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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용강동고분(사적), 토용이 출토된 통일신라 돌방무덤

경북 경주시 용강동에 있는 통일신라 고분(사적)이다. 시신을 돌방에 안장하는 굴식돌방무덤이다. 1986년 발굴 당시 중요 유물은 도굴되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나 토용, 청동십이지신상 등이 출토되었다. 문인상과 무인상, 여인상 등의 토용은 당나라 복식의 영향을 받은 당시 신라의 복식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무덤이 조성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발견된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7~8세기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용강동 고분(사적)>

용강동 고분은 전형적인 통일신라 중앙귀족들의 무덤형식인 돌방무덤을 하고 있다. 돌방무덤은 무덤방에 문이 달려 있는 구조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시신을 함께 묻을 수 있어서 가족 무덤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5세기 후반 지방에서 먼저 등장하고 경주로 전해져 중앙귀족들의 무덤형식으로 정착하였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호석을 갖춘 봉분의 형태로 복원한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용강동 고분은 봉분이 크게 훼손되어 ‘개무덤’ 등으로 불렸다. 농경지 가운데 있었던 폐무덤이었는데 지금은 도심 공원처럼 보인다.

경주용강동고분
<용강동 고분 옛날 사진>

OLYMPUS DIGITAL CAMERA<도심공원같은 모습>

토용은 흙으로 사람이나 동물을 본 떠 만든 것으로 옷이나 모자, 표정 등이 사실적이며, 사회적 지위에 따라 색깔이나 크기를 다르게 만들었다. 무덤에 같이 묻힌 토용은 동시대 당나라 무덤에서 출토되는 도용(陶俑)과 그 형태가 비슷하다.

문관상은 통일신라시대 관료의 복식을 잘 보여주고있다. 신라는 김춘추가 당나라를 다녀온 이후 당의 복식을 사용하고 있다. 여인상은 상류층 여자들의 복식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문관상, 8세기,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여인상, 8세기,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녀인물상,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여인상, 중국 당나라, 섬서역사박물관>

관료제와 토용
삼국 통일 이후에 새로운 국가 운영을 위해 관료제를 정비하아였다. 이전에는 왕경인과 지방민에게 각각 차등있게 벼슬을 주었으나, 통일 후에는 동일한 벼슬을 주었다. 이 시기에는 율령에 기초하여 국가기구를 조직하였고 이를 위해 국학 등의 교육기관도 정비되었다. 관료제의 정비는 중국 문화와 복식의 수용으로 엿 볼 수 있다. 당나라에 간 김춘추가 당의 복식을 받아 들여 진덕여왕 3년(649)부터 당나라식 관복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당나라 복식은 무덤에서 출토된 토용과 허리띠장식에서 잘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남자 문관상은 서역 소그드계 인물을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여인상들은 중국 당삼채 등에 볼 수 있는 여인상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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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문관상,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자상,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남자 문관상,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여자상, 경주박물관>

남자 문관상은 머리에 복두를 썼고 손에는 홀을 들었습니다. 깊은 눈과 높은 코, 덥수룩한 턱수염은 서아시아 또는 중앙아시아 소그드계 인물의 특징입니다. 턱수염이 난 또 다른 남자 인물상도 비슷한 계통으로 추정됩니다. 여자상들의 틀어 올린 머리 형태와 풍만한 신체 표현은 중국 당삼채나 채색 소조상에 보이는 귀부인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5년)

무덤에서는 여러 여인상이 출토되었는데, 체격이 큰 여인상과 작은 여인상이 같이 출토되었다. 신분 차이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여인상,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작은 여인상,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작은 여인상, 경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당나귀와 수레바퀴, 말, 경주박물관>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제 십이지신상은 당시 무덤 호석(護石)을 장식했던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호석(護石)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도교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다. 당나라 고분에서 비슷한 청동제 십이지신상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당시의 문화교류를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덤에서 출토된 청동십이지신상>

1986년 용강동에 있는 돌방무덤 안에서 쥐, 소, 호랑이, 토끼, 말, 양, 원숭이 형상의 청동 십이지상 7점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십이지상들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거나 공수한 자세를 취하였습니다. 아랫부분의 돌출된 촉을 어딘가에 꽂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5년)

