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군수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관아, 객사인 벽제관(碧蹄館,사적144호) 옛터

조선시대 고양군(高陽郡)은 오늘날 고양시와 서울 서북부지역을 포함하는 행정구역으로 종4품 외관직인 군수(郡守)가 수령으로 있었다. 1413년 고봉과 덕양이 통합되면서 고양현이 되었고 1471년 경릉과 창릉이 들어서면서 고양군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고양군 읍치(邑治)는 조선시대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마지막으로 예를 갖추면서 숙박을 하던 고양군 역관(驛館) 겸 객사(客舍)인 벽제관(碧蹄館) 옛터가 있는 고양시 고양동에 위치하고 있다. 벽제갈비로 유명한 이 지역은 일산을 포함한 대도시로 변모한 고양시의 행정중심지였던 곳이다. 지금은 일산과 원당에 밀려서 고양시에서 가장 한적하고 시골같은 장소로 바뀌었지만, 조선시대에는 서울과 의주로 통하는 대로변이었으며, 근처의 양주와도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옛 고양군 관아 건물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고 객사건물 중 가장 유명하고 역사적 의미가 컸던 벽제관 건물터 만 볼 수 있다. 옛터만 남은 벽제관지를 보면, 중국 사신이 머물던 곳이라 건물이 상당히 크고 많았을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실제 건물터를 보면 별로 큰 건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 법도에 맞추어 군수가 다스리던 지역의 객사 규모에 맞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거대한 객사 건물인 전주객사나 나주 금성관 등에 비해서 건물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다. 옛 관아건물이었던 벽제관 옛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중등교육기관인 고양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벽제관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왜군과 전투를 벌려서 크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고양 벽제관지(碧蹄館址), 사적144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관로
이곳은 조선시대 역관터로서 중국을 오가던 고관들이 머물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중국으로 통하는 관서로에 역관이 10여군데 있었는데, 한양에 들어가기 하루전에 반드시 이곳 벽제관에서 숙박하고 다음 날 예의를 갖추어 들어가는 것이 관례였다. 또한 중국으로 가는 우리나라의 사신들도 이곳에서 머물렀다. 지금의 벽제관터는 인조 3년(1625년) 고양군의 관아를 옮기면서 지은 객관자리로 일제강점기에 건물의 일부가 헐렸고 한국전쟁 때 문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다. 그 후 객관의 문도 무너져서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건물은 중앙의 정사와 좌우의 익사로 구성되는데,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 읍내마을에 위치한 ‘벽제관지’는 고양향교, 향교골 은행나무와 함께 이 지역의 오랜 역사를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이곳 지명을 고양동이라 하는 것도 1625년부터 1914년까지 289년간 고양군청과 벽제관과 같은 중요한 공공기관이 있어 붙여진 것이다. 고양동은 파주, 양주, 고양지역이 만나는 곳으로 옛부터 교통의 중심지로 유명하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조선의 수도인 한양을 연결하는 곳이었고 중국의 사신과 우리나라의 고위관리 등이 자주 지나는 경의대로(연행로, 의주로, 관서대로)의 중심 건물이 벽제관이었다. 벽제관은 처음 이곳에서 3km 가량 떨어진 옷 고을에 지어졌다. 이후 임진왜란 등으로 훼손되고, 당시 고양군청이 1625년에 현재의 고양동으로 옮기면서 벽제관도 고양향교와 함께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고양의 벽제관은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기록을 보면 세종 원년(1419년)에 중국 사신을 효령대군, 영의정 유정현 등이 영접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수십차례 기록에 보이는 중요한 장소였다. 그러나 벽제관은 사신영접의 기능 이외에도 고양 군수가 전패와 궐패를 모시고 임금께 예를 올리는 장소였으며 외부에서 온 관리나 손님이 머물렀던 공용의 숙박장소였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방 소송에 대하여 재판하는 장소로 사용키도 했다. 특히 벽제관은 인근에 조선시대 왕릉이 있어 이 곳을 임시 궁궐인 행궁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출처: 고양시청>

SANYO DIGITAL CAMERA조선시대 고양군 관아가 있었던 고양시 고양동 일대. 관아 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고, 고양군 객사였던 벽제관 건물터가 남아 있다. 벽제관은 한양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행길에서 첫번째로 묵어가는 숙소이자, 중국 사신이 한양에 입성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머물면서 예를 갖추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관아 객사 중 가장 잘 알려진 곳이다.

