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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김제군 관아, 동헌과 내아 (사적)

전북 김제시 교동에 위치한 옛 김제군 관아이다. 관아터에는 김제군수가 근무하던 동헌과 살림집인 내아, 동헌에 딸린 작은 정자인 피금각이 남아 있으며, 관아근처에 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동헌은 조선중기 숙종 때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건물은 앞면 7칸, 옆면 4칸으로 지방 관아 건물 중 비교적 큰 편이다. 살림집은 내아는 ‘ㄷ’자형 안채만 남아 있다. 피금각은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군수로 재임할 때 지은 것으로 그 규모나 형태가 전남 담양에 있는 정철 후손들이 지은 송강정과 비슷하다.

김제는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특히 조선중기 이후 농업생산력을 기반으로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다. 유력한 정치세력을 배출하지는 않았지만 경제력을 바탕으로 종4품 군수가 고을 수령으로 파견된 지역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관아 건물도 다른 지역에 비해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역내 서원이 많지 않아 향교도 비교적 큰 규모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제시 도심에 남아 있는 옛 김제군 관아. 지방 관아 건물 중에는 비교적 큰 규모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김제군수 집무공간인 동헌. 앞면 7칸에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비교적 큰 규모의 동헌 건물로 중앙부처나 감영 동헌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겹처마와 익공계 공포를 사용하고 있는데 건축수법이나 자재가 고급스럽다. 농업생산력이 풍부했던 김제군 관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동헌

SANYO DIGITAL CAMERA동헌 뒷면. 한쪽에만 온돌방을 두고 있다.

김제동헌
이곳은 조선시대 김제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맡아보던 청사로 동헌이라 하였다. 김제동헌은 조선 현종 8년(1667)에 세워 근민헌이라 칭하여 오다 숙종 25년(1699)에 동헌을 고쳐지어 사칠헌으로 개명하였다가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 초까지 김제읍사무소로 사용되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형태로 기둥, 처마, 지붕에 쓰인 부재나 장식이 장중하여 건물의 높은 품격과 관아의 위계를 볼 수 있다. 현존하는 관아 중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는 경우가 매우 드문 예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높게 평가 받아 2007년 7월 3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근민헌이란 편액은 백성에게 가깝게 있는 관청이란 의미로 사적 지정을 기념하여 제작되었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동헌 앞 언덕에 세워진 작은 정자인 피감각. 가운데 작은 온돌방을 두고 툇마루로 둘러싸인 형태를 하고 있다.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군수로 재직할 때 지은 것이라 한다.

SANYO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피금각.

SANYO DIGITAL CAMERA동헌 뒷편 김제군수가 거처했던 살림집인 내아.

SANYO DIGITAL CAMERA건물은 ‘ㄷ’자형을 하고 있는 안채만 남아 있다. 가운데 중문을 두고 양쪽에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는데 동헌 방향으로 방문과 툇마루를 두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내부는 가운데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들이 배치되어 있다. 지방관아 내아 건물 중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이다.

SANYO DIGITAL CAMERA내아에 딸린 작은 부엌. 일반 주택에 비해 부엌이 작은 편이다.

김제 내아
이곳은 조선시대 김제 고을의 수령이 기거하던 살림집이다. 관아는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사무처로 흔이 이를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의 처소이다. 김제 내아는 내동헌으로 조선 현종 8년(1667)에 세운 문화재로서 현재는 동쪽이 트인 <ㄷ>자형 안채 건물 하나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여러 부속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춧돌이나 기둥, 처마에 쓰인 목재가 모두 질이 좋고 정성껏 다듬은 것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동헌과 함께 남아 있는 내아로서 중요한 학술자료로 평가된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김제 관아에서 약 130 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김제향교. 중등교육기관을 담당하던 곳이다. 김제 지역에는 유력 양반세력이 없어 서원이 발달하지 않아 오랜 기간 교육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

