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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박물관 선사고대문화실] 마한과 한성백제기 충남지역

삼한(三韓)은 서쪽 마한에 54국, 동쪽 진한에 12국, 동남쪽 변한에 12국이 연맹체를 이루고 있었다고 중국 역사서에 남아 있다. 그 중 마한(馬韓)은 호서, 호남 지방에 존재한 연맹체로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4세기 중반까지 존재하였다. 마한은 54개의 작은 성읍국가들의 연맹체로 그 중 천안지방에 근거를 둔 목지국이 중심이 되었다.  지금도 교통의 중심지인 천안삼거리 인근에 위치한 천안 청당동에서는 무덤도랑을 지닌 묘제, 동물형상의 허리띠고리, 한반도를 대표하는 무기인 고리자루칼을 비롯한 철제무기, 공구 등이 출토되었다. 마한의 집터들은 에서는 발전된 토기제작기술을 보여주는 유물들과 유리구슬을 제작했던 거푸집 등이 출토되어 촌락에서 다양한 생산활동을 했음을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마한지역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무덤주인의 권위를 나타내는 칼을 비롯한 무기류, 생활용품에 해당하는 각종 토기들이 부장품으로 묻혔다. 중국과의 교류가 많았던 지역답게 중국의 영향을 받은 토기 제작기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마한의 무덤
기원 전후부터 300년경까지는 백제.신라.고구려가 소국을 통합해가던 시기이다. 그러나 충남지역에는 독자적인 마한(3~4세기)의 문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마한에서는 시신을 묻을 때 나무널과 나무덧널을 이용하였다. 무덤 주위에 ‘ㄷ’ 또는 ‘ㅁ’자 모양의 도량을 돌린 주구묘를 만들었다. 이러한 무덤 형태는 충청도의 내륙과 중서부지역에 주로 분포항였지만, 최근에는 경기도 남부와 전남지역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무덤에는 각종 철기와 함께 둥근바닥 항아리.깊은바리.두귀단지.겹입단지.새모양토기.톱니무늬 토기 등 지역색이 강하게 나타나는 특징적인 토기가 주로 껴묻혔다. 이 시기에는 철기의 제작이 보편화되고, 중국 전국계와 낙랑의 새로운 토기제작기술이 도입되었다. 모양을 만들기 위한 물레와 토기의 겉면을 다듬기 위한 두드림법이 사용되었으며, 소성온도를 높일 수 있는 밀폐된 가마의 도입으로 단단한 회색계열의 토기가 만들어졌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표주박모양 토기, 공주 하봉리, 마한

OLYMPUS DIGITAL CAMERA네귀달린 단지, 공주 남산리 출토, 마한

OLYMPUS DIGITAL CAMERA겹아가리단지, 두귀달린 단지, 공주 남산리 출토, 마한

OLYMPUS DIGITAL CAMERA손잡이잔, 천안 두정동, 마한

OLYMPUS DIGITAL CAMERA둥근바닥항아리, 공주 하봉리, 마한

OLYMPUS DIGITAL CAMERA바리, 연기 용호리, 마한

OLYMPUS DIGITAL CAMERA고사리모양장식검(연기 용호리), 둥근고리 자루칼(연기 응암리), 마한. 한반도지역 고유의 고리자루칼이다. 장식이 거의 없는 초기 고리자루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쇠도끼(공주 남산리. 천안 용원리. 공주 분강.저석리), 쇠투겁창(천안 용원리, 공주 분강.저석리), 둥근고리자루칼(천안 청당동), 마한

OLYMPUS DIGITAL CAMERA덩이쇠, 공주 남산리.대전 구성동, 마한

OLYMPUS DIGITAL CAMERA쇠낫, 천안 용원리, 마한

마한의 집터,
마한의 집터들은 구릉지대에 위치하며, 방형의 집터 안쪽 네 모서리에 각각 1개씩의 기둥을 세운 형태이다. 한성백제 지역에서 확인되는 ‘凸’ 또는 ‘呂’자형 집터와는 다른 또렷한 지역적 특징을 보여준다. 집터에서는 계란모양토기.시루.깊은바리 등 취사와 관련된 일상생활용기를 비롯하여 사발 등의 식기와 아궁이테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마한문화를 대표하는 두드림무늬토기는 정선된 점토띠로 그릇모양을 만들고, 그릇 안쪽에 받치모루를 대고 토기 겉면을 두드리며 단단하게 한 뒤, 물레로 형태를 다듬과 바닥을 마무리한 토기이다. 이러한 작업과정은 바탕흙이 굳기 전에 진행해아 하므로 숙련된 동작이 필수적이다. 그릇의 표준화에 따른 대량생산, 밀폐된 가마로 높은 온도에서 단단하게 구워져 오래 사용할 수 있게 된 점 등은 토기 제작기술이 이전보다 훨씬 발전된 결과라고 할 수있다. 또한 집터에서 출토된 유리구슬 제작과 관련된 거푸집은 집터 안에서 다양한 생산활동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받침모루, 아산 갈매리, 마한