SANYO DIGITAL CAMERA지금은 초석만 남아 있는 고양 벽제관 옛터. 건물은 일반적인 객사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며, 정청 3칸, 좌.우익랑 3칸씩으로 이루어 졌다.

SANYO DIGITAL CAMERA벽제관 행각 건물터. 사신이나 여행하는 관리를 수행하는 수행원들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SANYO DIGITAL CAMERA벽제관 마당.

SANYO DIGITAL CAMERA마당 한쪽편에는 오래된 측백나무가 자라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벽제관에 사용되었던 건축자재들.

SANYO DIGITAL CAMERA 벽제관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조선시대 중등교육기관인 고양향교이다.

SANYO DIGITAL CAMERA고양향교 강학공간인 명륜당.

 

 

경기도 안산군(安山郡) 관아, 안산객사와 읍성

안산군(安山郡)은 경기도 안산시와 시흥군 남쪽에 있었던 조선시대 행정구역으로 읍치는 안산시 상록구 수암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을의 규모는 크지 않은 편으로 종3품 군수(郡守)가 고을 수령이었다. 안산은 서해안 시화호 일대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서해안 방어와 연안항로의 중요한 요지로 군사적으로 중요했다.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말.조선초 대부도 부근 서해안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는 역할을 했으며, 해안에는 조선중기까지 초지진이 설치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의 장아구현이 설치된 이래 여러차례 그 명칭과 지위가 바뀌었다가 왜구의 피해가 극심했던 고려말 해안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안산군으로 승격된 이래 그 지위가 구한말까지 유지되었다. 경기도 서해안에 위치한 안산은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개편으로 시흥,과천과 함께 시흥군으로 통합되었다가 이지역에 반월공단이 세워지면서 도시화되어 1986년 안산시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인구 70만이 넘는 대도시로 인천과 함께 수도권의 대표적인 공업도시이다.

오늘날 안산은 서해안 갯벌을 간척하여 대규모 공단이 들어선 도시로 시화호가 있는 해안 주변에 도심이 형성되어 있지만, 조선시대 안산군 읍치는 도심 동북쪽 군포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수리산 서쪽편 자락에 위치한 수암동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금은 국도변과 고속도로 부근에 위치한 작은 촌락에서 발달한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도로가 수암동 주변을 지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안산읍성이 있었던 안산시 수암동 일대에는 안산군 관아가 있었는데 옛 관아건물들은 대부분 허물어지고 지금은 최근에 복원된 객사건물만이 남아 있다. 복원된 안산객사는 앞면 9칸, 옆면 3칸 규모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객사 건물 형태를 하고 있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가운데 3칸은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정청이고 양쪽에 앞면 3칸 규모의 좌.우익랑이 배치되어 있다. 익랑은 각각 온돌방 1칸, 대청마루 2칸으로 이루어졌다. 좌.우익랑은 조성에서 파견된 관리나 사신 등이 머무는 숙소로 사용되는 공간이다. 이곳 안산객사는 정조가 사도세자 능을 참배하기 위해 머문적이 있어 안산행궁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

