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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송학동 고분군(사적), 소가야 지배계층 무덤

경남 고성군 고성읍 송학리에 있는 송학동 고분군(사적)이다. 소가야 지배계층 무덤으로 고성읍 무기산에 1~7호 무덤과 11, 12호 무덤이, 북쪽을 300m 떨어진 기월리에 8,9,10호 무덤이, 동쪽에 13, 14호 무덤이 있으며, 도심에 제2송학동 고분군으로 불렸던 무덤이 있다. 1호 무덤은 겉모습이 일본의 전방후원형 무덤을 닮았으나 발굴,조사 결과 흙을 쌓아 구릉처럼 만든 뒤 돌방무덤을 만든 가야 고유의 형식을 하고 있다. 무덤들은 5~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무덤에서는 토기류와 금동귀걸이, 금동장식 등 다양한 형태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소가야는 3세기까지 변한 12개국 중 고자미동국, 고자국으로 불렸던 세력이 성장한 것이다. 삼한시대 사천 늑도 등과 함께 한.중.일 해상교역로에서 중요 거점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금관가야와 경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6세기 중엽 이전에 신라에 합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표적 유적으로는 송학동 고분군, 내산리 고분군, 율대리 고분군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성 송학동 고분군(사적)>

OLYMPUS DIGITAL CAMERA<북쪽에서 본 모습>

고성 송학동고분군<고성 송학동 고분군 위성사진>

1호분은 외관상 북쪽에 원형고분, 남쪽에 전방후원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발굴조사 결과 모두 13개의 돌덧널과 돌방이 있는 독립된 원형 고분이 모여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축성방법에서도 인공적으로 흙을 다져 쌓은 가야 고분의 축성양식이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1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아래쪽에서 본 모습>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501<큰칼, 6. 고성 송학동 1C호분,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301<발걸이, 5~6세기, 고성 송학동 1A-1호묘, 10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381<말방울, 5세기,  18. 고성 송학동 1A-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05<뚜껑접시(스에키계 토기), 5세기, 8. 고성 송학동 1A-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26<신라토기, 1. 고성 송학동 1B-1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3. 합천 옥전 31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15<청동 굽다리접시, 6세기, 5. 고성 송학동 1C호묘, 고성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22<말띠드리개, 6세기, 1.고성 송학동 1C호묘, 동아대학교 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구릉 서쪽에 있는 2기의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1호무덤 옆에 있는 작은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구릉 동쪽 아래에 있는 3기의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1호 무덤 아래 작은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가운데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제일 아래에 있는 무덤>

고성 송학동 고분은 도심과 가까운 작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어 도심과 당항포가 있는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릉에서 내려다 보이는 바다>

OLYMPUS DIGITAL CAMERA<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북쪽 방향>

원래 동쪽 도심에 있는 무덤들은 송학동 제2고분군으로 불렸는데 기월리고분군과 함께 통합하여 송학동 고분군으로 지정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도심에 있는 무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01<말갖춤, 5~6세기, 2. 말띠꾸미개,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 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박물관, 3. 발걸이,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04<넓은입 구멍단지, 7.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진주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고성 송학동고분군, 사적, 경남 고성군 송학동
고성읍 북쪽의 무기산 일대에 위치한 가야시대 고분군으로 7기 가량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유적이다. 소가야 왕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에는 겉모양이 일본의 전방후원분을 닮았다 하여 한일양국 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제1호분도 위치하고 있다. 199년부터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고분군의 특징과 내용이 밝혀지게 되었다. 첫째, 모든 고분의 봉토는 인공을 다져 쌓아 올려졌다. 언덕 위를 평평하게 고른 뒤 한 켜씩 다져가며 쌓아 올린 판축의 기술이 확인되었다. 둘째, 1호분은 모두 13개의 돌덧널과 돌방으로, 3개의 독립된 둥근 봉토를 가진 고분이 합쳐진 것으로 판명되어 일본의 전방후원분과 다른 모양의 무덤임이 밝혀졌다. 셋째, 가장 북쪽에서 발견된 B-1호 돌방은 전통적 가야고분과는 다른 모양인데, 입구.돌벽.천정에 붉은 색이 칠해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넷째, 출토유물은 토기류와 금동귀걸이, 마구, 금동장식, 큰칼, 청동제높은잔, 유리구슬 등이 출토되어 소가야 왕릉의 면모를 짐작케 해 주었다. 넷째, 출토된 유물의 특징을 통해 고분군은 대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 고분군이 자리한 고성군은 소가야의 옛 터로 알려져 있지만, ‘작은 가야’가 가야인들 자신이 불렀던 이름은 아니었을 것이다. 철이 많이 나는 ‘쇠가야’가 잘못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안내문, 고성군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고성군청, 201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고성 내산리 고분군(사적), 소가야 지배계층 무덤