 김제 옛 관아(동헌.내아), 사적 482호, 전북 김제시 교동
김제 옛 관아는 조선시대 지방행정의 치소로서 도시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동헌과 내아가 함께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매우 드문 사례이다. 현재 김제관에는 동헌과 내아, 피금각이 남아 있으며 비교적 온전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어 당대의 지방행정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실례가 되고 있다. 김제군 수령의 공무집행 공간이었던 동헌의 경우 1667년(현종 8) 김제군수 민도가 처음 세우고 이를 근민헌이라 칭하였으며, 1699년(숙종 25)에 중수하여 명칭을 사칠헌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그러나 1667년 이전에 이미 김제 동헌에 대한 시문이 전해지고 있어, 건립시기는 수령의 살림채인 내아(내동헌)과 함께 1500년대 중반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1633년(인조 11)에 지어진 피금각은 송강 정철의 아들 정홍명이 김제 군수 재임 시 동헌에서 업무를 마친 후 가야금과 바둑, 서책을 읽으며 휴식하기 위한 공간으로 지어졌다. 김제 관아는 현존하는 동헌, 내아, 피금각 이외에 외삼문과 내삼문, 호적고, 사령층 등이 김제지방도(1872년)에 보이며 외삼문의 경우 중층 문루형식에 상층엔 징벽루, 하층엔 벽지아문이라 편액하였다. (안내문, 김제시청, 2018년)

<출처>

  1. 안내문, 김제시청, 2010년,2018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19년

전라도 태인현 관아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에 남아 있는 옛 태인현 관아 건물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로는 태인현감이 근무했던 동헌과 관아에서 설치했든 큰 규모의 누각건물인 피향정(보물)이 남아 있다. 동헌은 조선후기 순조 때 (1816)에 새로 지은 건물로 <청녕헌>이라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은 앞면 6칸으로 지방관아 동헌 중에는 그 규모가 크고 웅장하다. 당시 전라감영 선화당을 지은 이름난 목수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형태나 제작수법 등이 상당히 뛰어난 건물이다. 관아에서 큰 행사를 치루기 위해 설치했던 피향정 또한 그 규모가 크고 제작수법이 뛰어나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정자건축으로 손꼽힌다.

태인현은 백제 때 처음 설치되었던 태산현과 인의현이 조선초 태종 때 합쳐서 생긴 조선시대 지방행정조직이다. 부안.고부.정읍.김제 등 주변지역과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로 산악지대에서 넓은 호남평야가 시작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 최치원이 고을 수령을 지냈으며, 부근에 최치원과 정극인을 모신 무성서원이 있다. 태인동헌은 동학혁명당시 농민군이 점령했던 곳으로 전봉준의 농민군 주력이 태인동헌 뒷산인 성황산전투에서 패하자, 이 곳에서 군대를 완전히 해산하였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옛 태인현 관아. 태인현감이 근무하던 동헌 건물만 남아 있다. 뒷편 객사가 있던 자리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SANYO DIGITAL CAMERA태인동헌. 앞면 6칸으로 지방관아 건물 중에는 비교적 크고 웅장하게 지었다.

SANYO DIGITAL CAMERA오른쪽 3칸은 넓은 대청마루가, 오른쪽 3칸은 온돌방이 있다.

SANYO DIGITAL CAMERA<청녕헌>이라 적힌 현판.

SANYO DIGITAL CAMERA서까래는 겹처마를 하고 있으며, 지붕을 받치는 공포에서 이 건물의 지은 목수의 뛰어난 솜씨를 알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온돌방 옆 1칸은 책이나 문서 등을 보관하는 다락방으로 사용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바깥쪽에서 본 모습.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지붕을  상당히 높게 만들었으며 구조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잘 지은 건물임을 알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태인현 읍치가 있던 태인면소재지. 피향정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으며 뒷편으로 동학군이 마지막 결전을 벌렸던 성황산이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태인현 읍치 가운데 위치한 피향정(보물 289호). 관아에서 공식행사를 위해 설치하는 누각으로 남원 광한루와 함께 호남지방을 대표하는 누각건축물이다.

SANYO DIGITAL CAMERA피향정 앞 마당에 모아놓은 태인현 고을 수령을 역임한 인물들의 공덕비이다. 제일 안쪽에 동학혁명의 발단이 되었던 고부군수 조병갑의 아버지 조규순의 공덕비가 있다.

