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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경상감영 측우대(국보)

서울 종로구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국보)이다. 조선후기 영조 때 측우제도를 재정비하면서 전국 감영에 설치된 측우대 중 하나이다. 높이 46 cm의 돌로 만들어진 것으로 새겨진 명문을 통해 영조 46년(1770)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경상감영 선화당 앞 마당에 있던 것을 총독부관측소로 옮겼으며 현재는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다. 강수량을 측정하던 측우기는 남아 있지 않으나 공주 충청감영에 있던 측우기와 같은 형태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1-20220504<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영조 46년(1770)>

‘측우대건륭경인오월조(測雨臺乾隆庚寅五月造)’이라고 새겨진 글자를 통해 영조 46년(1770)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2-20220504<옆에서 본 모습>

영조실록에 따르면 세종 대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에 설치하라고 명하고, 8도와 유수부에도 설치하여 측우를 보고하게 했다. 이때 측우대의 규격을 공식화했다. 이 유물은 실록의 규격를 따르고 있어 당시 제도를 살펴볼 수 있게 해 준다.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3-20220504<측우기 설치에 관한 기록이 있는 영조실록>

팔도와 양도에 측우기를 만들어 우수의 다소를 살필 것 등을 명하다.

세종조(世宗朝)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測雨器)를 만들어 창덕궁(昌德宮)과 경희궁(慶熙宮)에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도 모두 만들어 설치하여 우수(雨水)의 다소를 살피도록 하고, 측우기의 척촌(尺寸)이 얼마인가를 치계(馳啓)하여 알리도록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이는 곧 옛날에 일풍 일우(一風一雨)를 살피라고 명하신 성의(聖意)를 본뜬 것이니,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 듣건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측우기는 석대(石臺)를 만들어 안치(安置)하였다고 하였다. 금번 두 궁궐(宮闕)과 두 서운관(書雲觀)에 모두 석대를 만들되 높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1척이요, 넓이는 8촌이며, 석대(石臺) 위에 둥그런 구멍을 만들어 〈측우기를〉 앉히는데, 구멍의 깊이는 1촌이니, 경신년126) 의 신제척(新製尺)을 사용하라.”
하였다. 대체로 〈경신년의 신제척은〉 경신년에 삼척부(三陟府)에 있는 세종조 때의 포백척을 취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참고해서 자[尺]의 규식(規式)을 새로이 만든 것이다. (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 5월 1일,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04-20220504
<조선후기 헌종 때(1837년)에 제작되어 충청감영에 설치되었던 측우기>

OLYMPUS DIGITAL CAMERA<측우기가 설치되었던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 건물 앞에 측우대(복제품)을 볼 수 있다.>

대구경상감영측우대
후면에 ‘측우대, 건륭 경인년 5월에 만듦(測雨臺乾隆庚寅五月造)이라고 새겨진 명문을 통해 영조 46년(1770)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기상학자였던 와다 유지의 기록에 따르면, 본 측우대는 경상감영 선화당 뜰에 있다가 총독부 관측소로 옮겨졌다고 하며 이후 기상청에서 소장해왔다. 측우 제도는 임진왜란 등을 거치며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영조의 대에 다시 실행되었는데, 본 측우대는 이때 재건된 측우 제도를 증명해주는 유물로서 의의가 있다. 영조는 세종 대의 옛 제도를 모방하여 측우기를 만들어 창덕궁과 경희궁에 설치하라고 명하고, 8도와 유수부에도 설치하여 측우를 보고하게 했다. 이때 측우대의 규격을 공식화했다. 높이는 포백척(布帛尺)으로 1자, 너비는 8치, 석대 위 둥그런 구멍의 깊이는 1치로 정했다. 포백척의 1자가 약 46cm인데 현재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높이가 46cm이다. 이를 통해 본 측우기는 영조 대의 측우제도가 반영되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영조실록 114권, 영조 46년 5월 1일,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국보), 현존하는 조선시대 측우기

