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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박물관] 상주의 근대

조선시대 영남과 중부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 중심지에 위치했던 상주는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교통로에서 소외되면서 지방 소도시로 바뀌었다. 구한말 동학에서 분리된 경천교과 상주 지역에 자리잡기도 했으며 상주공립농잠학교가 설립되면서 근대 농업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근.현대사에서는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간평등 존중의 정신을 알리다.
19세기 말 외세의 침략, 부패한 정치와 봉건적 신분 질서를 타파하고자 최제우에 의해 창시된 동학은 1894년 동학혁명 실패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이후 3대 교주 손병희는 천도교로 개칭하여 교세 확장에 힘썼다. 그러나 남.북접의 내부적 갈등으로 공주에서 활동하던 김주희는 보은에서 경천교라 하고 1915년에 동학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로 동학교라 개칭하였다. 1918년 상주 은척면에 동학교당을 창건하고 1922년 조선총독부의 공인을 받아 동학경전, 가사 등 대대적인 간행사업을 하였다. 또한 이념 위주의 교세 확장에 심혈을 기울여 교세가 경북을 중심으로 충청도까지 미쳤으나, 1936년 일제의 탄압으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상주 동학교당은 일제 식민 통치 하에서 자주적인 발전을 하여 동학 본래의 취지를 계승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동학교당 전시관에는 동학가사 및 책판, 생활용품, 인쇄도구 등 2,000여 점에 달하는 기록유산이 보존되어 있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동경대전, 조선시대

OLYMPUS DIGITAL CAMERA궁을경, 근대, 상주 동학교주인 김주희가 궁을과 동학의 의미, 천도 회복의 원리, 유도와의 관계, 포덕천하 보국안민 등에 대해 문답식으로 풀이한 동학 경전입니다.

OLYMPUS DIGITAL CAMERA오행기, 근대, 헌성식 때 사용한 실내기

OLYMPUS DIGITAL CAMERA오룡기, 근대, 헌성식 때 사용한 실외기

OLYMPUS DIGITAL CAMERA동학가사, 근대

근대의 상주
1895년 상주목은 상주군, 함창현은 함창군으로 바뀌어 안동부에 속하였다. 1905년 전국을 8도로 정비하였는데, 상주군은 31면에서 22면으로 개편되었다. 1906년 31면에서 의성군에 4면, 문경시에 5면을 넘겨주면서 21면이 되었다. 1914년 상주와 함창이 통합되었으며, 1917년 상주역이 설치되어 여객 및 화물운송을 담당하였다. 1919년 3월 23일 상주장터 만세운동에서부터 3월 29일 이안면 소암리 만세운동, 4월 9일 화북면 운흥리 만세운동에 이르기까지 전후 4회에 걸쳐 일어났다. 이후 민족실력양성운동인 청년운동은 물론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였다. 1921년 상주공립농잠학교가 설립되면서 잠업 등 근대 농업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1931년 읍면제 실시에 따라 상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45년 이후 산업화 및 새로운 교통수단인 철도망이 다른 지역으로 나게 된다. 1980년 함창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86년 상주시와 군이 분리된다. 1995년 상주시와 군이 합하여 도농통합의 상주가 되었다. 대한민국의 중심, 갖지로 연결되는 편리한 도로망은 천혜의 자연을 바탕으로 유구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상주를 잇는다.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OLYMPUS DIGITAL CAMERA 호적부, 상주군 외서면의 1960년 호적부이다.

OLYMPUS DIGITAL CAMERA식산은행 상주지점 문서, 1921년

OLYMPUS DIGITAL CAMERA상주공립농잠학교 졸업증서, 1940년.

OLYMPUS DIGITAL CAMERA상주공립보통학교 가정통신문, 일제강점기

OLYMPUS DIGITAL CAMERA상주공립농잠학교 1회 졸업사진첩, 1924년

<출처>

  1. 안내문, 상주박물관, 2019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짜장면박물관 특별전] 청관(淸館), 그 기억을 거닐다

2013년 겨울 인천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짜장면박물관에서는 “청관(淸館), 그 기억을 거닐다”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회가 열렸다. 이번 전시에서는 임오군란 때 출병한 청나라 군대를 따라서 인천항을 통해 한반도에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았던 화교들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1883년 인천항에는 청국인 5명이 영국, 미국 등 서양 함선에 식류품과 급수를 공급하고, 식료품과 잡화, 해산물 등을 거래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이후 청국 조계가 설치되면서 다양 직업의 화교들이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다. 해방이후 화교의 경제활동을 억압하는 조치 등으로 어려움을 겪으며서 중국요리집 등 요식업에 주로 종사하였으며, 1990년 대 한.중수교 이후 중국 본토와 거래에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그 위상을 찾아가고 있다. 전시회에서는 이들 화교들이 살아왔던 다양한 자료 등을 통해 화교들 살아왔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2013년 겨울, “청관, 그 기억을 거닐다”라는 특별전시회가 열렸다. 임오군란 이후 한반도에 터를 잡고 살아온 화교들의 고난했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청관의 근대건축물

OLYMPUS DIGITAL CAMERA1908년 건립된 중국 요릿집이다. 가운데 정원을 두고 있는 중정형식의 건물이다. 중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손님들이 묵을 수 있는 숙소인 ‘주점(酒店)’으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중국음식점이 인기를 얻으면서 음식점으로 사용되었다.

공화춘, 공화춘은 1908년 무렵 건축된 중국 음식점 건물이다. 중국 산동지방의 장인이 참여하여 지은 중정형(中庭形)의 중국식 건물로, 외부는 벽돌로 마감하고 내부는 다양한 문양과 붉은색을 사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처음에는 무역상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곳으로 이용되었다. 중화요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면서부터는 음식점의 공간을 확대하여 대형 연회장을 갖춘 중국음식점으로 1960년대까지 그 명성을 날렸다. 인천광역시 중구에서 건물을 매입한 후 건물을 보수하고 내부에 전시공간을 마련하여 2012년부터 짜장면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인천 차이나타운의 형성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차이나타운 개발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중국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고,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외국자본의 유치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그간의 폐쇄적인 외국인 정책을 개선하고자 외국인에 대한 차별조항을 폐지하고 동시에 투자조건을 유리하게 만들어갔다. 특히 규제가 심했던 토지의 취득과 관리에 대해서는 법률개정을 통해 각종 제한을 전면 폐지하였다. 당시 동아시아 전체 자본의 70%를 점유하고 있던 화교들은 각종 제약이 사라지면서 국내에 투자를 시작하였고 이에 발맞추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화교 정책에 큰 관심을 갖는다. 인천광시와 인천중구는 1995년부터 중국의 지방정부들과 우호교류도시 관계를 맺으면서 차이나타운의 재개발 및 투자유치를 실시해 나간다. 결국 1999년 화교 기업들이 인천의 각종 개발 사업에 3억달러를 투자 유치하는데 성공하고, 2001년 인천광역시 중구 항동, 북성동 일원을 지역특화발전특구로 지정받게 된다. 이후 다양한 관광문화 상품이 개발되고, 명품 중화요리점으로 주말에 수도권 관람객이 자주 찾는 인천의 대표적 관광명소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SANYO DIGITAL CAMERA인천 차이나타운 입구에 세워진 첫번째 패루. 경인선 기차 출발역인 인천역에서 나오면 정면에 차이나타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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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의상,

