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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 황토현 전적(사적)과 만석보 옛터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에 있는 황토현 전적(사적)와 이평면 하송리에 있는 만석보 옛터이다. 황토현 전적은 동학농민군이 1894년 관군을 크게 물리친 곳이다. 동학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점거한 후 백산으로 진출하였는데 전라감사가 보낸 관군과 이곳 황토현에서 대치하였는데 밤을 이용한 기습공격으로 관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 싸움은 동학농민운동은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국내 및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전적지에는 당시를 기념하는 사당과 기념관, 기념물 등이 세워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정읍 황토현전적(사적 295호). 구한말 동학농민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계기가 되었던 황토현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은 고부읍치 북쪽 넓은 들판을 내려보고 있는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당시를 기념하는 기념관과 사당 등이 전적지임을 알려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황토현 전적지에 있는 사당.

SANYO DIGITAL CAMERA동학농민운동 기념관

황토현 전적지, 사적 295호, 전북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황토현 전적은 동학농민군이 관군에게 큰 승리를 거둔 곳이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맞서 봉기한 농민군은 1894년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조병갑을 응징했다. 그러나 사태 진정시키러 온 정부관리는 모든 잘못을 농민군에게 돌리며 그들을 탄압했다. 이에 수만 명의 농민군은 고부 북쪽의 백산에 집결하여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구한다는 기치 아래 번봉준을 대장으로 추대했다. 농민군은 1894년 5월 11일 새벽 이곳에 진을 치고 있던 관군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날 이곳은 동학 농민군이 남긴 정신과 함께 나라 사랑과 민주주의의 참뜻을 전하고 있다. (안내문, 정읍시청, 2018년)

만석보는 호남평야를 흐르는 동진강을 막아 물을 가두어 두었던 보가 있던 곳이다. 당시 고부군수 조병갑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보를 쌓고 물세를 거두어 들였다. 당시 고부군수의 학정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만석보를 때려 부수고 조병갑을 응징하면서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었다.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 옛터임을 알려주는 표지석.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는 호남평야를 흐르는 동진강과 정읍천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상류쪽에 정읍천을 막은 보가 있었는데 조병갑이 수세를 걷기 위해 이곳에 농민들을 동원하여 만석보를 쌓았다고 한다.

SANYO DIGITAL CAMERA상류쪽 정읍천을 막은 보가 있던 자리.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 조감도.

SANYO DIGITAL CAMERA동진강 제방

SANYO DIGITAL CAMERA제방 바깥쪽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호남평야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 옛터임을 알려주는 기념비

만석보터, 전북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이 터는 농사에 사용하기 위해 냇물에 둑을 쌓아 물을 가두어두던 보가 있던 곳이다. 원래 정읍천 상류에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민보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고종 30년(1893)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을 강제로 동원하여 만석보를 다시 쌓고 물세(水稅) 명목으로 많은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1894년 조병갑의 각종 폭정과 과중한 세금부담에 허덕이던 농민들이 마침내 일어나 이 만석보를 때려 부숨으로써 동학혁명의 발단이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첫 횃불이 타올랐던 이곳에 1973년 사적비를 건립하여 그 역사적 의의를 기념하고 있다.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SANYO DIGITAL CAMERA만석보에서 서쪽으로 4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봉준 고택(사적 293호)

<출처>

  1. 안내문, 정읍시청, 2010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9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소, 2019년

유숙이 그린 19세기를 대표하는 매화 그림(보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홍백매도(보물)이다. 조선후기 도화서 화원이었던 유숙(1827 ~1873년)이 그린 매화가 그려진 8첩 병풍이다. 화면전체에 가지를 펼친 매화를 섬세하면서도 힘찬 필치로 그렸다. 19세기에 유행한 매화그림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그가 그린 유일한 매화그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홍백매도(보물). 19세기에 유행했던 매화그림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화원으로 시사모임 벽오동에서 활동했던 유숙의 대표작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고목에 활짝 핀 매화를 섬세하면서도 힘있는 필치로 표현하고 있다.