서울 종로구 국립기상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공주충청감영측우기(국보)이다. 조선후기 헌종 때(1837년)에 제작되어 공주에 있던 충청감영에 설치되었던 측우기이다. 현존하는 유일한 조선시대 측우기로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1971년 환수되었다. 중앙정부에서 제작하여 전국에 배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던 기상관측 관련 제도와 기술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_ 국보01-20220504<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국보, 현종 3년(1837), 높이 31 cm 지름 15 cm>

이 측우기는 높이 31.2 cm, 지름 14.5 cm 크기이다. 표면에 금영측우기라는 명칭과 ‘높이 1자 5치, 직경 7치’라는 크기, 제작연대 등을 표현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도광정유제(道光丁酉製)’란 글자는 헌종 3년(1837)에 제작되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조선 세종 때 강우량을 관측한 이래 그 전통이 이어져 왔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충청감영계록>에는 1836년부터 1895년까지 약 300건의 관측기록이 남아 있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_ 국보02-20220504<표면에 새겨진 글씨>

호조에서 아뢰기를,
“각도 감사(監司)가 우량(雨量)을 전보(轉報)하도록 이미 성법(成法)이 있사오니, 토성(土性)의 조습(燥濕)이 같지 아니하고, 흙속으로 스며 든 천심(淺深)도 역시 알기 어렵사오니, 청하옵건대, 서운관(書雲觀)에 대(臺)를 짓고 쇠로 그릇을 부어 만들되, 길이는 2척이 되게 하고 직경은 8촌이 되게 하여, 대(臺) 위에 올려 놓고 비를 받아, 본관(本觀) 관원으로 하여금 천심(淺深)을 척량(尺量)하여 보고하게 하고, 또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水中)에다 박석(薄石)을 놓고, 돌 위를 파고서 부석(趺石) 둘을 세워 가운데에 방목주(方木柱)를 세우고, 쇠갈구리[鐵鉤]로 부석을 고정시켜 척(尺)·촌(寸)·분수(分數)를 기둥 위에 새기고, 본조(本曹) 낭청(郞廳)이 우수(雨水)의 천심 분수(分數)를 살펴서 보고하게 하고, 또 한강변(漢江邊)의 암석(巖石) 위에 푯말[標]을 세우고 척·촌·분수를 새겨, 도승(渡丞)이 이것으로 물의 천심을 측량하여 본조(本曹)에 보고하여 아뢰게 하며, 또 외방(外方) 각 고을에도 경중(京中)의 주기례(鑄器例)에 의하여, 혹은 자기(磁器)를 사용하던가, 혹은 와기(瓦器)를 사용하여 관청 뜰 가운데에 놓고, 수령이 역시 물의 천심을 재어서 감사(監司)에게 보고하게 하고, 감사가 전문(傳聞)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93권, 세종 23년 8월 18일 임오 4번째기사,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측우기를 올려놓았던 측우대는 남아 있지 않으나 대구 경상감영에 있던 측우대가 남아 있어 그 형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_ 국보03-20220504<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국보, 영조 46년(1770), 높이 46 cm, 국립기상박물관>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_ 국보04-20220504
<옆에서 본 모습>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_ 국보05-20220504
<뒤에서 본 모습>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_ 국보06-20220504
<옆에서 본 모습>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_ 국보07-20220504
<위쪽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공주 충청감영 선화당>

