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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청제비(보물 517호), 삼국시대 신라가 저수지를 쌓고 세운 비석

경북 영천시 도남동에 있는 청제비(보물 517호)이다. 삼국시대 신라가 이곳에 청못이라는 저수지를 쌓으면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직사각형 화강암 판석에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앞면에는 536년(신라 법흥왕 23)에 제방을 처음 쌓을 때 새긴 것이고 뒷면에는 798년(통일신라 원성왕 14) 제방을 수리하면서 새겼다. 내용은 비를 세운 연원일, 공사명칭, 규모, 내용, 동원된 인원수, 공사관계자 등이다. 비석에 새긴 내용으로 신라의 수리시설, 통일신라 행정체제, 공사 동원 방식 등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청제비 서쪽에는 1688년(숙종 14)에 세운 ‘청제중립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최일봉 등이 파손되어 흙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다시 세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고대비석의 해독과 보존 등 금석학에 대한 큰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1-20200105영천 청제비(보물 517호). 삼국시대에 세운 청제비와 그 옆에 조선후기에 청제비를 다시 세우면서 세운 청제중립비가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9-20200105청제비 앞면. 신라 법흥왕 때(536년) 이곳에 청못을 쌓으면서 그 경위 등을 새겨놓고 있다. 비석의 높이는 130 cm 정도이며 판석형태의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OLYMPUS DIGITAL CAMERA영천 청제비 탁본, 삼국시대(신라) 536년, 영천군 금호면 도남동,

영천 청제를 쌓아 저수지를 만들면서 세운 비석의 탁본이다. 비 높이는 130 cm 정도이며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들었다. 비의 양면에 각각 다른 시기에 기록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앞면에는 병진년인 법흥왕 23년(536)에 처음으로 청제를 건립하면서 기록한 내용이 있는데,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명칭, 규모, 동원한 인원수, 공사관계자 등이 기록되어 있다. 뒷면에는 정원貞元 14년인 원성왕 14년(798)에 청제를 새로이 수리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2-20200105청제비 뒷면. 통일신라 원성왕 때(798년) 무너진 청못을 수리하면서 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8-20200105청제중립비. 조선후기 숙종 때(1688년) 지역 선비들이 땅속에 묻혀 있던 옛 비석의 내용을 확인하고 수리하여 다시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당시 지식인들의 금석학에 대한 큰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3-20200105청제중립비 뒷면.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7-20200105옆에서 본 모습.

OLYMPUS DIGITAL CAMERA비각 바깥쪽에서 본 모습.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5-202001052기의 비석은 원래 다른 위치에 있었는데 지금은 청못 앞 한쪽편 비각에 보관되어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517호 04-20200105영천 청못. 삼국시대에 처음 세워진 인공 저수지로 그 규모나 형태는 바뀌었지만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영천 청제비, 보물 517호, 경북 영천시 도남동
이 비는 신라시대 청못이라는 저수지 수축과 관련 있는 양면비이다. 비는 화강암의 자연 판석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114 cm, 폭 94 cm, 두께 16 cm이다. 비면에는 행간이나 윤곽선은 없고 양면을 가공하여 글자를 새겼는데 그 양면의 비문은 각기 다른 연대와 내용을 담고 있다. 비의 한면은 병진년 (법흥왕 23년, 536년)의 간지가 적혀 있는 것으로 청못을 처음 축조한 기념으로 새긴 것이다. 다른 면은 정원 14년(원성왕 14년, 798년)의 절대 연대가 적혀 있는 것으로 청못의 일부 무너진 둑을 다시 수리한 사실이 적혀 있다. 이러한 비문 내용은 신라시대 벼농사 및 수리시설과 관련이 있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 할 수 있다. 청제비 서쪽에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청제중립비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효종 4년(1653)에 비가 두 동강이 나서 땅속에 매몰되어 그 고적이 전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 세사람이 다시 세웠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위의 비문들은 1960년 12월 신라 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내문, 영천시청, 2020년)