화면 오른쪽 화단의 괴석 위에 백매와 홍매 세 그루가 서 있고, 매화 가지가 왼편으로 길게 이어지며 8폭의 화면을 채우고 있다. 병풍의 왼편에는 매화도를 감상하며 고향에 핀 매화를 그리워하는 내용의 중구구 명대 문인 예경의 시를 유숙이 옮긴 제시가 적혀 있다. 화원이자 중인시사 벽오사의 일원이기도 했던 그의 작품에서 조희룡 매화도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유숙의 매화도 화법과 18세기 후반 홍백매도의 유행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흥선대원군 이하응 초상화(보물)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초상화(보물). 구한말 최고의 어진화사 이한철이 그렸는데 다양한 복식을 하고 있는 5점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초상화에 나타난 흥선대원군의 복식은 <흑단령포본>, <흑건청포본>, <와룡관학창의본>, <복건심의본>, <금관조복본>이 있다. 의관과 기물이 매우 화려하며 당대 최고의 화가가 그린 초상화답게 표현이 매우 뛰어난 걸작이다. 초상화와 함께 초상화를 보관했던 영덩함 등이 고스란히 전하고 있어 당시 초상화와 관련된 문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4점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1점은 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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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점의 초상화 중 ‘와룡관학창의본’이다.>

일상생활에서 입었던 복식으로 주위의 화려한 기물들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50세 때 초상으로, 와룡관 학창의본이다. 주인공의 서탁 위에는 자명종, 벼루, 전갑, 인장과 인주합, 안경, 타구 등이, 협탁에는 네모난 향로와 시저병이 놓여 있다. 이 기물들은 모두 당시 문인들에게 애호되던 것이다. 자명종이나 청 황실에서 사용했다는 벼루 송화석연, ‘척사검’이라는 글자가 입사된 칼 등의 진귀한 물건은 대원군의 권위와 권력을 상징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창녕 척화비, 구한말 서양세력을 경계하고자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만옥정공원 내에 있는 척화비(斥和碑)이다. 구한말 대원군이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서양세력을 경계하고자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 중 하나이다. 창녕읍내 다른 곳에 있던 것을 해방 이후 이곳으로 옮겨 왔다. 이 비석을 세운지 백년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전국에 남아 있는 척화비가 많지 않아 역사적 의미는 큰 비석이다. 척화비에는 ”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게되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SANYO DIGITAL CAMERA창녕 만옥정 공원으로 옮겨져 있는 창녕 척화비. 당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훼손되어 지금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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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에 새겨진 글자.

SANYO DIGITAL CAMERA창녕 척화비가 있는 만옥정공원에는 신라 진흥왕이 창녕지역을 다녀간 후 세운 기념비인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가 있다.

창녕 척화비,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1866년(고종 3) 일어난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을, 1871년(고종 8) 신미양요에서 미군을 물리친 정부가 외국과의 화친을 경고하기 위하여 1871년 4월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 중의 하나이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하게되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내용이 전면에 큰 글씨로, “만년에 걸친 자손들에게 경계하노니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라는 내용이 좌측에 작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원래 창녕읍 교하리에 있던 것이 광복 후 만옥정 공원으로 옮겨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중앙박물관특별전, 미술 속 도시] 20세기 새로운 매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대한제국은 외국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 도입하였다. 사진은 새로운 시각매체로 각광을 받았으며 인쇄술의 발달로 신문과 잡지는 그림과 사진을 넣어 새로운 정보와 지식 전달 수단이 되었다. 당시 미술가들은 새로운 사진술을 배우고, 신문이나 잡지의 삽화가로 변신하기도 했다. 전시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사신기술을 도입한 화가출신 지운영의 사진을 비롯하여 당시를 대표하는 사진들을 전시했다.