OLYMPUS DIGITAL CAMERA목걸이, 천안 용원리.연기 응암리, 마한

OLYMPUS DIGITAL CAMERA유리구슬 거푸집, 아산 갈매리, 연기 응암리

거푸집은 광물을 녹여 만든 금속이나 유리 등의 액체를 제품으로 만들기 위한 모형이나 틀이다. 유리는 석영.탄산소다.석회암 등을 섞어 높은 온도에서 녹인 후 급히 얼리면 생기는 투명한 물질이다. 유리구슬을 만드는 방법은 유리를 가열하여 말랑해지면 막대에 감아 대롱모양으로 만든 다음 기위로 자르거나, 거푸집으로 작은 구슬을 한꺼번에 만드는 방법 등이 있다. 전시품은 둥근 유리구슬을 만드는 거푸집이다. 갈색 연질의 네모난 점토판에 벌집처럼 구멍을 뚫고, 구멍 가운데에 작은 구멍을 뚫어 구슬의 구멍이 생기도록 철심 혹은 나무침을 세운 후 유리액체를 부어 구슬을 만들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얼굴무늬 손잡이, 천안 두정동, 마한

OLYMPUS DIGITAL CAMERA귀때토기, 대전 구성동, 마한

OLYMPUS DIGITAL CAMERA바리(아산 갈매리), 깊은 바리(공주 장원리), 마한

OLYMPUS DIGITAL CAMERA시루, 대전 송촌동, 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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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모양토기, 공주 장선리, 마한

OLYMPUS DIGITAL CAMERA아궁이틀 편, 아산 갈매리, 마한

아궁이는 방고래에 불을 넣거나 솥이나 가마에 불을 지피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틀은 아궁이의 앞부분을 장식하는 것으로, 마한.백제지역에서는 대부분 흙으로 만들어졌다. 모양은 ‘∩’자 모양의 점토판에 돋을띠로 표현된 무늬가 있다. 백제에서는 서울 풍납토성이나 부여 군수리 등 도성의 집터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어 상당한 위상을 갖는 집단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문헌에 남아 있지 않은 백제에서의 취사(炊事)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서상 부장리 고분군
한성백제(기원전18년~475년) 시기인 4~5세기 충남지역은 여전히 마한의 문화가 남아 있었다. 그렇다면 당시 해안교통로의 거점이자 철과 소금의 주요 생산지였던 태안반도의 맹주는 어느지역이었을까? 2004~2005년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 고분군 발굴조사에서는 마한의 전형적인 ‘ㅁ’자형 도랑이 돌려진 분구묘 13기가 확인되었는데, 한변의 길이가 20~40m에 이르는 것도 있다. 무덤 안에서는 금동관모와 신발, 자루솥, 고리자루큰칼, 중국제 자기편, 흑색마연토기 등으로 대표되는 위세품과 함께 짧은목단지, 넓은입항아리 등의 백제토기류, 큰칼.창.도끼.손칼 등의 철기류, 금동귀걸이.곱은옥.구슬 등의 장신구류가 다량 출토되었다. 서산 부장리 고분군에서는 마한의 전통묘제인 ‘ㅁ’자형 도랑이 돌려진 분구묘와 함께 한성백제에서 하사한 최고 수준의 위세품이 출토된 것이다. 이로 보아 당시 이 지역의 지배세력은 한성백제에 철과 소금을 공물로 바친 대가로 태안반도의 맹주로 부상할 수 있었으며, 한성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산에 대해서는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朝)에 마한 54소국 가운데 치리국국(致利鞠國)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부장리 고분군은 2006년 사적 제475호로 지정되어 사적공원으로 정비되어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충남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무덤 서산 부장리고분군(사적475호)이다. 2000년 이후 이곳에 임대아파트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청동기시대에서 백제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덤, 주거지 증 다양한 유적이 발굴되었다. 무덤은 토광묘에서 목관묘까지 다양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산 부장리 고분 출토 유물. 서산 부장리고분군에서는 백제의 지방세력을 대표하는 형태의 다양한 유물들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특히 5호분에는 공주지역에서 볼수 있는 금동관모, 철제초두, 각종구슬을 비롯하여 환두대도, 철검, 도끼, 각종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한성백제기 지방의 유력한 세력으로서 마한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둥근바닥항아리, 서산 부장리, 백제. 상당히 큰 규모의 항아리이다. 중국과 교류가 많았던 이 지역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OLYMPUS DIGITAL CAMERA병모양토기, 짧은목단지, 곧은입단지, 서산 부장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세발토기, 흑색마연토기, 서산 부장리,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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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부달린투겁창, 쇠투겁창과 창고달, 쇠투겁창, 서산 부장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쇠낫, 삼칼, 서산 부장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끌, 손칼, 서산 부장리,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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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손칼, 쇠도끼, 서산 부장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쇠도끼, 서산 부장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세잎장식둥근고리자루큰칼, 두잎장식둥근고리자루큰칼, 백제. 장식이 들어간 고리자루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쇠자루솥, 서산 부장리, 백제. 두(鐎斗)라고 불리는 액체를 데우는데 사용하는 용기이다. 청동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곳에서 출토된 것은 철로 만든 것이다. 왕릉이나 지배층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는 유물로 상류층에서만 사용하는 것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유리구슬, 유리곱은옥, 박유리구슬, 서산 부장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금동귀걸이, 서산 부장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흑옥달린귀걸이, 서산 부장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유리 대롱옥, 서산 부장리, 백제

