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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박물관 야외전시실] 석조불상을 비롯한 유물들

공주박물관 야외에는 공주 지역에서 출토된 석조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공주에는 삼국시대 백제 성왕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대통사와 석조불상이 남아 있는 서혈사를 비롯하여 많은 사찰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지역에서 출토된 불상, 석탑, 석조 등 불교 유물들이 박물관 입구에 전시되어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보물148호, 149호로 지정된 대통사 절터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석조를 비롯하여 서혈사 절터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석조불상과 통일신라시대 석탑 등이 있다.

대통사는 공주시 반죽동에 있던 사찰로 『삼국유사』에는 신라 법흥왕이 양나라 무제를 위해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성왕이 창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 이후에 대통사는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통사가 있던 반죽동 일대에는 조선시대 충청감영이 설치되었던 지역으로 공주읍치의 중심지였다. 서혈사는 대통사 인근에 있는 사찰로 통일신라 이후에 크게 번창했던 사찰로 석조여래좌상 3구와 여러점의 석조유물들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공주박물관 입구에서 볼 수 있는 석주 유물인 대통사 석조와 서혈사 석조여래좌상. 공주를 대표하는 사찰이었던 대통사와 서혈사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공주 대통사 석조, 보물148호, 보물149호, 삼국시대 백제. 대통사 절터에서 출토된 석조이다. 통일신라 이후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직육면체 석조와는 달리 원통형을 하고 있다. 삼국시대 백제의 전형적인 석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여래좌상, 통일신라 9세기, 공주 서혈사 터. 서혈사는 공주시 웅진동에 있었던 사찰로 통일신라시대에 큰 사찰로 규모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3구의 석조여래좌상이 남아 있었는데 형태과 온전한 1구는 보물979호로 지정되어 박물관 내부에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박물관 내부에 전시중인 서혈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979호)

OLYMPUS DIGITAL CAMERA비로자나불좌상, 통일신라, 공주 서혈사터.

OLYMPUS DIGITAL CAMERA박물관 야외에 전시 중인 불상들.

OLYMPUS DIGITAL CAMERA여래입상, 고려, 공주 소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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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입상, 고려, 공주 신흥리

OLYMPUS DIGITAL CAMERA약사여래좌상, 고려 12~13세기, 연기 반곡리

OLYMPUS DIGITAL CAMERA배례석, 통일신라 9세기, 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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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 고려, 공주 금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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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광배, 백제 7세기, 공주 금학동

OLYMPUS DIGITAL CAMERA여래좌상, 통일신라, 공주 반죽동

OLYMPUS DIGITAL CAMERA여래좌상, 고려 12~13세기, 공주 금학동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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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입상, 고려 12~13세기, 홍성 상하리

OLYMPUS DIGITAL CAMERA약사여래좌상, 고려 12~13세기, 대전 보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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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입상, 고려, 공주지역

OLYMPUS DIGITAL CAMERA여래좌상, 고려 12~13세기, 공주 금학동 절터

OLYMPUS DIGITAL CAMERA석탑과 부재들. 주로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석탑 부재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석탑, 통일신라 9세기, 출토지 미상

OLYMPUS DIGITAL CAMERA석탑, 통일신라 9세기, 공주 반죽동

OLYMPUS DIGITAL CAMERA석탑, 통일신라 9세기, 공주 봉황동

OLYMPUS DIGITAL CAMERA석탑받침, 조선 15~16세기, 충남

OLYMPUS DIGITAL CAMERA석등연화대석, 백제 6~7세기, 공주 정치리

OLYMPUS DIGITAL CAMERA부도, 조선, 공주 삼각리

OLYMPUS DIGITAL CAMERA부도, 고려 12~13세기, 아산 아산리

OLYMPUS DIGITAL CAMERA대좌 하대석, 고려 12~13세기, 공주 상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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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돌기둥, 조선, 공주 반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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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우기 받침돌, 조선, 공주 반죽동. 공주 감영에 있었던 측우기 받침돌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계단난간석, 공주 대통사터. 조선시대까지 감영 건물에 재활용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초석, 통일신라 9세기, 공주 중동

OLYMPUS DIGITAL CAMERA초석, 통일신라 8~9세기, 공주 서혈사터

OLYMPUS DIGITAL CAMERA초석, 조선 15~16세기, 충남.

OLYMPUS DIGITAL CAMERA십이지신상, 조선 15~16세기, 공주 반죽동

OLYMPUS DIGITAL CAMERA비석받침돌, 고려, 충남

OLYMPUS DIGITAL CAMERA비석머릿돌, 조선, 충남

OLYMPUS DIGITAL CAMERA용머리, 조선 15~16세기, 충남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공주박물관 선사고대문화실] 백제와 충남지역 불교 문화

백제의 불교는 침류왕 때(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중국 동진(東晉)으로부터 들여왔다. 백제의 지배층이 사회통합차원에서 국가적으로 불교를 적극 수용하게 된 것은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 공주로 도읍을 옮긴 웅진백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성왕은 남조의 양나라로부터 불교 경전을 받고 기술자를 초빙하여 각처에 사찰을 세우고 등 불교를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태안과 서산의 삼존불상 등을 볼 때 중국 산동지방 불교의 영향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박물관에는 공주와 주변지역에서 출토된 불상을 비롯하여 불교문화재들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실제 웅진백제기 유물들은 거의 없는 편이며, 사비기 백제(7세기경)때 만들어진 공주의당보살입상(국보), 통일신라시대 공주지역의 독특한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계유명천불비상(국보)과 서혈사 절터에서 출토된 석불좌상(보물) 등이 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공주가 지역의 중심지로 백제불교를 계승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보살입상, 국보 247호, 공주 송정리, 백제.>