경남 고성군 동해면에 있는 내산리 고분군(사적)이다. 원래 100여 기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60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봉분의 크기가 10m 정도인 중간규모의 무덤이 40여기 이며, 15m 이상 대형 무덤도 20기가 있다. 소가야는 남해안 상교통로에 자리잡고 교역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해지역 금관가야와는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다투는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후기에는 해상무역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고성 내산리 고분군(사적)>

내산리고분군은 당항포가 있는 내해 바다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위치하고 있다. 소가야 중심지인 고성과 남해 먼바다를 연결하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다. 언덕에는 60여기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고성 내산리고분군(사적)<내산리 고분군 무덤 분포(위성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위쪽 1호무덤 부근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습>

무덤은 위쪽부터 1호 무덤이 있으며 동쪽 마을 부근에 60호 무덤이 있다. 앞쪽 소나무 주위에 있는 29호 무덤부터 시작하여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구릉 중간에 보이는 무덤(5~9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입구에 있는 소나무>

OLYMPUS DIGITAL CAMERA<27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9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6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8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중앙에 위치한 무덤들(5 ~17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위쪽에 있는 무덤(1~5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1호무덤 부근에서 보이는 아래쪽 무덤들>

OLYMPUS DIGITAL CAMERA<정비되기 전 무덤(14~15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 있는 무덤(18~19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앞쪽에 위치한 무덤(30~32호)>

OLYMPUS DIGITAL CAMERA<동쪽 40~60호 무덤이 있는 지역>

내산리고분군을 지나 고개를 넘아가면 당항포 부근 바다를 볼 수 있다. 이 바다는 다리가 놓여진 좁은 입구를 제외하면 사방이 육지로 둘러싸여 있어서 태풍이나 폭풍우를 피해서 배를 정박하기에 좋다. 소가야가 번성했들 때는 배들이 이 곳에 쉬었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당항포 앞 바다>

OLYMPUS DIGITAL CAMERA<목걸이,경남 고성 내산리, 1999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5~6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731
<쇠투겁창, 4~6세기, 1. 고성 내산리 34호묘, 국립진주박물관, 2. 함안 도항리 36호묘, 국립김해박물관,  4. 고령 지산동 75호묘, 대가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521<화살촉, 4~6세기, 7. 고성 내산리 21-1호묘, 34호묘, 국립진주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01<말갖춤, 5~6세기, 2. 말띠꾸미개,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 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박물관, 3. 발걸이,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04<넓은입 구멍단지, 7. 고성 내산리고분, 고성 송학동고분, 국립진주박물관, 동아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27<신라토기, 2. 고성 내산리 8호묘, 국립전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1.경남 고성 내산리, 1999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5세기>

OLYMPUS DIGITAL CAMERA<구멍단지, 2.경남 고성 내산리, 1999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5세기, 굽다리항아리, 3.경남 고성 내산리, 1999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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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받침, 5.경남 고성 내산리, 1999년 발굴>