OLYMPUS DIGITAL CAMERA금동관편, 천안 용원리, 백제

관이나 관장식은 머리에 쓰는 장식품인 동시에 의관제의 중요한 품목으로 정권의 질서체계를 상징한다. 백제의 금동관은 역U자 형태로 관 윗부분에 대롱모양의 장식이 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이 금동고나편은 천안 용원리 9호 석곽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백제 중앙으로부터 사여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출처:공주박물관>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

 

 

 

 

[공주박물관 선사고대문화실] 선사시대 충남지역

국립공주박물관 2층은 “충청남도 선사고대문화실”이라는 이름으로 충청남도 지역에서 출토된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유물들을 연대순으로 전시하고 있다. 충청남도는 금강 본류와 크고 작은 지천 주변에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해 살아왔다. 공주 석장리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알려진 구석기시대 주거유적지이도 하다. 또 태안반도와 서해안 일대는 중요한 연안 해상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었기때문에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중국, 일본과 문화교류가 활발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문화가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석기.신석기시대에는 공주 석장리를 비롯하여 대전 둔산동 등 금강 중류지역에 충남지역의 주요 유적지들이 분포하고 있다. 반면에 청동기시대에는 한.중.일 해상교역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는 천안, 아산, 당진 등 서해안가 가까운 지역에 크게 부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충청, 경기, 호남지역에는 50여개의 소국들이 마한이 성립되었으며 그 중 천안지역이 마한연맹체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금강변에 위치한 선사시대 유적지인 공주 석장리 유적지이다.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 오랜기간 동안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1960년대 미국인 대학원생이 처음으로 발견한 이래 우리나라 고고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유적지이다.

충청남도의 선사시대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한 충청남도는 낮은 구릉지대가 많고 금강과 같은 큰 하천과 그 지류 주위에 작은 평야가 발달하여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다. 구석기시대에는 주로 금강 중류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한 뗀석기를 사용하는 구석기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고, 신석기시대에는 해안가와 내륙지역까지 영역을 확장하였다. 청동기시대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제작하기 시작한 토기의 사용과 농경이 크게 발전하였고 더욱 큰 집을 짓고 대규모의 부락을 이루며 살았다. 기원전 3세기부터 중국에서 철기 제작기술이 전래되어 다양한 철제 도구들과 정교한 청동기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회.경제.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충남 지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남서부 지역에는 기원 전후부터 마한으로 불리는 50여개의 소국들이 성립되었다. <출처:공주박물관>

구석기시대의 뗀석기
충남지역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주로 금강 중류의 대전.공주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이 가운데 공주 석장리유적은 1964년 발굴조사에서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된 구석기시대 유적으로, 한국 구석기시대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다. 구석기시대는 사냥과 채집에 따라 이동생활을 시작하였고, 처음에는 찍개와 긁개, 여러면석기 등 단순한 뗀석기를 사용하다가 차츰 돌 재질이 다양해지고, 만드는 기술도 발달되면서 돌날이나 슴베찌르개 등 정교한 도구가 만들어졌다. 금강유역에서 출토되는 뗀석기 가운데 슴베찌르개는 한반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다른 지역에 비해 출토 량이 월등히 많아 우리나라 뗀석기문화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몸돌과 격지(공주 석장리), 찍개(대전 둔산동), 찌르개(대전 대정동), 슴베찌르개(대전 용산동, 공주 석장리), 구석기시대. 금강유역을 중심으로 비교적 넓은 지역에서 구석기시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토기와 석기
신석기시대(8,000~1,500BCE)가 되면 고기잡이.사냥.채집.농사.가축 기르기 등 다양한 생산 활동에 따라 한 곳에 정착해 살면서 토기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충남지역에는 신석기시대의 일반적인 모양인 뾰족바닥의 빗살무늬토기와 땅을 갈 때 사용하는 돌보습, 실을 뽑아내는 가락바퀴, 열매나 곡식을 가공하기 위한 갈돌과 갈판이 주로 출토되었다. 충남지역은 큰 하천과 하천으로 흘러드는 지류가 많고, 구르이 발달하여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였기떄문에 해안 지역뿐만 아니라 내륙에서도 신석기시대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충남지역에서 조사된 집터는 후기에 해당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일부 전.중기유적도 있다. 집터는 가운데에 화덕이 설치된 움집이며, 빗살무늬토기는 바닥에 무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빗살무늬토기, 아산 성내리, 신석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빗살무늬토기, 서산 대죽리, 신석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가락바퀴, 아산 성내리.서산 대죽리, 신석기시대