화교의 직업 변천사
1883년 12월에 청국인 5명은 인천 선린동 지역에 거주하면서 식료품과 잡화를 수입하고 해산물의 중국수출과 영국, 미국, 러시아 등의 함선에 식료품과 급수를 공급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이후 인천구화상조계장정을 통해 청국인은 청국조계에 다양한 상점을 운영하는데 주단포목점, 청(중화)요리점, 이발소, 채소상 등이다. 당시 화교의 직업을 크게 분류하면 무역 및 상점을 운영하는 상인, 도시주변에서 야채를 재배하는 농민 그리고 ‘쿨리(苦力)’라 불리는 부두 노동자들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쿨리들은 부두 하역장 및 건설현장에서 조선인 노동자와 경쟁을 하면서 생활을 하는데, 만보산 사건 등을 계기로 위기상황을 맞기도 한다. 이 시기에는 중일전쟁까지 발발하여 화교들이 활동과 입지는 더욱 위축되어진다. 1945년 일본의 패망과 광복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거래하던 일부 농업 종사자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상업 종사자들에게는 막대한 수입을 올리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1948년 한국정부가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생하면서 화교들의 사회활동은 감소하고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때문에 손쉽게 시작할 수 있는 중화요리 사업에 손을 뻗치게 되고 1970년대 경제성장과 함께 외식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한국인이 중국요리 사업에 참여하고 일부 화교 제재정책으로 요식업에서 화교의 입지는 줄어들고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화요리점도 대부분 사라진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대금지불영수정(근대), 고가단(견적서, 1970년대), 거래영수증(1960년대), 화교 이발도구 삭도 (1920년대), 면도칼잡(1960년대), 바리깡(197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초세유 초상화(근대), 보화한의원 면허증(근대)

OLYMPUS DIGITAL CAMERA복무증명서(1995년), 교사가 사용했던 안경과 펜(근대)

OLYMPUS DIGITAL CAMERA인천화교 신원증명서(근대), 인천화교 진정서(근대)

OLYMPUS DIGITAL CAMERA인천화교 친속증명서와 보증서

인천화교중산학교와 교육정책
타지역 화교와 달리 인천 화교는 95%이상이 산동지역 출신이고, 산동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이들 중 90%이상이 인천화교중산학교 출신이라 문화적 동질성이 매우 강하고 거듭된 통혼으로 혈연적 유대관계가 돈독하다. 과거 화교들은 한국사회에서 많은 핍박과 차별정책으로 인해 화교학교를 통해 사회의 결속을 유지하게 된다. 1902년 한국 최초의 화교학교인 인천화교소학교가 설립된 이래 1957년 초중부 창설, 1964년 고중부 증설로 초,중,고중부 고루 갖춘 인천화교중산중학교로 설립된다. 화교의 교육정책 중 특이한 점은 대학 진학과정이다. 과거에 화교들은 대만에 있는 대학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대만의 학위를 국내에서 인정받기 어렵고 한국적 사고 배양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자 최근에는 한국 내 대학을 진학하는 수가 늘어나고 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화교학교를 이끈 사람들

OLYMPUS DIGITAL CAMERA졸업증명서(1976년), 주판(근대), 성적표(근대), 인천화교 중산중학교 조직 장칙(근대), 붓과 벼루

OLYMPUS DIGITAL CAMERA인천화교의 생활모습

화교의 세시풍속
인천 화교의 세시풍속은 초기 중국 산동지방의 전통을 유지하였으나 점차적으로 한국적으로 변화하였다. 본래 화교들의 가장 큰 명절은 한국의 설과 유사한 춘절(春節0로서 12월23일 조왕신을 맞이하는 날부터 정월보름까지이며, 친지와 이웃을 찾아 새해 인사와 덕담 등을 나눈다. 특히 이 기간에는 아이들에게 홍파오(紅袍)라는 붉은 색 봉투에 돈을 담아 주는데, 설날 때 세뱃돈을 주는 한국의 풍습과 유사하다. 또한 봄이 왔음을 축하하는 청명절(淸明節)이나 노동절, 한국의 추석과 같은 중추철(仲秋節) 등 연후기간에는 가족과 친지들이 함께 모여 폭죽을 터트리거나 회포를 풀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많은 화교들은 한국 법정 휴일에 맞춰 휴식을 취하거나 직계가족들과 여행을 가는 등 한국 풍토에 맞게 변모하기 시작한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토용(근대), 인천화교 교무위원화 쌍십절 행사자료(근대), 사자상.

OLYMPUS DIGITAL CAMERA향로, 홍파오(紅袍, 세뱃돈 봉투), 의자, 촛대

OLYMPUS DIGITAL CAMERA복래춘(福來春), 복래춘은 “복(봄)이 다시온다”는 의미의 상호명으로 중국의 전통과자를 4대째 이어하는 곳이다.

화교의 음식문화
중국은 광할한 영토를 가지고 있어 지역마다 기후, 토양이 달라 생산되는 산물이 다르며, 한족을 포함한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져 다양한 음식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인천에 거주하고 있는 화교들은 대부분이 중국 산동 출신으로 산동지역에서 재배되는 수수, 귀리, 보리, 밀, 조 같은 잡곡을 주로 사용하고, 고온에서 단시간 조리하는 볶음요리가 주류이며, 신선하고 짠맛이 주된 특징이다. 대표적인 음식으로 중국의 4대요리인 총소해삼, 청탕연와, 구전대장, 만두 등이 있으며 인천에서 탄생한 짜장면의 기원이 되는 작장면(炸醬麵)과 같은 면류도 유명하다. 이들 대부분의 음식은 고온의 열을 유지하여야 맛을 낼 수 있기에 음식의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화로의 화덕도 함께 발달하게 된다.