고성 내산리 고분군, 사적, 경남 고성군 동해면 내산리
고성군 동해면의 북쪽 끝에 위치하여 마산방면의 진해만에 근접해 있는 가야시대의 고분군이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은 28기 정도이지만, 61기 가량의 봉토분이 밀집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원래는 100여기의 고분이 있었다 하나, 많은 도굴과 파괴의 피해를 입었다. 1997년부터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가 연차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발굴조사를 통해 고분군의 특징이 알려지게 되었다. 대형봉토분인 제8호분과 제34호분에서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확인되었다.첫째, 고분의 봉토는 인공적으로 다져 쌓아 올려져, 지역적 고분축조의 특색을 나타낸다. 둘째, 중앙의 주곽(제8호분)과 돌방(제34호분)을 중심으로 봉토 내에 여러기의 돌덧널이 함께 만들어져 있어, 고성 송학동고분군과 함께 이 지역 가야고분의 특색을 보여준다. 셋째, 고리장식대부장경호와 굽다리접시 등의 토기, 큰칼과 철호살촉 등의 철기, 귀걸이와 팔찌 등의 금은장신구, 발걸이와 운주 등의 마구들이 출토되었다. 넷째, 제34호분에서 출토된 은팔찌는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며 굴식돌방무덤의 모양도 백제와 동일한 특색을 보여준다. 제8호와 제34호분은 출토된 토기와 마구로 보아 6세기 전반에서 중엽 경에 만들어졌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곳에 있었던 가야세력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일 것이다. (안내문, 고성군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고성군청, 201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3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4.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김해 수로왕비릉(사적), 금관가야 수로왕비의 무덤

경남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수로왕비릉(사적)이다. 금관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의 무덤이다. 수로왕비는인도 아유타국 공주로 배를 타고 건너와 왕비가 되었으며, 9명의 왕자를 낳았는데 그 중 2명은 허씨 성을 주었으며 김해허씨는 그 후손이라 전해지고 있다. 무덤 옆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돌로 세워진 파사석탑이 남아 있다. 도심에 있는 수로왕릉과는 떨어져 있으나 오랜 세월 수로왕비의 무덤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해 수로왕비릉(사적)>

건무(建武) 24년 무신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청컨대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항려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 생략 ~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국(阿踰陀國)註 496의 공주로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 생략 ~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 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니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 생략 ~
(삼국유사, 권 제2, 제2 기이, 가락국기,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능역은 조선초 세종 때(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성역화되어다. 봉분의 규모가 크지 않으며 봉분을 두른 호석은 없다. 능비와 상석은 조선 중기 인조 때(1647년)에 다시 설치하였다고 한다. 무덤 주위에는 높이 5m 정도의 담장이 있다. 왕릉에 속하지만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수로왕비 능역>

SANYO DIGITAL CAMERA<수로왕비 무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능역내에서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과 관리인이 머무는 고직사가 부속건물로 있다.

SANYO DIGITAL CAMERA<재실과 고직사>

파사석탑은 허왕후가 인도에서 건너올 때 바다 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는 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종류의 돌이라고 한다. 인근 사찰에 있던 것을 원래의 자리로 옮겨야 한다고 하여 조선시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SANYO DIGITAL CAMERA<파사석탑 보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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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석탑>

원래 바다를 항해할 때 균형을 잡기 위해 배의 바닥에 실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과학적 분석결과 파사석은 붉은 빛이 도는 기이한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힘든 암질인 것이 밝혀졌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04<정면에서 본 모습>

파사석탑
이 석탑은 <삼국유사> 등 고서에 수로왕비 허황옥이 48년(수로왕 7)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 가락국에 올 때 싣고 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탑의 부재 5층만 남아 있는데 조각이 기이하고 돌에 붉은 빛 도는 희미한 무늬 같은 것이 남아 있다. 신농본초(神農本草)에 닭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는 것이 바로 이 탑이어서 신비를 더하고 있다. 파도를 진정시켜준다는 신령스러운 탑으로 일명 진풍탑으로 불리운다. 원래 호계사(虎溪寺)에 있었으나 1873년에 절이 폐사되자 김해부사 정현석이 수로왕비역으로 옮겼으며, 이를 영구 보존하기 위해 1993년 5월에 다시 이 자리로 옮기고 보호각을 세웠다.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금관(金官)註 183 호계사(虎溪寺)註 184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 읍이 금관국이었을 때 세조DB주석수로왕(首露王)의 비인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註 185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陁國)註 186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 하였는데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니 곧 쉽게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다. 붉은 돛, 붉은 깃발, 주옥(珠玉) 등 아름다운 것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주포(主浦)라고 부른다. 처음 언덕 위에서 비단 바지를 풀은 곳은 능현(綾峴)이라고 하며, 붉은 깃발이 처음 들어온 해안은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한다.
수로왕이 그를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이때에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못하여 토착인들이 신복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452년)에 이르러서야 그 땅에 절을 세웠다. 또 왕후사(王后寺) 아도(阿道) 눌지왕(訥祇王)의 시대로 법흥왕대의 전이다.를 창건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겸하여 남쪽의 왜를 진압하고 있는데 가락국 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고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본초(本草)≫註 187에서 말하는 닭벼슬의 피를 찍어 검사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 하는데 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삼국유사, 권 제3, 제4 탑상, 금관성파사석탑,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3년)