가락바퀴는 솜이나 털 등의 섬유를 꼬아 실을 뽑아내는 방적기구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되었으며, 시대와 장소에 따라 재료나 형태가 다양하다. 가운데에 뚤려 있는 구멍에 축이 될 막대를 끼워 고정시킨 뒤, 손으로 섬유를 잡고 가락바퀴를 돌리면 섬유가 꼬이면서 실이 만들어 진다. 이렇게 만든 실로 가죽을 꿰매어 입거나 간단한 형태의 옷감을 만들어 옷을 지어 입은 것으로 보인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돌보습, 공주 장원리,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의 토기
청동기 시대에는 납작바닥에 적갈색이나 황갈색을 띠는 민무늬토기가 나타나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모양과 크기 등이 다르게 만들어졌다. 충남지역에서는 빠른 시기의 집터에서 입부분에 간단한 선이나 구멍 등의 무늬가 있는 토기와 겹입토기가 출토되며, 늦은 시기의 원형집터나 돌널무덤에서는 송국리식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또한 고운 흙으로 빚어 겉면을 흑연 등의 광물질이나 산화철을 발라 문질러 광택을 낸 검은간토기나 붉은간토기도 있다. 붉은간토기는 둥근 바닥에 짧은 목의 단지와 굽다리가 달린 토기가 많다. 그리고 검은간토기와 함께 주로 돌널무덤에서 출토되는 덧띠토기는 입부분에 둥근 띠가 덧붙어 있다. 한편 굽다리가 달린 독특한 모양의 토기는 고운 흙으로 빚었으며, 겉면이 비교적 매끄러운 것이 특징이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충남지역의 청동기시대 토기. 청동기시대에는 민무늬토기를 비롯하여 기술발전을 보여준 검은간토기, 붉은간토기 등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는 지역적인 특색을 보여주는 토기들이 만들어졌는데, 송국리형 토기는 충남지역을 대표하는 토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겹아가리토기, 대전 용산동, 청동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구멍무늬토기, 천안 백석동, 청동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바리, 부여 송국리. 아산 와우리, 청동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붉은간토기, 공주 장선리, 청동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굽단지, 천안 백석동.천안 운전리, 청동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붉은간토기, 대전 신대동, 청동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덧띠토기, 대전 궁동.금산 수당리, 초기 철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덧띠토기, 청양 분향리.아산 권곡동, 초기 철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검은간토기, 금산 수당리,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의 간석기
청동기시대에는 이전 시기보다 석기의 제작기술이 크게 발달되며, 종류는 보다 다양해지고 기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본격적인 쌀농사가 시작되면서 수확을 위한 돌칼이 새롭게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반달모양에서 점차 세모꼴로 변한다. 또한 예리하고 날렵하게 가공되어 살상력이 높아진 화살촉.간돌감.창.달모양 도끼 등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며, 특히 간돌검과 달모양 도끼는 권위를 상징하는 도구였다. 한편 마을이 번성하면서 집을 짓는데 필요한 공구류가 다량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목재를 얻기 위해 삼림 벌채가 늘어나면서 돌도끼의 사용이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목재를 가공하기 위한 홈자귀.대팻날.돌끌 등은 청동기시대에 새로이 만들어진 석기들이다. 이외에 도구이 날을 갈기 위한 숫돌, 실을 뽑아내는 가락바퀴, 곡식이나 열매를 가공하기 위한 갈판과 갈돌도 만들어졌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기시대의 간석기. 청동기시대에는 제작기술의 발전으로 일상생활 등에는 다양한 석기들이 만들어졌다. 충남지역은 한.중.일 해상교역로의 거점으로 초기 성읍국가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천안, 당진, 대전, 공주 등 다양한 지역에서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돌칼, 1.3,부여송국리, 2.아산 시전리, 4~6.천안 백석동, 청동기시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생활도구로 농사에 사용되었던 돌칼이다. 초기에는 반달모양돌칼이 주로 사용되었다가 점차 세모형태로 바뀌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돌살촉, 공주 화월리, 서천 한산면, 청동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돌검, 공주 남산리, 대전 추동리, 청양 신흥리, 금산 음대리, 대전 신대동, 청동기시대. 전국적으로 고루 출토되는 형태로 지배층의 권위를 나타내는 유물이다. 청동검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바퀴날 도끼, 천안 백석동, 청동기시대. 돌검과 함께 지배층의 권위를 나타내는 유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숫돌, 대전 대정동, 청동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갈돌과 갈판, 공주 장원리, 대전 관평동, 청동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홈자귀, 공주 신영리. 당진 자개리, 청동기시대