공주시 의당면 송정리 절터에서 출토된 보살상으로 안정된 표현기법과 구슬장식, 연꽃무늬 대좌양식 등에서 7세기 백제 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의 불교
백제의 불교는 침류왕 1년(384) 중국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 전래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백제의 왕실과 지배귀족들은 고대국가체제 정비를 위한 새로운 사회통합의 방법으로 불교를 적극 수용하였다. 본격적인 불교의 발전과 장려는 웅진시대부터이며 사비시기에 크게 융성하게 된다. 특히 성왕은 공주와 부여에 대통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을 세우고 541년에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열반경 등의 경전을 요청하여 백제 불교를 크게 발전시켰다. 이후 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 법왕, 무왕 등도 불교를 깊이 신봉하였고 백제 전역에 능사, 미륵사, 왕흥사와 같은 많은 사찰을 세웠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여래입상, 공주 능암사지,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도제불상대좌, 청양 본의리, 백제. 높이 1m의 거대한 불상받침으로 세련된 제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불상대좌 양식은 일본 불상받침에 전승되었다고 한다.

1986년 청양군 본의리에 있는 백제시대 가마터에서 파편 상태로 수습되었으며, 복원결과 높이 100cm, 폭280cm의 초대형 불상받침으로 밝혀졌다. 좌우 대칭의 옷자락이 가지런한 아름다움을 보이며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주름처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법륭사 금당석가삼존 등 일본의 불상 받침에 전승되고 있어 당시 백제 불교미술의 국제적 위상을 살펴볼 수 있다. 제작시기는 백제 말기인 7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여래입상, 공주 공산성,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여래입상, 금산 음지리,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금동보살입상, 공주 명곡사지,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여래입상, 공주 공산성.당진 용연리, 통일신라.

불비상(佛碑像)
불비상은 비석처럼 돌을 다듬어 앞면이나 옆면에 부처를 조각하고 발원문을 새겨 놓은 불상을 말한다. 불비상은 중국 남북조시대부터 시작하여 당나라까지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통일신라 초기의 충남 연기군 일대에서 성행하여 ‘연기파불비상’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국내에 불비상은 국립공주박물관이 소장한 것을 포함해서 7점이 알려져 있다.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된 ‘계유명천불비상’은 충남 연기군의 한 암자에서 발견되었고 국립 청주박물관에 전시된 ‘계유명불상’과 ‘기축명불비상’, ‘반가사유사상’ 등 8점은 연기군 비암사 석탑 상층부에서 1966년 발견되었다. 이 외에 연기군 연화사에 2점, 동국대박물관에 1점 소장되어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계유명 천불비상, 국보108호, 연기 서광암, 통일신라. 비석에 불상을 새긴 불비상으로 공주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불비상은 특히 통일신라초기에 연기지역에서 성행하였다고 하며 청주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계유명천불비상’과 함께 7점이 남아 있다고 한다.

지붕모양을 한 덮개돌과 연꽃무늬받침. 몸체를 각각 따로 만든 비석모양이며, 앞면에 작은 불상들이 수없이 새겨져 있다하여 천불비상이라 한다. 불비상의 아래쪽에 있는 삼존불의 좌우에는 “계유(癸酉,673)년 4월15일에는 백제 유민 250명이 국왕대신, 7세부모, 법계중생을 알리기 위하여 이 불상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통일신라 초기 백제 옛 땅에 백제불교와 미술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서혈사지 석불좌상, 보물979호, 공주 서혈사지, 통일신라, 통일신라시대의 세련된 조각기술을 보여주는 불상이다.

공주시 웅진동 서혈사터에서 발견된 부처상이다.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하여 다리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린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대좌는 여덟잎의 연꽃을 표현하였으며, 대좌를 받치는 지대석에는 극락의 천사인 천인과 인간의 얼굴을 한 상상의 새 가릉빈가를 새겼다. 전체적인 자세와 세부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공주박물관>

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삼국통일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 위치를 느끼던 신라는 중국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한다. 백제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난하였지만, 백제 방어군을 격파하고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킨 뒤 웅진성을 포위한 신라.당 연합군에게 결국 항복하고 만다.(660년) 백제 멸망 이후 백제의 충신들과 각 지방의 세력들은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킨다.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첨으로 군사를 일으켜 한때 200여 성을 회복하며 4년간 활동하였으나 결국 신라.당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어 백제는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이후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공주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는 등 백제의 옛 땅을 지배하려 했디만 결국 신라에 의해 밀려나고 충남 지역을 비롯한 백제의 영토는 신라에 편입된다. 이로서 이 지역에는 백제 문화의 잔영 위에 신라의 문화가 이입된 새로운 문화가 융성하게 된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도깨비 얼굴모양 기와, 공주 주미사지,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수막새, 공주 주미사지, 공주 서혈사지,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조각, 공주 주미사지,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보상화무늬 수막새, 공주 금학동,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암막새, 공주 금학동,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넝쿨무늬 암막새, 연꽃무늬 수막새, 공주 주미사지,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치미, 공주 주미사지, 통일신라,