수로왕비릉은 금관가야 건국설화  “구지가”와 관련된 구지봉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멀리서 보면 구지봉이 거북의 머리이며, 수로왕비릉이 자리한 위치는 목부분에 해당한다. 남쪽의 수로왕릉과는 수백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면서 구지봉을 지키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 오르는 길>

SANYO DIGITAL CAMERA<구지봉에서 보이는 수로왕비릉>

김해 수로왕비릉, 사적, 경남 김해시 구산동
김해시내 북단에 위치한 이 곳은 가락국 수로왕비의 능이다. 분산(盆山)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하며, 동쪽 100m 지점에는 구산동 고분군이 있다. 조선시대 1446년에 수로왕릉과 함께 정화되었는데, 능비와 상석은 1647년에 설치된 것이다. 원형 봉분의 규모는 지름 16~18m, 높이 5m 정도로 봉분을 두르는 호석은 없다. 능 주위는 네모나게 돌담을 둘렀으며, 앞쪽으로 낮은 단의 축대가 있다. 능비에는 ‘가락국수로왕비보주태후허씨릉’이라 새겨져 있다. 경내에는 숭보재, 외삼문, 홍살문 등의 건물이 있으며, 능을 바라보고 오른쪽에는 파사석탑(婆娑石塔)이 있다. 이 석탑음 김해시 중심에 있었던 호계사에서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삼국유사에는 서기 48년에 수로왕비가 인도에서 올 때 풍랑을 가라앉히기 위해 배데 싣고 왔던 것으로 기록하였다. 파사석은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로 닭 벼슬의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다고 하는데, 김해시의 향토사학자가 이를 확인하였다고 한다.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08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3.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김해 대성동고분군(사적), 금관가야 지배층 무덤들

경남 김해시 대성동에 있는 대성동 고분군(사적)이다. 금관가야 무덤들로 길이 약 300m, 높이 20m 정도의 낮고 경사가 완만한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데  다른 가야 고분과는 달리 봉분을 크게 만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결과 1~5세기에 조성된 무덤들로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구릉 정상에는 4~5세기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출토 유물로는 토기류와 철기류,  중국제 거울, 북방계 말갖춤, 방패형동기, 호랑이모양 띠고리, 청동솥 등이 있다. 중국의 영향을 받은 유물들은 당시 한.중.일 문화교류에서 금관가야가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대성동 고분군(사적)>

대성동 고분군은 구도심을 남북으로 흐르는 해반천 동쪽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평지 또는 해발 20m의 낮은 구릉꼭대기에 크지 않은 규모의 무덤들이 밀집해 있다. 금관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의 무덤(수로왕릉)이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데, 무덤들이 연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적지 북쪽에는 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남쪽에는 대성동박물관이 있다. 금관가야 중심부인 봉황대 유적(사적)이 남쪽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사적)<김해 대성동 고분군(사적) 위성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서쪽 해반천 옆 도로에서 보이는 대성동 고분군>

OLYMPUS DIGITAL CAMERA<북쪽에서 본 모습>

유적지 북쪽 평지에서 발견된 29호분과 39분은 발굴되었던 상태로 복원하여 노출전시관으로 조성해 놓고 있다. 29호 무덤은 3세기 후반에, 39호분은 이보다 100년 늦은 4세기 후반에 조성된 무덤으로 추정된다. 29호 무덤은 가야 최고 지배자의 무덤으로 회청색의 도질토기, 순장, 달개가 달린 금동관, 오르도스형 청동솥 등이 한반도 남부에서 최초로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노출전시관>

OLYMPUS DIGITAL CAMERA<노출전시관 내부의 29호분과 39호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30<김해 대성동 29호 무덤(나무덧널 무덤), 3세기, 국립김해박물관>