홈자귀는 머리 부분에 홈이 파인 도끼로 각종 도구나 집 등의 시설물을 만들 때 필요한 나무가공용 도구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타나는 독특한 석기로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날은 한 쪽에만 있으며, 반대쪽에는 ‘ㄱ’자 모양으로 굽은 나무자루에 끈으로 견고하게 묶을 수 있도록 오목한 홈이 패여 있다. 청동기시대에는 농경을 중심으로 하는 정착생활로 마을의 규모가 커지고, 각종 시설물의 건설이 널어나면서 홈자귀와 같은 나무 가공용 도구가 발달하게 되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돌도끼(천안 용곡동, 공주 장선리, 아산 명암리), 돌끌(아산 명암리), 청동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검을 비롯한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들. 지배층의 권위를 나타내는 유물들이 대부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검, 대전 비례동.서산 탑곡리, 청동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대롱옥, 아산 갈매리, 공주 남산리, 공주 화월리, 청동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쇠투겁창, 검, 칼자루끝장, 공주 수촌리유적 출토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

OLYMPUS DIGITAL CAMERA청동방울, 당진 우두리, 초기 철기시대.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

[공주박물관 무령왕릉실] 정지산 유적 출토 유물

정지산 유적은 송산리고분군이 있는 송산의 북쪽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가 웅진을 도읍으로 하던 시절에 제사시설이 있었다고 하며, 제사관련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무령왕릉 묘지석에는 무령왕과 왕비가 사망후 상당기간 이곳에서 빈전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가 웅진에 도읍을 정했던 기간은 비교적 짧았기때문에 실제로 많이 사용되었다는 볼 수 없다. 출토된 유물 또한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공주 정지산 유적 발굴 조사 당시 사진. 발굴.조사 결과 건물들이 많지 않은 제사유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지산 유적
무령왕릉의 묘지석에는 무령왕과 왕비가 사망한 후 약 16~27개월 동안 빈장(殯葬, 매장하기 전에 특정 장소에서 일정 기간 동안 장례를 치름)을 하였음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왕릉의 위치를 남서쪽, 장례지를 서쪽이라 하였는데 공산성을 기준으로 대략 남서쪽에 무령왕릉이, 서쪽에 정지산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정지산유적은 그 위치와 성격, 규모 및 출토 유물 등을 통해 무령왕과 왕비의 장례지로 가장 유력하게 추정되고 있다. 무령왕릉이 자리한 능선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6년 발굴조사 결과 백제 웅진도읍기의 대규모 제사지였음이 확인되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공주 정지산 유적. 공산성 서쪽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백제의 제사유적지이다. 특별한 건물터 흔적은 남아 있지 않고 안내표지판과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그릇받침. 전형적인 제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그릇받침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굽다리접시

OLYMPUS DIGITAL CAMERA뚜껑

OLYMPUS DIGITAL CAMERA접시

OLYMPUS DIGITAL CAMERA뚜껑접시.등잔

OLYMPUS DIGITAL CAMERA무늬있는 벽돌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

[공주박물관 무령왕릉실] 웅진백제기 대외교류를 보여주는 유물

무령왕릉이 조성되었던 웅진백제기에는 중국 남조와의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었다. 고분의 형태도 북조의 영향을 받은 고구려 석실분과는 달리 벽돌로 쌓은 전축분(塼築墳)이다. 또한, 출토된 유물 중에서도 중국 남조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도자기, 남조 양나라에서 발행한 동전인 오수전, 위세품 성격의 청동으로 만든 그릇 등이 있다.

또한 남조에서 성행했던 도교사상이 반영된 유물들 또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입구에 세워진 무덤을 지키는 석수(石獸), 토지신에게 묘지터를 샀다는 의미로 지불한 돈을 의미하는 오수전과 매지권, 한나라 도교 사상이 반영된 그림이 새겨진 청동거울과 은제그릇 등이 당시에 성행했던 도교사상이 잘 보여준다.  이들 유물들을 통해 당시 중국 남조와의 교류관계를 잘 살펴볼 수 있다.

중국 도자기 – 문물 교류의 상징
백제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도자기들은 모두 중국 동해안에서 한반도 서해안으로 이어지는 문화교류의 바닷길을 통해 수입되었다. 무령왕릉에서는 청자단지 2점과 흑갈색 유약을 입힌 병 1점, 6개의 잔 등 9점의 중국 도자기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도자기는 중국 남조 여러 왕조의 수도였던 남경을 중심으로 한 절강지방의 청자 가마, 특히 월요(越窯)에서 많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양(梁)나라에서 가져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도자기는 중국에서도 매우 귀하게 여기는 물품이었으며, 백제에서도 소유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위세품의 성격을 띠고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뚜껑 단지. 중국 남조 양나라에서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청자 뚜껑이 있는 자기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청자 단지.

OLYMPUS DIGITAL CAMERA오수전(五銖錢, 중국동전), 양나라 무제때 만든 것으로 523년 무령왕의 죽음에 즈음하여 양나라로부터 백제에 전해진 것이다. 무령왕릉 입구 묘지석 위에 놓여 있었다.