OLYMPUS DIGITAL CAMERA<뚜껑합>

경주 용강동 고분(慶州 龍江洞 古墳), 사적, 경상북도 경주시 용강동 1130-11
이 고분은 ‘개무덤’, ‘고려장’ 으로 불리던 폐고분으로, 파괴가 심하여 198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발굴조사하였다. 석실[돌방]의 구조는 남벽의 중앙에 연도가 연결되어 정방형의 단실분으로, 네 벽 모두 장방형의 깬돌로 정연하게 쌓고 시상(屍床) 높이에서 내부로 활모양 상태를 이루게 하였다. 시상은 서벽과 북벽에 붙여 동서로 길게 놓여 있는데, 벽쪽을 제외한 가장자리에 편평한 깬돌을 쌓고, 그 내부를 깬돌과 냇돌로 채운 다음 점토로 두텁게 바르고 회칠을 해서 마무리했다. 석실[돌방] 내에서 사람의 치아와 함께 토용(土后), 흙으로 만든 말, 청동제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토기, 구슬, 돌베개 등이 출토되었다. 토용은 높이 12~22cm로 전신상을 흙으로 빚어 만든 뒤 백토를 입히고 그 위에 붉은 색으로 채색한 것이다. 신라지역에서 출토된 다른 것들에 비해 매우 사실적이다. (안내문, 문화재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1년
  3. 안내문, 문화재청, 2011년
  4.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21년
  6. 위키백과, 2021년

경주 황성동 고분(사적), 통일신라 굴식돌방무덤

경북 경주시 황성동에 있는 황성동 고분(사적)이다. 이 무덤은 인근 용강동 고분(사적)과 함께 고구려와 중국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통일신라의 굴식돌방무덤이다. 발굴,조사 결과 봉분과 호석 주변시설, 석실 내부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등을 통해 7세기 중반 처음 조성되었으며 9세기에 시신이 다시 매장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오래전에 도굴되어 내부에 있던 껴묻거리는 대부분 없어졌으나 일부 남아 있는 유물을 두 번에 걸쳐 장례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중국 당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남녀 인물상, 가축을 표현한 토용과 축성 연대를 확인해 준 인화문토기, 중국제 해무리굽 청자편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황성동 고분(사적 476호)>

무덤의 규모는 봉분 지름 7.75m, 돌방은 남북 2.4m, 동서 1,75m 정도로 크지 않은 편으로 통일신라 때 무덤형태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다. 봉분은 모래흙과 자갈 등을 다져 쌓았으며 바깥쪽에는 호석을 쌓아 마감하였다. 돌방은 남북방향으로 긴 네모형이다. 관이 들어가는 널길이 왼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널길이 있는 봉분 앞쪽에는 상석(床石)이 있었던 자리가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봉분)

OLYMPUS DIGITAL CAMERA<반대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상석이 있던 자리>

OLYMPUS DIGITAL CAMERA<발굴된 상석 받침돌> 

이 유물은 ‘상석(床石)받침 기초석 (基礎石)’으로 상석(床石)의 하단부에 해당된다. 양쪽 모서리에 장대석을 세우고 그 내부에 깬돌을 채운 현재 모습은 상석의 완형이 아닌 보존된 일부 모습이다. 원래 모습은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이 시설물은 후대에 추가적으로 설치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시설물 북서쪽 모서리 부분에서 출토되어 현재 국립 경주문화재연구소에 보관 중인 매납유물 (합)으로 유추해보며, 상석 받침기초석은 고분 축조와 동시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출토 유물 중 남녀 인물상은 중국 섬서박물관에서 많이 전시되어 있는 당나라 유물인 도용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어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자는 손에 홀을 들었던 문관상으로 추정되는데 이국적인 인상을 준다. 여자는 소매가 긴 포(袍) 형태의 옷을 입고 허리띠를 매었습니다. 통일 신라 초기 복식을 살펴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남녀 인물상, 8세기 황성동 돌방무덤>