<출처>

  1. 안내문, 영천시청, 2020년
  2. 안내문, 중앙박물관, 2014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20년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20년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 비화가야 점령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에 있는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이다. 신라가 창녕지역을 편입한 이후 진흥왕이 이 곳을 다녀간 후 세운 기념비이다. 비석은 자연석 앞면에 비문을 새겨두고 있다. 앞부분은 닳아서 잃을 수 없지만 뒷부분은 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어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른 순수비처럼 이 지역을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 통치이념 등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후반부에는 수행하던 신하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어 당시의 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비문 내용중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단양 적성비와 함께 척경비로 일컫고 있으나, 비분의 내용과 성격 등을 고려해 볼 때 북한산, 마운령, 황초령의 순수비와 동일한 성격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이 척경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를 멸망시키기 1년 전으로 대가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SANYO DIGITAL CAMERA창녕 도심 만옥정공원에 있는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 신라 진흥왕이 비화가야를 영토에 편입시킨후 이 지역을 다녀간 후 기념으로 남긴 비석이다. 원래 화왕산성 아래 산기슭에 있던 비석을 발견한 후 이곳으로 옮겼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은 높이 1.8 m 정도의 큰 돌에 글자를 새겼는데 마멸이 심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글자를 선명하게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

SANYO DIGITAL CAMERA글자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부분. 진흥왕을 수행했던 인물들의 관직과 이름 등이 남아 있어 당시의 행정조직 등을 밝혀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SANYO DIGITAL CAMERA옆쪽에서 본 모습

SANYO DIGITAL CAMERA뒷면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다.

SANYO DIGITAL CAMERA비석이 있는 창녕 만옥정공원. 화왕산 등산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도심공원으로 신라 진흥왕 척경비(국보 33호)를 비롯하여 통일신라 때 만든 삼층석탑, 창녕객사, 창녕 척화비 등 문화재가 공원내에 있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국보 33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동
이 비는 삼국시대 신라 진흥왕(540~576, 재위)이 세운 기념비이다. 흔히 순수비로 통칭되나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처럼 순수관경이란 말이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따로 척경비라 일컫는다. 단양 적성의 진흥왕비와 비의 성격이나 형태가 거의 비슷하다. 비문 첫머리의 “신사년 2월1일 입”은 진흥왕 22년(561)으로 추정되어 기존 3개의 순수비보다 수년 앞서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매끄러운 화강암의 자연판석을 약간 다듬어 비문을 새겼으며 개석이 없고 인명과 관등의 표기 방식이 독특하며 고졸한 해서체 등을 지녀 신라 비석 중 가장 오랜 형식을 보여준다. 전문 642자 가운데 400자 정도가 판독되었다. 앞 부분은 마멸이 심하고, 뒷 부분은 관련인사가 나열되어 있다. 모두 27행인데 대개 한 줄에 26자씩 적었고 끝 줄은 3자이다. 돌의 크기는 높이 178 cm, 폭 175 cm, 두께 약 30 cm이다. 본래 화왕산 기슭에 있었던 것을 1914년 발견하였고, 192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출처>

  1. 안내문, 창녕군청, 2010년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2018년
  3.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청, 2018년

예산 이성만 형제 효제비, ‘의좋은 형제’ 일화의 배경이 된 비석

충남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옛 대흥관 관아 앞에 세워져 있는 ‘이성만 형제 효제비’이다. 이 비석은 인근 ‘개방이다리’ 옆에 있었는데, 예당저수지가 생기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예전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고, 농심라면 광고 모티브로 사용되었던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배경이 되었던 일화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대흥호장이었던 이성만.순 형제의 우애와 효행을 비석에 새겨 후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도록 연산군 때 조정에서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대흥군(大興郡)은 충남 예산군 대흥면.응봉면.광시면.신양면 일대에 있었던 옛 조선시대 군현이다. 삼국시대 백제 임존성이 있었던 지역이며, 고려는 대흥군을 두었다. 조선 태종 때 현감이 고을 수령인 대흥현이 되었다가 숙종때 대흥군으로 승격되었다.

OLYMPUS DIGITAL CAMERA예산군 대흥면 소재지 옛 대흥군 관아 앞 공원에 세워져 있는 효제비. ‘의좋은 형제’ 일화의 배경이 되었던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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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에는 총 171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두 형제의 우애와 효행과 관련된 내용이 적혀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농심라면 광고와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일화가 너무 잘 알려져 있어 이곳에 조성된 공원을 ‘의좋은 형제 공원’이라 부르며, 일화와 관련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옛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내용

OLYMPUS DIGITAL CAMERA옛 대훙군 관아. 대흥군수가 근무했던 동헌 건물과 아문이 남아 있다.