충남의 통일신라 토기
충남지역 곳곳에서 발굴 조사된 통일신라시대 유적에서는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이 시기 무덤에서는 백제의 무덤에 많이 부장되었던 항아리, 바리, 개배 대신 당시 유행하던 도장무늬로 장식된 합, 병, 완 등 다양한 신라토기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보령 진죽리와 공주 가교리에서는 도장무늬로 장식된 토기를 만들었던 통일신라시대 가마터가 발견되어 백제지역에서도 본격적인 신라 문화가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충남지역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토기

OLYMPUS DIGITAL CAMERA굽항아리, 연기 와촌리,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합, 공주 소학동. 공주 금성동,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인화문 병, 인화문 완, 아산 명암리,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병, 공주 귀산리,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병, 보령 진죽리, 통일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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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지도, 조선, 종이에 수묵

계룡산을 그린 회화식 지도이다.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개화식의 구도로서 계룡산의 주요 봉우리와 사찰, 촌락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계룡산의 주요 산봉우리는 진한 묵으로 윤곽을 표현하고, 마른 붓질을 반복하여 명암을 주었으며, 대둔산은 엷은 묵으로 처리하였다. 그림 아래에는 계룡산의 어원 및 풍수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공주목 지도, 복제품, 조선 1872년, 종이에 채색

채색 공주목 지도이다. 지도와 지리지가 결합된 전형적인 사례로서 산천, 창고, 사찰, 고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공산성의 성벽과 중군영 등 조선시대에 만든 군사시설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현존하는 고지도 중 공산성의 모습을 가장 자세히 표현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돌곰, 공주 웅진동, 백제

무령왕릉 맞은 편 남쪽 구릉의 경사면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선명하지 않은데, 본래부터 강한 선으로 조각되지 않은 것 같다. 목을 움츠리고 머리를 약간 위로 향하고 있으며, 앞다리는 세우고 뒷다리를 구부려서 앉아 있는 모양이다. 입을 다물고 양쪽 눈은 뜨고 있으며, 양쪽 귀는 뒤로 붙어 있다. 곰나루와 가까운 이 지역은 예로부터 곰과 관련된 지명이나 전설이 만히 남아 있다. 이 돌곰이 출토된 곳이 바로 곰사당이 있던 자리로 생각된다. <출처:공주박물관>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

[공주박물관 선사고대문화실] 공산성, 웅진기 백제의 왕성

공산성은 백제가 고구려의 압박에 밀려 공주로 도읍을 옮겼던 웅진백제기 왕성 역할을 했던 산성이다. 서울의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즈막한 구릉이 둘러싸고 있어 작은 계곡을 이루고 있는 형태이다. 원래는 백제의 다른 성곽처럼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후기에 석축성으로 고쳤다고 한다. 웅진기 백제의 왕성이었던 공산성 내에는 백제의 왕궁터를 비롯하여 여러 건물터 등이 남아 있으며, 연꽃무늬 기와를 비롯하여 토기 등 백제시대의 유물을 비롯하여 통일신라부터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어 오랬동안 지역의 거점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정지산 유적에서 본 공산성 전경. 금강변에 위치한 나지막한 구릉으로 둘러쌓인 지역에 성을 쌓았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지역 거점으로서 꾸준히 개.보수되어 왔다. 지금은 조선후기에 쌓은 석축성이 남아 있다.

공산성은 공주시내 중앙부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금강의 남쪽에 연접해 있는 공산에 축조된 산성이다.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겨 공산성에 자리를 잡았다. 공산성은 왕성으로서 혼란을 수습하고 나라를 안정시켜 새롭게 도약하기 위한 중심 터전이 되었다. 538년 사비(부여)로 도읍이 옮겨진 이후에도 공산성은 여전히 백제의 북방을 지키는 중심성이었다. 특히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침공 떄에는 의장왕이 공산성에 웅거하여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고자 노력하였던 곳이었다. 성 안에는 삼국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유적들이 분포되어 있으며, 추정왕궁터, 저수시설, 목곽고 등 다양한 유적에서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공산성 내에서 확인된 다량의 기와, 연꽃무늬와 바람개비무늬로 장식된 와당, 중국제 자기 등은 백제 시기 공산성의 위상을 보여주며, 철제 무기류와 마구류 등은 백제 멸망기의 상황을 보여준다. 2014년 성안마을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목곽고와 다양한 목공구는 당시 백제의 목재 가공 기술을 보여주는 예이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공산성 발굴유적 분포도

OLYMPUS DIGITAL CAMERA공주읍지 공주목지도, 19세기

목활자본의 사찬(私撰) 읍지로, 개별 읍지로서는 공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총6권2책 160장의 방대한 분량으로 공주의 강역, 연혁, 사찰, 지역의 인물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공산성은 성지(城址)조에 “쌍수산성(雙樹山城), 옛날 이름은 공산산성으로 부(部)의 북쪽 3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거울, 추정왕궁터,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봉황모양향합, 추정왕궁터,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흑유완, 성안마을,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수막새, 바람개비무늬 수막새, 추정왕궁터,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웅천’명 기와조각, 추정왕궁터, 통일신라

OLYMPUS DIGITAL CAMERA병, 성안마을,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뚜껑있는 단지, 성안마을,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등잔, 추정왕궁터.광복루앞광장,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목기, 성안마을,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병, 추정왕궁터, 성안마을,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벼루(추정왕궁터), 벼루(성안마을),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세발토기, 성안마을,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네발토기, 성안마을,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사발, 뚜껑접시, 곧은입단지, 성안마을,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사발, 광복루앞광장. 12각 건물터,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사발, 공산성,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공산성 모형, 금강변 낮은 구릉으로 둘러쌓은 좁은 지역에 왕성이 형성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금서루에서 본 모습.

