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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불좌상 납석사리호(국보)

부산시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납석사리호(국보)이다. 지리산 암벽 아래 암자터에서 발견된 곱돌을 다듬어서 만든 항아리이다. 항아리 표면에 15행으로 비로나자불의 조성기록과 함께 영태 2년(신라 혜공왕 2년, 766년)이라는 기록이 있어, 우리나라 비로자나불 좌상의 제작이 8세기 이전에 시작되었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내용은 죽은자의 혼령을 위로하고 중생을 구제하기를 바라는 글로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납석사리호, 통일신라 766년, 국보>

OLYMPUS DIGITAL CAMERA<뒷면>

국보_제233-1호_산청석남암사지_석조비로자나불좌상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출처>

  1.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3. 위키백과, 2022년

통영 세병관(국보), 삼도수군통제영 객사

경남 통영시 문화동에 있는 세병관(洗兵館, 국보)이다. 조선후기 해군본부격인 삼도수군통제영 객사 건물이다. 건물 수리 때 발견된 상량문에 따르면 1605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수군 선박이 정박했던 통영항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세병이란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건물 현판은 제137대 통제사인 서유대(有大)가 쓴 글씨이다. 경복궁 경회루(국보), 여수 진남관(국보)와 함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건축물로 역사성과 건축적인 측면에는 가치가 큰 문화재이다.

통영 세병관 (국보) 03-20220221<통영 세병관(국보)>

건물은 앞면 9칸, 옆면 5칸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 단층건물이다. 궐패를 모시는 정청과 좌우 익랑으로 구성된 일반적인 관아 객사와는 달리 전체가 개방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통제영 휘하 장수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수군훈련을 지휘하기 위한 용도인 것으로 보인다.

통영 세병관 (국보) 02-20220221<정면에서 본 모습>

통영 세병관 (국보) 04-20220221<옆쪽에서 본 모습>

통영 세병관 (국보) 01-20220221<남서쪽 모서리에서 본 모습>

통영 세병관 (국보) 26-20220221<세병관 현판>

건물 자체가 경사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기단 2단으로 높지 않은편이다.  기단 윗편에는 전돌을 깔았으며 자연석 주춧돌 위에 민흘림 기둥을 올려 놓고 있다. 기둥 위에 올려진 지붕을 받치는 공포는 익공계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다.

통영 세병관 (국보) 18-20220221<건물 기단>

통영 세병관 (국보) 12-20220221<기둥을 올려 놓은 주춧돌>

통영 세병관 (국보) 14-20220221<아래쪽을 굵게 하여 만든 민흘림기둥>

통영 세병관 (국보) 10-20220221<지붕을 받치는 공포>

건물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벽면이 없이 넓은 마루로 되어 있다. 뒷편에는 높은 단을 설치하여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앞뒤쪽 1칸씩 폭을 좁게 하여 통로로 사용되는 퇴간역할을 하고 있다.

통영 세병관 (국보) 21-20220221<세병관 내부>

통영 세병관 (국보) 05-20220221<앞쪽에서 본 건물 내부>

통영 세병관 (국보) 20-20220221<내부 천장>

통영 세병관 (국보) 07-20220221<뒷편 통로 역할을 하는 퇴간>

통영 세병관 (국보) 09-20220221<내부 공간을 분리해 주는 벽면역할을 하는 분합문>

가운데에는 45 cm 정도로 단을 높게 만들어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했다. 일반적인 객사의 정청에 해당하는 공이다. 위쪽에 홍살을 세우고 분합문을 두어 공간을 분리하고 있다. 천장은 다른 곳과는 달리 소란반자를 설치했다. 뒷편에는 문인도가 그려져 있다.