1837년(헌종 3)에 제작된 측우기로 측우대는 소실됐다. 조선시대 충남 지역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 (금영錦營) 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1915년경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에 의해 국외로 반출되었다가 1971년 환수되어 기상청에서 보관해왔다. 측우기는 땅에 스며든 물의 깊이를 측정하던 이전의 강우 측정 방식에서 벗어나 강수량을 정량적으로 측정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측우기는 중앙에서 제작해 전국 감영에 보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까지는 본 측우기만이 전한다. 조선시대 측우 제도를 증명하고 있는 본 측우기의 제작 시기와 크기 등이 중단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에 있다. 이는 측우기가 일련의 제작 지침에 따라 제작되었음을 나타낸다. 측우기의 평균 높이는 31.2cm, 지름은 14.5cm인데 이를 주척으로 환산했을 때 명문에 표기된 ‘높이 1자 5치, 직경 7치’ 와 근사한 값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측우기가 주척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곧 측우기 각 동체(胴體)가 약 5치의 크기로 제작되어 자를 대지 않고도 대략적인 강수량을 알 수 있는 척도로 기능했음을 말해준다. 19세기에 제작되었지만 세종 대 이후 강우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측우기는 전국적인 관측 체계를 구축한 것은 물론 지속적 관측을 통해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공주충청감영측우기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물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관측 제도 정비, 과학의 발달, 도량형의 통일 등 중앙집권화된 국가 체제의 완비를 의미한다.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출처>

  1. 안내문, 국립기상박물관, 2022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5. 세종실록 93권, 세종 23년 8월 18일,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국보)

경북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 경내에 있는 청운교 및 백운교(국보)이다. 삼층석탑과 다보탑이 있는 불국사 대웅전 영역을 출입하는 계단으로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전체 34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에는 16계단의 청운교가 있고 아래에는 18계단의 백운교가 있다. 계단의 경사는 45˚이며 청운교와 백운교 사이에 무지개 모양 아치를 구성하여 그 아래로 도솔천을 상징하는 물이 흐르도록 하고 있다. 통일신라 떄 지어진 건축물로 그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다. 아치형 다리는 성문이 돌다리에서 반원형 아치구조물인 홍예(虹霓)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후대 건축물에 비해서도 건축기법이나 조형미가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국보)>

불국사 대웅전 경내로 오르는 계단인 청운교와 백운교는 석굴암과 함께 리나라 불교 사찰을 대표하는 장면으로 손꼽힌다. 33계단으로 구성된 이 계단은 궁궐 정전영역처럼 웅장하면서 위압적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불국사와 우리나라 사찰을 대표하는 장면>

OLYMPUS DIGITAL CAMERA<정면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옆에서 본 모습>

청운교는 17단으로 이루어진 아래쪽 계단을 말하며 높이 3.82 m, 너비 5.14 m이며, 백운교는 16단으로 이루어진 위쪽 계단으로 높이 3.15 m, 너비 3.09 m이다. 이 다리는 계단을 다리의 형식으로 만든 것으로 경사면을 45도로 하고 있으며 축대를 쌓고 계단을 구성하는 자재를 다듬은 수법이 상당히 정교하다. 물이 지나가는 수로를 의미하는 아치형 구조물은 홍예형식으로 만든 다리의 초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청운교>

SANYO DIGITAL CAMERA<홍예로 불리는 아치형 다리>

SANYO DIGITAL CAMERA<위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돌난간>

불국사 청운교 · 백운교 (靑雲橋·白雲橋), 국보,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1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에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 서쪽의 연화교와 칠보교가 있다. 청운교와 백운교는 대웅전을 향하는 자하문과 연결된 다리를 말하는데, 다리 아래의 속세와 다리 위의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두 계단 중 아래의 것은 17단의 청운교로 높이 3.82 m, 너비 5.14 m이며, 위의 것은 16단의 백운교로 높이 3.15 m, 너비 5.09 m이다. 전체 33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33이라는 숫자는 불교에서 아직 부처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서른세 가지의 단계를 의미한다. 청운교는 푸른 청년의 모습으로, 백운교는 흰머리 노인의 모습으로 인생을 상징한다. 백운교 다리 아래에 작은 통로가 있고, 그 양쪽에 길게 옆으로 뻗은 청운교와 제작 수법이 비슷한 얇고 넓은 덮개돌이 있다. 계단을 다리형식으로 만든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으며, 오르는 경사면을 45˚각도로 구성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만들었으며 다듬은 수법도 정교하다.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750)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신라 시대의 다리로는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어 매우 귀중하다. 또한 무지개모양으로 이루어진 다리 아랫부분은 우리나라 석교나 성문에서 볼 수 있는 반원아치 모양을 한 횽예교(虹霓橋)의 초기형태를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안내문, 경주 불국사,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 불국사,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5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국보)