공산성은 금강 남안에 위치한 백제 시기 산성이다. 본 모형은 현재의 공산성 모습을 일정 비율로 축소하여 제작하였다. 모형의 축소 비율은 지형은 1/300, 건물은 1/200로 색상과 질감을 원형에 가깝도록 재현하였다. <출처:공주박물관>

1) 광복루,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여 금강과 공산성 일대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공산성에서 유일하게 토성이 겹성으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초기 데라우찌 총독은 공주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중군영 문루의 부재를 활용하여 공산성 제일 높은 곳에 누각을 짓고 ‘웅심각’이라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퇴락한 누각을 공주시민들이 합심하여 보수하였아. 이듬해 4월 김구, 이시영 선생 등이 공주를 방문하면서 이곳을 둘러본 후, 국권회복을 기념하는 뜻에서 이름을 ‘광복루’로 고쳤다. 정면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으로, 모든 면이 개방되어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2) 임류각
임류각은 백제 24대 동성왕 떄에 궁의 동쪽에 세운 누각 건물로, 높이 5장(3m)으로 전한다. 1980년 대의 발굴조사 시, 공산성 동쪽의 산정에 위치한 광복루에서 서쪽으로 약 150m 떨어진 산중턱 서쪽 사면에서 건물터 1동이 확인되었다. 조사된 건물터가 고층누각이란 이유 등으로 백제시기 임류각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현재로서 조사된 건물터를 백제시기의 유구로 볼 만한 적극적 증거가 확인되지 않아 백제의 임류각 터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복원된 임류각 건물은 정면6칸, 측면5칸이며, 건물터가 확인되 위치에서 위쪽에 새로이 복원된 것이다. <출처:공주박물관>

3) 영동루
남동 방향의 석성과 토성이 분기되는 지점에 세워진 누각이다. 토성이 절단된채 5m 정도의 너비로 남아 있었던 지역인데, 1980년의 발굴조사에서 문터가 확인되어 이후 복원한 것이다. 확인된 문터는 길이 6.5m, 너비 2.46m의 규모로 문지석 2매가 확인되었고, 자연석으로 쌓은 통로벽을 갖추고 있었다. 복원된 문루는 조선시대 성문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규모는 남아 있는 기록을 참조하여 3칸으로 복원되었다. <출처:공주박물관>

4) 진남루, 공산성 주 출입문
공산성 남쪽 문루이자 읍에서 성내로 출입하는 정문인 주문으로, 현재까지도 남쪽 출입문으로 이용되고 있다. 충청도 관찰사 유근이 1602년에 공산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으면서 당시에 함께 개축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복적인 보수가 있었음에도 문터 자체는 원상태의 것으로 여겨진다. 문터는 석축기단을 좌우대칭으로 높게 조성하고, 두 석축기단에 장대석을 걸쳐 덮은 다음 문루를 세운 누각이다. 2층 누각의 효과를 내고 있으며, 누각 아래에 입구를 열어 성문의 역할도 함께 하였다. 정면 3칸, 측면2칸의 초익공 팔작집이다. 문루는 누각 건물이긴 하나 특별한 시설이 없고 성의 전면이 남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공산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진람루이다. 공주읍 시가지와 연결되는 출입문이다.

5) 금서루
공산성의 서문으로, 현재는 추출입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1975년의 성곽 보수 시에 돌로 쌓아 높이 4.4m, 너비 5~6m, 길이 17m 규모로 복원한 것이다. 이것도 본래의 성문터가 아니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확인하기 어렵다. 부분적으로 조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여지도서』에 따르면 서문은 3단이란 기록이 있어 이를 근거로 1990년 본래의 문터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복원하였다. 복원된 문루는 개구식으로 새롭게 입구를 내고 그 위에 문루를 올린 것이다. <출처:공주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공산성 서문에 해당하는 금서루. 1975년에 복원하였다. 문루 아래로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가 있으며, 지금은 공산성 정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6) 공산정
옛 문헌에는 보이지 않는 건물이다. 1970년대 전망대 형식으로 새롭게 만든 것으로, 이전에는 ‘유신각’으로 불렸다. ‘공산정’은 시민공모에 의해 2009년 새로이 지어진 것이다. 정면3칸, 측면2칸의 2층 누각으로, 서문인 금서루와 북문인 공북루 사이의 구릉에 우뚝 서있다.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이곳에 오르면 금강과 공주시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출처:공주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금강과 주변지역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좋은 곳에 위치한 정자이다. 원래부터 있던 것은 아니고 최근에 전망대 용도로 지은 정자이다.