태인동헌,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성리
이 건물은 조선시대 태인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보던 청사이다. 이 동헌은 조선 중종 때 태인현감 신잠이 세웠으며, 현존 건물은 순조 16년(1816)에 다시 세운 것이다. 건물 정면에는 고을을 편안하게 잘 다스린다는 뜻의 <청녕헌>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전설에 따르면 전라감영의 선화당을 지은 목수가 3천냥의 비용으로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여 지은 건물이라 한다. 이 동헌은 현존하는 조선시대 동헌 중에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건물 가운데 하나이다.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전라좌수영 본영

전남 여수시 군자동 일대에 있었던 전라좌수영 본영이다.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이 심했던 남해안 전라도와 경상도에는 수군절도사가 상주하는 본영을 각각 2곳을 두었는데 전라좌수영은 전라도 서쪽을 담당하는 수영이었다. 전라좌수영은 조선초 성종 때(1479) 순천 오동포에 처음 설치되었으며, 1895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수영에는 둘레 1.13 km의 수영성이 설치되었는데 현재는 성벽 일부만이 남아 있다. 성내에는 80여동의 건물, 2024호의 민가 등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객사 건물이었던 진남관(국보 304호)만이 남아 있다.

전라좌수영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이 수군을 이끌면서 왜군을 상대로 해전에서 승리를 이끌면서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임하면서 삼도수군통제영 본영이 되기도 하였다. 전라좌수영이 있었던 여수에는 거북선을 최초로 만든 선소(사적392호), 충무공을 추모하며 세운 타루비(보물 1288호), 사당인 충민사(사적381호), 전라좌수영을 지원했던 승병들의 머물렀던 흥국사 등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여수 구도심에 남아 있는 옛 전라좌수영. 객사였던 진남관(국보 304호)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옛 전라좌수영성 모형(유물전시관 내 전시). 여수 구항 일대 둘레 1.3 km의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정문 앞에는 함선들이 정박하는 선착장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모습. 내부에는 80여 동의 관아 건물과 2,000여 호의 민가가 들어서 있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여수 앞 바다에서 보이는 전라좌수영성 일대. 객사건물인 진남관이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수군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진남관에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전라좌수영성의 규모
전라좌수영성의 설치 당시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종실록』에 의하면 성종 21년 10월에 전라좌수영성을 수축하였는데, 당시의 규모를 둘레 3,634자라 했다. 또 1847년 기록인 『호좌수영지』에서는 성주위가 3,158포척이라 했다. 성종년간의 규모를 당시 영조척을 기준으로 산정하면 약 1.13 km가 되는데, 현재 성곽의 터로 실측된 1.74 km와 약간의 차이만 있다. 이는 이후 설치되는 치나 오성의 치수 산정 또는 측량방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전라좌수영 관아 문루인 망해루.

OLYMPUS DIGITAL CAMERA망해루에서 옛 선착장으로 이어지는 길. 망해루에서 바다까지는 250 여 m 정도의 짧은 거리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출입문.

OLYMPUS DIGITAL CAMERA전라좌수영 객사건물이었던 진남관(국보 304호), 앞면 15칸, 옆면 5칸의 상당히 큰 건물이다. 궐패를 모시는 객사이지만 전라좌수영 소속 지휘관들이 모여 회의를 하거나 수군훈련을 지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가운데 정청부분. 다른 지방 관아 객사와는 달리 좌.우익랑을 두지 않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내부. 벽체를 두지 않고 내부는 넓은 마루로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에서 내려다 보이는 여수 앞바다. 지금은 건물로 막혀 있지만 선박들의 움직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전라좌수영 본영, 여수
여수가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불리게 된 것은 1579년(성종 10) 순천 내례포의 수군 만호영을 설치하면서 기존에 있던 해남의 수영을 ‘전라우도수영’, 순천의 신설 수영을 ‘전라좌도수영’이라고 하면서 부터다. 1593년부터 1601년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기도 했던 여수는 조선시대 400년간 조선수군의 본거지로서 구국의 성지로 전승의 사명을 다한 곳이며, 지금까지 이순신장군의 기백과 충정 정신이 도도히 살아 숨쉬는 역사의 고장이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아래 전라좌수영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유물전시관.

OLYMPUS DIGITAL CAMERA난중일기(국보 76호, 복제품), 난중일기는 이순신장군이 임진란(1592~1598) 7년 동안 싸움터에서 손수 쓴 진중일기로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붙인 이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간첩(국보 76호, 복제품), 이순신장군이 친척들에게 친필로 보낸 편지를 수집하여 만든 책이다. 크기는 세로 33 cm, 가로 44 cm로 글씨는 한문 초서로 쓰여 있다.