통영 세병관 (국보) 25-20220221<국왕의 궐패를 모시는 공간>

통영 세병관 (국보) 24-20220221<천장에 설치된 소란반자>

 통영 세병관 (국보) 08-20220221<뒷편에서 본 모습>

통영 세병관 (국보) 06-20220221<옆에서 본 모습>

세병관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중심 건물로 통영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경사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어 웅장한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통영 세병관 (국보) 19-20220222<남쪽편 언덕에서 본 삼도수군통제영과 세병관>

통영 세병관 (국보) 16-20220221<세병관 출입문>

통영 세병관 (국보) 17-20220221<세병관에서 내려다 보이는 통영 앞바다>

세병관(洗兵館), 국보, 경남 통영시 세병로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客舍)로 제6대 통제사 이경준(李慶濬)이 이곳에 통제영을 옮겨온 이듬해인 1605년에 처음 세웠다. 제35대 통제사 김응해(金應海)가 1646년 규모를 크게 하여 다시 지었으며, 제194대 통제사 채동건(蔡東健)이 1872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정면 9칸, 측면 5칸의 9량 구조 단층 팔작집으로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지금 남아 있는 조선시대 건축물 가운데 바닥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 중 하나이다. 장대석 기단, 50개의 민흘림 기둥, 2익공 양식에 벽체나 창호도 없이 통칸으로 트여 있으며, 질박하면서도 웅장한 위용이 통제영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우물마루에 연등천장을 시설한 것이나, 안쪽의 중앙 3칸만은 한 단을 올려 전패단(殿牌壇)을 만들고 상부를 소란반자로 꾸민 후 3면에 분합문을 두어 위계를 달리하였다. 세병이란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세병관(洗兵館)>이라 크게 써서 걸어 놓은 현판은 제137대 통제사인 서유대(有大)가 쓴 글씨이다.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_

<출처>

  1. 안내문, 통영시청,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국보)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국보)이다. 조선후기 정조 때(1782년) 국왕의 명으로 창덕궁 규장각 부속 건물인 이문원 앞에서 설치되었던 측우대 이다. 대리석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 남아 있는 측우대 중 외형이나 새겨진 글씨 등이 매우 뛰어나다. 바깥에는 비를 기원하는 뜻으로 세종 때 예를 본받아 창덕궁에 측우기를 설치했다는 내용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정조 6년(1782), 보물>

OLYMPUS DIGITAL CAMERA<측우대에 새겨진 글자>

“측우기는 세종24년(1442)에 시작되었다. 구리로 만들고 높이가 1차5치이며 지름이 7치이다. 서운관과 각 도의 고을에 두어 비올 때마다 그 깊이를 재어서 보고하게 하였다. 선왕이신 영조 46년(1770)에 옛날 제도를 본떠서 창덕궁, 경희궁과 팔도와 한성부, 개성부에 만들어 두었다. …. 정조6년(1782) 여름에 경기도가 크게 가물어서 임금께서 예복을 갖추고 저녁이 지나도록 찬 곳에서 제사를 올리시고, 날이 샌 뒤에 옥문 밖에 대가를 머무르고 경한 범죄자를 모두 석방하였다. 이에 도성 안 선비와 부인들이 우러러 보고 감격해 하였다. 해가 지기도 전에 큰 비가 밤까지 내렸으니 우리 성상의 지극한 정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다. … 비의 양이 미흡하다 여기셔 내각에 분부하여 측우기를 창덕궁 이문원 뜰에 설치하고 기다리게 하였다. 이내 내리는 비에 흡족해 하시고 신에게 이 글을 쓰라 하시니 그 기쁨을 기념한 것이다. …. 이 측우기에는 임금과 백성들의 걱정과 기쁨이 얽혀 있으니 신 등이 감히 공손하게 지키고 삼가 기다리지 않으랴…” 심염조 지음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이문원(摛文院)은 조선시대 역대 임금의 어진, 어필 등을 보관하는 기관이다. 정조는 창덕궁 금호문 안쪽에 규장각 건물을 짓고 정청에 ‘摛文之院(이문지원)’을 써서 붙였다. 이 측우기는 이문원 앞 마당에 세워져 있던 것이다.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국보) 06-20220504<이문원 측우대 위치>

OLYMPUS DIGITAL CAMERA<창덕궁 규장간 정청 건물>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의 받침대이다. 네 측면에는 가뭄이 극심해지자 정조임금이 비를 기원하는 뜻에서 세종 대의 측우기를 원형으로 삼아 만들어 창덕궁에 두었다는 내용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황동 측우기는 보물561호 금영측우기를 복원한 것이다.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출처>