유리구슬
무령왕릉에서는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유리구슬이 출토되었다. 색조는 담황색.감색.녹색.황색.청색 등이며, 그 형태와 크기가 매우 다채롭다. 발굴 당시 바닥 곳곳에 흩어져 있어 정확한 원상과 용도를 추정하기는 힘들다. 다만 삼국시대의 다른 대형 무덤에서 출토된 유리구슬의 예로 보아 주로 목걸이 등을 포함한 장신구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유리구슬이 얽힌 직물편이나 신발조각 등을 통해 의복과 같은 직물이나 금속공예품 등을 장식하는데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색유리구슬. 왕에서 출토된 다양한 색깔의 구슬들. 흩어져 있어 그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의복 등을 장식하거나 장신구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은구슬. 옥

OLYMPUS DIGITAL CAMERA곱은옥. 곱은옥은 곡옥(曲玉)이라고도 부른다. 쉼표(,)모양을 하고 있으며 초승달, 또는 동물의 치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한반도와 일본에서 크게 성행하였다. 금관이나 귀걸이 등 장신ㄱ에 매달아 사용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금장식 곱은옥. 골무나 모자모양을 하고 있는 금장식을 머리에 씌웠다.

OLYMPUS DIGITAL CAMERA모자모양 금장식

모자형장식과 곱은옥
기록에 따르면 백제지역에서는 금, 은 못지 않게 옥을 귀하게 여기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무령왕릉에서는 목걸이 등에 사용한 조그마한 유리구슬 이외에 곱은옥에 금제모자형장식을 씌워 아름답게 꾸민 옥들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 무령왕릉 출토 곡옥은 유리로 된 것과 경옥(비취)으로 된 것 두가지가 있는데, 경옥제 곡옥은 녹색바탕에 흰 반점이 섞여 있고 은은한 색과 광택이 있으며 잘 갈려진 고급품에 속한다. 또한 경옥제곡옥에는 금제 모자형장식을 씌우기도 하였다. 따로 분리되어 있는 금제모자형장식들도 여러 개 있는 것으로 보아 금모장식을 한 곡옥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모자형장식은 모양에 따라 모자모양인 것, 탄환모양인 것, 관(管)모양인 것으로 나뉘어지는데 모두 얇게 펴서 만든 금판을 오려 붙여서 형태를 만들고 그 표면에 금알갱이와 가는 선을 하나하나 누금(鏤金)하였다. 가는 선을 누금하여 만든 원 안에는 주(朱, 붉은 물감)를 감입(嵌入, 표면을 파내고 물감을 채우는 방법)하여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장식.

OLYMPUS DIGITAL CAMERA꽃모양 금장식

꽃모양 금장식은 달개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두 가지이고 다시 크기에 따라 큰 것과 작은 것으로 구별된다. 크기가 큰 것은 왕과 왕비의 머리와 허리부분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옷이나 천에 붙였던 장식으로 여겨진다. 또한 소형의 꽃모양 금장식 가운데 꽃잎수가 여섯이면서 꽃잎 사이의 구멍이 두 개인 꽃모양은 그 모양이 무령왕으이 베개와 발받침의 장식에 쓰였던 것과 같다. <출처:공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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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모양의 금.은장식

OLYMPUS DIGITAL CAMERA여러가지 장식 구슬

청동거울
무령왕릉의 청동거울은 널방안에서 발견되었는데 왕쪽에서는 방격규구신수문경과 의자손수대경(宜子孫獸帶鏡)이, 왕비쪽에서는 수문경(獸文鏡)이 나왔다. 이러한 형태의 거울은 경주 황남대총이나 무령왕릉 등 일부 유적에서만 발굴되고 있으며 특권적 권위를 지닌 왕이나 그에 버금가는 신분의 사람들만 소유하고 있었던 위세품이었다. 또 같은 틀에서 만들어져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거울들이 우리나라와 일본의 고분에서 함께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거울이 국가간의 교류를 통해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거울, 국보161호, 삼국시대 백제, 9개의 돌기가 있는 의자손수경과 한나라 수대경을 모방하여 만든 수대경이다.

거울 중앙의 꼭지를 중심으로 9개의 작은 돌기가 있다. 안쪽에는 크고 작은 원이 있고 그 사이에 7개의 둥근 돌기와 네 명의 신선, 세마리의 상서로운 동물무늬가 사는 선으로 새겨져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거울의 앞면, 복제품, 처음 만들었을 당시 청동거울은 황금색을 띄지만, 시간이 흘러 녹이 슬면 녹색으로 변하며 광택을 잃게 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청동거울, 국보161호, 삼국시대 백제. 후한의 거울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방격규구신수문경(方格規矩神獸文鏡)은 중앙의 꼭지를 중심으로 4각의 구획이 있고 각각의 모서리에 4마리의 짐승과 이들을 사냥하는 신선을 표현한 뒤 바깥쪽에 두 줄의 원을 만들었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출처:공부박물관>

등잔
무령왕릉에서는 6개의 잔이 나왔다. 그 가운데 5개는 무덤 안을 밝힌 감실 안에 놓았던 등잔으로 타다 남은 심지와 그을린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나머지 깨끗한 잔 1개는 술잔과 같은 그릇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잔들은 주로 청자를 구워내던 중국 남조 월주요 계통의 가마에서 바탕흙과 유약만 약간 달리하여 구워낸 것으로 보인다. 그 제작 시기와 자기의 종류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다양하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등잔. 중국 남조에서 구워진 것으로 보이는 등잔이다. 등잔으로 사용한 흔적들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발견 당시 무덤안 감실이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청동다리미,