OLYMPUS DIGITAL CAMERA<민영환 초상입체사진(1904년)과 입체경>

러시아에 다녀온 지 8년 후, 민영환은 대한제국의 군부대신으로 임명된 뒤, 서구식 예복을 입고 굳건한 자세로 앉은 초상사진을 남겼다. 가슴에 단 훈장들은 그의 지위를 분명히 드러낸다. 사진 아래에는 당시 세계 최대의 입체사진 제작 회사인 “Underwood & Underwood. Publishers”, “Sum Sculpture Works and Studios”의 로고와 글자가 인쇄되어 있다. 입체경으로 보기 위해 동일한 사진 2장을 나란히 붙여 제작한 것이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새로운 미술환경
개항 이후, 조선은 근대화를 위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외국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 도입하였습니다. 사진은 기록과 재현, 복제가 가능한 첨단의 시각매체로 각광받았고, 회화시장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서양식 인쇄술로 등장한 신문과 잡지는 그림과 사진을 넣어 정보와 지식을 쏟아냈습니다. 이제 최신 문물에 민감했던 미술가들은 사진술을 배워 사진관을 차리고 신문이나 잡지의 삽화가로 변신하게 됩니다. 제작소에서 기계에 의해 대량생산된 공예품들은 전통의 미술공예시장을 점령해갔습니다. 이처럼 서울의 도시 공간은 ‘근대’와 ‘식민지’라는 큰 변수를 거치며 익숙한 옛 것과 낯선 것이 뒤섞여 급속하게 변해갔습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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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초상사진, 조선 1896년, 고려대박물관>

조선말기 문신 민영환이 1896년 특명전권공사의 자격으로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이다. 사모와 관복을 착용했지만 러시아 황실로부터 받은 훈장을 왼쪽 가슴에 달고 어깨띠를 둘러 조선을 대표하는 관료임을 당당히 드러냈다. 사진 우측에 시를 적었는데, 이는 초상화에 찬문을 적는 전통적인 화면구성을 따른 것이다. 내용은 위풍당당한 사진의 모습과는 달리 열강들 사이에서 약소국의 지위를 절감했던 심정이 드러난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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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사진, 천연당사진관, 1910년대 초, 한미사진미술관>

김규진(1868~1933년)이 1907년에 설립한 천연당사진관에서 촬영한 젊은 청년의 초상 사진이다. 천연당사진관의 등장으로 왕족을 비롯한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초상사진은 다양한 계층이 향유하는 문화가 되었다. 그는 대대적으로 신문 광고를 내면서 고객을 확보했고,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는 한 달 동안 천연당사진관에서 천여 명이 넘는 사람이 사진을 찍었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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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경 초상사진, 경성사진관, 1926년, 한미사진미술관>

카메라를 향해 자연스럽고 환하게 웃고 있는 여인의 초상사진이다. 사진 속 주인공은 1921년 부인사진관을 개설한 조선 최초의 여류 사진가 이홍경이다. 그녀는 1926년 근화여학교에서 처음 개설된 사진과의 초대 교사를 맡아 교육자로도 활동하여 대표적인 직업여성으로서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인사동 경성사진관”이라는 문구와 “채상묵 심사제”라는 압인이 찍힌 것으로 보아 구한말 대표적 초상화가 채용신의 아들 채상묵의 경성사진관에서 찍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기생사진, 도비사진관(부산), 대한제국 1903년, 한미사진미술관>

기생이 서화를 그리는 모습을 찍은 사진으로, 교양인이자 예술인으로서의 기생의 면모가 드러난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미인 사진이 유행하여 게이샤 사진이 상품으로 널리 유통되었는데, 이에 익숙했던 일본인들은 조선의 기생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유명 기생들의 사진은 우편엽서로 제작되어 상품과 수집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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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영 초상사진, 헤이무라 도큐베이 사진관(추정), 1833년 경, 한미사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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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영 초상사진, 헤이무라 도큐베이 사진관(추정), 1833년 경, 한미사진미술관>

조선말기 서화가이자 사진술 도입에 앞장섰던 지운영의 초상사진이다. 그는 1882년 수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갔을 때, 고배의 헤이무라 도쿠베이(1850~1894)에게 사진술을 배웠다고 한다. 이 사진 모두 그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두 장 중 한 장은 흑립을 쓰고 도포를 입은 모습인데, 남바위를 쓴 것으로 보아 겨울임을 알 수 있다. 공수 자세로 비스듬히 취한 모습은 우리의 전통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자세이다. 반면 또 다른 사진에서 지운영은 서양식 복식으로 한껏 멋을 냈다. 둥근 테가 달린 모자에 털 코트, 구두 등은 1880년대 영국 신사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패션이었다. 카펫이 깔린 바닥, 의자와 스탠드, 배경 등 스튜디오 공간 전체에 이국적인 분위기가 풍기고, 지운영은 이전과 달리 자연스러운 자세로 당당히 서 있는 포즈를 취하였다. 익숙한 포즈에서 1884년 ‘촬영국’ 설힙 후 일본을 오가던 시기에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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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잡지, 대한제국, 1908년, 종이에 인쇄>