OLYMPUS DIGITAL CAMERA오리주둥이 항아리(1920년대), 주석주전자(1920년대), 쇠절구(1940년대), 화로(192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주방칼과 국자(근대), 나무젓가락과 젓가락통(근대) 법랑4층 찬합, 법랑접시

OLYMPUS DIGITAL CAMERA 청관에서 사용되었든 등잔과 등잔대(근대), 화교의 채상(彩箱,음식 등을 보관할 수 있는 바구니)

OLYMPUS DIGITAL CAMERA 쌍절곤과 철퇴

인천중화기독교회
1910년 인천은 많은 외국 자본이나 문물 등 상업의 중심지로서 발돋움하게 된다. 당시 화교 상인들은 인천과 중국 간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축적하여 화교들이 인천에 몰려오는 계기를 마련하고, 화교들이 거주하던 청관에는 많은 음식점과 숙박시설 등이 생겨난다. 이시기 한성에는 화교교회가 발족되어 서울과 경기, 인천을 중심으로 그 범위를 넓혀 가고 있었고, 1917년 도이명(C.S.Deming)과 손래장(孫來章)이 인천에 작음 방을 빌려 화교교회를 열었다. 그후 1922년 땅을 구입하여 인천 화교 최초의 교회를 신축하고 손래장을 교회의 전도사로 임명한다. 이에 손래장은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고 신학 공부에 매진하여 1925년에 인천중화교회 목사 안수를 받아 7년간 목회한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천중화기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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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탑에 달려있던 종

OLYMPUS DIGITAL CAMERA화교가 사용하던 성경책

인천 개항과 청관의 탄생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인과 함꼐 온 40여명이 군역상인들이 이땅에 정착하면서 대한민국 화교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이들은 주로 푸젠성, 저장성 등 남방인들로 청나라 군대에 물자를 공급하면서 조선 상인들과의 무역을 하였다. 1884년 4월 인천구화상조계장정(仁川口華商祖系章程)이 체결되면서 지금의 인천 선린동 일대의 5천평 토지에 청국조계지가 세워졌고 그해 10월 청국영사관이 건립된다. 1884년 중반부터 청상의 영업허가 비용을 면제하는 등 우대조치를 취하면서 중국의 유력 상인들이 인천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는 남방 상인이 중심이던 화교 사회에서 강소, 강서, 호남, 호북 등 각 지역의 상인과 산동상인을 중심으로 한 북방 상인이 동시에 등장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시기 청상들은 청국의 정치적 우세와 청국정부의 지원을 기반으로 활발한 상업활동을 펼칠 수 이었다. 청상은 이와같이 유리한 조건을 기반으로 일부 무역업종을 독점할 수 있었는데, 특히 면포루는 청상이 본국에서 들여오는 주요 수입 품목으로 인천 개항이래 꾸준히 각광을 받는다. 또한 청상은 청국으로 홍삼, 금, 소가죽, 해산물 등을 수출했는데, 당시 홍삼은 중국 남방인이 선호하는 고가품이이었다. 이 시기 청관은 그야말로 전성시대였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The illustrated London News, 1856년

OLYMPUS DIGITAL CAMERA청국인 우리탕 고용지원서, 19세기

청일전쟁과 한일강제병합
1894년 청일전쟁 패배로 화교들의 정치적 기반은 완전히 무너졌으며 대부분의 유력 상인은 본국으로 귀국하였다. 청일전쟁 후의 인천 화교 사회는 종전과 다른 큰 변화를 갖는다. 우전 법적 보장이 낮은 적성(適性)국민으로 전락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또한 청일조계지 경계주변에서 일본인들과 자주 충돌했고 큰 피해를 입었다. 그뒤 1904년 러일전쟁과 1910년 한일강제병합(경술국치)을 거치면서 일본 상인과 조선총독부이 노골적인 규제를 받아 화교의 경제는 상세 회복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1912년경 조선총독부에 의한 청국조계지의 철폐로 인천 화교 사회는 침체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화교여권(근대)

OLYMPUS DIGITAL CAMERA화교엽서(일제강점기), 인천화성 동순동 주식(근대), 동해의 전쟁

OLYMPUS DIGITAL CAMERA청천백일기 손문 포스터(191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순문 글씨, 한일강제병합 이후 청관(1910년대)

OLYMPUS DIGITAL CAMERA1900년대를 전후한 인천 청관지역의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청천백일만지홍기(1910년대)

일제강점기
1894년 청일전쟁과 1910년 한일강제병합이후 인천화교 사회 구성원들의 특징에 큰 변화가 일어난다. 처음 인천에 거주했던 화교들이 상인중심이었다면 1920년대 중반부터는 산동지역의 노동이민자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시기의 변화는 중국 산동 지역의 자연재해와 빈번한 범죄발생, 한반도 식민지 건설에 따른 인력부족이 주된 요인이었다. 그러나 조선 노동시장의 급격한 산동 화교 점유율 확대는 조선 노동자와의 갈등 관계를 초래하게 되고 만보산사건과 같은 유혈사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1930년대에 이르면서 청관지역에는 다수의 중화요리점이 생겨나는데 중화루, 동흥루, 공화춘 등이 대표적인 공간으로 정계 및 지역 인사들이 즐겨 찾는다. 그러나 요식업의 발달과 달리 1940년대 이후 일본정부는 대륙침략정책을 기반으로 한반도 북부 지역을 병참기지로 건설하는 정책에 따른 화교 노동 이민정책을 실시하면서 화교들의 입지는 크게 줄어든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화교가 사용하던 봉투, 여권발급 추천서

OLYMPUS DIGITAL CAMERA인천시가도,

만보산사건과 인천사태
1931년5월 중국 장춘 근교 만보산에서 한국 농민들과 중국 농민들이 수로 개설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 중국과 일본 경찰이 출동해 총격전까지 벌어진 사건이 있었다. 실제 재산피해는 크지 않았고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국내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일본이 의도적으로 왜곡 보도하여 많은 조선 농민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알려진다. 이에 인천지역 일부 조선인들은 근처 화교마을을 돌며 화교들을 조롱하고 구타한다. 더욱이 이를 지켜보던 많은 조선인들이 시위에 지속적으로 참여해 화겨들이 경영하던 이발소, 요리점 등에 돌을 던지고 부을 질렀다. 때문에 많은 화교들이 청관 안으로 몸을 피하기 시작하였고 그 수가 3천명에 육박하기 이르렀다. 당시 일본경찰은 분쟁의 사태가 더욱 커질까 두려워 일방적으로 화교들에게 칼, 몽둥이, 창 등 무기 반납을 종용하였다. 결국 수천명의 조선인은 청관거리에 진입하여 2명의 화교를 살해하고 상점들을 약탈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상해를 입혔다. 뒤늦게 조선총독부는 경성에서 헌병 경찰대를 급히 파견하여 사태를 무마시킨다. 그러나 약1만명의 화교들을 안전 및 재산에 위협을 느껴 귀국을 결심하게 된다. <출처:짜장면박물관>

