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불교는 침류왕 때(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중국 동진(東晉)으로부터 들여왔다. 백제의 지배층이 사회통합차원에서 국가적으로 불교를 적극 수용하게 된 것은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 공주로 도읍을 옮긴 웅진백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성왕은 남조의 양나라로부터 불교 경전을 받고 기술자를 초빙하여 각처에 사찰을 세우고 등 불교를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태안과 서산의 삼존불상 등을 볼 때 중국 산동지방 불교의 영향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공주박물관에는 공주와 주변지역에서 출토된 불상을 비롯하여 불교문화재들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실제 웅진백제기 유물들은 거의 없는 편이며, 사비기 백제(7세기경)때 만들어진 공주의당보살입상(국보), 통일신라시대 공주지역의 독특한 불교문화를 보여주는 계유명천불비상(국보)과 서혈사 절터에서 출토된 석불좌상(보물) 등이 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도 공주가 지역의 중심지로 백제불교를 계승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다.
<금동보살입상, 국보 247호, 공주 송정리, 백제.>
공주시 의당면 송정리 절터에서 출토된 보살상으로 안정된 표현기법과 구슬장식, 연꽃무늬 대좌양식 등에서 7세기 백제 떄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의 불교
백제의 불교는 침류왕 1년(384) 중국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 전래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백제의 왕실과 지배귀족들은 고대국가체제 정비를 위한 새로운 사회통합의 방법으로 불교를 적극 수용하였다. 본격적인 불교의 발전과 장려는 웅진시대부터이며 사비시기에 크게 융성하게 된다. 특히 성왕은 공주와 부여에 대통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을 세우고 541년에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열반경 등의 경전을 요청하여 백제 불교를 크게 발전시켰다. 이후 성왕의 뒤를 이은 위덕왕, 법왕, 무왕 등도 불교를 깊이 신봉하였고 백제 전역에 능사, 미륵사, 왕흥사와 같은 많은 사찰을 세웠다. <출처:공주박물관>
금동여래입상, 공주 능암사지, 백제
도제불상대좌, 청양 본의리, 백제. 높이 1m의 거대한 불상받침으로 세련된 제작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불상대좌 양식은 일본 불상받침에 전승되었다고 한다.
1986년 청양군 본의리에 있는 백제시대 가마터에서 파편 상태로 수습되었으며, 복원결과 높이 100cm, 폭280cm의 초대형 불상받침으로 밝혀졌다. 좌우 대칭의 옷자락이 가지런한 아름다움을 보이며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주름처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법륭사 금당석가삼존 등 일본의 불상 받침에 전승되고 있어 당시 백제 불교미술의 국제적 위상을 살펴볼 수 있다. 제작시기는 백제 말기인 7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출처:공주박물관>
금동여래입상, 공주 공산성, 통일신라
금동여래입상, 금산 음지리, 통일신라
금동보살입상, 공주 명곡사지, 통일신라
금동여래입상, 공주 공산성.당진 용연리, 통일신라.
불비상(佛碑像)
불비상은 비석처럼 돌을 다듬어 앞면이나 옆면에 부처를 조각하고 발원문을 새겨 놓은 불상을 말한다. 불비상은 중국 남북조시대부터 시작하여 당나라까지 형식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통일신라 초기의 충남 연기군 일대에서 성행하여 ‘연기파불비상’이라고도 부른다. 현재 국내에 불비상은 국립공주박물관이 소장한 것을 포함해서 7점이 알려져 있다.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된 ‘계유명천불비상’은 충남 연기군의 한 암자에서 발견되었고 국립 청주박물관에 전시된 ‘계유명불상’과 ‘기축명불비상’, ‘반가사유사상’ 등 8점은 연기군 비암사 석탑 상층부에서 1966년 발견되었다. 이 외에 연기군 연화사에 2점, 동국대박물관에 1점 소장되어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계유명 천불비상, 국보108호, 연기 서광암, 통일신라. 비석에 불상을 새긴 불비상으로 공주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불비상은 특히 통일신라초기에 연기지역에서 성행하였다고 하며 청주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는 ‘계유명천불비상’과 함께 7점이 남아 있다고 한다.
지붕모양을 한 덮개돌과 연꽃무늬받침. 몸체를 각각 따로 만든 비석모양이며, 앞면에 작은 불상들이 수없이 새겨져 있다하여 천불비상이라 한다. 불비상의 아래쪽에 있는 삼존불의 좌우에는 “계유(癸酉,673)년 4월15일에는 백제 유민 250명이 국왕대신, 7세부모, 법계중생을 알리기 위하여 이 불상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통일신라 초기 백제 옛 땅에 백제불교와 미술의 전통이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출처:공주박물관>
서혈사지 석불좌상, 보물979호, 공주 서혈사지, 통일신라, 통일신라시대의 세련된 조각기술을 보여주는 불상이다.