김해 대성동 29호묘(3세기)
김해 양동리 고분이 2세기 가락국(구야국)의 중심이었다면 3세기에는 김해 대성동으로 중심이 이동합니다. 대성동에서 확인된 첫 번째 왕의 무덤이 29호묘입니다. 내부에서는 북방의 오르도스동복, 도질토기, 순장, 달개가 달린 금동관 등이 처음으로 확인이 됩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OLYMPUS DIGITAL CAMERA<39호 무덤 부곽과 29호 무덤>

OLYMPUS DIGITAL CAMERA<29호 무덤>

노출전시관
노출전시관은 대성동고분군에서 발굴된 무덤 중 29호분과 39호분을 발굴 당시의 모습 그대로 복원, 전시하여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무덤축조 방법과 유물 부장상태를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29호분은 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왕묘로 추정되는 주요한 무덤이며 청동솥, 최초의 가야 도질토기 등 중요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39호분은 이보다 100년 정도 늦은 4세기 후반의 무덤으로 29호분을 일부 파괴하고 축조하였다. 이러한 무덤간의 중복축조는 대성동고분을 비롯한 금관가야 무덤축조 방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으며, 이는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세력교체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대성동고분군의 무덤들은 대부분 구릉 정상부에 조성되어 있다. 노출전시관 뒷편으로는 23~24호 무덤(4~5세기)이 발굴조사된 구역이 있다. 이곳에서는 사신문양거울, 굽은칼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노출전시관 뒷편>

OLYMPUS DIGITAL CAMERA<23호, 24호 무덤>

이곳은 2기(23, 24호)의 무덤이 발굴조사된 구역으로, 사신문양거울, 굽은칼 등의 유물이 출토된 곳입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67
<사신 격자무늬 거울, 4세기, 2. 김해 대성동 23호묘, 김해 양동리 441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동의대학교 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굽은 칼, 삼국시대 5세기, 김해 대성동 무덤>

구릉 정상부 바로 아래에는 18기(5~22호)무덤이 발굴된 구역이 있다. 호랑이모양띠고리, 방패꾸미개 등의 유물이 출토된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5~22호 무덤이 발굴된 구역>

이곳은 18기(5~22호)의 무덤이 발굴조사된 구역으로, 호랑이모양띠고리, 방패꾸미개 등의 유물이 출토된 곳입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5~22호 무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50<바람개비모양 동기, 4세기, 1. 대성동 88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2. 김해 대성동 1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일본 고분시대의 문물로 방패나 화살통에 붙인 청동 꾸미개로 추정됩니다. 일본 기나이를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가나가와현 오즈카 고분, 서로는 후쿠오카현 마루쿠야마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54<8. 가락바퀴모양 석제품, 4세기, 대성동 18호묘, 88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12<왜계(하지키) 토기, 4세기, 1. 김해 대성동 13호묘, 2. 김해 구지로 33호묘, 3. 마산 현동 8호묘, 4. 김해 부원동유적, 국립김해박물관>

구릉 정상부에는 4기(1~4호)의 무덤이 발굴,조사된 구역이 있다. 판갑옷, 재갈, 물미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1~5호 무덤>

