왕의 군사는 죽은 자가 반이 넘었다. 이때 왕은 서교(西郊)에 있는 큰 나무 아래에 있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모두 도망치자 혼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월유택(月遊宅)으로 도망쳐 숨었으나, 병사들이 찾아내서 해쳤다.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장사 지내고, 시호(諡號)를 민애(閔哀)로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 민애왕,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태종대왕릉에 배장되다 ( 857년 12월08일(음) ), 그 해 12월 8일에 태종대왕릉(太宗大王陵)에 배장하였다.(삼국사기 권 제44 열전 제4 김양,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김양 묘(金陽 墓), 경북 경주시 서악동 1000-1
이 무덤은 김양(陽, 808~857)묘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형태이다. 무열왕릉(武烈王陵) 동쪽에 김인문묘(金仁問墓)와 나란히 위치해 있다. 김양은 무열왕의 9세손(世孫)으로 여러 벼슬을지내면서 나라에 공헌하였으며, 신무왕(神武王)이 된 김우징(金祐徵)을 도와 민애왕(閔哀王)의 뒤를 잇게 하였고, 다음 왕인 문성왕(文聖王)도 받들었다. 그 후 헌안왕(憲安王) 때 김양이 세상을 떠나자, 대각간 (大角干)을 추증하고 무열왕릉 곁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7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4. 삼국사기,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