신문과 만화
사진과 함께 도입된 새로운 문물 중 하나가 서양식 인쇄술이다. 기계식 출판물의 생산은 사진.삽화를 대량 유포할 수 있는 근대적 시각 환경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점차 신문매체에서도 삽화와 같은 시각 이미지를 활용하기 시작했고, 시사만화 형태의 삽화를 제작하여 계옹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신문과 더불어 각종 단행본과 잡지류가 발간되었는데, 새로운 감각의 표지 그림이나 서체, 장정 도안을 보여주면서 새로운 대중 매체의 유형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서양화가 안석주(1901~1950년)는 조선일보, 시대일보, 신동아 등의 신문, 잡지에 글과 그림을 결합한 ‘만문만화’를 선보이면서 당시의 시대상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 조선일보 1928년 2월5일자부터 시작한 『가상소견』연작은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모던걸과 모던보이로 대표되는 이 시기 새로운 유형의 인물들과 자본주의 도시로 변모하는 서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신문 만화들은 도시의 화려함 뒤에 가려진 모습들을 드러내 보인 시대의 기록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도화임본, 이도영(1884~1923년), 1916년, 종이에 인쇄, 국립중앙도서관>

도화임본은 1907년 학부에서 편찬한 최초의 국정 미술 교과서 중의 하나로 총 4권으로 발행되었다. 전시된 본은 1916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장정 도화임본』이다. 여기에 수록된 그림은 모두 108개인데, 대부분 서화가 이도명(1884~1933년)이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서화교육의 확산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모-던껄의 장신운동, 안석주, 조선일보, 1928.2.5.>

『가상소견』연작은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모던걸과 모던보이로 대표되는 이 시기 새로운 유형의 인물들과 자본주의 도시로 변모하는 서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모-던뽀이의 산보, 안석주, 조선일보, 1928.2.7>

OLYMPUS DIGITAL CAMERA<꼬리피는 공작, 조선일보,1928.2.9>

OLYMPUS DIGITAL CAMERA<위대한 사탄, 조선일보, 1928.2.10>

이왕직미술품 제작소 공예품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조선의 고유한 전통적 고예미술의 진작’을 위해 1908년 창립한 황실 직영의 한성미술품제작소로 시작되었다. 1910년 일본의 강제병합에 의해 ‘이왕직소관미술품제작소’(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변경되었고, 1922년 민간에게 매각된 후, 1936년 해체할 때까지는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여기서 제작한 공예품에는 황실의 표상인 이화무늬가 장식되었고, 기물바닥에 ‘美’라는 명문을 찍어 미술품제작소의 제작품임을 밝혔다. 일상 생활용기나 제기를 작게 만든 장식용 소품은 상품용으로 인기가 높았다. 또한 일본식 기형에 우리나라의 전통 문양을 장식하는 등 시장의 취향을 반영한 공예품이 주요 제작상품이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이왕직소관미술품제작소 제작품목록, 1919년, 종이에 인쇄,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은제 장식용 소품, 이왕직미술품제작소, 20세기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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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무늬 꽃병, 20세기 전반, 국립고궁박물관, 등록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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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爵), 20세기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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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제 주전자, 20세기 초, 고궁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나전 칠 물가풍경무늬 반, 1915~1922년>

OLYMPUS DIGITAL CAMERA<백자 양각 장생무늬 합모양 문방구, 조선 19~20세기 초>

OLYMPUS DIGITAL CAMERA<’광무육년’을 새긴 백자 문방구, 대한제국, 1902년>

분원에서 만들어진 백자 문방구로, 바닥의 명문을 통해 ‘광무6년(1902) 음력 5월 양근분원’에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자 몸체에는 수파 위의 반룡, 삼태극무늬, 만자무늬, 매화와 대나무무늬, 모란과 월계화 등과 같이 1897년 대한제국 선포 후 국가의 위용과 재도약의 의지를 담은 여러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OLYMPUS DIGITAL CAMERA<’비원소’를 새긴 분청사기 찻그릇, 1918~1922년, 서대식 소장>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6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