이곳은 4기(1~4호)의 무덤이 발굴조사된 구역으로 판가봇, 재갈, 물미 등의 유물이 출토된 곳입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65
<갑옷, 4세기, 김해 대성동 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231<말머리 가리개, 4~5세기. 1. 김해 대성동 1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251<재갈, 4~5세기, 3. 김해 대성동 2호묘, 국립김해박물관, 4. 함안 도항리 36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51<3. 통모양 동기, 4세기, 김해 대성동 2호묘, 39호묘, 88호묘, 94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일본의 경우 44기의 무덤에서 59점이 출토되었습니다. 기나이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사이타마현 구마노신사 고분, 남으로는 구마모토현 시미즈 고분에서 출토되는 등 넓은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1<유리목걸이, 4세기, 3,5. 김해 대성동 3호묘,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군 남쪽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대성동박물관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대성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박물관내부에서 재현해 놓은 가야시대 기마무사>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12 <청동 투겁창, 2~4세기, 2. 김해 양동리고분, 대성동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청동 투겁창은 일본 북부 규슈를 중심으로 발견되며, 제사와 의례 행위를 하기 위해 무기 모양으로 만든 것입니다. 반면 일본의 심장부인 기나이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제사와 의례용으로 청동 방울을 제작하였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3<청동그릇, 4세기, 1.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국 서진의 청동그릇입니다. 유사한 것들이 삼연을 비롯한 북방에서도 확인되어, 서진과의 직접 교류, 삼연을 통한 유입 등 유입경로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4<청동솥, 4세기, 대성동 47호묘, 국립김해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5<재갈, 4세기, 4.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6<말방울, 4세기, 5.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삿갓모양 말방울은 대성동유적에서만 출토되었습니다. 중국 조양(朝陽) 원대자 벽화 무덤, 안양(安陽) 효민둔 154호 무덤 등에서 출토되어 북방의 유목국가(모용선비)와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7<허리띠 꾸미개, 4세기, 1. 김해 대성동 88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가락국 지배자의 무덤에 부장한 중국식(서진) 허리띠 꾸미개입니다. 중국에서 두 마리의 용을 장식한 허리띠 꾸미개는 황제나 왕족이 착용한 최고급 위세품입니다.(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8<금동말띠 꾸미개, 4세기, 2,4,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말머리 꾸미개, 4세기, 3.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9<유리잔, 4~5세기, 1. 김해 대성동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2. 경주 금관총, 국립경주박물관(비교자료)>

김해_대성동_76호분_출토_목걸이<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보물)>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42<유리목걸이, 4. 김해 대성동 88호묘, 5, 김해 대성동 3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금관가야-20200212_52<왜계무기, 3~4세기, 김해 양동리, 대성동유적, 국립김해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4. 창, 5. 돌화살촉, 6. 청동촉>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061<철기 만드는 도구, 4세기, 1. 끌,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무사-20200212_111<덩이쇠, 4~5세기, 김해 대성동 94, 95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7.경남 김해 대성동, 1992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4~5세기>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대외관계-20200212_28<신라토기, 4. 김해 대성동 73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5. 합천 옥전 23호묘, 경상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07<빗모양 장신구, 4세기, 5. 김해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19<6. 손칼, 4세기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20<사슴뿔 머리장식, 4세기, 김해 대성동 91호묘, 대성동고분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공원 광장에 있는 조형물>

대성동고분군 무덤배치의 특징
본 대성동고분군에서는 2차에 걸쳐 분묘들이 중복축조되었음이 판명되었다. 제1차는 3세기말, 제2차는 5세기 초의 일이다. 이러한 분묘의 중복축조는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유례가 없는, 김해지역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제1차 분묘중복축조는 이 무렵 김해로 갑자기 대거 유입된 순장.도질토기.북방계 갑옷과 투구.기승용말갖춤 등의 북방문화를 근거로, 이 문화를 소유한 북방주민이 김해로 이주함에 따라, 전시기의 분묘를 파기하고 그들의 무덤을 축조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즉, 특정 북방주민의 이주설이다. 그 외 분묘중복은 친족관계에 있는 분묘들이라는 견해와 묘역부족으로 인한 현상이라는 견해도 있다. 제2차 분묘축조현상은, 이후 대성동고분군을 비롯하여 김해지역에서는 지배자의 무덤이 축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금관가야의 쇠퇴를 이해하는데 극히 중요하다. 이곳 노출전시관의 부지에서도 많은 무덤들이 중복축조되어 있었으며, 29호분과 39호분의 목곽묘도 그러한 중복현상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2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2014년
  3. 안내문, 중앙박물관 특별전, 2020년
  4.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3년

김해 예안리 고분군(사적), 금관가야 무덤

경남 김해시 대동면에 있는 예안리 고분군(사적)이다. 낙동강 서쪽 대동리 들판에 위치하고 있는 금관가야의 무덤들로 봉분이 남아 있지 않고, 농경지로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널무덤, 구덩식장방형돌방무덤, 독무덤, 앞트기식방형돌방무덤 등 총 212기의 무덤이 발굴, 조사되었다. 가야시대에 존재했던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변천한 가야의 매장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출토유물로는 회백색와질, 적갈색연질, 회청색경질 토기류가 있으며 철정, 가위, 재갈등의 철기류가 발견되고 있다. 각 무덤에서는 사라 뼈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OLYMPUS DIGITAL CAMERA<김해 예안리고분군(사적)>

예안리고분군은 금관가야 중심지에서 동쪽으로 1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낙동강과 가까운 들판에 위치하고 있는데 옛날에는 김해만 해안가였던 곳이다.