몸체에 긴 손잡이를 따로 만들어 붙인 형태이다. 고대의 다리미는 왕이나 귀족들이 묻힌 무덤에서만 나오고 있는데, 이것을 통하여 백제 왕실의 의생활을 엿볼 수 있다. 다리미 몸체 바닥에 모시와 같은 천조각이 붙어 있다. 무덤안에 넣을 때 특별히 직물로 감쌌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동수저. 무덤 입구에 놓여 있던 제기 중 하나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동그릇과 동수저

OLYMPUS DIGITAL CAMERA동그릇과 동수저

동그릇
동그릇은 권위의 상징물로 지배계층만 사용하던 것이었다. 이 중 동바리는 중국 강소성(江蘇省), 고령 지산동 등에서 비슷한 것들이 발굴되는데, 이러한 것들은 백제가 중국 남조로부터 수입하여 대가야에 전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동그릇.

OLYMPUS DIGITAL CAMERA동그릇.

OLYMPUS DIGITAL CAMERA동그릇.

OLYMPUS DIGITAL CAMERA등잔. 동으로 만든 등잔으로 도자기로 만든 것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제잔. 안쪽에는 물고기 그림이, 바깥쪽에 연꽃그림이 그려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제잔에 새겨진 그림.

은잔
왕비의 머리부근에 놓여 있었던 은으로 만든 잔이다. 잔과 뚜껑은 은으로 만들었고, 잔받침은 동으로 제작하였다 뚜껑의 꽃봉오리 모양 손잡이 아래를 금꽃잎으로 장식하였고, 뚜껑과 잔, 받침의 겉면에는 산과 골짜기.노니는 짐승.나무.연꽃잎.구름.용을 새겨 극락정토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은잔.

OLYMPUS DIGITAL CAMERA은잔 뚜껑에는 산과 골짜기,용 등 다양한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은잔에 새겨진 그림. 용, 봉황.나무,짐승, 구름, 연꽃잎 등이 새겨져 있다. 중국 남조에서 성행했던 도교의 영향을 받은 그림으로 여겨진다.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

 

 

[공주박물관 무령왕릉실] 무령왕비 관장식과 장신구들

무령왕릉에는 왕과 왕비가 나란히 누어 있었다. 묘지석에 따르면 왕이 죽은지 3년 후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무령왕과 마찬가지로 금제관식을 비롯하여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무령왕과는 달리 큰칼 대신 작은 손칼이 3점 있었으며, 귀고리, 은팔지, 목걸이 등 장신구들이 상대적이 많이 놓여 있었다. 출토된 장신구들은 웅진기 백제의 뛰어난 금속 공예기술과 예술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무령왕비는 사비기 백제를 이끌었던 성왕의 어머니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령왕릉 출토 유물들이 전시된 무령왕릉실.

OLYMPUS DIGITAL CAMERA무령왕비 금제관식(복제품), 국보155호, 삼국시대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관장식이다. 무령왕 관장식과 마찬가지 불꽃모양을 하고 있다. 관모에 꽂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중앙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무령왕비 금제관식.

왕비의 관꾸미개는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가 대칭형의 구도로 표현되어 있고, 달개는 달려 있지 않다. 비단으로 만든 관모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무령왕비 금귀걸이, 국보 157호. 무령왕비 금귀걸이는 2쌍으로 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짧은 2줄의 장식이 달려 있고, 끝에 탄환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령왕비 금귀걸이, 국보157호. 다른 1쌍은 탄황작식이 없이 잎사귀 모양의 장식과 둥근 옥이 달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령왕비 목걸이, 국보 158호, 삼국시대 백제. 목걸이는 마디가 9줄인 것과 7줄인 것 1쌍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9줄인 목걸이가 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무령왕비 목걸이, 누금기법을 사용하여 금알갱이를 붙여서 만든 화려한 목걸이다.

작은 고리를 여러 개 붙여서 속이 빈 공모양으로 만들고, 그 위에 다시 수많은 금알갱이를 누금기법으로 하나하나 붙여서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둥근 원판이 달려있는 귀걸이.

OLYMPUS DIGITAL CAMERA톱니모양의 금팔찌. 크기가 작아 왕비가 어린시절에 사용했거나 가족이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OLYMPUS DIGITAL CAMERA톱니모양 은팔찌.

OLYMPUS DIGITAL CAMERA고리모양 팔찌.