광복과 한국전쟁
1945년 해방을 맞으면서 화교경제는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으며 1946년과 1947년에 이르러 한반도의 전체 수출입 무역의 80%를 점유하는 호경기를 맞는다. 그러나 1948년 수립된 한국 정부의 외국인에 대한 일련의 규제정책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국내에서 중국으로의 이동이 금지되어 화교무역의 배경이었던 중국과의 교역이 불가능해지게 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직전부터 인천화교들은 사회경제적 난관을 겪는다. 자유당 정부가 6.25 직전 전국에 내린 창고 봉쇄령으로 화교무역상은 큰 타격을 입었고, 외국인에 대한 외화사용 규제책은 화교의 무역업에 족쇄를 채은 격으로 화교의 경제활동이 점차 암흑기로 접어들게 되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6.25전쟁 화보, 출납유수(근대)

한국정부의 화교정책 변화
1960년대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화교들은 더욱 큰 어려움을 겪는다. 두번의 화폐개혁을 통해 화교들의 현금이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외국인 토지 소유금지법이 제정되면서 많은 화교의 소유지가 한국정부의 승인을 거쳐야 했고, 대부분의 토지가 시세에도 못미치는 가격에 매매되었다, 1970년에는 외국인 토지 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이 제정되어 주거용 200평, 상업용 50평이내, 1가구 1주택 1점포만이 허용되었고, 타인에게 임대도 할 수 없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요식업에서도 불리한 세율을 통해 화교들이 세운 많은 명품 중화요리점은 문을 닫는다. 이와 반대로 한국인들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들이 늘어남녀서 화교들의 중화요리의 입지가 크게 위축된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보갑호구책(근대), 화교등기증 신청부(1953년), 거주허가 연장신청 명단(1967년), 인천화교 전화부

오늘날 화교
20세기 초반의 화교 사회는 중국본토와 밀착되어 중국문화를 흡수하려는 요소들이 강한 반면 20세기 후반에는 중국 문화에서 탈피하여 현지 문화를 받아들이고 현지 사회와 일원화되려는 현상이 강해진다. 이러한 변화의 주된 요인은 이념과 국익에 입각학 정착국의 특징에서 찾을 수 있는데, 화교의 경제활돌을 압박.제약하고, 문화적 독자성을 포기하고 현지 사회에 동화시키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중국인의 이민과 정치활동은 제한되었다. 특히 외국 국적화교의 경제활동은 철저하게 금지하였고 강제적인 재산몰수와 이주가 행해졌다. 결국 화교의 자체적 경제활동을 억제하여 토착화를 통해 자국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다. 많은 화굗르은 현지 문화를 받아 드리고 현지어를 사용하였으며 때로는 중국 이름이 아닌 현지 이름으로 바꾸기도 한다. 특히 지역사회와 타협하여 나가면서 철저하게 화교 고유의 문화를 숨기게 되었다. 그러나 화교의 현지화가 수동적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다. 화교 사회에서도 현지 사회에 자발적으로 동화하려는 의식이 생겨났고 현지에서 출생한 3세, 4세들이 늘어나면서 화교들의 현지화는 촉진된다. <출처:짜장면박물관>

화교의 자본
21세기 중국 경제는 미국과 경쟁할 수 있을 만큼 급성장하였다. 중국의 성장에는 많은 요인들이 있었지만 그 중 해외에 나와 있는 화교들이 숨은 주역이다. 현재 화교들은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대부분에 거주하며 미국이나 유럽의 자본을 압도하고 있다. 화교는 20세기초부터 동아시아 지역으로 퍼져나가 초기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전략적이고 지속적인 경제활동으로 막대한 부와 중국 경제 도약의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된다. 화교 경제는 유럽연합(EU)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과 같은 제도적 통합체가 아닌 동일 민족을 바탕으로 한 기능적 통합체이기 때문에 결속력, 특히 경제적 협력에 있어서 어떤 통합체보다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바야흐르 21세기 세계 시자에서 화교는 막강한 자본력을 가진 중요한 집단이다. <출처:짜장면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관(淸館), 인천화교의 어제와 오늘

청국영사관 회의청, 1910년 청나라 영사였던 가문연(賈文燕)이 건립한 곳으로 舊청국영사관 뒤쪽에 남아 있다. 지붕은 일식으로 개수되었으나 나머지 개구부, 가구방식, 창호형태 등은 모두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1층 목구조로 측벽은 조적으로 마감되어 있고 전면 벽체는 흙벽 위에 회칠로 마감되어 있다. 이 건물 현관에는 두 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왼쪽 현판은 조선 총상회에서 사용했던 당시의 명판으로 중화민국 11년(1923)에 설치한 것이고, 중앙에 걸려 있는 현판은 1919년에 허문연이 건립하였다고 되어 있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선린동 화교주택,1939년대의 중국인 주상복합건물로서 청국 조계지에 세워진 건물로 현재도 화교가 거주하고 있다. 조적조 2층으로 지붕은 슬레이트로 되어 있고 벽체는 조적구조이며 창호와 2층 발코니는 목조로서 아치 형태를 하고 있다. 평면형식은 한가운데에 중청을 두고 사방에 방을 두는 공간ㅂ치 형태로 중국의 전통 주택유형 중의 하나인 사합원 구조의 축소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도 사합원 주택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 있고 특히 2층 발코니 형태 및 창호 등이 이색적이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청국영사관, 청국영사관은 청국의 첫번째 해외지계인 인천 청국조계지가 설치된 1884년에 세워진 것으로 청일전쟁 후 잠시 폐쇄되었다가 1898년에 다시 개청하였다. 청국영사관은 청관 중앙 가장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현재 인천화교 중산학교가 자리하고 있는 터에 위치해 있었다. 청국영사관 안에는 약141평의 본청 외 순포청,전보국 등이 있었으며, 신포동에 분청을 두었다. 이 중 전보국은 통신사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설치되었다. 당시 청국영사관은 벽돌조 1층 건물로 일본식 기와이음을 중국풍의 궁자형아치로 장식하였다. 이 장식 수법은 당시 청국조계지 내 중국인 주택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으로 현재의 선린동 중국인 주택에서도 볼수 있는 특징이다. 중문으로 추정되는 출입구는 4개의 사각기둥 위에 활모양의 아치3개를 올린 아케이드이다. 이 건물보다 낮은 건물을 좌우에 두어 이 부분이 솟을대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3개의 아치 가운데 좌우 아치에는 쇠창살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출입은 중앙부만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출처:짜장면박물관>

 

 