충무공 이순신과 여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이곳 여수에 부임하여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전라좌수영의 본영이었던 여수는 거북선을 처음으로 출정시킨 곳인데, 1593년(선조 26) 8월부터 1601년(선조 34년) 3월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기도 하였다. 이순신의 수군이 옥포, 합포, 당항포, 율포, 노량, 명량, 한산도 등에서 거둔 승리는 조선이 왜적에게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여수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발자취가 곳곳에 문화유적으로 남아 있다. 거북선을 최초로 만든 선소, 공의 공적을 새긴 통제이공수군대첩비, 공을 추모하여 세운 눈물의 비석 ‘타루비’, 국내 최초로 세워진 이순신 사당 ‘충민사’가 있다. 또한 나라를 구하는데 앞장 선 승려들의 흥국사도 있으며, 송현마을에는 효성이 지극했던 공이 전쟁중에 어머니 변씨를 모셔와 보살핀 곳도 있다. ‘만약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없었을 것이다’라는 이순신의 글을 되새기게 하는 이곳 여수는 임진왜란 때 위태로운 나라를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곳이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임명장,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 부하장교에게 직책을 수여하는 명령서

OLYMPUS DIGITAL CAMERA좌수영 수군의 서본, 전라좌도 수군이 쓰던 글씨교본

전라좌수영 여수와 임진왜란 
여수는 한반도 남쪽 끝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 때문에 왜구의 침략경로에 노출되어 있어 왜구가 침략하기 시작한 고려 말부터 수군기지화 되다가 진례만호와 내례만호를 거쳐 성종 10년(1479)에 드디어 전라좌수영으로 승격되어 고종 32년(1895) 혁파되기까지 417년 동안 남해안 방어의 주력기지로 국방상 중요한 임무를 다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여수의 좌수영수군은 이순신장군과 함께 바다의 모든 왜적을 격파하였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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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소의 톱

여수 전라좌수영 31-20100911여수 선소 유적(사적 392호),  여수시 시전동에 있는 전라좌수영 조선소 유적이다. 이곳에서 거북선을 비롯한 함선들을 건조하였다.

여수와 거북선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 이순신장군이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에 부임하여 선소에서 거북선을 건조하는 한편 갖가지 병기를 시험하는 등 마치 왜적의 침입을 미리 알고 있는 듯 대비하였다.
난중일기: 인전년 3월 27일 <일찍 조반을 먹고 배를 타고 소포로 나가 쇠사슬을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여 종일 기둥나무 세우는 것을 보고 겸하여 거북선에서 대포 쏘는 것을 시험하였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철쇄방비시설. 전라좌수영 동쪽과 돌산도 사이의 해협에 선박의 통행을 막기 위해 방어시설이 설치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철쇄방비시설이 설치되었던 여수 종포와 돌산도 사이의 해협. 광양만을 통해 남해 노량해협으로 연결되는 연안항로의 주요 지점으로 지금은 거북선대교가 세워져 있다.

철쇄방비시설
이 방비시설은 전라좌수영의 동쪽 소포(지금의 종포)에서 건너편 돌산도까지 쇠사슬을 걸쳐 매어 적선의 야간통행을 막는 시설이었다. 우선 긴 쇠사슬의 중간중간에 큰 나무를 꿰어 부표로 사용하고, 이 쇠사슬을 바다에 가로질러 설치한 후 이것이 조류에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수면에 큰 돌을 달아매어 닻으로 사용했다. 『난중일기』에 ‘돌은 신생포(지금의 율촌)에서 떠왔고, 나무는 두산도(지금의 돌산)에서 베어 왔으며, 공은 거의 날마다 이 쇠사슬을 건너 매는 일을 감독했다’고 적혀 있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전라좌수영.삼도수군통제영.진남관
전라좌수영- 조선시대 남해안 방위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여수에 자리잡고 있던 수군영이다. 1479년(성종10) 처음으로 설치되었고, 1895년(고종32)에 없앴다. 현재 그 모습을 거의 잃은 채 성곽의 극히 일부와 진남관만이 남아 있다. 조선후기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전라좌수영 성안에는 건물 80여 동, 민가 2024호, 우물 9곳, 연못 1곳 등이 있었다고 한다. 봄이면 주변에 매화가 만발하여 매영성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삼도수군통제영-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의 수군을 이끌고 경상도 해전에서 여러번 승리를 거두어 1593년(선조 26)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수군을 다스리는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함으로써 전라좌수영이 1601년(선조 34)까지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었다.
진남관 –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세워진 수군의 중심기지였다. 여수지역에서 목재를 조달하여 건축하였으며,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단층 목조건물 중 가장 크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여수 진남관(국보), 전라좌수영 객사