  1. 안내문, 고궁박물관, 2014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국보)

서울 종로구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국보)이다. 조선후기 영조 때 측우제도를 재정비하면서 전국 감영에 설치된 측우대 중 하나이다. 높이 46 cm의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 새겨진 명문을 통해 영조 46년(1770)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경상감영 선화당 앞 마당에 있던 것을 총독부관측소로 옮겼으며 현재는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다. 강수량을 측정하던 측우기는 남아 있지 않으나 공주 충청감영에 있던 측우기와 같은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1-20220504<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영조 46년(1770)>

‘측우대건륭경인오월조(測雨臺乾隆庚寅五月造)’이라고 새겨진 글자를 통해 영조 46년(1770)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2-20220504<옆에서 본 모습>

영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대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에 설치하라고 명하고, 8도와 유수부에도 설치하여 측우를 보고하게 했다. 이때 측우대의 규격을 공식화했다. 이 유물은 실록의 규격를 따르고 있어 당시 제도를 살펴볼 수 있게 해 준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3-20220504<측우기 설치에 관한 기록이 있는 영조실록>

팔도와 양도에 측우기를 만들어 우수의 다소를 살필 것 등을 명하다.

세종조(世宗朝)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창덕궁(昌德宮)과 경희궁(慶熙宮)에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도 모두 만들어 설치하여 우수(雨水)의 다소를 살피도록 하고, 측우기의 척촌(尺寸)이 얼마인가를 치계(馳啓)하여 알리도록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는 곧 옛날에 일풍 일우(一風一雨)를 살피라고 명하신 성의(聖意)를 본뜬 것이니,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듣건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측우기는 석대(石臺)를 만들어 안치(安置)하였다고 하였다. 금번 두 궁궐(宮闕)과 두 서운관(書雲觀)에 모두 석대를 만들되 높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1척이요, 넓이는 8촌이며, 석대(石臺) 위에 둥그런 구멍을 만들어 〈측우기를〉 앉히는데, 구멍의 깊이는 1촌이니, 경신년126) 의 신제척(新製尺)을 사용하라.”
하였다. 대체로 〈경신년의 신제척은〉 경신년에 삼척부(三陟府)에 있는 세종조 때의 포백척을 취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참고해서 자[尺]의 규식(規式)을 새로이 만든 것이다. (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 5월 1일,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4-20220504
<조선후기 헌종 때(1837년)에 제작되어 충청감영에 설치되었던 측우기>

OLYMPUS DIGITAL CAMERA<측우기가 설치되었던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 건물 앞에 측우대(복제품)을 볼 수 있다.>

대구경상감영측우대
후면에 ‘측우대, 건륭 경인년 5월에 만듦(測雨臺乾隆庚寅五月造)이라고 새겨진 명문을 통해 영조 46년(1770)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기상학자였던 와다 유지의 기록에 따르면, 본 측우대는 경상감영 선화당 뜰에 있다가 총독부 관측소로 옮겨졌다고 하며 이후 기상청에서 소장해왔다. 측우 제도는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영조의 대에 다시 실행되었는데, 본 측우대는 이때 재건된 측우 제도를 증명해주는 유물로서 의의가 있다. 영조는 세종 대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에 설치하라고 명하고, 8도와 유수부에도 설치하여 측우를 보고하게 했다. 이때 측우대의 규격을 공식화했다. 높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1자, 너비는 8치, 석대 위 둥그런 구멍의 깊이는 1치로 정했다. 포백척의 1자가 약 46cm인데 현재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높이가 46cm이다. 이를 통해 본 측우기는 영조 대의 측우제도가 반영되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 5월 1일,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국보), 현존하는 조선시대 측우기

서울 종로구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공주충청감영측우기(국보)이다. 조선후기 헌종 때(1837년)에 제작되어 공주에 있던 충청감영에 설치되었던 측우기이다.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 측우기로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71년 환수되었다. 중앙정부에서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던 기상관측 관련 제도와 기술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_ 국보01-20220504<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국보, 현종 3년(1837), 높이 31 cm 지름 15 cm>