예산 이성만 형제 효제비, 충남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 1497년
이 비는 1978년, 의좋은 형제 이야기의 무대였던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개방이다리’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예당저수지로 인한 수몰 위험이 있어, 현 위치로 옮겼다. 이 비가 발견되어 의좋은 형제 전설을 증명하게 되었다. 다음은 철저한 현장 조사와 기왕의 탁본을 토대로 작성한 비문에 따른 번역문이다. 판독된 비문은 이두, 속자(俗子), 고자(古字), 첩자기호등을 포함하여 총 171자이다.

영락 16년(1418) 11월 3일, 지신사 하연이 삼가 왕지를 받들어 ‘의리가 있는 남자와 절개가 있는 여자, 효성스런 아들과 손자를 찾아보고 보고할 일’로 각도에 공문서를 보낸 일이 있다. 충청도 대흥호장 이성만, 이순 등은 부모가 살아 계실 적에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봉양하고, 봄과 가을로 부모가 사랑하는 친구과 친척들에게 술과 안주를 대접해서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는, 형은 어머님의 무덤을 지키고 동생은 아버님의 무덤을 지키면서, 아침에는 형이 아우의 집에 이르고, 저녁에는 아우가 형의 집에 나아가되 아침과 저녁으로 서로 맞찹고 같이 밥을 먹었고, 한가지 만난 것을 얻으면 모이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다고 임금꼐 상신을 올려 보고 드렸다. 앞서 효자 대흥호장 이성만, 이순 등을 임금께서 궐내로 불러 정표문려하시고, 자자손손에 이르기까지 조심하고 삼가고 지켜서 가품을 떨어뜨리지 말고 더욱더 힘쓰라 하시고, 영세토록 전하는 교훈이 되게 하셨다. 홍치 10년(1497) 정사 2월 세우고 표하다. (안내문, 예산군청, 2010년)

<출처>

  1. 예산군청
  2. 문화재청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소

포항 냉수리 신라비(국보264호), 신라 지방 호족의 재산분쟁과 관련된 비석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신광면사무소에 있는 비석(국보 264호)이다. 삼국시대 신라지배층이 포항 냉수리 지역 호족의 재물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는 명령을 내린 비석이다. 1989년 마을 주민이 밭에서 발견되었다. 비석은 사다리꼴 형태의 자연석에 앞.뒷면과 윗면에 총 231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글자가 거의 닳지 않아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다. 글자는 해서체로 보이며 비석의 형태나 글씨체 등은 중원고구려비(국보 205호)와 울진 봉평신라비(국보 242호)와 비슷하다. 비문에 내용에 따르면 당시 지배귀족이 논의를 통해 명령을 결정하였으며, 일을 마치고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낸 뒤,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오늘날 판례에 해당하는 내용을 널리 공포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문에는 ‘계미’라는 글자와 ‘갈문왕’이라는 글자가 있어 443년 또는 503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6세기 신라에서는 문장으로 이루어진 금석문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돌에 글자를 새긴 비문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비문의 내용들은 오늘날 판례에 해당하는 나라의 법 시행, 국왕의 지방 순시, 댐과 성을 만든 과정과 책임 소재 등 공식적인 일을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비석들은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도록 산성이나 댐의 주변, 성벽, 교통로 등에 세워졌다. 이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안을 돌에 새겨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이를 영구히 보존해야하는 시대적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포항 냉수리 신라비(국보 264호, 앞면). 포항 지역 호족의 재산권 관련 분쟁을 해결한 내용을 새긴 비석으로 가장 오래된 신라 비석 중 하나이다. 글자는 비석의 앞면, 윗면, 뒷면에 새겼다.

OLYMPUS DIGITAL CAMERA글자는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대부분의 글자가 육안으로 읽을 수 있다. 글자의 크기는 일정하지 않는데 해서체로 보이나 예서체의 특징도 많이 남아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글자가 새겨진 윗면.

OLYMPUS DIGITAL CAMERA뒷면은 돌을 다듬지 않은 상태에서 글자를 새겨놓고 있다.

OLYMPUS DIGITAL CAMERA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옆면.

OLYMPUS DIGITAL CAMERA반대쪽 옆면.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비각. 비석은 1989년 밭에서 농민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원래의 위치는 아니라고 한다.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이 있는 포항시 신광면사무소.