전남 여수시 군자동에 있는 진남관(국보)이다. 여수에 있었던 옛 전라좌수영 객사 건물로 현존하는 단층 목조건물 중 가장 큰 규모이다. 건물 규모는 앞면 15칸, 옆면 5칸으로 전체 면적은 240평 정도이다. 잘 다음은 돌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민흘림 기둥읠 세웠는데 총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주심포와 다포계 양식을 절충한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인 객사와는 내부에 벽면으로 공간을 분리하지 않고 전체적으로 넓게 개방되어 있다. 천정은 서까래등이 노출된 연등천장이며 바닥은 우물마루이다.

임진왜란 직후 처음 건립되었다가 숙종 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크게 중건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학교 건물로 사용되면서 크게 훼손된 것을 해방 이후 현재의 모습으로 수리하였다. 객사는 지방 관아 중심 건물로 국왕의 궐패를 모시고 관아를 방문한 사신.관리 등이 머무는 장소이다. 조선시대 대부분 관아에는 객사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건물이 전라좌수영 객사인 진남관과 통제영 객사인 세병관이다. 통제영이나 수영에 큰 규모의 객사가 설치된 것은 진(鎭) 등 관할에 속한 함선이나 어선들을 모아 훈련을 했으며, 비상시에는 수영에서 모여서 함대를 편성하고 해전을 지휘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여수 진남관(국보). 앞면 15칸의 상당히 큰 규모의 건물로 전라좌수영 객사였다. 좌.우에 익랑을 두는 일반적인 객사 건물과는 달리 단일 건물로 되어 있다.

진남관의 규모
진남관의 정면길이는 54.5 m, 높이는 14 m, 넓이는 748 ㎡, 기중은 68개나 되는 우리나라 최대이 단층목조 건물로서 정면 15칸, 측면 5칸으로 우리나라에서 이와 같이 기둥사이가 15칸이나 되는 건물은 사찰의 회랑, 궁전의 행랑, 종묘의 정전 같은 건물을 제외하고는 합천 해인사의 장경판전과 진남관 단 두 곳 뿐이다. 진남관은 지방관아 건물이었다는 점에서 규모의 특징을 찾을 수 있으며 학술적,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건물이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낮은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OLYMPUS DIGITAL CAMERA기둥을 올린 막돌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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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과 공포, 서까래, 지붕 등의 모형.

진남관의 건축적 특징
진남관은 돌을 다듬어 단정하게 쌓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우고 벽체 없이 팔작지붕을 얹었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하고 그 사이사이에는 화반을 받쳤는데, 주심포와 다포양식을 절충한 것이다. 외부의 살미첨자는 쇠서와 함께 연꽃모양의 화문을 조각하여 하나의 장식판처럼 변형되었고, 건물의 전.후면에서 안쪽으로 제2주열에 높은 기둥들을 배열하여 그 위에 대들보를 가구하면서도 내부 곳곳에 내고주를 세워 중간을 받치게 하였다. 특히 기둥의 배열에서 건물 양쪽 끝 세번쨰 측면 기둥만은 열을 흐트러 놓아 내부가 복도처럼 보이지 않게 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모든 부재들이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지붕마루와 추녀 마루는 양성을 하였고, 네 추녀끝을 활주로 지탱하고 있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궐패를 모셨던 가운데 정청 부분.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내부. 좌.우 익랑 구분 없이 하나의 넓은 공간으로 되어 있다. 전라좌수영 소속 수군 지휘부가 이곳에 모여서 회의를 하거나 수군훈련을 참관할 수 있는 용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에서 내려다 보이는 여수항. 포구 주변에서 수군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휘할 수 있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여수항 앞 바다에서 보이는 진남관. 여수항의 랜드마크가 되었던 건물로 객사에서 보내는 신호에 따라 선박을 운행하면서 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남관의 용도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진남관은 전라좌수영의 객사로 건립되었다. 객사는 성 안의 중요한 위치에, 또는 관아와 함께 세워지는 중심 건물로 임금을 상징하는 전비와 궐패를 모셔놓고 관아의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 또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향궐망배’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지방 관리들이 임금을 가까이 모시듯 선정을 베풀 것을 다짐하던 곳이다. 또한 진남관은 외국의 사신과 중앙으로부터 왕의 명을 받들고 내려온 대신을 접대하는 건물로 사용하기도 했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진남관.