OLYMPUS DIGITAL CAMERA고리모양 팔찌

금.은팔찌
팔찌는 금으로 만든 것과 은으로 만든 것이 있고 바깥 테두리를 톱니모양으로 장식한 것과 고리로 연결한 것 등 그 형태가 여러가지이다. 특히 톱니모양 팔찌는 왕비의 오른쪽 팔목과 발받침의 북쪽에서 각각 한 쌍식 출토되었으며 그 크기가 매우 작아 눈길을 끄는데, 이 팔치의 지름이 약 3.8~4.5cm 정도여서 어른의 팔목에 끼우기에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아마 왕비가 어렸을 적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 무덤에 묻혔거나 왕비의 어린 자녀 등 가족이 가지고 있던 팔찌를 왕비의 무덤에 넣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무령왕비 은팔찌, 국보160호, 삼국시대 백제. 바깥쪽에는 용무늬를 안쪽에는 글씨를 새겨 놓고 있다. 글자는 팔찌의 주인, 만든 시기, 만든 사람의 이름이다. 제작수법과 조형미가 뛰어난 작품이다.

글자가 새겨진 팔찌로 왕비의 왼쪽 손목부분에서 발견되었다. 팔찌의 안쪽에 팔찌를 만든 때와 만든 사람의 이름, 팔찌의 주인 등 그 제작 연유에 대한 글을 세로방향으로 새겼다. 그 내용은 “경자년(520) 2월에 다리(多利)라는 장인이 대부인(大夫人), 즉 왕비를 위하여 230주이를 들여 팔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경자년은 왕비가 죽은 병오년(526)보다 6년 전이며 문장 마지막에 230주이(主耳)는 무게 단위였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무령왕비 장식손칼, 삼국시대 백제.

장식손칼
무령왕릉에서는 모두 4점의 장식손칼이 출토되었는데, 왕의 허리춤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금.은장식손칼 1점, 왕비 쪽에서 금.은장식손칼 2점, 은장식손칼1점이 출토되었다. 흔히 일반 손칼과는 달리 큰칼이나 금동신발 혹은 관식(冠飾) 등과 발견되어 둥근고리큰칼과 마찬가지로 위세품의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인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유리동자상, 삼국시대 백제. 호신용으로 중국 남조시대에 이런 물건을 지니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중국 남조와의 문화교류를 잘 보여준다.

왕비의 허리부근에서 두 점이 발견되었다. 머리를 깎고 손을 합장한 모습이 표현되어 있으며 한 점은 하반신이 파손되어 있다. 이 동자상은 왕비가 살아 있을 때 부적과 같이 몸에 지지고 다니거나 장신구에 매달아 왕비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수호신의 성격이 짙어 보인다. 남조시대 중국에서도 이런 물건을 몸에 지니는 풍습이 유행하였는데 중국에서는 이를 ‘옹중(翁仲)’이라 불렀다고 한다. 같은 시기에 백제에서 이와 같은 동자상을 몸에 지녔던 것은 그 무렵 중국과 백제의 풍속이 많이 닮아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 동자상은 불교의 승려 또는 도교의 도인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왕비와 어금니

무령왕릉에는 왕과 나란히 왕비가 누워 있었다. 왕비의 묘지석은 왕비가 왕의 사후 3년이 지난 병오년(526) 11월 천명(天命)대로 살다 돌아가셨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무령왕릉 발굴 당시 어금니 한 개가 발견되었고 이 치아는 치의학 전문가들의 분석결과 10대와 20대 시절에 건강하게 자란 30대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천명을 다했다는 묘지석의 기록과 분석 결과가 사뭇 동떨어진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이 치아는 사랑니로 치아가 마모되는 정도만으로 나이를 추정하는 것은 힘들다는 연구 결과가 제시되기도 했다. 무령왕과 함께 묻힌 왕비는 무령왕의 아들로 왕위를 이은 성왕의 어머니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왕비는 내세에서의 안식을 비는 극진한 장례속에 무덤에 묻혔을 것이다. <출처:공주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금동신발(왕비, 복제품)

OLYMPUS DIGITAL CAMERA발굴 당시 사진

OLYMPUS DIGITAL CAMERA유물을 정리하는 중 금동신발 조각이 새로 발견되어 복원예정이라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무령왕비 베개(복제품). 표면에 붉은 칠을 하고 금박을 붙여 거북등 무늬를 만들었다. 칸마다 비천상과 봉황, 어룡, 연꽃, 덩굴무늬를 그려 넣았다. 베개의 양 옆에 목제 봉황머리가 놓여 있었다고 한다. 윗부분에 갑, 을이라는 글자가 확인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발받침(왕비, 복제품)

무령왕비 베개의 묵서명
왕비베게 윗부분에 올려진 봉황 아래에서는 붓으로 갑(甲), 을(乙)이라고 쓴 묵서명이 보존처리중에 확인되었다,. 필체는 행서체로 왕비 지석에 새겨진 갑, 을의 서체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갑과 을은 10간의 첫째와 둘째를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두 마리 봉황의 암.수 성의 구별이나 좌.우를 가리키는 방위개념으로 쓰인 것으로 보여진다. 비록 갑,을 두글자에 지나지 않지만 웅진도읍기의 유일한 묵서 명문으로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은 것이라 하겠다. <출처:공주박물관>

<출처>
1. 국립공주박물관
2. 두산백과
3. 문화재청
4.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