OLYMPUS DIGITAL CAMERA <여인상, 중국 당나라, 시안시 출토, 섬서역사박물관 소장>

여인상
7세기에 만들어지 경주 황성동의 돌방무덤에서는 인물상과 동물상 등 다양한 토용들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중 여인상은 신라 여인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머리는 가르마가 선명하고 살짝 묶어서 왼쪽으로 틀었습니다. 오른손을 아래로 늘어뜨려 병을 쥐었고, 왼손은 소맷자락에 가린 채 웃음을 머금은 입을 살짝 가리고 있습니다. 치맛자락 밖으로 살작 내민 자그마한 발끝이 수붑은 여인의 미소와 너무나도 잘 어울립니다. 경주 용강동 돌방무덤에서도 여러 여인상이 출토되었습니다. 체격이 큰 여인상과 작은 여인상이 있는데 신분 차이를 나타내는 듯 합니다. 황성동 출토여인상에 비해 중국 당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황성동 보다는 조금 늦은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입니다.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5년)

OLYMPUS DIGITAL CAMERA<소의 형상을 하고 있는 토용>

OLYMPUS DIGITAL CAMERA<말머리 모양 토용>

경주 황성동 고분은 형산강변의 평지에 만든 신라 석실분으로 2005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했다. 조사 결과 석실 축조 이후 몇 차례의 추가장이 이루어졌고, 고분 주변에 시설이 추가되면서 행해진 의례행위가 확인됐다. 석실은 출입구가 왼쪽에 위치한 〈좌편연도식(左便義道式) 석실〉로 규모는 남북길이 2.4m, 동서너비 1.75m로 네 벽은 올라가다가 점차 모죽임을 한 후 뚜껑돌을 덮었으나 도굴로 천정이 무너져서 일부만 확인된다. 석실은 남북으로 긴 장방형 으로 동쪽 벽면에 붙여서 시신을 안치한 시상대를 만들고 서쪽 벽에 붙여서는 통로인 연도(道)를 만들었다. 벽면의 틈에는 회를 발라서 매웠고 바닥에는 점토를 발라서 미장을 했다. 봉분은 흙과 모래, 자갈을 섞어서 층층이 다진 판축기법으로 쌓았다. 규모는 동서 14.1m, 남북 16.4m, 잔존높이 2.0m이며, 호석은 직경 약 9.8m, 높이 약 2.0m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호석보강토가 약 1m 너비로 확인됐다. | 출토유물은 석실 안에서 출토된 인화문토기 뚜껑과 호석 주변에 묻은 제사유물인 유개대부발 그리고 화장묘인 유개호 등으로 고분의 변화 시기를 잘 보여준다. 유적의 연대는 석실 안에서 출토된 인화문토기로 보아 7세기 중반에 축조되었고, 이후 상석설치와 호석보강이 이루어졌다. 마지막 추가장이 이루어진 시기는 묘도에서 출토된 중국제 해무리굽 청자편으로 보아 9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경주 황성동 고분은 석실의 형태가 잘 남아있고 호석 주변에서 상석받침기초와 호석 보강시설 등과 같이 신라 횡혈식 석실분 연구의 새로운 시설이 확인되었으며, 출토유물들은 고분의 연대와 신라토기 편년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출처>

  1. 안내문, 경주시청, 2019년
  2. 안내문, 경주박물관, 2015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1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1년

시안 진시황 병마용갱 3호갱

시안 진시황릉 3호갱은 1976년에 처음 발견되었다. 1호갱 북쪽 25 m, 2호갱 서쪽 120 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 28.8 m, 남북 24.6 m 정도로 U자형 평면을 하고 있으며 전체 면적 520 ㎡ 정도로 1, 2호 갱에 비해 그 규모는 상당히 작은 편이다. 1977년 9개월 간 첫 발굴.조사 후 보존을 위해 다시 흙으로 덮었으며, 1988년 전시장을 지은 후 다시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발굴.조사 결과 유적 대부분은 심하게 훼손되었으며 68구의 병용, 1기의 전차, 34개의 청동제 무기가 출토되었다. 3호갱은 1, 2호갱의 지휘부로 알려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진시황릉 병마용갱 3호갱>

3호갱은 동쪽 끝 경사로가 출입로로 사용되었으며 입구에 전차가 있는 방이 있다. 양쪽 복도를 통해 남쪽 방과 북쪽방을 연결하고 있다. 남쪽 방에는 통로, 2개의 작은 방으로 구성되며 북쪽방은 동쪽을 향하는 직선형이다. 1, 2호갱과 같은 구조로 흙으로 벽을 쌓아 칸막이를 만들고 목재 서까래가 있는 지붕으로 덮혀 있으며 통로에 병마용이 도열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3호갱 내부>