7) 공북루, 공주의 출입 관문
조선중기에 개축된 북문루. 남문이자 정문인 진남루와 함께 금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출입 관문이었다. 정면5칸, 측면2칸의 2층 누각건물로,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금강에 바로 접해 경치가 좋았던 까닭에 본래 기능인 문루뿐만 아니라 정자로서의 기능도 겸했을 것이다. 본래 공북루 자리에는 ‘망북루’가 있었는데, 16세기 무렵에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었다. 이후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한 유근이 1602년에 공산성을 대대적으로 고쳐 쌓으면서 그 터에 공북루를 짓고, 그 옆에는 월파당을 지었다고 전한다. 유근이 공북루를 신축한 후에도 여러 차례 개보수가 이루어졌는데 공북루와 함께 세웠던 월파당은 많이 퇴락하여 철거되었다. <출처:공주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공산성 북문인 진북루. 금강 나루를 통해 금강 이북 지역과 연결되는 공주의 관문이다.

8) 연지와 만하루

SANYO DIGITAL CAMERA연지와 만하루. 북문인 진북루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지역 유지들이 금강 경치를 감상하면서 풍류를 즐기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9) 영은사,
공산성 안에 있는 사찰이다. 구체적인 창건시기는 알 수 없지만, 사찰 내에서 통일신라시기 우물 뚜껑 등이 출토되어 적어도 통일신라시기부터 불교 관련 유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은사 앞 빈터에서 건물의 기단석으로 볼 수 있는 석렬과 그 주변으로 와적층, 배수로 형상의 시설과 6점의 통일신라 불상이 확인되었다. 현재 남쪽에는 원통보전이란 법당이 있고, 북단에 강당인 관일루가 위치한다. <출처:공주박물관>

10) 쌍수정
진남루 부근의 서쪽 고지대에 위치한 전각이다. 인조가 이괄의 난(1642년)을 피해 파천했을 떄 머물렀던 장소로 전해진다. 인조는 피난하는 동안 두 그루의 나무 사이에서 정난의 소식을 기다렸다고 한다. 이후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인조는 크게 기뻐하며 자신이 머물렀던 쌍수에 금대와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하사했다고 한다. 이후 인조의 유서가 깃던 쌍수가 고사하자 1734년(영조10)에 충청도 관찰사 이수항이 왕의 유지를 기념하여 정자를 세우고 쌍수정이라 이름을 붙였다. 쌍수정 앞 광장은 일제강점기에 연병장으로 사용되었다. 1985~86년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기 벽주건물터, 연못, 목곽고,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어 웅진도읍기 왕궁터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공산성 서남쪽 정상부에 위치한 쌍수정. 주변에 웅진기 백제의 왕궁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쌍수정 아래 웅진기 백제 왕궁터로 추정되는 건물터. 여러동의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대전 월평동유적,
대전 월평동유적은 월평동 산성에서 남쪽으로 연결된 산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에서는 나무로 만든 지하창고, 울타라의 나무기중자리, 울타리를 에워싸는 도랑, 돌로 쌓은 성벽, 집터, 둥근 저장구덩이 등이 발견되었다. 이 시설은 처음에는 고구려가 일시적을 사용하다가 후에 백제가 시설을 보강하여 장기간 사용하였다. 대부분의 시설은 백제가 고구려와 신라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유적에서는 나무로 만든 그릇.숟가락, 가야금, 말안장, 유리를 녹이는 도가니 등 생활과 관련된 유물이 많이 나왔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대전 월평동 유적 발굴.조사

OLYMPUS DIGITAL CAMERA안장가리개, 대전 월평동,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검은칠기그릇.나무숟가락. 대전 월평동,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가락바퀴, 어망추, 대전 월평동, 백제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

 

[공주박물관 선사고대문화실] 백제의 웅진 천도

웅진기는 한강유역에서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밀려서 도읍을 웅진으로 옮긴 시기는 약 70년(475~538) 정도이다. 백제는 고구려의 압력으로 웅진으로 천도를 했지만 지방세력의 협조하에 비교적 빠른 기간내에 새로운 왕도를 건설하였다. 웅진기 왕성은 금강과 맞닿아 있는 공산성을 중심에 배치하여 군사적 기능이 중시되었다. 이 시기 백제는 신라와 혼인을 통해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 및 일본열도와의 관계도 강화하였다. 국가가 안정을 되찾은 무령왕대에는 중국 남조의 양에 사신을 보냈으며, 중국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고 다시 신라와 가야 그리고 왜에 전하였다.

웅진기 백제는 약70여년 정도로 그 기간도 짧고 국력도 크지 않았기때문에 이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이나 유물은 많지 않은편이다. 공산성은 당시 백제의 왕성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왕과 지배층의 무덤이 모여있는 송산리고분군이 대표적인 유적지이다. 그중 무령왕릉으로 대표되는 벽돌을 쌓아 조성한 전축분(塼築墳)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무덤 양식이다. 일제강점기 송산리고분군의 무덤들은 대부분 도굴되어 유물이 많지 않았으나 1970년대 무령왕릉이 발견되면서 웅진기 백제를 대표하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웅진기 백제의 왕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공주 공산성. 고구려의 압박에 밀려 한성에서 내려오면서 터를 잡은 곳이다. 금강이 방어선 역할을 하지만 왕성으로서는 좁아 보인다.