이 측우기는 높이 31.2 cm, 지름 14.5 cm 크기이다. 표면에 금영측우기라는 명칭과 ‘높이 1자 5치, 직경 7치’라는 크기, 제작연대 등을 표현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도광정유제(道光丁酉製)’란 글자는 헌종 3년(1837)에 제작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조선 세종 때 강우량을 관측한 이래 그 전통이 이어져 왔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충청감영계록>에는 1836년부터 1895년까지 약 300건의 관측기록이 남아 있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_ 국보02-20220504<표면에 새겨진 글씨>

호조에서 아뢰기를,
“각도 감사(監司)가 우량(雨量)을 전보(轉報)하도록 이미 성법(成法)이 있사오니, 토성(土性)의 조습(燥濕)이 같지 아니하고, 흙속으로 스며 든 천심(淺深)도 역시 알기 어렵사오니, 청하옵건대,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짓고 쇠로 그릇을 부어 만들되, 길이는 2척이 되게 하고 직경은 8촌이 되게 하여, 대(臺) 위에 올려 놓고 비를 받아, 본관(本觀) 관원으로 하여금 천심(淺深)을 척량(尺量)하여 보고하게 하고, 또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水中)에다 박석(薄石)을 놓고, 돌 위를 파고서 부석(趺石) 둘을 세워 가운데에 방목주(方木柱)를 세우고, 쇠갈구리[鐵鉤]로 부석을 고정시켜 척(尺)·촌(寸)·분수(分數)를 기둥 위에 새기고, 본조(本曹) 낭청(郞廳)이 우수(雨水)의 천심 분수(分數)를 살펴서 보고하게 하고, 또 한강변(漢江邊)의 암석(巖石) 위에 푯말[標]을 세우고 척·촌·분수를 새겨, 도승(渡丞)이 이것으로 물의 천심을 측량하여 본조(本曹)에 보고하여 아뢰게 하며, 또 외방(外方) 각 고을에도 경중(京中)의 주기례(鑄器例)에 의하여, 혹은 자기(磁器)를 사용하던가, 혹은 와기(瓦器)를 사용하여 관청 뜰 가운데에 놓고, 수령이 역시 물의 천심을 재어서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게 하고, 감사가 전문(傳聞)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93권, 세종 23년 8월 18일 임오 4번째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측우기를 올려놓았던 측우대는 남아 있지 않으나 대구 경상감영에 있던 측우대가 남아 있어 그 형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_ 국보03-20220504<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영조 46년(1770), 높이 46 cm, 국립기상박물관>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_ 국보04-20220504
<옆에서 본 모습>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_ 국보05-20220504
<뒤에서 본 모습>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_ 국보06-20220504
<옆에서 본 모습>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_ 국보07-20220504
<위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공주 충청감영 선화당>

1837년(헌종 3)에 제작된 측우기로 측우대는 소실됐다. 조선시대 충남 지역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 (금영錦營) 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1915년경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에 의해 국외로 반출되었다가 1971년 환수되어 기상청에서 보관해왔다. 측우기는 땅에 스며든 물의 깊이를 측정하던 이전의 강우 측정 방식에서 벗어나 강수량을 정량적으로 측정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측우기는 중앙에서 제작해 전국 감영에 보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까지는 본 측우기만이 전한다. 조선시대 측우 제도를 증명하고 있는 본 측우기의 제작 시기와 크기 등이 중단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에 있다. 이는 측우기가 일련의 제작 지침에 따라 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측우기의 평균 높이는 31.2cm, 지름은 14.5cm인데 이를 주척으로 환산했을 때 명문에 표기된 ‘높이 1자 5치, 직경 7치’ 와 근사한 값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측우기가 주척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곧 측우기 각 동체(胴體)가 약 5치의 크기로 제작되어 자를 대지 않고도 대략적인 강수량을 알 수 있는 척도로 기능했음을 말해준다. 19세기에 제작되었지만 세종 대 이후 강우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측우기는 전국적인 관측 체계를 구축한 것은 물론 지속적 관측을 통해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공주충청감영측우기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물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관측 제도 정비, 과학의 발달, 도량형의 통일 등 중앙집권화된 국가 체제의 완비를 의미한다.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세종실록 93권, 세종 23년 8월 18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