[인천시립박물관 특별전] 오래된 이웃 화교

인천시립박물관에서는 1914년 겨울 “오래된 이웃, 화교”란 제목으로 특별전시회를 열었다. 이번 전시는 한국에 정착한 화교의 역사와 오늘날 한국 화교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내용들이다. 역사 이래로 중국 본토에서 국경을 넘어 한반도에 정착한 사람들은 많지만 이들을 화교라 부르지 않는다. 한국 화교는 1882년 임오군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청나라 오장경 부대를 따로 상인들에서 출발하며, 오장경은 한국 화교의 시조로 여겨진다. 이후 청나라와의 조약을 통해 화교상인들의 유입은 늘어났으며 산동성 출신들이 주로 이주하였다. 화교들은 인천을 거점으로 무역업 등에 종사하면서 전국 각지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해방이후 각종 규제조치로 화교들이 쇠락하기도 했으나, 1990년대 중국과의 수교 이후 화교의 사회적 지위나 삶의 환경은 크게 개선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교(華僑)란 본국을 떠나 해외각처로 이주하여 현지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중국인 또는 그 자손을 말하며, 1921년에 제정된 중화민국헌법에 따라 정의되 조례에는 ‘僑居國外國民’라 정의되어 있다. 화교가 언제 처음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말에서 남송대까지 북방민족의 침입을 피히 동남아시아로 이주해간 한족(漢族)들을 그 중심으로 보고 있다. 당시 한반도에도 많은 이주민이 있었지만 대부분 현지화되어 한국내 많은 성씨들이 이때 이주한 인물을 조상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화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명나라와 청나라때는 서구의 식민지개척에 편승하여 많은 화교들이 이주하였으며, 일부는 화교왕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19세기 노예제 폐지와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노동력부족 등으로 많은 중국 하층민들이 해외로 이주하여 하였다. 이때 미국을 비롯하여 식민지 각국으로 이주한 중국노동자를 비하해서 쿠리(coolie)라 불렀다.

과거 입학식과 졸업식 같은 특별한 날이면 먹던 ‘짜장면’. 이 음식은 이제 남쪽 끝 마라도에서도 볼 수 있는 한국인이 가장 즐겨먹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이 ‘짜장면’으로 기억되는 사람들을 우리는 ‘화교(華僑)’라 부릅니다. 이들이 우리사회에 들어온지도 130여 년이 지났지만, 사실 화교란 단어가 대주에게 익숙해진 것은 오래되지는 않았습니다. 이전에는 단지 중국인이라 칭해고, 그보다는 ‘되놈’, ‘짱꼴라’로 더 많이 불렀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낯선 이방인이었고, 어울리기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화교에게 관심 갖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골목에서 무언가 다른 말을 하는 무리와 마주치면 서로를 피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어디서부터 기인하는 걸까요? 왜 자기 나라인 중국이 아니라 한국 땅에서 살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들은 이땅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중국인’이라는 다수에 속해 있으면서 한국사회 속 소수자인 화교, 이들 화교에 관한 이야기가 이제 시작됩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천시립박물관 특별전, 오래된 이웃 화교

중화가(中華街): 공간_차이나타운
인천역에 내려 첫 번째 패루 중화가를 지나면 차이나타운이 시작됩니다. 이곳에 중국인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은 1882년 임오군란에서 비롯됩니다. 광동의 상인들은 한국에 파견된 청나라 오장경의 부대를 따라왔고, 곧이어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면서 화교상인들의 유입은 늘어만 갔습니다. 결국 1884년 ‘인천지구화상지계장정’에 따라 ‘청관조계(淸館租界)가 형성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청관의 명칭은 ‘지나정(支那町)’ 그리고 다시 ‘미생정(彌生町)’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동안 인천은 화교 진출의 거점으로 이용되었고, 화교는 전국으로 퍼져나가 우리 사이 곳곳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해방을 맞아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이곳의 명칭은 현재의 선린동(善隣洞)으로 바뀌었습니다. 이후 여러 제약 속에서 화교들이 빠져나가면서 90년대까지 이 지역은 점차 쇠락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최근 인천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다시 부흥하고 있습니다. 주말이면 서울과 경기 등지에서 방문한 사람들로 거리는 북적거리고, 인천공항과 인천항을 통하여 많은 중국인들이 방문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첫번째 전시주제는 우리나라 화교의 역사를 인천지역 화교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임오군란과 화교의 영입

OLYMPUS DIGITAL CAMERA임오계림사변과 오무장 사당. 임오군란을 계기로 화교가 인천을 통해 건너왔다고 하며, 당시 군대를 이끌고 참전한 오장경을 화교의 시조로 여긴다.

임오계림사변(壬午鷄林事變), 1932년, 미야타 가이코츠(官武外骨)가 정리한 임오군란 관련 신문잡지기사를 임오군란 발생 50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것이다.  오무장공사(吳武壯公祠), 현대, 1885년 고종은 임오군란을 평정한 오장경(吳長慶)의 공을 기려 부대가 주둔했던 옛 동대문운동장 인근에 그의 사당을 세웠다. 1969년 명동에 있던 한성화교중학교가 연희동으로 이전되면서 이 사당도 함께 옮겨졌다. 한국 화교들은 오장경을 근대 화교의 시조로 여겨 매년 5월23일 제사를 지낸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임오군란 석판화, 1882년,

일본에서 보도용으로 제작된 다색판화. 1882년 구식군대의 반발로 시작된 임오군란은 일본세력 배척운동으로 발전하였고, 일본 공사를 비롯한 일본인들은 인천을 통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차이나타운의 형성,

OLYMPUS DIGITAL CAMERA청일전쟁 석판화, 1885년,

청일전쟁은 1894~1895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전까지 조선에 대해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던 청나라는 전쟁에서 패하면서 그 위세가 급격히 줄어들었고, 화교의 숫자도 급감하게 되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차이나타운의 형성

OLYMPUS DIGITAL CAMERA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 대한국대청국통상조약(大韓國大淸國通商條約, 복제). 구한말 개항장 인천을 통해 화교들이 들어오던 시기의 조약들이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1882년, 1882년 8월23일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체결 된 통상조약으로 「고종실록」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 이 조약으로 청 상인들의 내륙까지 들어오게 되어 조선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인천구화상지계장정(仁川口華商地界章程), 1884년, 1884년 체결된 청국 상인들의 거주지역에 관한 조약. 이를 통해 오늘의 선린동 일대 구릉지대의 약 5천 평에 청국 조계가 설정되었다. 대한국대청국통상조약(大韓國大淸國通商條約, 복제), 1899년, 한중 양국의 우호.왕래.통상에 관한 조약으로 거류민의 보호와 무역허용범위, 주택.토지 임차와 관련된 내용 등이 규정되어 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제물포항 각국조계도, 1880년대,