OLYMPUS DIGITAL CAMERA정청부분 내부. 내부는 통로로 사용되는 툇마루보다 약간 높게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내부 천정은 서까래 등이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기둥위에만 있는 주심포양식에 기둥 사이에도 화반을 받쳐두는 절충적인 형태의 다포계 양식을 사용하고 있다.

진남관의 축조
진남관은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사용하던 곳에 선조 32년(1599)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이 건립한 건물이다. 진남관은 정유재란으로 불타버린 진해루터에 세운 성의 중심 건축물로서 숙종 42년(1716)에 화재로 없어진 것을 숙종 44년(1718) 이제면 전라좌수사가 다시 세웠다. 1959년 5월 30일 보물 제324호로 지정되었다가 그 중요성과 가치가 인정되어 2001년 4월 17일 국보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진남관 야경.

진남관, 국보 304호
진남관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이 지휘소로 사용한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1599년(선조32) 통제사 이시언에 의해 건립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716년(숙종42) 화재로 불탄 것을 1718년(숙종44)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이순신 전사 120년이 되는 해를 기려서 다시 세운 것이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 여수공립보통학교 등으로 사용되면서 크게 훼손되었다. 남쪽의 왜적을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뜻을 가진 진남관의 중건기는 1953년 보수 공사 중에 발견되었는데, 글씨는 중건 당시에 이제면이 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면모가 곳곳에 서려 있는 핵심적인 유적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지방 관아 건물 중에서 가장 크다. 진남관 앞에 있는 2개의 돌기둥은 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있을 때 수군들의 밤 훈련을 위해 불을 밝힐 목적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당시에는 4개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이 전한다.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출처>

  1. 안내문, 여수시청, 201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전라도 낙안군 관아

전남 순천시 낙안면.외서면과 보성군 벌교읍 등에 있었던 옛 지방 고을이었던 낙안군(樂安郡) 관아이다. 낙안군은 삼국시대 백제의 분차군이었으며, 그 후 여러차례 이름이 바뀌었다가 고려 초 낙안군으로 바뀌면서 구한말까지 존재해오다 1908년에 폐지되었다. 원래 읍치는 벌교읍 부근이었으나 고려말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낙안읍성이 있는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낙안읍성에는 당시 쌓았던 읍성을 비롯하여 관아, 읍치에 거주했던 주민들이 살았던 오래된 가옥들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 있다. 낙안군 읍치는 조선시대 관아가 있었던 읍치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매우 높으며 옛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지로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지역의 관광 명소로 잘 알려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군 읍치였던 낙안읍성. 읍치는 남해안에서는 꽤 넓은 평야였던 낙안들판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순천과 연결되며, 북쪽으로는 승주, 구례를 거 남원과, 서쪽으로는 보성지역과 연결되는 교통로이다. 고려말, 조선초에 왜구의 침입이 많았던 지역으로 해안에서 비교적 안전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곳에 읍성을 쌓아 대비했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아 입구에 세워져 있는 임경업 장군 선정 비각, 인조 때 낙안군수를 역임한 임경업 장군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아 중심 건물인 객사 입구에 세워져 있는 홍살문.

OLYMPUS DIGITAL CAMERA관아의 중심이 되는 객사. 조선시대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며 이곳을 방문한 중앙관리가 머무는 숙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객사를 출입하는 객사문.