안산읍성 및 관아지, 경기도 안산시 수암동
안산읍성은 수암봉의 능선을 이용하여 평지를 감싸도록 쌓은 전형적인 평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772m이고, 주요 방어 지역을 여겨지는 서쪽과 북쪽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바깥쪽이 매우 가파르며, 몇개의 높은 단을 이루고 있다. 평지인 남쪽은 돌을 쌓았는데, 도로로 인해 절단된 곳을 보면 성벽의 바닥부분과 내부에는 부분적으로 석축을 하고 그 안쪽에는 흙을 다져서 성벽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내에는 조선 초기의 무장이었던 김정경(1345~1419)의 거처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있으며, 그가 심었다고 전하는 은행나무 세그루가 남아 있다. 관아는 단원구 목내동에 있다가 1441년(세종23) 이전 수암동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이며, 다시 1669년(현종10)에 이곳으로 옮겼다. 정문인 평근루와 객사.동헌 등의 행정시설, 옥사와 창고가 있었을 것이나, 모두 파괴되고 곳곳에 흩어진 주춧돌과 기와조각들이 발견된다. 성의 남쪽에는 조선시대의 안산 관아로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에 수암면사무소로 이용되던 건물터가 남아 있다. 객사 건물은 2010년에 복원되었다. <출처: 안산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안산시 수암동 수암봉 등산로 입구에 남아 있는 옛 관아터와 안산객사. 안산읍성은 북쪽과 동쪽 능선에 의지하여 둘레 772 m의 크지 않은 규모의 읍성이다.

OLYMPUS DIGITAL CAMERA객사 앞에 남아 있는 고목인 느티나무가 이곳이 옛 관아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안산객사
객사는 정청에 전패(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를 모셔 국왕의 친정을 상징할 뿐 아니라 지방관이 국왕에 충성을 다짐하는 곳이었다. 고을의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보다 오히려 격이 높아 관아시설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했다. 배치는 고을의 진산을 등친 채 남향을 취하여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았고, 관아 내 독립적인 영역을 차지하였다. 객사는 한말까지 기능이 유지되었으나, 일제에 강점되면서 궐패 봉안이 중지되고 그 기증도 중지되었다. 객사의 정청은 맞배지붕으로 좌우익사보다 한단 높게 조성되었고, 좌우익사는 팔작지붕으로 온돌과 마루를 놓았으며, 정편 3칸, 측면3칸으로 축조되었다. 이곳은 1797년(정조21) 8월16일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기 위하여 하룻밤 묵어간 적이 있어 ‘안산행궁’이라 불리기도 한다. <출처:안산시청>

OLYMPUS DIGITAL CAMERA옛 안산읍성 건물터에 복원한 안산객사. 객사는 국왕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시는 관아 건물로 양쪽 익랑에 온돌방과 대청마루를 두어 이곳을 방문한 관리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이기도 하다. 안산객사는 정조가 사도세자 능을 방문하면서 잠시 머물렀기때문에 안산행궁이라고도 부른다.

OLYMPUS DIGITAL CAMERA건물은 앞면 3칸의 정청(正廳)과 좌.우 익랑(翼廊)을 두고 있는 전형적인 객사의 형태를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국왕의 궐패를 모시는 정청.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수리산(修理山)’을 뜻하는 ‘취암지관(鹫岩之館)’이라 적한 현판이 달려 있다. 서해안 바닷가와 가까워서 수리산에는 독수리가 많이 서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산객사 좌익랑(左翼廊). 앞면3칸, 옆면 3칸으로 되어 있으며 작은 온돌방과 넓은 대청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좌익랑은 서반(무신)들이 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좌익랑 대청마루. 파견된 관리들을 위한 연회가 열리는 공간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안산객사 우익랑(右翼廊). 주로 문신(文臣)들이 머무는 공간이다. 좌익랑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복원된 안산객사 전경

OLYMPUS DIGITAL CAMERA뒷편에서 본 안산객사. 온돌방 뒷쪽에 굴뚝이 보인다.

OLYMPUS DIGITAL CAMERA객사 앞 건물터와 관아 출입문이 있었던 자리 부근에는 큰 고목들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읍성내 관아 건물터와 안산군 읍치였던 수암동 일대.

OLYMPUS DIGITAL CAMERA읍성 뒷편으로는 수리산 봉우리 중 하나인 수암봉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관아 뒷편으로 읍성 성곽이 둘러져 있는데 성문과 성벽 석축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OLYMPUS DIGITAL CAMERA흔적만 남아 있는 북문.

OLYMPUS DIGITAL CAMERA석축 일부만 남아 있는 성벽

OLYMPUS DIGITAL CAMERA관아 부근에 있었던 조선초 무장 김정경의 집터와 은행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