1880년대 후반에 제작된 제물포 각국조계의 계획도이다. 중앙의 일본조계를 중심으로 청국조계와 각국조계의 모습이 상세히 그려져 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제물포항 각국조계도(복제), 1893년,

지금의 북성동 일대 각국조계를 확장하기 위한 계획도이다. 확장하고 했던 땅은 3,565㎡로 혜관과 관련된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마련한 땅으로 보인다. 청국조계와 경계가 표시되어 있으며, 필지 별로 등급이 설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천부지도(仁川府地圖), 1918년,

지금의 북성동 일대가 지나정(支那町)으로 표시되어 있다. 한일병합 이후,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새로운 정명(町名)을 만들었는데, 청관.청국 거류지로 불리던 곳을 지나정으로 개칭하였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천시가안내약도, 1930년대 후반,

인천시가의 주요도로, 철로, 인천항 등을 간략하게 표시한 약도로, 지금의 북성동 일대를 미생정(彌生町)으로 표기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 지나정에서 미생정으로 바뀐 결과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화교의 증가

OLYMPUS DIGITAL CAMERA화교의 인구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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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인 집단분포도, 대한제국기,

조선전도에 중국인 집단 분포도를 인원수만큼 지역별로 표시한 지도이다. 지역의 이름과 인구 표시 기호는 빨간색으로 표기하였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대련-조선-북해도 정기선 안내, 청도-인천-상해 관광안내 소책자

대련(大連), 조선, 북해도 정기선, 일제강점기, 대련~북해도 사이의 정기노선에 관한 안내서로 인천과 부산을 거점으로 이용하고 있다. 정기선의 발착지와 노선도 등의 내용이 들어있다. 청도-인천-상해 관광안내 소책자, 일제강점기, 관광안내용 팸플릿으로 인천-청도, 인천-상해 간 해상노선이 개설된 경위와 관광코스 등을 설명하고 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조선우선항로도 사진엽서, 화교영취소맥분상세표.

조선우선(郵船)항로도 사진엽서,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한반도로 오는 가장 대표적인 루트는 대련 혹은 산동반도에서 인천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화교영취소맥분상세표, 1942년, 인천화상상회(仁川華商商會)에서 중화민국 주인천영사분관에 발신한 자료. 밀가루 배급을 위탁받은 화상상회에서 교민들에게 배급한 내용을 보고하는 문서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청관거리 사진 (1920~30년대)

인화문(仁華門): 사람_인천 화교 사람들
인천에 자리잡은 화교들은 주로 중국에서 수입한 식료품과 잡화를 팔았고, 한국 전역에 퍼져 있는 화상들과 긴밀한 관계를 통해 사업을 번창시켜 나갔습니다. 1898년 의화단 운동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가까운 한국으로 피난을 와 화교인구가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화교의 숫자가 증가하면서 한국인들과의 충돌도 많아졌습니다.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적 배경이 달랐고, 일제의 이간책으로 여러 소요들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1931년 중국 길림성에서 한국인과 중국인이 충돌한 만보산 사건이 전해지면서 인천.서울.평양 등에서 화교에 대한 습격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교들은 잡화점, 비단가게, 양장점, 이발소, 요식업 등을 중심으로 점차 그 활동 범위를 확대해 나갔습니다. 이어지던 화교 사회의 호황은 해방을 전후로 막을 내립니다. 1948년 한국정부는 외국인 입국을 불허하면서 화교의 유입은 종식되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수립으로 중국과의 교역은 중단되었습니다. 이어 창고봉쇄령과 외화사용 규제로 화교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습니아. 1961년 내려진 외국인토지소유금지법과 1970년의 외국인토지취득관리법으로 화농은 밭을 잃었고, 화상들은 점포의 크기를 줄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1998년 이후부터는 외국인의 부동산 관련 규제 완화, 영주권과 지방선거권 인정 등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인천 차이나타운 활성화 계획과 중국경제의 성장으로 화교사회가 재도약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130여 년의 화교 역사는 한국 근대사와 함께 하면서도 다른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그들이 걸어온 세월을 실제 화교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해 보고자 합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두번째 전시는 인천에 정착해 살았던 화교들이 살아왔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왕oo 이야기
내 아버지는 산동출신 상인어었어, 의화단운동의 혼란을 피해 가족들과 함께 동북지방으로, 다시 토비와 마적을 피해 신의주로 이주해 왔지.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어. 신의주는 화상.화공.화농학교가 있었는데, 가업에 따라 화상학교에 진학하여 상인으로써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네. 내 나이 스무 해가 되던 땐가, 당시 화교상인들이 활발히 활동하던 인천으로 옮겨왔고, 중국 본토와의 무역뿐만 아니라, 중화요리점에 채마밭에 사업들을 점차 키워나갔지. 그 때, 나 말고도 많은 화교들이 잡화점.양복점.이발소 등을 열었고, ‘쿨리’라 불리는 노동자들도 늘어만 갔어. 그러자 당시 일제하의 조선인들은 일자리를 뺏어간다고 걱정이 많아지더군. 결국 만보산 사건이 터졌고, 화교들에 대한 습격 때문에 나는 군산으로 잠시 피신하기도 했지. 이때부터 화교단체의 조직돠 활동에도 힘쓰기 시작했다네. 그렇게 해방을 맞고,곧이어 6.25가 시작된 거야. 젊은 화교들 중엔 한국군에 참여해 첩보요원으로 활동하는 녀석도 있었어. 내 조카도 그 중 하나였지. 중공군으로 위장하여 함흥에 갔던 녀석은 그 후로 소식을 알 길이 없네.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죽었다나… 전쟁이 끝나고, 전국 각지에는 화교들이 차린 음식점들이 생겨났네. 나 역시 요리점을 하던 차에 중화요식업조합에 참여했고, 여기서는 각지역의 화교업무를 처리하기도 했지. 이것들은 지역의 화교협회로 바뀌었고, 그 중에서 난 인천화교협회의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옛 중화루 사진. 중화는 공화춘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중국요리집이었다. 원래는 최초의 서구식 호탤에 대불호텔이었던 것을 1918년 청나라 상인들이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중화루(中華樓) 간판, 일제강점기,

1918년 뢰소정(라이샤오징)을 비롯한 청나라 상인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로 알려진 대불호텔을 인수하여 중국요리 전문점 ‘중화루(中華樓)’를 개업하였다. 이후 급증한 산동출신 화교 상인과 노동자로 인하여 공화춘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중국요리집으로 성장하였다. 아들과 손자를 거쳐 영업을 지속하다가 1970년대 초에 폐업하였고, 1978년 건물마저 철거되었다. 위쪽의 간판은 건물 박공 부분에 있던 것으로 보이며, 아래쪽의 간판은 1층 입구 우측에 걸려 있던 것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화교 상인으로 성장하다.