김해 예안리 고분군(사적)<예안리 고분군 위치(위성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유적지 앞 들판>

OLYMPUS DIGITAL CAMERA<마을 표지석>

김해 예안리고분군에서는 북방계와 남방계 사람의 특징, 편두를 가진 인골 등이 발견되어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공존하며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05 <머리뼈, 4~5세기,  1.남방형질, 2.북방형질, 김해 예안리고분, 부산대학교 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06<머리뼈, 4~5세기,  3.발치, 김해 예안리고분, 부산대학교 박물관, 4. 편두, 김해 예안리 고분, 국립김해박물관, 복제품>

변한인의 성형풍습
인간이 타고난 본래의 모습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욕구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화장 또는 문신을 하거나 장식품을 걸치기도 한다. 이것은 인체를 변형시키지 않고 인체의 아름다운 부분은 돋보이도록 하고 약점이나 추한 부분은 수정 혹은 감추고 싶어하는 욕망에서 나온 것이며, 신분.계급.종족.성별을 구분하기 위한 치장이기도 하였다. 이와는 달리 인체의 특정 부분을 변형시켜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형태로 만들기도 했다. 여기에는 유아의 이마부위를 강제로 눌러 두개골을 납작하게 만드는 편두, 이를 뽑는 발치, 도구를 넣어 아래 입술을 길게 늘어뜨리는 방법등이 행해졌는데, 이것은 일종의 성형수술이었다. 이마를 눌러 편평하게 만든 편두는 변한인의 인체변형의 풍속의 하나였다. (안내문, 부산박물관, 2013년)

미늘쇠는 칼 모양의 몸통에 미늘같은 뾰족한 날이 서 있으며, 아래에는 투겁이 있어 자루를 끼울 수 있다. 지배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의식용 도구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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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늘쇠, 김해 예안리 무덤, 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특별전-가야본성20200212_15<2. 이득지(二得知)를 적은 토기, , 5~6세기, 김해 예안리고분, 국립김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경남 김해 예안리, 1980년 발굴, 삼국시대(가야) 4세기, 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무늬가 있는 토기조각, 김해 예안리, 중앙박물관>

김해 예안리 고분군(사적 261호), 김해시 대동면 예안리
김해시에서 서낙동강을 따라 상동으로 가는 도로 가에 위치한 고분군으로 도로 건너에는 예안리 패총이 있다. 1947년경까지 다수의 돌덧널들이 노출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밭으로 변해 있다. 고분군은 서북의 까치산에서 동쪽의 마산으로 길게 연결된 습한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1976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과 부산대학교박물관이 5차례의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덧널무덤 59기, 구덩식돌넛무덤93기, 독무덤 17기, 앞트기식 돌방무덤 12기 등 총 181기의 고분이 조사되었고, 토기류 1,100여점, 철기류 660점, 구슬류 180여점, 귀걸이 41쌍, 골촉 60여점 등 총 2,000여점이 출토되었다. 4~6세기에 걸쳐 계속적으로 만들어진 고분군은 가야지역에서 확인되는 모든 형식의 고분이 중복되고 있어, 가야의 묘제가 덧널무덤에서 돌덧널무덤으로 돌덧널무덤에서 돌방무덤으로 변해가던 과정을 알수 있다. 삼국지는 3세기경의 가야사회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러 편두를 만드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예안리 고분군에서는 두개골 성형으로 앞이마가 심하게 후퇴한 10개체의 두개골이 출토되어, 이러한 풍습이 가야사회에서 실제로 존재했음을 증명해 주었다. 무려 190여개체의 인골이 확인된 예안리 고분군은 가야인 내지는 고대 한국인의 형질을 살펴볼 수 있는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편두를 포함하여 출토된 유물들은 현재 부산대학교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안내문, 김해시청, 2011년)

<출처>

  1. 안내문, 김해시청, 2011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3. 안내문, 부산박물관, 2013년
  4. 안내문, 중앙박물관특별전, 2020년
  5.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