출입문 경사로를 들어서면 정면에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도열해 있으며 복도를 통해 양쪽 방으로 연결된다. 양쪽 통로에 병사들이 도열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3호갱 입구에 있는 방>

OLYMPUS DIGITAL CAMERA<입구 통로>

OLYMPUS DIGITAL CAMERA<통로에 도열해 있는 병사>

OLYMPUS DIGITAL CAMERA<남쪽편 방>

OLYMPUS DIGITAL CAMERA<병사들이 도열해 있는 작은 방>

OLYMPUS DIGITAL CAMERA<맞은편>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일직선 통로 형태의 북쪽편 방>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Preface
Pit 3 was discovered in June 1976, located north of Pit 1 at the western end. It is 25 meters to the south of Pit 1 and 120 meters to the east of Pit 2. It is of U-shape about 520 square meters, measuring 28.8 meters long from east to west, 24.57 meters wide from north to south and 5.2 ~ 5.4 meters deep. Investigation shows that Pit 3 was destroyed seriously in history. Only 68 pottery figures, one chariot and 34 bronze weapons were unearthed from this pit. Pit 3 is now known as the command center of Pit 1 and Pit 2. (안내문, 시안 병마용박물관, 2019년)

<출처>

  1. 안내문, 시안 병마용박물관,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

시안 진시황 병마용갱 2호갱, 발굴현장 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곳

1호갱에서 북쪽으로 20 m 떨어진 곳에 위치한 2호갱은 1976년에 처음 발견되었다. 전체적으로 ‘L’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동서로 124 m, 남북으로 98 m 정도 규모이다. 보병 위주로 구성된 1호갱과는 달리 궁수, 전차, 기병, 보병 등이 4개 대열로 배치되어 있다. 전체 대형은 독립된 것처럼 보이지만 전투시 유연하게 병력을 재배치할 수 있는 형태로 진(秦)의 독특한 군사전략과 대형이 잘 반영되어 있다. 현재까지 발굴이 진행중이며 발굴된 토용 중 아주 적은 수만 갱내에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같은 1호갱과는 달리 고고학 발굴 현장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되고 있으며, 병마용을 대표하는 토용들을 별도의 전시공간에서 가까이 살펴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진시황 병마용갱 2호갱>

OLYMPUS DIGITAL CAMERA<2호갱 내부>

진흙으로 쌓은 벽이 견고한 서까래가 있는 지붕을 지탱하고 있다. 지붕은 섬유매트가 있는 진흙으로 덮혀 있다. 병마용 유물 발굴 과정에서 지붕들은 해체되었지만 아직 발굴되지 않은 부분에서 갱을 덮고 있는 지붕을 확인할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붕목유적(棚木遺跡, remains of Roof beams), 병마용이 도열해 있는 갱의 지붕>

1호갱과는 달리 2호갱은 출토된 병마용들을 도열해 전시하지는 않고 있으며, 바깥쪽에 앉아서 활을 쏘는 궤사용, 서서 활을 쏘는 입사용, 장교로 보이는 중급군리용, 장군으로 추정되는 고급군리용 등 병마용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전차가 배치된 것으로 보이는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천차로 보이는 병마용들>

OLYMPUS DIGITAL CAMERA<지붕이 남아 있는 부분>

앉아서 노(弩)를 쏘는 모습을 하고 있는 이 궤사용(跪射俑, Kneeling Archer)은 2호갱 북동쪽에 위치한 궁수 중심의 대열에 발견된 것으로 갑옷을 입고 있다. 원래 노(弩)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호갱에서는 160명이 궤사용이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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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갱 출토 궤사용(跪射俑, Kneeling Archers)>

OLYMPUS DIGITAL CAMERA <궤사용들이 주로 출토된 부분>

2호갱에서는 약 116명이 기병용이 말과 함께 출토되었다. 말들은 하곡마(河曲馬, Heque horse)라 불리는 티벳 북서부지방에서 가져온 품종이라한다. 말들은 안장이 얹혀 있지만 유목민들이 사용했던 등자는 아직 없다. 기병은 꽉끼는 바지를 입고 모자를 쓰고 있으며 한손에는 고삐를, 다른손에는 활을 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 <기병용 출토현장(騎兵俑, Cavalry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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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마기병용(鞍馬騎兵俑, Cavalryman with his saddle war-horse)