OLYMPUS DIGITAL CAMERA인천화교협회를 비롯한 상업에 종사했던 화교단체 관련 문서들이다.

인천중화상회 외교문서, 1931년, 인천화교협회의 전신으로 중국 국민당의 지도를 받던 인천중화상회의 외교문서이다. 조선화상무역조합, 1945년, 조선화상무역조합(인천부 미생정 8번지)의 업무관련 서류집으로 1942~1945년의 내용이 담겨있다. 인천화상해산(海産)조합장정, 1937년, 해삼물 수출무역에 종사하던 화상들이 모여 만든 인천화상해산조합의 규정집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화교 기업 관련 각종 자료

인천화상 동순동고빈유한공사 주식장부첩, 1935년, 동순동고빈유한공사에서 주주 한봉명에게 발급한 주식장부첩이다. 화상 동순동 주식회사 증권, 1934~1935년, 인천의 화상 동순동이 만든 고빈유한공사에서 주주에게 발급한 증권이다.

OLYMPUS DIGITAL CAMERA1942년 화교 세대별 직업분포와 관련기사

화교 삼도(三刀). 음식점에서 사용하는 고기칼과 채소칼, 양복점에서 쓰는 재단가위, 이발소 면도칼인 체도를 말한다. 화교들은 이 세가지 칼을 바탕으로 중화요리점, 양복점(세탁소), 이발소를 운영하며 현지에 자리잡았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이발도구 세트, 재단가위, 육도, 월병틀, 차이나타운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중국 과자 월병을 만드는 틀, 추석날 밤 월병을 빚어 달에 바친 다음, 친척과 친지들에게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배추(결구백채)의 도입을 장려하는 전단지.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배추는 이때 도입된 종자라고 한다.

결구백채 재배법 전단지, 1940년대, 우리주변에서 쉽게 먹을 수 있는 채소인 배추는 원산지가 중국으로 결구백채(結球白菜)라 한다. 화교들은 고향에서 이 백채를 가져왔고, 조선총독부의 장려정책으로 지금은 김치를 만드는 가장 대표적인 재료가 되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천지역 화교 명부 자료

인천화교 세대별 명부, 1942년, 화상들의 영업점을 중심으로 구성원의 인적사항을 기재함과 동시에 세대별 사항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화교구성원 전반을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여한화상전화번호부, 1972년, 전국화교의 전화번호부이다. 각종 긴급신고 및 주요전화를 시작으로 한성특별시의 사관교단, 잡화상, 한의원, 기타, 부도색인, 주택이 각 도(道)로 나누어져 정보가 기입되어 있다. 이들 정보는 모두 상호, 대표, 전화, 주소로 나누어진 표에 쓰여 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칠성문 밖에 있는 중국인의 채마밭에 감자며 배추를 도적질하러 밤에 바구니를 가지고 간다. … 소작인인 중국인 왕서방이었다. ” – 김동인의 “감자” 중 -

‘짱꼴라’는 원래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중국놈이라는 뜻으로 ‘청국노(淸國奴, 잔코로)라 부르던 것에서 변한 것이다.

‘짱깨’는 중국 상인이나 점포 주인을 ‘장꿰이(掌櫃)’라고 부르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 신작로 닦아 놓으니 왕서방이 먼저 지나간다.

OLYMPUS DIGITAL CAMERA일제강점기 화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잘 보여주는 김동인의 소설 『감자』.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왕서방은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배금주의자이자 호색한으로 묘사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화교에 대한 부정적인 면을 묘사한 대중가요와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 배금주의적인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짱개’라는 말의 어원이 되는 돈상자.

장궤(掌櫃), 일제강점기, 화교들이 사용하던 돈괴. 중국인을 비하하는 뜻으로 쓰는 ‘짱깨’라는 말은 이 물건의 중국발음 ‘장꾸이’에서 온 것으로 이 돈괴를 맡은 사람, 즉 상점의 지배인을 뜻하는 말에서 파생되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경계의 사람들

OLYMPUS DIGITAL CAMERA한국전쟁 당시 많은 화교들이 참전했으나 화교라는 신분상 제약으로 이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참전용사증서, 1999년. 화교신분을 유지하던 김성정씨의 경우 한국으로의 귀화를 선택하고서야 참전용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참전화교들은 공식 기록이 없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참전위령비 하나 받지 못했다. 포장 수여식 사진과 포장증, 1973년, 한국전쟁에 참여한 몇몇 화교들은 그 공로가 인정되어 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화교신분인 관계로 유공자로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일부 전쟁에서 부상당한 화교의 경우 치료비를 자비로 해결해야만 했다. SC지대 참전략사,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한국전쟁 당시 사진

SC지대 대원사진, 국내 화교 참전부대인 4863부대 SC지대 김성정씨와 사촌동생 김정의씨의 사진이다. 이 중 김정의씨는 전쟁당시 공작활동을 위해 낙하산을 타고 적 후방에 침투한 뒤 실종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남한 포로 송환을 환영하는 화교들, 인천 화교 각 단체에서 남한 포로 송환을 환영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 필름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혼인증서와 인천화교협회 공문

OLYMPUS DIGITAL CAMERA화교등기증, 중화민국 영사관에서 발급한 화교여권

진oo 이야기
내 어릴쩍 이야기부터 해불꼐. 내 어머니는 한국인, 아버지는 화교였지 집안 생활은 여느 한국 사람들과 다르지 않았어. 다만 집 안에는 관우사당이 있었고, 8살이 되던 해에 화교학교로 진학했을 뿐이야. 이때 내 기억은 아름답지만은 않아. 아버지는 중국말을 하는데, 어머니는 한국말을 해. TV드라마는 한국말을 하는데, 학교에서는 대만교과서를 배운단 말이야. 또 학교를 다녀올 때면 우리 교복을 보고는 다른 한국 애들이 맨날 놀리는 거야. 결국 부모님은 남고 나만 대만으로 갔어. 근데 거기선 또 나를 외성인(外城人)이라 그래. 대만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그래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지. 그런데 그 와중에 집안 사정은 점차 나빠졌더라고. 한국 정부는 한국경제를 농단한다며 화교 수십명을 감옥에 집어넣질 않나, 화물과 재산을 몰수하질 않나… 그나마 여윳돈이 있던 사람들은 중국집을 차렸지만, 난 뭐.., 가진 것도 없고 화교학교는 학력을 인정받지 못하지, 취직은 안되지, 결국 중국집 배달을 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온거야.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화교학교에 진학하다.