OLYMPUS DIGITAL CAMERA객사문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양쪽에 손님들을 수행했던 인원들이 묵을 수 있는 문간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객사문 안쪽으로 보이는 낙안 객사.

OLYMPUS DIGITAL CAMERA낙악객사. 가운데 궐패를 모시는 앞면 3칸 규모의 정청을 두고 양쪽에 각 앞면 2칸씩 익랑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객사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낙안읍성에서 볼 수 있는 관아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던 건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고 있는 가운데 정청 건물. ‘낙안지관’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동쪽편 익랑. 손님이 묵을 수 있는 온돌방 1칸과 손님과 연회를 할 수 있는 툇마루를 두고 있다. 문신들이 머무는 숙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서쪽편 익랑. 무신들이 머무는 숙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낙안객사.

OLYMPUS DIGITAL CAMERA뒷편 낙안읍성 성벽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낙안객사.

낙안객사
객사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곳으로, 외국이나 조정에서 파견된 사신의 숙소였을 뿐만 아니라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 때 고을의 관리와 선비들이 모여 망궐례를 올리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이 객사는 세종 32년(1450) 군수 이인이 건립한 후 인조9년(1631)과 철종 8년(1857)에 각각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는 객사 본전만 남아 있어 전체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1900년대 초까지는 모두 보존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객사본전은 1909년 이후 낙안초등학교 건물로 사용되어 안팎으로 변조된 부분이 많았으나 1982년에 다시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완벽한 좌우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지붕은 본사의 경우 맞배지붕이고, 양쪽 날개집은 팔작지붕이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입구에 세워져 있는 문루인 낙민루. 남원 광한루 등과 함께 호남지방에서는 유명한 문루였으나 한국전쟁 때 불타버려 남아 있지 않았는데 최근에 옛모습을 복원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낙민루 앞에 남아 있는 오래된 고목.

낙민루
낙민루는 조선 헌종 때 군수 민중헌이 중건하였다고 전해지며 1924년 일부분을 수리하였다고 한다. 남원의 광한루, 순천의 연자루와 더불어 호남의 명루로서 오랜 세월동안 희로애락을 나눈 누각이었으나 6.25전쟁 당시 불타 소실되었던 것을 1986년 기존이 초석 위에 17평 규모로 겹처마 팔작집의 누각형으로 복원하였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낙안군수가 집무를 보던 동헌을 출입하는 문. 양쪽에 행랑채를 두고 있는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쪽에서 본 모습. 양쪽 행랑채는 창고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낙안군수가 집무를 보던 건물인 동헌. 앞면 5칸으로 양쪽에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앞면 1칸씩 온돌방을 두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가운데 대청마루. 낙안군수가 송사를 다루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군수가 손님을 접견하고 일상적인 업무를 보는 공간인 온돌방.

OLYMPUS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동헌

OLYMPUS DIGITAL CAMERA마당에 재현해 놓은 재판을 받는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곤장을 맞는 모습도 재현해 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뒷편 읍성 성벽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동헌

동헌(시무당)
이 건물은 조선왕조 때 지방관청으로 감사, 병사, 수사, 수령 등이 지방행정과 송사를 다루던 곳으로동쪽은 수령이 서쪽방은 관리들이 사용하던 곳이다. 좌측에 있는 건물은 내아로서 수령의 안채로 사용하던 건물로 내동헌이라고 한다. 당초 건립 연대나 퇴락한 연대는 기록에 없어 알 수 없으나 문헌을 참고하여 옛 터의 발굴 조사와 전문가의 고증을 거쳐 1990년 복원하였다.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동헌 옆에 있는 군수의 생활공간인 내아를 출입하는 문.

OLYMPUS DIGITAL CAMERA생활 공간인 내아. 옛모습을 복원해 놓았다.

OLYMPUS DIGITAL CAMERA내아 대청마루.

OLYMPUS DIGITAL CAMERA건물 앞 통로로 사용되었던 툇마루.

OLYMPUS DIGITAL CAMERA온돌방 내부.

OLYMPUS DIGITAL CAMERA내아 뒷마당.

OLYMPUS DIGITAL CAMERA읍치 마을 가운데 위치한 옥사.

OLYMPUS DIGITAL CAMERA옥사 건물.

  1. 안내문, 순천시청, 2012년
  2. 위키백과,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