OLYMPUS DIGITAL CAMERA<안장을 얹은 말>

OLYMPUS DIGITAL CAMERA <기병용이 출토된 부분>

2호갱에서 출토된 입사용(立射俑, Standing Archer)이다. 갑옷이 아닌 전투복을 입고 있는 보병으로 양손의 포즈는 활을 쏘는 자세를 하고 있다. 2호갱에서는 172구의 입사용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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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용(立射俑, Standing Archer)>

2호갱에서 출토된 중급군리용(中級軍吏俑, Middle-ranking Officer)이다. 모자와 네모난 신발을 신고 있다. 갑옷아래 군복은 무릎까지 늘어져 있다. 중급장교의 갑옷은 2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가습갑옷만 있고 다른 하는 가슴갑옷과 검은 갑옷을 같이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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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군리용(中級軍吏俑, Middle-ranking Officer)>

2호갱에서 발견된 장군으로 보이는 7구의 고급군리용(高級軍吏俑, High-ranking Officer) 중 하나이다. 고급군리용의 키, 의복, 투구는 그의 높은 지위를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미늘 갑옷을 입고 있으며 턱아래 리본으로 묶은 투구를 착용하고 있다. 갑옷을 장식하기 위해 리본으로 만든 8개의 매듬, 전면에 3개, 후면에 3개, 어깨에 각각 1개의 매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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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군리용(高級軍吏俑, High-ranking Officer)>

진시황 병마용갱은 3곳 모두 비슷한 토목 구조로 만들어졌는데 그 크기와 모양은 다르게 조성되었더. 갱은 지하 5 m 정도이며 흙으로 만든 칸막이벽으로 공간을 분리한 긴 복도형태를 하고 있다. 바닥은 도기 벽돌로 포장되어 있으며 강한 서까래가 있는 지붕으로 덮혀 있다. 지붕은 섬유매트와 흙으로 덮혀 있으며 경사지니 도로를 통해 지상으로 연결된다. 전체적으로 병마용을 은폐하기 용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붕목유적(棚木遺跡, The traces of timber), 병마용갱을 덮고 있는 지붕>

OLYMPUS DIGITAL CAMERA<지붕과 그 아래에 묻혀 있는 병마용>

OLYMPUS DIGITAL CAMERA<병마용갱에 사용되었던 벽돌들>

OLYMPUS DIGITAL CAMERA<복도에 묻혀 있는 병마용>

OLYMPUS DIGITAL CAMERA<복도에 묻혀 있는 병마용>

OLYMPUS DIGITAL CAMERA<철전판(鐵栓板, Iron belt), 철추(鐵錘, Iron hammer), 철부(鐵斧, Iron axe)>

OLYMPUS DIGITAL CAMERA<포지전(鋪地磚, The pottery floor bricks)>

OLYMPUS DIGITAL CAMERA<붕목유적(棚木遺跡, The traces of timber)>

진시황 병마용에서는 동노기(銅弩機, Bronze crossbow trigger), 동월(銅鉞, Bronze battleaxe), 동극(銅戟, bronze halberd), 동모(銅矛, Bronze spear), 동피(銅鈹, broze pi), 동성(銅殳, Bronz Shi), 동과(銅戈, Bronze Gi) 등 약 4만여 개의 청동무기가 출토되었다. 이 무기들은 모형제작, 주조, 마무리 과정을 통해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무기의 표면에는 크롬처리기술을 통해 도금되어 발굴 당시 새것처럼 반짝여 보였다고 한다. 이것은 진나라 때 도금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으며 무기제조 과정이 표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금균(金鈞, Bronze hook)

OLYMPUS DIGITAL CAMERA동전촉(銅箭鏃, bronze arrow-heads), 철정동촉(鐵錠銅鏃, Bronze arrow with iron sha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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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노기(銅弩機, Bronze crossbow trigger), 동월(銅鉞, Bronze battleaxe)