OLYMPUS DIGITAL CAMERA화교학교 교과서와 공책, 졸업장 등. 한성화교중학교는 지금 연희동에 자리잡고 있으며, 연희동.연남동 일대에 화교들이 많이 거주한다.

화교학교 교과서, 1990년대, 한국 화교 학생들을 위한 대만교과서로 1990년대에 이용되었다.한성화교학교 공책, 광복이후, 한성화교중학교에서 사용하던 공책으로 대해(해서의 큰 글자)와 작문을 연습하기 위한 것이다. 국어 과본, 1960년, 대만교육청에서 발한한 것으로 인천화교중산중학교의 교과서로 추정된다. 대만에서 교과서를 받아와야 했기때문에 그 수가 맞지 않아 제본하여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화교학교 졸업장, 인천화교소학교와 인천화교중산중학교이 졸업증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화교학교 모자, 학생수첩(1978년), 주판

OLYMPUS DIGITAL CAMERA관우사당(재현), 화교들은 가정에 관우를모시는 사당을 두었다고 한다.

관우는 유비, 장비와 함께 촉나라를 세운 실존 인물이다. 송대 이후 무신(武神)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상업을 수호하는 재물신 불교의 호법신, 마귀를 물리치고 병을 치료하는 의신(擬神) 등으로 받들어진다. 많은 화교들이 재물과 벽사를 관장하는 관우를 가신(家神)으로 모신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결국 중국집

OLYMPUS DIGITAL CAMERA화교의 주요 규제. 해방 이후 어려운 경제사정 속에서 화교에 대한 차별적인 조치들이 많이 시행되었으며 이런 상황때문에 한국내 화교들은 동남아시아 화교에 비해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국집 식기류와 공화춘 젓가락, 차주전자, 공화춘부채, 1905년 건립된 공화춘은 짜장면을 최초로 팔기 시작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공화춘은 자리를 옮겨 계속 운영되고 있으며, 원래 자리는 짜장면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중화음식업 동업협정 가격표, 1945년 이후, 중화요식업총회 경기도지부에서 발행한 중화음식업 동업협정 가격표로 음식 종류에는 한글과 한자가 병기되어 있다.

선린문(善隣門):이웃, 그리고 변화
한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화교는 중국 산동성 출신이며, 여전히 산동 사투리를 쓰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의 정책에 갇혀 대만 국적을 지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화교 이주민의 대다수는 남성이었으며,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한국 여성들과 결혼하였습니다. 이로써 중국 본적과 대문 국적으로 한국 땅에 사는 사람들이 된것입니다. 화교가 자리잡은 지도 130여 년이 흘렀습니다. 화교들은 이제 한국 사회의 일부가 되었고, 지금 한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계속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말하는 것, 먹는 음식, 생각하는 것까지 한국 사람과 구별하기는 어려워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방인으로서 중국인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나가려고 합니다. 이들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가장 큰 이유는 모국어와 화교학교 교육이겠지만, 한국 사회의 차별과 한국인의 배타적 성향도 못지않은 이유로 말해집니다. 세번째 패루는 인천 차이나타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선린문(善隣門)입니다. ‘좋은 이웃’이란느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곳의 지역 이름과도 같은 뜻입니다. 그 이름 속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

OLYMPUS DIGITAL CAMERA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선린문이라고 한다. 세번째 전시는 중국과의 국교 수교 이후 나아진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화교들의 정체성과 그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한다.

강oo 이야기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태어난 나를 사람들은 6.25세대로 부릅니다. 전쟁통에 태어났냐고요? 아니 아니, 화교가정 대부분의 어머니는 한국인이라 세대를 거쳐~ 거쳐 중국 화교의 피는 6.25%만 섞였다는 뜻이랍니다. 화교소학교에 들어갔지만 일반 중고등학교를 졸업해 중국어보다는 한국어가 편하고, 또 친구들처럼 걸그룹을 좋아하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일 뿐입니다. 내가 태어날 무렵 우리 부모님은 중국집을 경영했지만, 중국과의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보따리상을 하였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으로는 그 무렵부터 여러가지가 좋아졌다 합니다. 내가 열 살 무렵인가? 외국인은 땅도 갖지 못하게 했던 게 없어지고, 중학교 무렵에는 영주권도 인정받게 되었답니다. 저 고등학교 때는 지방선거권도 인정받았어요. 내가 살던 차이나타운은 활성화 계획이 잡히면서 관광객도 많아졌지요. 덕분에 우리집 수입도 늘어갔습니다. 하지만 계속 화교로 지내기엔 어려움이 많더라구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위해 인턴원서를 내려 했지만 인터넷 접수창에는 주민등록번호만 넣을 수 있을 뿐 외국인등록번호를 적어봐야 오류라고만 나옵니다. 중국어는 능숙하지만 깡통여권을 가진 나는 출입국도 쉽지 않아 회사에서 원하질 않구요. 아버지는 반대하셨지만 취업을 위해서도, 대학에서 만난 여자친구와의 미래를 위해서도 귀화를 선택했고, 지금은 유통회사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나는 한국 땅에 남아 가정을 꾸릴 계획이지만, 형은 미국으로 동생은 대만으로 이민을 갔어요. 그런 게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출처:인천시립박물관>

화교? 누가인가요? 그들이 생각하는 이웃

OLYMPUS DIGITAL CAMERA화교신분에 대해 정의한 중화민국헌법(1912)와 중화인민공화국 관련 법률. 출생보고표, 외국인사항신고서(사본)

중화민국헌법(사본), 1912년 제정된 중화민국헌법에 따라 제정된 화교신분증명조례에서는 화교를 ‘僑居國外國民’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귀교교권권익보호법(사본),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의해 제정된 화교 정의.

교외국외적 중국인(僑居國外的 中國人), 바이두(百度), 본국을 떠나 해외 각처로이주하여 현지에 정착, 경제활동을 하면서 본국과 문화적.사회적.법률적.정치적 측면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인 또는 그 자손.

OLYMPUS DIGITAL CAMERA대만여권(왼쪽)과 화교들이 사용하는 깡통여권(오른쪽). 신분증번호가 없어 한국 화교들은 대만인들이나 한국인들이 받는 무이자 입국 혜택이 없다고 한다. 

깡통여권, 화교들에게 대만 여권은 두가지로 나뉜다. 대만에 호적이 있으면서 신분증번호가 있는 여권과 호적이 한국 등 다른 나라에 있어 신분증번호가 없는 여권이 그것이다. 무비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신분증 번호가 있는 여권일 뿐이다. <출처:인천시립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