공주시 웅진동 서혈사터에서 발견된 부처상이다.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하여 다리 위에 얹었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리고 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린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대좌는 여덟잎의 연꽃을 표현하였으며, 대좌를 받치는 지대석에는 극락의 천사인 천인과 인간의 얼굴을 한 상상의 새 가릉빈가를 새겼다. 전체적인 자세와 세부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공주박물관>
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삼국통일
백제와 고구려의 압박을 받아 위치를 느끼던 신라는 중국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한다. 백제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난하였지만, 백제 방어군을 격파하고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킨 뒤 웅진성을 포위한 신라.당 연합군에게 결국 항복하고 만다.(660년) 백제 멸망 이후 백제의 충신들과 각 지방의 세력들은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킨다.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첨으로 군사를 일으켜 한때 200여 성을 회복하며 4년간 활동하였으나 결국 신라.당 연합군에 의하여 진압되어 백제는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이후 당나라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공주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는 등 백제의 옛 땅을 지배하려 했디만 결국 신라에 의해 밀려나고 충남 지역을 비롯한 백제의 영토는 신라에 편입된다. 이로서 이 지역에는 백제 문화의 잔영 위에 신라의 문화가 이입된 새로운 문화가 융성하게 된다. <출처:공주박물관>
도깨비 얼굴모양 기와, 공주 주미사지, 통일신라
연꽃무늬 수막새, 공주 주미사지, 공주 서혈사지, 통일신라
비석조각, 공주 주미사지, 통일신라
보상화무늬 수막새, 공주 금학동, 통일신라
연꽃무늬 암막새, 공주 금학동, 통일신라
넝쿨무늬 암막새, 연꽃무늬 수막새, 공주 주미사지, 통일신라
치미, 공주 주미사지, 통일신라,
충남의 통일신라 토기
충남지역 곳곳에서 발굴 조사된 통일신라시대 유적에서는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특히 이 시기 무덤에서는 백제의 무덤에 많이 부장되었던 항아리, 바리, 개배 대신 당시 유행하던 도장무늬로 장식된 합, 병, 완 등 다양한 신라토기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보령 진죽리와 공주 가교리에서는 도장무늬로 장식된 토기를 만들었던 통일신라시대 가마터가 발견되어 백제지역에서도 본격적인 신라 문화가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충남지역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 토기
굽항아리, 연기 와촌리, 통일신라
합, 공주 소학동. 공주 금성동, 통일신라
인화문 병, 인화문 완, 아산 명암리, 통일신라
병, 공주 귀산리, 통일신라
병, 보령 진죽리, 통일신라

계룡산 지도, 조선, 종이에 수묵
계룡산을 그린 회화식 지도이다. 꽃봉오리가 피어나는 모습을 하고 있는 개화식의 구도로서 계룡산의 주요 봉우리와 사찰, 촌락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계룡산의 주요 산봉우리는 진한 묵으로 윤곽을 표현하고, 마른 붓질을 반복하여 명암을 주었으며, 대둔산은 엷은 묵으로 처리하였다. 그림 아래에는 계룡산의 어원 및 풍수에 관해 기록하고 있다.
공주목 지도, 복제품, 조선 1872년, 종이에 채색
채색 공주목 지도이다. 지도와 지리지가 결합된 전형적인 사례로서 산천, 창고, 사찰, 고정 등이 기록되어 있다. 공산성의 성벽과 중군영 등 조선시대에 만든 군사시설이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현존하는 고지도 중 공산성의 모습을 가장 자세히 표현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돌곰, 공주 웅진동, 백제
무령왕릉 맞은 편 남쪽 구릉의 경사면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하여 선명하지 않은데, 본래부터 강한 선으로 조각되지 않은 것 같다. 목을 움츠리고 머리를 약간 위로 향하고 있으며, 앞다리는 세우고 뒷다리를 구부려서 앉아 있는 모양이다. 입을 다물고 양쪽 눈은 뜨고 있으며, 양쪽 귀는 뒤로 붙어 있다. 곰나루와 가까운 이 지역은 예로부터 곰과 관련된 지명이나 전설이 만히 남아 있다. 이 돌곰이 출토된 곳이 바로 곰사당이 있던 자리로 생각된다. <출처:공주박물관>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