OLYMPUS DIGITAL CAMERA동검(Bronze Sword)

OLYMPUS DIGITAL CAMERA동극(銅戟, bronze halberd), 동모(銅矛, Bronze spear), 동피(銅鈹, broze pi), 동성(銅殳, Bronz Shi), 동과(銅戈, Bronze Gi)

Preface
Located 20 meter to the north of Pit 1 at the eastern end, Pit 2 is in “L” shape. This pit was discovered in April 1976, covering area of 6,000 square meter. It measures 124 meters long from east to West, 98 meters wide from to south and 5 meters deep. Different from Pit 1, Pit 2 consists of mixed military force in four arrays: archers, war chariots, cavalrymen and infantrymen. The four arrays seemed to exist independently, but could be assembled immediately to constitute a complete battle formation during the war times. This reflects the unique strategy of Qin military affairs. The excavation work of Pit 2 is still continuing. At present a large area of the remnants of the roof beams and small part of the pottery warriors and horses are being exhibited in the Pit. It is a rare chance for visitors to enjoy the archaeological digging at the site. (안내문, 시안 진시황 병마용갱박물관)

<출처>

  1. 안내문, 시안 병마용박물관, 2019년
  2. 위키백과, 2020년
  3. 百度百科, 2020년

경산 조영동 고분군(사적 516호), 삼국시대 초기 신라 지방세력 무덤

경북 경산사 조영동 일대에 있는 고분군(사적 516호)이다. 이곳은 삼국시대 초기 지방세력은 근거지였던 임당동 일대에 분포한 고분군 중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삼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있었는데 발굴.조사 후 4 ~ 6세기에 조성된 8기의 대형 봉토분이 남아 있다. 발굴.조사 결과 대형 봉토분에서는 금, 은, 금동 등으로 만든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어 삼국시대 초기 지방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서쪽 임당동고분군과의 사이에 있는 저습지에서도 다양한 생활유적과 유물이 출토되어 삼국시대 초기 지방세력의 생활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유적지로 평가 받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산 조영동고분군(사적 516호). 임당동고분군과 함께 삼국시대 초기 지방세력을 무덤을 추정되는 8기이 대형봉토분이 금호강이 내려다보이는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임당동고분군이 있는 서쪽방향. 금호강이 대구를 향해 흐르고 있으며 주택지가 형성된 저습지에서 생활유적과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분군 북쪽으로는 금호강이 영천에서 대구로 동.서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며 멀리 팔공산 일대 산악지대가 장벽을 형성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으로는 영천방향으로 금호강을 따라 넓은 평야가 이어지고 있다. 오른쪽 아파트 부근에 부적리고분군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아래에 있는 2기의 대형봉토분. 하나의 봉토분에 여러개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끝에 있는 대형봉토분. 여러개의 무덤이 연결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분군 가운데 있는 3기의 대형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남쪽 주택가 옆에 있는 3기의 봉토분.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 있는 봉분들.

경산 조영동 고분군, 사적 516호
이 고분군은 임당동 구릉에 분포하는 고분들 가운데 중앙부인 ‘성말괭이’라고 부르는 곳에 위치한 봉토분이다. 이 무덤들 가운데 일부가 1987년 임당동 주택지 개발지역에 포함됨으로써 영남대학교 박물관의 조산단에 의하여 2년에 걸친 학술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에서 독(항아리)무덤(옹관묘), 널무덤(목관묘), 덧널무덤(목곽묘), 돌널무덤(석관묘) 등 우리나라 원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시대를 달리하는 많은 무덤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축조되었음이 밝혀졌다. 특히 큰 무덤들에서 금동관을 비롯하여 금, 은, 금동 등으로 만든 각종 유물 등이 많이 출토되었다. 따라서 이 무덤들은 삼국시대 초기 고대 국가 중 하나인 압독국에 속한 지배계급의 무덤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 고분군은 앞으로 우리나라의 고대국가 형성 및 발달에 관한 새로운 연구의 근거를 제공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는 목책을 이용한 성곽, 각종 주거지, 대형 건물지, 저습지 등의 생활 유적지 등이 조사됨으로써 고대인들의 생활전반에 관한 연구의 토대를 제공해 주고 있다. (안내문, 경산시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경산시청, 2020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