백제의 웅진천도
백제는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도성이 불타고 왕이 전사하는 위기를 맞아 도읍을 서울에서 공주(熊津)로 옮긴다. ‘웅지백제’란 문주왕의 웅진천도(475년)부터 성왕의 사비천도(538년)까지 공주에 도읍하였던 시기를 말한다. 차령산맥과 금강으로 둘러싸인 공주는 외적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유리한 천혜의 방어벽을 갖추었고, 백제와 긴밀한 관계의 지방 세력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왕권이 약하여 혼란이 거듭되었으나 무령왕대부터 안정을 되찾았다. 무령왕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물리치고 중국과 교류를 크게 확대하였다. 무령왕의 뒤를 이은 성왕은 도읍을 더 넓은 부여(사비)로 옮겨 백제의 힘과 문화를 크게 일으키게 된다. 이렇게 웅진백제시기는 한성백제의 문화를 이어받고 중국의 문화를 흡수하여 화려한 백제문화를 다시 꽃피울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출처:공주박물관>

공주의 백제유적
475년 웅진천도로 공주와 충남지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백제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공주지역의 대표적인 백제유적은 당시 도성이었던 공산성, 왕의 묘지였던 송산리고분군을 비롯한 백제고분군, 무령왕의 장례장으로 추정되는 정지산유적 등이다. 백제왕실은 웅진천도 직후 벽돌무덤이나 굴식돌방무덤과 같은 외래무덤양식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중국 남조에서 지배층의 무덤양식으로 유행하던 벽돌무덤의 수용은 이후 마한.백제지역의 굴식돌방무덤 축조기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단지, 공주 취리산,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단지, 작은단지, 공주 금학동,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접시, 굽다리접시, 공주 금학동,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세발토기, 공주 산의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입큰단지, 공주 금학동,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곧은입단지, 공주 산의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곧은목단지, 공주 산의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곧은입단지, 공주 금학동,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팔찌, 수정구슬, 공주 웅진동,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반지, 공주 금학동,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금동귀걸이, 공주 웅진동,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은장식못, 공주 금학동,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금나뭇잎장식, 공주 옥룡동,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금제장식, 공주 금학동, 백제

백제에 수입된 중국도자기
백제는 3세기 중후반부터 중국 서진의 도자기를 수입한 이래 지금까지 약 100여점 이상의 중국도자기가 백제유적에서 발견되었다. 백제에 수입된 중국제 도자기는 청자와 흑유계통이 많다. 그 중에서 청자는 입이 넓고 어깨에 고리형의 귀가 붙어 있는 반구사이호, 어깨에 네개 혹은 여섯 개의 귀가 부착된 사이호와 육이호, 그리고 청자완 등이 있다. 어깨 한쪽에 닭모양의 주구를 붙이고 다른쪽에 손잡이를 붙인 닭모양단지는 4세기경에 동진에서 제작된 것들이 백제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흑갈유항아리, 공주 수촌리, 중국 남조

OLYMPUS DIGITAL CAMERA네귀달린항아리, 공주 수촌리, 중국 남조

OLYMPUS DIGITAL CAMERA청자잔, 공주 수촌리, 중국 남조

OLYMPUS DIGITAL CAMERA흑갈유항아리편, 홍성 신금성, 중국 남조

양직공도, 중국 북송
「양직공도(梁職貢圖)」는 두루마리로 된 그림으로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 때인 520~30년대에 만들어졌다. 당시 양나라 황제에게 사신으로 온 외국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그 사신을 보낸 나라에 대해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백제사신의 모습과 백제에 대해 설명이 남아 있는데, 다른 나라의 사신들의 모습에 비해 단정한 느낌을 줄 정도로 세련된 모습이다. 또한 백제가 중국 요서지방에 진출하였다는 내용을 비롯하여 정비된 지방통치체제, 영역 확장, 언어, 풍속 등의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6세기 전반 웅진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원본은 20세기 초에 유실되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북송대인 10세기 초에 모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양직공도 중 1번째, 파사국(페르시아) 사신과 백제 사신이 묘사되어 있다. 당시 페르시아와 백제의 복식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백제는 중국 남조와 교류가 많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세련된 복식을 하고 있다. 옆에는 백제에 대하여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양직공도에는 고구려와 신라 사신이 없다. 당시의 외교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백제는 오래전에 동이(東夷)에서 나왔고 마한에 속하였다.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의 낙랑을 침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 진나라 이래로 많은 공물을 바쳤다. 동진 의희(405~418년) 중에는 여전(전지왕)이 송 원가(423~453년) 중에는 여비(비유왕), 제나라 영명(483~493) 중에는 여태(동성왕)가 모두 중국의 관작을 받았다. 양나라 초에 태를 정동장군에 제수하였다. 얼마 후 고구려에게 격파 당하였다. 보통2년에 여륭(무령왕)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고구려를 여러 차례 격파하였다”고 하였다. 그 도성을 고마라 부르고 읍을 담로라고 하는데 중국의 군현에 해당한다. 22개의 담로가 있는데 왕족을 나눠 보내 분거하게 하였다. 주변 소국으로 반파.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련.상기문.하침라 등이 있는데 백제에 부속되었다. 언어와 의복은 고구려와 거의 동일하나, 걸을 때 두 팔을 벌리고 걷지 않고 절을 할 때 한쪽 다리를 펴지 않았다. 모자를 관(冠)이라 부르고 저고리를 복삼(複衫)이라 하고 바지를 곤이라 한다. 그 나라 말 중에는 중국말이 뒤섞여 있으니 이 또한 진한의 풍속이 남은 것이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 양직공도 중 2번째,