경북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에 있는 연화교 및 칠보교(국보)이다. 불극사 극락전 영역을 출입하는 계단으로 안양문과 연결된다. 계단을 아치가 있는 다리형식으로 만들었으며 경사면을 45˚로 구성하고 있다. 계단은 18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는 아래 10단 연화교이고 위 8단은 칠보교이다. 연화교 계단에는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 때(751년) 세워진 건축물로 당시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궁궐 정전 월대를 오르는 계단처럼 신성한 공간을 보여주는 구조물이다. 다른 사찰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형태의 건축물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경주 불국사 연화교 및 칠보교(국보)>

연화교와 칠보교는 아미타불이 있는 극락이 연화와 칠보로 장식되어 있다는 불경 내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계단은 오르는 길과 내려오는 길이 구분되어 있으며 양쪽에 석재를 조립해서 만든 돌난간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정면에서 본 연화교 및 칠보교>

연화교 계단에는 희미하게 남아 있는 연꽃무늬를 볼 수 있다.

SANYO DIGITAL CAMERA<위에서 본 계단>

연화교는 높이 2.31 m, 너비 1.48 m이며, 칠보교는 높이 4.06 m, 너비 1.16 m이다. 물길이 지나가는 돌다리 형태를 만드는 아치는 하나만 두고 있으며, 그 규모도 홍예가 아니라 그냥 돌판을 올려 놓은 형태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연화교 및 칠보교 계단과 아치>

OLYMPUS DIGITAL CAMERA<안양문을 받치고 있는 석축>

SANYO DIGITAL CAMERA<돌 다듬어 만든 난간>

OLYMPUS DIGITAL CAMERA< 연화교 및 칠보교(국보)와 청운교 및 백운교(국보)>

불국사 연화교 · 칠보교, 국보, 경북 경주시 진현동 15-1
불국사의 예배공간인 대웅전과 극락전에’ 오르는 길에 동쪽의 청운교(靑雲橋)와 백운교(白雲橋), 서쪽의 연화교(蓮華橋)와 칠보교(七寶橋)라는 계단이 있다. 연화교와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연화교는 구성면에서 다른 다리와 비슷하지만, 층계마다. 연꽃잎이 새겨져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전체 18계단으로, 밑에는 10단의 연화교가 있고 위에는 8단의 칠보교가 놓여있다. 연화교는 높이 2.31 m, 너비 1.48 m이며, 칠보교는 높이 4.06 m, 너비 1.16 m이다. 동쪽의 청운교와 백운교가 웅장한 멋을 보여주는데 비해, 섬세한 아름다움을 내보이고 있어, 불국사의 조형에 조화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 경주 불국사, 2011년)

<출처>

  1. 안내문, 경주 불국사,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5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
  4. 위키백과, 2022년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국보)

국립 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국보)이다. 황남대총이라 불리는 황남동 고분군 98호 무덤 남분에서 출토되었다. 곱은옥 모양의 금 구슬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3개씩의 금 구슬을 연결하였다. 금사슬, 금 구슬, 곱은옥이 비례와 구성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 간결하면서도 세련미가 돋보인다. 푸른색의 곱은옥을 사용하지 않고 금으로 곱은옥 모양을 만든것이 특이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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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 금, 삼국시대 5세기, 경주 황남대총, 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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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국보), 2015년 경주박물관 특별전>

SANYO DIGITAL CAMERA<경주 대릉원 황남대총(가운데 뒷편)>

<출처>

  1.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1년
  2.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2022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