영일 냉수리 신라비, 국보 264호,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이 비는 1989년 3월 신광면 냉수2리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존하는 신라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건립 연대는 계미년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 눌지왕 27년(443) 혹은 지증왕 4년(503)으로 보는 두 견해가 대립되고 있다. 진이마촌의 절거리라는 인물이 소유했던 재물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하자, 갈문왕을 비롯한 중앙의 귀족들이 합의하여 분쟁을 해소하였다는 것이 비문의 주된 내용이다.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며, 10여자 정도는 정밀한 판독이 요청되고 있다. 전체적인 모양이 아래 부분은 넓고, 위로 가면서 너비가 줄어드는 사다리꼴 모양의 사각형으로 이 비는 앞면.뒷면.윗면 등 3면에 글자가 새겨진 특이한 형태로 앞면에 12행 152자, 뒷면에 7행 59자, 윗면에 5행 20자로 도합 231자가 판독되고 있다. 글씨는 예서체로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4부분으로 울진봉평신라비와 연관된 내용을 담고 있어, 5~6세기 신라사 연구에 중요한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안내문, 포항시청, 2017년)

<출처>

  1. 포항시청
  2. 문화재청
  3. 두산백과
  4. 위키백과
  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부여 사택지적비(보물 1845호),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 비석

국립부여박물관에서 소장.전시 중인 사택지적비(보물 1845호)이다. 백제 의자왕 때의 귀족 사택지적이 남긴 비석으로 부여 부소산성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화강암 한면 한면을 다듬어 네모모양의 칸을 만들고 그 안에 글씨를 새겼다. 비석의 오른쪽에 봉황(혹은 삼족오)이 새겨져 있다. 현재 전하는 백제의 유일한 비석이다.

비문은 사택지적이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며 금당과 탑을 세운 동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글의 양식은 두자로 이루어진 단어를 따로 나누어 운을 맞춘 중국 육조시대의 사륙병려체이다. 사택지적은 ‘일본서기’에 의자왕 때 일본에 사신으로 간 대좌평 ‘지적’과 같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미륵사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무왕의 왕비도 사택씨였음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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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사택지적비(보물 1845호), 현존하는 유일한 삼국시대 백제의 비석이다. 백제말 유력한 귀족이 남긴 비석으로 당시의 세련된 문화를 보여준다.

갑인년 정월 9일 내지성에 사는 사택지적은
몸이 나날이 늙어감을 한탄하여
금속을 다듬어 금당을 세우고
옥을 다듬어 탑을 쌓았다
높다란 금당의 자비로운 모양은
신성한 구름을 보내는듯하고
우뚝한 탑의 자비로운 모습은
성스럽고 밝은 정기를 지니고 비상하는 듯하다.
(중앙박물관, 2011년)

백제 대좌평 사택지적은 누구?
일본의 고대 역사를 기록한 <일본서기>에는 642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된 ‘대좌평 지적’이 등장한다. 그는 사택지적비에 등장하는 ‘내지성’에 사는 사택지적’과 같은 인물로 여겨진다. 대좌평은 백제의 최고위 관직이었고 사택 가문은 백제의 유력한 귀족이었다. 지적은 최고 귀족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654년, 절과 탑을 짓고 사택지적비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비석에 새겨진 아름다운 글씨체와 유려한 비문은 이들이 매우 세련되고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하였음을 보여준다. (부여박물관, 2012년)

OLYMPUS DIGITAL CAMERA비석에 새겨진 글자. 네모모양으로 칸을 나누고 그 안에 글자를 새겼다. 남조의 영향을 받은 글씨체와 글의 양식을 보여준다.

부여 부소산성에서 발견된 비석으로 백제 의자왕 14년(654)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글자는 화강암의 한 면을 다듬고 네모모양으로 나누어진 칸에 새겨져 있다. 현재 4행만 남아 있는데, 각 행에는 세로로 14자씩 있다. 비문은 중국 육조시대의 사륙병려체로 그 내용은 사택지적이 금당을 세우고 탑을 쌓은 동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의 비문 양식 및 글씨체 등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중앙박물관, 2011년)

<출처>

  1. 문화재청
  2. 부여박물관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4. 두산백과
  5. 중앙박물관