OLYMPUS DIGITAL CAMERA 양직공도 중 3번째,

OLYMPUS DIGITAL CAMERA양직공도 중 4번째,

‘당염림본왕회도’와 ‘오대남당고덕겸모양원제번객입조도’는 대문 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으로 중국 남조 양나라때 작품인 ‘양직공도’의 모사본으로 추정된다. ‘당염립본왕회도’는 7세기초, ‘오대남당고덕겸모양원제번객입조도’는 10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 국가박물원 소장의 ‘양직공도’에 백제 사신만 남아 있는 반면, 이들 그림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그려져 있어 삼국인들의 용모와 복식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하지만 3점의 그림에 그려진 사신들의 모습이 매우 다르고, 관련 국가에 대한 기록이 없어 동일한 작품에 대한 모사본이 아닐 가능성이 크므로 향후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왕회도(王會圖, 중국 당나라) 중 1번째

OLYMPUS DIGITAL CAMERA2번째

OLYMPUS DIGITAL CAMERA3번째

OLYMPUS DIGITAL CAMERA4번째

OLYMPUS DIGITAL CAMERA5번째. 백제 사신이 묘사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6번째

OLYMPUS DIGITAL CAMERA번객입조도(蕃客入朝圖, 중국 남당) 중 1번째. 백제사신이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에는 고구려와 신라 사신이 표현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2번째.

OLYMPUS DIGITAL CAMERA3번째. 고구려, 신라, 일본 사신이 표현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4번째.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벽돌, 중국 난징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전돌, 중국 난징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수막새, 중국 난징 출토

OLYMPUS DIGITAL CAMERA‘양관와위사의’명 전돌, 공주 송산리, 백제

이 벽돌은 벽돌무덤인 송산리 6호 무덤의 널길을 막는데 쓰인 것으로 측면에 새겨진 글은 “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 중국 양나라 관영공방의 기와를 본보기로 삼았다.” 혹은 “양선이위사의(중국 양나라 사람 선(宣)이 분묘의 축조를 관리하였다.”로 읽히고 있다. 백제의 기와와 벽돌의 제작, 혹은 분묘의 축조에 중국 양나라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벽돌의 형태와 문양은 무령왕릉에 사용된 벽돌과 닮았기 때문에 무령왕릉을 쌓기 위한 벽돌을 만들 때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수막새, 공주 송산리.공주 공산성,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연꽃무늬 전돌, 무령왕릉, 백제

송산리 고분군
송산리 고분군은 공주시 웅진동과 금성동 일대에 남아 있는 백제의 대규모 고분군이다. 현재 확인되고 있는 고분은 벽돌무덤인 무령왕릉과 6호분, 이외에 굴식돌방무덤 십여기가 알려져 있다. 1920~1930년대부터 백제왕릉으로 추정되어 발굴조사까지 이루어졌으나 무령왕릉을 제외한 모든 고분들은 이미 도굴된 뒤였기 때문에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었다. 내부에서는 소량의 금.은제품들이 화려했던 고분부장품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무령왕릉과 송산리 6호분은 중국에서 유행한 벽돌무덤으로, 남조에서 많이 보이는 장방형 터널식 고분이다. 이는 당시 무덤의 축조에 있어 중국의 고분양식과 기술이 적극적으로 도입된 것으로, 당시의 백제와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웅진기 백제의 대표적인 유적인 공주 송산리고분. 무령왕릉을 비롯하여 웅진기 백제 지배층의 무덤이 모여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목관 복원 추정도

OLYMPUS DIGITAL CAMERA널고리, 송산리 1호분,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꺾쇠(송산리 3호분), 관못(송산리 1.3호분),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무령왕릉 출토), 세발토기(송산리고분군),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깊은바리(송산리8호분), 두귀달린단지(송산리8호분),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병, 송산리1호분,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동전무늬전돌(송산리고분군),연꽃무늬전돌(무령왕릉),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문자있는 전돌, 무령왕릉,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은팔찌, 은사슬, 송산리고분군,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은제장식(송산리고분군), 금제금구(송산리4호분), 달개(송산리4호분),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유리구슬(송산리8호분), 금제구슬(송산리고분군),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호박옥(송산리고분군), 흑옥(송산리고분군),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허리띠장식, 송산리고분군,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화살통장식(송산리고분군), 화살촉(송산리1.3호분), 허리띠장식(송산리4호분),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대도장식(송산리4호분), 철검조각(송산리4호분), 손칼(송산리고분군),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
그릇받침, 傳 공주 송산리

그릇받침은 바닥이 둥근 항아리를 받치기 위한 것으로 형태에 따라 화로모양그릇받침, 바리모양그릇받침, 원통모양그릇받침, 고리모양그릇받침 등으로 구분된다. 원통모양의 그릇받침은 백제토기 중대형에 속하며 가장 화려하게 장식된다. 정지산유적과 같은 제사유적을 비롯하여 도성이나 대형 고분과 같은 중요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제사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화로모양과 바리모양은 일상용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과 제사유적과 신라 및 가야지역의 여러 의례 관련 유적을 볼 때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

[공주박물관 선사고대문화실] 마한에서 백제로

마한연맹체는 천안지역의 목지국이 중심이었다가 고구려에서 남하한 세력과 토착세력이 연합한 한강유역의 백제가 중심이 되었다. 4세기 중후반경에는 마한지역 대부분이 백제에 완전 복속하게 되었으며 지방세력들은 백제의 귀족으로 그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 시기 한성백제에서 지방귀족세력에 협력의 표시로 보내준 금동관모, 중국에서 수입한 도자기 등이 서산 부장리, 공주 수촌리 등 다양한 지역 지배세력의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공주박물관에서는 한성백제기 지방세력과 중앙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유적지로 공주 수촌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 유물들로는 금동관모, 금동신발, 금동제허리띠 뀌개 등의 위세품과 중국에서 수입한 단지, 각종 토기류, 철제 무기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공주읍 북쪽에 위치한 수촌리 고분. 철기시대부터 한성백제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모여 있다. 특히, 한성백제기 무덤에서는 중국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이는 도자기를 비롯하여 금관, 금동신발같은 위세품들이 출토되었다.

마한에서 백제로
마한은 한강유역에서 세력을 크게 키운 백제에 의해 점차 그 힘이 약화되어 4세기 중후반 백제 최전성기에 의해 완전히 복속되었다. 충남과 전라지역의 마한의 여러 나라는 백제에 흡수되었지만 마한의 세력가들은 백제의 귀족으로 세력을 유지하였다. 천안, 공주, 서산 등 새롭게 백제가 된 지역에서는 전통적인 형태의 무덤 내에서 한성백제 양식의 토기를 비롯하여 백제식 금동관모와 신발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중국제 도자기 등 백제가 중국에서 수입하여 내려보낸 물품도 같이 발견되었다. 이것을은 모두 백제 중앙과 지방 세력과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들로 백제가 훗날 충남지역을 중심으로 중흥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도움이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출처:공주박물관>

충남지역의 한성백제토기
3~4세기경 한성백제의 정치적 영향력은 점차 주변지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뚜렷한 특징을 보이는 한성백제 양식의 토기도 함께 보급되면서 토기제작기술이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한성백제 토기의 지방 확산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종으로는 곧은입단지.세발토기.굽다리접시.꼭지달린 뚜껑 등을 들 수 있다. 이 토기들은 4세기 중.후반에 충청남도 북부와 서해안, 금강유역으로 확산되면서 항아리.독.사발 등의 일상생활용 그릇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마한 토기문화를 변화시켰으며, 한성백제 토기의 양식을 모방한 그릇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기존의 마한토기문화 속에 한성백제 양식이 공존하거나 지역 색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우는 마한토기가 백제토기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단절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가 누적되면서 진행되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이처럼 서울 인근과 지방은 토기기종의 구성, 출현시점, 기형 등에서 지역 간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충남지역에서 출토된 한성백제기 토기들.

OLYMPUS DIGITAL CAMERA곧은입항아리, 천안 화성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어깨단지, 천안 용원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입큰 항아리, 공주 수촌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손잡이잔, 공주 수촌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흑색마연토기, 천안 용원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세발토기, 공주 수촌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꾸껑있는 완, 공주 수촌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입큰단지와 그릇받침, 공주 수촌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흑유닭모양 단지, 공주 수촌리,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단지이다. 닭머리 모양의 주구를 가지고 있는 주전자로 한성백제기 공주지역에도 중국의 도교사상이 전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흑유닭모양 단지는 반구호의 어깨 부분에 닭머리 모양의 주구와 손잡이를 붙인 형태로 천계형주전자라고도 한다. 옛 중국 설화에 도인들이 단약을 먹고 신선이 될 때 닭과 새 모이를 쪼아 먹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닭모양 단지는 신선사상이 풍미하던 중국 서진(西晉)부터 남조때까지 많이 사용되다가 그 이후에는 점차 줄어든다. 동진때까지는 몸통이 둥근 모양이 중심을 이루다가 남조에 들어서면 목이 길어지는 등 실용적인 모양으로 변해간다. <출처:공주박물관>

공주 수촌리 유적
공주 수촌리 백제 고분군은 공주시에서 북쪽으로 10km 떨어진 작은 구릉의 서쪽 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철기시대의 무덤부터 한성백제시기의 널무덤, 돌덧널무덤, 굴식돌방무덤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무덤 안에서 당시 공주지역 최고 세력가들이 사용하였던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귀걸이, 각종 말갖춤과 무기류, 토기류 등 화려한 백제 유물과 중국제 도자기들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수촌리 유적은 한성백제의 중앙정부가 지방을 간접적으로 통치하고 있던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 4~5세기 충남지역의 지방 세력이 백제와의 관계를 강화하며 점차 백제의 중앙귀족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관모, 공주 수촌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복원한 금동관모.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신발, 공주 수촌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복원한 금동신발

OLYMPUS DIGITAL CAMERA
목걸이, 대롱옥, 곱은옥, 구슬, 공주 수촌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구슬목걸이, 공주 수촌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제허리띠꾸미개, 공주 수촌리, 백제

수촌리 금동제허리띠꾸미개는 표면에 귀신 혹은 짐승얼굴문양이 주조로 표현된 매우 정교한 공예품으로 한성백제 중앙에서 제작해 지방 유력자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나 주변국에서는 이보다 이른 시기의 귀면 허리띠꾸미개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5세기 전반 무렵에는 중국과 구별되는 백제적인 금속제 허리띠가 제작되었고, 이로서 이 시기부터는 백제적인 관복문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귀걸이, 공주 수촌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살포, 공주 수촌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쇠투겁창, 화살촉, 공주 수촌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도끼, 공주 수촌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발걸이, 공주 수촌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재갈, 공주 수촌리, 백제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